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베이스 수원 콜센터에서 일하던 상담원 12명이 사업장 폐쇄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징계 해고됐다. 그리고 10개월째 복직 싸움을 하고 있다. 이들의 노동 경험과 복직을 위해 싸우는 이야기를 시야, 정소은, 정윤영, 희정 네 명의 기록자가 듣고 쓴다.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하늘에서는 노란색 은행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한낮에 노랗게 물든 가을의 돌담길을 언니들과 함께 걸었다. 노란 은행잎을 맞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표정이 환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언니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앞에 선 언니들은 좁은 책상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있을 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평생 경기도에서만 지냈다는 한 언니는 서울엘 다 와본다고, 이런 일을 겪으니까 서울에도 온다고 깔깔 웃었다. 모두 따라 웃었다.
일주일에 두 번, 서울과 부천 가는 길은 나들이 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그 시간만큼은 즐거웠다. 휴게소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럼 정말 ‘놀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들과 ‘그냥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언니들 웃는 모습만으로 충분했고 별일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잊지 못할 일 년이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기까지 겪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상처로 남겠지만, ‘투쟁은 고통이 아니’었다. 즐거움이 있었고 배움이 늘 있었다.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 누군가 응원의 말을 건네는 순간, 일만 하느라 보지 못했던 언니들의 표정을 보았던 순간들이 그랬다. 언젠가 선전전이 끝나는 때를 떠올리면 ‘서울 나들이’라 불렀던 그 순간들이 벌써 그리워진다.
실적 압박 받으며, 아픈 목을 부여잡고 일한 20년
어디든 들어가야 했다. 준비하던 모든 것이 ‘빠그라’졌다. 손꼽아 기다리던 쇼핑몰을 분양받기까지 동대문 새벽 시장에서 악착같이 일을 배웠다.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분양 사기였다. ‘큰돈을 날렸’고 꿈을 향해 쌓아올린 시간들과 미래의 희망도 함께 날렸다.
‘그럼 너도 여기 와.’ 친구 한마디에 삼성전자서비스 AS 콜센터에 들어갔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사후 확인 부서, 고객 만족도를 조사하는 아웃바운드 부서였다. 면접을 본 날 바로 일을 시작했다. 2002년 4월 4일, 20년 차 ‘콜센터 언니’ 이효진 씨는 입사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건물 2층에는 책상들이 둥그렇게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직원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때는 모든 직원들이 섞여 앉아’ 일했다.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낯선 때였다. 그 낯선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회사는 ‘아웃소싱’ 얘기로 어수선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할 수 없다고 했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효진 씨는 정규직과 같은 층에서 일하지 못했다. 물론 하는 일은 그대로였다.
효진 씨는 하는 일이 꽤 적성에 맞았다. 사람들이랑 마주칠 일 없이 ‘할당량’만 채우면 되는 게 편했다. 월급은 그때나 지금이나 최저임금 수준이었지만 정시 퇴근에 비할 게 아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하면서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콜센터는 ‘정말 딱’ 맞는 직장이었다.
‘콜센터’ 하면 사람들은 감정 노동을 떠올린다. 물론 욕설과 괴롭힘에 ‘눈물이 나올 정도로’ ‘멘탈이 다 털릴 때’가 있지만 그것도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효진 씨는 응대하기 힘든 고객보다 실적에 대한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다. 콜은 실적으로 연결되고 실적은 곧 인센티브였기에 콜센터에서는 ‘1분 1초가 다 돈’이었다. 상담사들은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야 했다.
“실적으로 돈을 받으니까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다들 정말 목숨 걸고 달리거든요. 저는 요령 피우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대충 적당히 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고객한테 응대를 잘하는 게 그게 왜 잘못된 거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저처럼 요령을 피우지 않는 사람은 늘 꼬라비가 되는 거예요. 회사에서는 실적을 줄 세워서 보여주는데 그게 힘들었어요. 상담한 녹음 파일을 주면서 뭘 잘못했는지 찾아서 코멘트를 달라고 할 때도 있고, 불려가서 OJT(직장 내 훈련) 받을 때도 있는데, 벌 주는 거죠. 너무 자존심 상하고 싫었어요.”
