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까지 일할 수 있게만 해달라며 양보했는데

[르포] 유베이스 수원 콜센터 상담원들의 이야기 ③윤난희

시야 | 기사입력 2023/02/02 [21:24]

정년까지 일할 수 있게만 해달라며 양보했는데

[르포] 유베이스 수원 콜센터 상담원들의 이야기 ③윤난희

시야 | 입력 : 2023/02/02 [21:24]

※ 유베이스 수원 콜센터에서 일하던 상담원 12명이 사업장 폐쇄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징계 해고됐다. 그리고 10개월째 복직 싸움을 하고 있다. 이들의 노동 경험과 복직을 위해 싸우는 이야기를 시야, 정소은, 정윤영, 희정 네 명의 기록자가 듣고 쓴다.

 

“노조는… 사실 너무 부끄러워요.”

 

한참을 머뭇거리다 윤난희 씨가 말했다. 콜센터 상담원들이 금속노조 유베이스수원지회를 만들 때 자신은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는 고백이었다. 유베이스에서 ‘너 그만둬’ 라고 했을 때, 윤난희 씨는 화가 치밀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는데 몇몇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난희 씨에게 내밀었다.

 

“너무너무 대단하잖아요.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회사가 원하는 사직서 대신 금속노조 가입서를 써서 내밀자, 수원사업장은 폐쇄되지 않았다. 노조 덕분에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난희 씨 인생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 유베이스 부천 사업장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는 윤난희 씨 모습 (출처: 금속노조유베이스지회 ‘콜센터 그언니’)

 

세상 사람들에겐 여전히 “삼성전자서비스입니다”

 

마산에서 의류 사업을 하던 부모님은 1990년대에 사업을 확장하다가 부도를 맞았다. 빚더미에 주저앉을 뻔 했지만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도난 사업을 지탱하는데 난희 씨의 20대가 흘렀다. 그러다 서른 셋이 되었을 때, 부모 대신 떠안은 대출빚 통장과 옷 보따리만 챙겨서 지인의 소개로 수원으로 이주해 첫 직장을 가졌다. 2001년의 일이다.

 

‘삼성’이란 간판이 있었지만 삼성의 직원은 아니었다. 협력사로 입사했다. 1년만 열심히 일하면 삼성의 정직원이 될 수 있다고 소개 받았다. 정직원과 협력사 직원은 나란히 섞여서 일했다. 그런데 얼마 후, 콜업무를 하던 정직원도 명예퇴직을 하거나 전문상담 부서로 옮겼다.

 

삼성전자 고객이 AS 문의 전화를 하면 “삼성전자서비스입니다”라는 음성이 들린다. 난희 씨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한다. “냉장고가 고장났어요.” 그러면 난희 씨는 냉장고 상태를 묻고 AS기사가 출장을 나갈 수 있게 접수하거나, 상담으로 해결 가능한 정도면 전문상담원에게 연결해주었다.

 

“1년 정도 일하다가 퇴직했어요.”

 

그 해 여름, 지금의 남편을 지인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삼성전자 에어컨 사업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난희 씨는 늦깎이 집을 떠나서 꿈만 같은 연애를 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알뜰살뜰 살림하고 싶어서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을 앞두고 퇴사했다.

 

그러나 꿈같은 시간은 잠시. 남편이 다니던 삼성전자 에어컨 사업부도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에어컨 사업부는 전라도 광주로 옮길 계획이었고, 남편은 명예퇴직을 할지 직장을 따라 이주할지 고민이 깊었다. 삼성에서 쉬는 날도 없이 20년 넘게 잔업과 특근을 하면서, 난희 씨가 짊어진 짐도 덜어준 남편이었다. 남편은 잠시 쉬고 싶어했고, 난희 씨는 고생한 남편이 재충전할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다.

 

“둘 다 실직자가 돼 버린 상태에서 제가 임신을 헀어요. 내가 일자리를 찾아야겠다 싶어서 옛날에 카르푸라고 있잖아요. 캐셔를 하려고 들어갔다가, 삼성전자서비스 콜센터에서 사람을 수시로 뽑는다면서 지인이 저더러 오라고 해요. 그래도 사무실에 있는 게 낫잖아요. 재입사했을 때는 협력사로 완전히 분리된 거 같았어요.”

 

삼성전자서비스로 돌아간 건 2003년 3월이었다. 정직원이 된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하지만 ‘삼성’이라는 간판이 있는 한, 협력사도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집에서 걸으면 25분, 버스 타면 5분 거리였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와서 좋았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 ‘삼성전자서비스’로 통했다.

