※혼인, 혈연, 입양 관계만 ‘가족’으로 정의한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 1항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시민들이 10월 25일 국회 앞에 모였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25개 단체가 주최한 시민 발언대 “우리의 연결될 권리를 보장하라”에서 나온 다양한 목소리를 연재합니다.
저는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활동가 미혜입니다.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는 주거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내놓은 대책이 ‘시설 보호’거나, 아니면 폭력이 멈추지 않는 원가족에게 돌려보는 방식이라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탈가정 청소년도 집다운 집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며, 사회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탈가정 청소년들과 함께 거리에서, 거주 시설에서, 그리고 대안 주거로 공동체를 이루며 다양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 사회가 혈연·혼인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가족 중심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통해 수많은 청소년들을 위험한 거리로 내몰면서도,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가정을 탈출한 청소년에게 ‘부모동의서’ 요구하는 사회
지금도 가정폭력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정상가족’에 대한 통념과 가부장제 시스템은 서로 맞물려 작동하면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외부에서 관여하지 못하게 만들어 폭력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결국, 살고자 가정을 탈출하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정상성’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는 탈출한 청소년을 다시 폭력의 가정으로 돌려보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거 위기에 있는 청소년을 ‘보호’한다며, 국가가 만들어 놓은 쉼터의 기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세상으로 나와서 자신의 힘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살아왔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혈연가족이 계속 따라다닙니다.
가정폭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집에서 탈출한 청소년이 보호시설에 머물기 위해서도, 친권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아동-청소년의 거소지정권은 친권자에게 있기 때문에, 가정폭력의 가해자인 부모가 자녀의 머무를 곳을 결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마주합니다.
탈가정을 해도 안전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부모동의서를 받아내야 합니다. 결국 안전한 일을 포기하게 된 청소년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위험하고 어려운 일들과 환경을 감내해야 합니다.
아파서 응급실에 가거나 수술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병원에서는 법적 부모동의서가 필요하다 합니다. 청소년들은 부모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아 성인이 되기를 기다리며 그냥 고통을 참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병원의 관행으로, 수술동의서 등은 성년이 되었다 해도 법적 가족에게 서명할 권한이 있기 때문에, 1인가구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배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는 혈연과 혼인 관계를 기준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기초생활 수급권자로서의 지원도, 재난지원금, 주거 급여도 모두 가구별로 지급하고 있으니, 가족을 떠난 청소년들에게 무용지물입니다.
겨우 스무 살이 되어도, 주거 위기에 놓인 ‘후기청소년’이 공공주택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가족의 소득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런 제도들은 최소한의 안정적인 집을 얻기 위한 이들의 노력을 방해합니다.
원가정에서 살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대안으로 가정위탁제도가 있지만, 법적 권한을 갖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도, 이제 내 인생에 의미 없어진 혈연가족이 소환됩니다.
대안공동체를 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청소년들은 이런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 거리로 나와 외롭고 위험한 순간에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오며 지금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한 이들과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들이 있습니다. 서로 기대어 살아가기에 이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혈연지간이나 혼인을 통해 이룬 가족이 아니라면, 이 관계망은 아무런 법적 권한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출팸’이라고 부르며 청소년들이 만들어 놓은 대안공동체를 마치 위기집단처럼 말하며 궁지에 몰아 청소년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사실 위기는 수많은 대안가족과 공동체들이 아니라, 이러한 공동체를 무시하며 빈곤과 위기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이 사회가 위기라는 것을, 우리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혈연, 혼인, 입양 관계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가족의 형태로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목소리를 내고 존재를 드러내고 살아갈 권리를 되찾기 위해 개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까? 마땅히 국가가 보장해야 할 개인의 권리를, 국가의 책임을 언제까지 회피하려고 합니까? 정부와 국회는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그 자리가 부끄럽지 않습니까?
찾아보니 여성가족부의 역할은 여성과 청소년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동안 성적으로 불평등하여 벌어진 각종 폭력과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국민들이 안전하게 살아가게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더군요. 부처가 만들어진 이후(2001년 여성부 신설) 얼마나 세상이 변하였나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최소한 예전에는 존재를 지우며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삶을 확인하였고, 사회의 안전망이라고 만들었던 제도들이 정작 그들에게 가 닿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가족 정책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차별과 배제의 과거로 돌아가게 하려고 합니까. 그것을 어떻게 여성가족부가 공표할 수 있습니까. 지난 ‘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하며 ‘가족’의 정의에 다양한 가족을 포용할 수 있도록 건강가정기본법을 개정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폭력을 겪고, 생명을 잃어야만 변화하겠습니까?
청소년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면서요? 최소한 보호를 권리로서 보장하기 위해, 사회는 실효성 있는 제도를 만들고 법을 개정해 나가야 합니다. 그동안 청소년을 거리로, 폭력으로, 불안정한 삶으로 내몰았던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정상가족’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 속에 있음을 인정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서로를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의 더 많은 죽음과 희생을 멈추기 위해, 정부와 여성가족부는 ‘지금 당장!’ 개인의 생존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에 나서야 합니다.
[필자 소개] 미혜. 현재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활동가이다. 그동안 청소년 지원활동(긴급위기지원, 주거지원, 자립지원 등)을 해오다가 한계를 느껴 ‘청소년에게도 집다운 집’이 보장되는 사회로의 변화를 기대하며 청소년 주거권 운동을 시작했다.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는 청소년 주거권 관련 법정책 개선, 청소년 활동가 및 청소년 지원현장 조직, 교육 및 캠페인, 청소년 탈시설 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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