입사한 지 몇 달만에 아웃소싱이 되더니 사장도, 부서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뭔가가 자꾸 ‘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자신이 밀려나는 것 같아 불안했다. 계속 일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과 실적 압박을 끌어 안고, 효진 씨와 언니들은 10년, 20년씩 일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피가 나면 ‘목을 꼬집으면서’ 일했다. 그렇게 하면 기침이 덜 나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어 어쩔 수 없이 퇴사한 언니들이 많았다. 일을 못 하게 되면 안 되니까 환절기엔 목을 부여잡고 일했다.
우리도 노조 해야 되는 거 아냐?
아웃소싱 업체는 2012년 또 한 번 바뀌어 유베이스로 ‘넘어갔다.’ 고용 승계 약속과 함께 ‘달라지는 건 없어’라는 말을 믿고 유베이스로 왔는데, 월급이 달라졌다. 보너스, PI와 자기계발같은 수당이 매해 깎이더니 10년 경력의 상담원과 신입의 월급이 별 차이가 없었다. 그마저 제시간에 들어오지 않았다. “월급 언제 들어오는 거야?” 하는 말을 달고 살았다. 작은 불이익과 불만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2013년 삼성전자 수리 기사와 협력업체의 콜센터 상담사들이 직고용을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을 시작했다. 효진 씨와 유베이스 상담사들은 그 과정을 모두 봐왔다. 노조가 정문 앞에서 집회를 하면 센터는 정문을 폐쇄해버렸다. 집회 장소를 후문으로 옮기면 후문을 폐쇄했다. 관리자는 ‘종이(노조 가입신청서) 절대 받지 마’라며 엄포를 놓았다. 상담사들은 보안담당이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면 그 사이로 출퇴근을 했다.
유베이스 상담사들이 노동조합과 만나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직고용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선택하는 것처럼, 삼성전자서비스 역시 2018년에 자회사를 만들었다. 자회사가 생기자, 유베이스는 ‘같은 공간에서 일할 수 없다’고 했다. 수원센터에서 10년, 20년씩 일한 유베이스 상담사들은 건물에서 ‘쫓겨나’ 부천에 있는 센터로 전보 당할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자회사로 못 가니까 불안했어요. 같이 일 못하니까 부천으로 가든지 하라는데, 그럼 우리를 자르려고 하는 거냐고 물었을 때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예요. 다들 우리도 노조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했죠. 저는 그때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나갈 생각이었고 쉬고 싶었어요. 너무 지쳤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누가 금속노조를 찾아간 거예요.”
유베이스 상담사들이 노조에 가입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은 걸까? 관리자 한 명이 효진 씨를 불러 이것저것 캐물었다. 오래 일한 상담사들만 골라서 ‘쪼는 게’ 빤히 보였다. 예전엔 그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실적이 떨어졌다고 큰소리를 내는 걸 보고 효진 씨는 가슴이 아팠다. 노조를 만든다고 20년 관계가 깨질 줄은 몰랐다.
“상담사들끼리 모임이 많았어요. 띠별 모임도 많았고 계모임도 하고. 관리자 언니들하고 모임까지 할 정도로 친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모임을 깨기 시작하는 거예요. 선을 긋는구나 했죠. 15년, 18년 된 모임들도 다 깨졌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더라고요. 등에 칼을 꽂고 뒤통수를 때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고, 20년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구나 그게 너무 화가 났어요. 진짜 회사에 오기도 싫었어요.”
노동조합 신청은 회사 근처 놀이터에 했다.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사람들 눈을 피해서 서명을 받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사무장은 뭐하는 거예요?’ 물을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다. 언니들과 서로 뭘 하면 되냐고 물어보면서 ‘어설프게’ 조직을 만들어갔고, 2019년 3월 유베이스 수원지회를 설립했다.
노조를 만들고 상담사들이 요구한 것은 하나였다. ‘이 고장에서 일할 수 있게만 해달라’는 것. 집에서 멀지 않을 것, 정시 퇴근일 것, 이들에겐 가장 중요한 근무 환경이었다. ‘그렇게 하겠다’던 회사는 3년이 지나자 말을 바꾸었다. 3년 전과 똑같았다. 삼성이 도급 계약을 해지했다며 부천 센터로 전보 발령을 내렸다. 회사는 위로금을 월급의 400%에서 600%로 올렸다. 그때 나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효진 씨는 그만두지 않았다.