 

▲ 금속노조 유베이스 수원지회 조합원들이 손수 만든 선전물, 작은 케이스 안에 밴드가 들어있다. (출처: 금속노조유베이스지회 ‘콜센터 그언니’)

 

기업가들은 ‘효율적’이라고 보겠지요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여자였다. 출산하고 육아휴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는 입사한 지 1년도 안 돼서 출산을 하니까 민망했고, 육아휴직은 무급이잖아요. 돈도 벌어야 해서 바로 복귀했어요.”

 

2003년 10월에 딸을 출산하고 산전후 휴가 기간인 3개월만에 직장으로 복귀했다. 남편의 조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상사는 상담 업무가 아닌 코칭 업무를 배정했다. 수시로 입사하는 신입 직원을 교육시키고 사원들의 CS(customer satisfaction, 고객만족) 업무 능률을 향상시키는 1대1 교육을 담당했다.

 

“사실은 좀 편하게 다닌거죠. 그렇게 2년 정도 하다가 조직개편을 해요. 한 부서가 40-50명인데, 그걸 세분화시켜서 15명씩 한 셀로 나눠요. 한 셀당 셀장이 필요하잖아요. 제가 셀장을 맡게 된 거에요.”

 

말하자면 윤난희 씨가 조직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되었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언니’하면서 따라주는 동료들과 재미있게 잘 해냈다. 그러다 얼마 후에 또 조직개편이 있었다. CMI(고객만족도 조사)를 담당하는 해피콜 부서와 일반상담을 섞어버렸다. 콜이 들어올 때는 무조건 콜을 받다가, 조금만 한가해지면 고객에게 전화를 해서 고객만족도 조사를 하게 했다.

 

“모든 직원에게 고객만족도 조사라는 걸 시킬 수 없으니까 베테랑 직원들을 한 셀에서 다섯 명 정도 뽑아서 콜이 빈다 싶으면 투입하는 거예요. 그런 시스템으로 가니까 뭔가 세상이 빡세게 돌아가는 거예요. 기업가들은 효율적이라고 보겠지만요.”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다 부작용이 생기면 또 조직개편이 이뤄졌다. 결국 한 파트가 여러 셀을 통합해서 해피콜만 전담하기로 정했다. 하필 난희 씨가 해피콜 전담 셀장을 맡았다. 그러나 어느새 콜이 폭주할 때면 해피콜과 일반상담이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우리 건수를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했어요. 잔업도 하고 토요일도 근무했어요. 일반콜을 안 받고 고객만족 평가를 하는 거니까 좀 더 일해줬는데, 회사는 그게 아닌가 봐요. 콜이 폭주하면 실제로 안 하기로 했던 걸 해버려요. 밀리면 무시하고 (상사가) 섞어버려요.”

 

회사관리자와 부서원 사이에서 매니저의 입장은 수시로 난처해졌다. 난희 씨에겐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새로운 영역에서 일을 배우면 기분도 전환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서 TV전문 상담부서로 옮겼어요.”

 

새로운 공부를 하고 업무가 능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2년을 채우지 못했다. 기침이 심해졌다. 성대결절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직업병이었다. 난희 씨는 일을 그만뒀다. 딸이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였다. 그동안 남편이 생후 3개월 된 딸의 육아를 도맡아준 덕분에 직장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남편은 살림에 소질이 있었고 아이 키우는 게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난희 씨는 학교에 입학하는 딸에게 엄마 노릇을 해보고 싶었다. 재충전할 시간도 필요했다.

 

부부는 역할을 바꿔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용안정’에 대한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삼성전자서비스의 협력사 이투씨(E2C)에서 하던 업무인 CMI(고객만족도 조사) 부서가 유베이스로 아웃소싱되고, 고용 승계된 사람들은 ‘속았다’고 토로했다.

 

난희 씨는 2013년에 유베이스로 입사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콜센터에서 CMI 부서였던 해피콜 전담 매니저로 조직을 관리했던 경력은 삭제됐다. 유능한 경력 사원이었지만 신입사원으로 채용됐다. 옛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성과급이 줄었다가 사라졌단다. 이투씨에서 고용승계된 다음 달에 당장 월급에 문제가 생겼다. 금액이 둘쑥날쑥했다. 월급 문제를 이야기하면 유베이스는 해명 대신 옆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며 경고했다. ‘잘린다’는 엄포와 함께.

 

▲ 민주노총 콜센터 노동자 결의대회에 참석하겠다고 인증샷을 찍고 있는 윤난희 씨. (출처: 금속노조유베이스지회 ‘콜센터 그언니’)

 

난희 씨가 입사할 때 월 임금은 130만 원이었다. 해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근속수당이 줄거나, 상여금이 깎였다. 월급은 인상되어도 연봉은 인상되지 않았다. 유베이스에서 이상한 셈법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동안, 난희 씨는 이상한 회사라고 생각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삼성의 고객을 상대하면서 삼성전자서비스 일에만 전념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게는 ‘삼성전자서비스 콜센터’로 불릴 테니까.

