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가진 사람과 식사를 함께한 적 있나요?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접시 위의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

| 기사입력 2023/01/23 [21:01]

섭식장애 가진 사람과 식사를 함께한 적 있나요?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접시 위의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

| 입력 : 2023/01/23 [21:01]

※ 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 음악가이자 영상제작자인 필자 민.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던 섭식장애로부터 풀려난 이후, 2021년 의료계의 여성에 대한 향정신성 식욕억제제 과다 처방 문제를 파헤친 탐사 다큐멘터리와 인터뷰를 제작했다. (민 제공 사진)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과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식에 대한 선호, 접시에 담긴 음식의 양, 식사 속도 등을 그와 비교 당한다. 상대는 음식이나 먹는 행위를 통제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많이 한다. 상대의 원인불명의 트라우마가 접시에 들러붙는 것을 본다. 어느 순간부터 그와 함께 나누는 대화들은 섭식의 테두리 안에 갇혀 식사 테이블 위를 불편하게 맴돈다.

 

당신은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마치 그런 세계를 본 적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다.

 

식욕억제제 과다 처방에 관한 탐사 영상 제작, 그 후

 

10여 년 간 이어져 온 섭식장애는 어느 날 갑자기 끝나버렸다.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운 덕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운. 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책임한 단어들인가? 그러나 이는 또한 명백한 진실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나흘 이상 폭식을 하고 게워내는 일이 내 인생에서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간 내내 마른 체형과 삼키고 뱉는 행위에 대해서만 강박적으로 생각하느라 다른 것들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생에서 섭식장애를 빼면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섭식장애에 압도되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 문제가 내 인생에서 더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 물론 이런 증상들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증상들은 나로부터 사라지고 없어졌다.

 

닷페이스(.face 2016-2022 조소담 대표가 설립한 미디어 스타트업, 다양성 이슈를 독특한 형식으로 전달했다)에 입사했을 때 목표가 하나 있었다.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에 대한 영상을 만들어서 그것과 마침내 작별하고 싶었다. 그것이 수 년 간 섭식장애로 인한 고통 속에 있었고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풀려난 내 임무라고 생각했다.

 

▲ 2021년 8월 26일 공개된 닷페이스 영상 “비만치료용 식욕억제제, 이렇게 막 처방한다고?” 중에서. 출처: 닷페이스 유튜브 채널 @facespeakawake

 

섭식장애를 가시화하는 것이 이유 없이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누가 누구를 수단과 도구로 삼아 누구의 인생을 망치면서 이득을 얻고 있는지 낱낱이 고발하고 싶었다. 2021년 의료계 전반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향정신성 식욕억제제 과다 처방에 대한 탐사 다큐멘터리와 인터뷰를 제작했고,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영상을 봤다.

 

그래서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 영상이 나온 뒤 오히려 약국에서 식욕억제제 매출이 더 높아졌다는 댓글을 봤다.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해서 식욕억제제를 먹어보고 싶어진다는 댓글도. 알고 보니 나는 탐사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동시에 식욕억제제 프로모션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얼마간 이러한 사태를 예상했었는지도 모른다. 섭식장애를 가진 이들은 마른 몸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무슨 정보든 그들 수중에 들어오면 가능한 한 빠르게 시도해보려 할 것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과거의 나이기 때문이다.

 

생존 메커니즘을 거스르기

 

섭식장애를 가진 이들은 일종의 ‘컨트롤 프릭’(control freak)이며,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몸이란 일종의 실험실이다. 식욕억제제를 비롯하여 체중을 조절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은 섭식장애를 가진 몸에게 마른 몸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전술이 된다. 이들은 식욕에 관여하는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터득한 뒤 약물이나 행위를 통해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유발하기도 한다. 몸의 메커니즘을 알면 알수록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들은 보다 치밀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목표로 하는 지배와 통제란 본질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들은 끊임없이 좌절한다. 저체중과 영양실조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면서도 숨을 쉬고,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는 것. 생존의 모든 조건을 역행하며 생존하기. 이는 몸의 생존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거스른다.