“처음 어렵게 시작해서 그런지 이렇게 나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잘 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노조는 살려고 시작한 거고, 그러는 과정에서 뭔가 생겼던 것 같아요. 공부도 많이 하고 자료들도 많이 찾고 그랬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컸어요. 결과를 보지 말고 끝까지 뭔가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끝까지 남은 조합원 12명은 모두 해고되었다. 노조를 설립하고 해고되기까지 3년 동안 모든 걸 쏟아부었다. 저녁도 주말도 없이 살았다. 퇴근하고 돌아가는 차 안은 작은 교실이고 회의실이었다. 처음으로 근로기준법을 들여다보았다. 법률 용어는 인터넷에 검색해가며 공부했다. 자료 하나를 익히기 위해 ‘진짜 수십 번 읽’었다. ‘이런 사소한 권리도 못 찾고 있었네, 미련했네.’ 싶다가도 이제라도 알게 됐다는 쾌감에 더 빠져들었다.
그런 엄마를 보고 아이들은 ‘왜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하느냐’며 화를 냈다. 남편도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안타까워했다. 그 뒤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회사 주차장에서 자료를 읽고, 퇴근하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차에서 자료를 읽었다. 효진 씨는 ‘나 그거 모르겠어.’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요구안을 쓰는데, a4 용지 한 장을 쓰는데 이틀 밤을 샜어요. 한 줄 쓰고 이렇게 써도 되나? 법적으로 문제되는 거 아니야? 썼다 지웠다, 버전만 5개를 만들었어요. 교섭이 한 번 끝나면 몸살이 날 정도로 모든 에너지를 쏟았어요. 그러더니 어느 날 글씨가 안 보이더라고요. 번아웃이 왔죠.”
‘쉴 새 없이’ 눈물이 났다. 관리자에게 불려가 ‘인신공격’을 당하거나, 관리자랑 친했다는 이유로 ‘스파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 같이 노조하자고 했던 언니가 위로금 받고 나갔을 때, 몇십 년 관계가 한순간에 박살나는 걸 볼 때도 마음에서 불길이 일었다.
마스크를 벗고 마이크를 잡기까지
그렇게 3년을 힘들게 버틴 결과는 해고였지만, 해고노동자로 살아본 일 년은 ‘죽을 때까지 남을’ 시간이었다. 처음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사람들에게 선전물을 돌릴 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당당하게’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딸의 한마디가 컸다.
“어느 날은 딸이 ‘엄마! 무슨 죄지은 사람 같아!’ 그러는 거예요. 사진을 봤는데 정말 옷도 모자도 까맣고 마스크까지 까만 거예요. 엄마를 한눈에 찾을 수 있게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어요. 말은 안 하지만 우리가 선전전하는 걸 인스타로 다 보고 있다는 거잖아요. 이게 엄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스크를 벗으면서 효진 씨는 ‘동지애’가 생긴 걸 느꼈다. 처음 집회 참석했을 때 새빨간 깃발과 함성이 무서웠던 효진 씨지만, 이젠 그 깃발과 함성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싶다가도 어느새 자신 옆에 동지가 와 있고, 또 자신이 동지 옆으로 가 있다. 상담사로 일할 때는 ‘어차피 쟤도 좀 이따 나갈 건데’ 싶어 오래 일한 사람과만 어울렸는데, ‘인간으로서 조금 성장했다’고 느낀다.
일 년째 복직 투쟁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솔직히 ‘복직해도 일할 수 있을까?’ 언니들과 매일 하는 얘기다. 복직을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다시는 콜센터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다가도 ‘우린 정말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면 20년 경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생계에 대한 고민이 당장 절박하지만, 그런 절박함을 떠나 투쟁은 계속될 거라고 효진 씨는 생각한다. 유베이스 안에서든 효진 씨의 삶에서든. 투쟁하면서 바라는 것은 ‘작은 뭔가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만능이어야’ 일할 수 있는 콜센터 상담사들이 전문성을 인정받았으면 하는 것, 그리고 해고될 걱정 없이 일하는 것뿐이다. 그 작은 승리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게 끝까지 남은 해고노동자들이 계속 투쟁하는 이유다.
[필자 소개] 정윤영. 이러저러한 일로 밥벌이하며 르포를 씁니다. 『숨은 노동 찾기』, 『달빛 노동 찾기』, 『숨을 참다』 등을 함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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