 

▲ 2021년 8월 26일 공개된 닷페이스 영상 “식욕억제제 먹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부작용” 중에서. 출처: 닷페이스 유튜브 채널 @facespeakawake

 

그러나 나는 나의 몸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아의 어떤 기획에도, 예측에도, 감시에도 근원적으로 결코 포섭되지 못하는 변수들이 언제나 존재했다. 그 변수는 상황이나 환경이기도 했고, 타인이기도 했고, 바로 나 자신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누구보다 엄격한 체벌과 고통을 주었다. 나는 해내지 못했고, 그런 나는 무가치하고 끔찍하며,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 과정들은 몸과 마음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곤 한다.

 

섭식장애는 폭식과 절식을 반복하는 장애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체내 호르몬 수치의 급격한 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몸과 마음에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자취를 남기게 되는데, 그것은 경고 신호이자 일종의 구조 요청이기도 하다.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PCOS)으로 인해 ‘야즈’라는 경구 피임약을 처방 받아 복약하고 있다. 5년 동안 월경이 멈췄다. 초음파 검사를 받으면 배란을 하지 못해 두꺼워진 자궁 내막 안에 미처 난자가 되지 못한 난포들이 가득 차 있다. 얼굴에는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악성 여드름이 수포처럼 올라왔다. 혈중에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 농도가 높아서 발생하는 증상이라고 한다. 몸 안팎에서 무언가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마구 경고한다. 그러나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야즈를 먹으면 월경이 유도되고 피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나는 야즈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었다. 야즈를 먹지 않으면 몸이 곧바로 오작동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일 야즈를 먹어 몸의 항상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금은 강박적으로 생각한다. 월 3만원으로 간편하게 섭식장애의 흔적을 지워나갈 수 있다니. 나는 과거가 불편하고, 과거를 견디지 못하고,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과거에 발생한 적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싶다. 닷페이스에서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에 대한 영상을 만들 때도 그랬고,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관리하기 위해 야즈를 처방 받아 복용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나는 섭식장애로부터, 그리고 여성의 몸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섭식장애가 있던 시절의 나와 같이 식사를 하다간 분명히 체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듣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것이다. 고개를 든다. 실은 모두의 접시에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음을 발견한다. 섭식장애가 있던 나와 식사를 함께 해준 사랑하는 사람들의 접시에도 사실은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 누군가는 섭식장애를 가진 나와 함께 식사를 해주었고, 이제 나는 섭식장애를 가진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민 제공)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K에게 생존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섭식이 아니라 페미닌한 외모다. 지난 달부터 온리 팬즈(Only Fans)에 올리고 있는 누드 사진 덕분에 매월 수십 만 원 이상을 벌 수 있다. 그에게 먹는 것은 매우 가치 없는 반복 노동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H가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본다. 그는 현재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통을 음식 없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음식을 삼키면서 고통을 함께 삼킨다. 그에게 음식을 끊임없이 삼키는 행위는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실제로 그가 생존할 수 있게끔 한다.

 

나는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을, 그 지긋지긋한 곳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곳이 내가 살고 있는 곳이고, 나를 살린 곳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섭식장애를 가진 나와 함께 식사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섭식장애를 가진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섭식장애가 있던 나 자신이나 섭식장애를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해 너무 많은 걸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들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삶의 기쁨도 슬픔도 예상치 못했던 사건,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더 잘 느끼기로 했다. 모든 식사는, 모든 삶이 그렇듯이, 언제나 선물처럼 주어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살면서 이런 선물 같은 식사를 할 수 있기를.

 

[필자 소개] 민. 음악가/영상 제작자. 닷페이스에서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일했고 현재는 진단명 없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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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23/01/29 [11:52] 수정 | 삭제
  • 닷페 영상도 멋졌고, 이 글도.. 멋진 분인 것 같아요. 진단명 없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기대되고, 꼭 보고 싶습니다.
  • ㅇㅇ 2023/01/24 [13:47] 수정 | 삭제
  • 밥 잘 챙겨먹어야겠다 먹는 걸로 스트레스 받는 친구에게 전화걸어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 밀랍 2023/01/24 [12:42] 수정 | 삭제
  • 진짜 좋은 글이네요. 영상도 찾아서 보았어요. 예전엔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료계 문제는 결국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상을 보니까 그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듭니다. 이런 문제가 향정신성 식욕억제제 과다 처방에만 국한된 게 아닐 것 같아서 더 화가 나고 걱정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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