 

노동조합을 만든 건 2019년 3월이었다. 삼성이 콜센터 협력사를 자회사로 승계할 때는 매일 매일 기대감에 부풀었다. 안정된 일자리가 필요했다. 유베이스가 자회사에 해당 안된다는 걸 알았을 때, 아쉬웠지만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유베이스는 여전히 삼성의 아웃소싱 업체였고, 삼성 외에도 고객사가 있었고, 난희 씨에게는 노조가 생겼으니까, 욕심부리지 않고 정년퇴직할 때까지만 일하고 싶었다.

 

노조를 시작하고 어렵사리 사측과 단체협약을 체결했을 때, 또 한 번 난희 씨는 탄성을 질렀다.

“역시 노동조합은 있어야 돼!”

 

금속노조 유베이스 수원지회가 생긴 후로 회사의 태도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문제 제기를 못했죠. 말만 듣고 끝이예요. 그런데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난 후로는 내용을 파악해서 당신들 왜 위반하냐고 따지면 ‘잘못했습니다.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라구요. 단체협약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죠.”

 

가장 중요한 건 고용안정이었다. ‘삼성전자서비스 일이 없어져도 유베이스는 워낙 많은 고객사를 갖고 있으니까, 어떤 일을 해도 유지시켜 주겠다’는 사측의 구두약속을 난희 씨는 철석같이 믿었다.

 

난희 씨의 싸울 결심

 

그러나 유베이스는 2021년 12월 말 삼성과 계약이 종료되어 또다시 수원사업장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난희 씨에게 부천사업장으로 출근하라는 명령은 부당했다. 회사는 통근버스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노조는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통근버스를 타는 출퇴근 시간을 근무 시간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회사는 딱 잘라 거절했다.

 

“(회사가) 기숙사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사실 최저임금 받으면서 남편과 자녀를 두고 타 지역의 기숙사에서 산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완전히 가능하지 않은 걸 그냥 보여주기 식으로, 서류에 남겨놓기 위해서 하다 보니까 협의가 안 되는 거죠.”

 

노조와 회사 간 줄다리기 교섭이 시작되었을 때도 유베이스는 합의점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징계로 해고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번엔 난희 씨도 싸울 결심을 했다.

 

“저는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노동조합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서 이미 알아버렸잖아요. 내 생각도 많이 바뀌고.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 수도 있지만, 포기하는 건 아닌 거 같았어요.”

 

▲ 유베이스 부천 사업장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있는 조합원들. (출처: 금속노조유베이스지회 ‘콜센터 그언니’)

 

2022년 3월에 징계해고를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원사업장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사무실 앞 거리에서 철야농성을 하며 항의했다. 유베이스가 있는 서울 을지로 아우름센터와 부천센터에 가서 피켓을 들고 선전전을 하며, “콜센타 그언니” 선전지를 돌렸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남기고 떠나는 동료를 붙들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기도 많이 울었다.

 

“예전에 저는 정말 개인주의였어요. 그냥 내 일만 하고 친한 사람하고만 밥 먹고 사실 친한 사람하고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노조를 하고 나서 내 인생이, 내 삶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 남하고 어울려 살아야 하는구나. 주변에 정말 어려운 사람도 있을 거고, 좀 여유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다 어울려서 살아야겠다. 이런 걸 많이 느꼈고 깨우친 거 같아요.”

 

그러나, 이 싸움의 끝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하고 싶었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후회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그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후회는 없어요.”

 

후회하는 건 썬크림을 많이 바르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해고를 당하고 한낮에, 봄볕에, 여름땡볕에, 가을햇살에, 겨울 따스한 오후에 유베이스 사업장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썬크림을 바르고 마스크를 쓰고 모자도 눌러썼지만 햇빛은 눈가 피부에 가닿았다. 눈밑에 기미가 생겼다. 거울을 볼 때마다 썬크림을 더 많이 바르겠다고 입속말을 한다.

 

“그것 외엔 후회되는 건 정말 없어요. 이렇게 안 했으면 후회했을 거 같아요.”

 

삼성을 대표해서 삼성의 고객을 응대한다는 자긍심으로 20여 년을 일했다. 삼성의 정직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유베이스에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었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양보하고 양보한 결과가 징계이고 해고라면, 난희 씨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다.

 

[필자 소개] 시야. 노동자를 편드는 글을 쓰고 싶어서 취재하고 기록한다. 함께 쓴 책으로 『들꽃, 공단에 피다』, 『회사가 사라졌다』, 『숨을 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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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다 2023/02/10 [20:57] 수정 | 삭제
  • 화이팅입니다. 저는 유베이스에서 원거리발령과 갖은 협박으로 직장내괴롭힘 당해 결국 반불구가 되어 쫓겨났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보름을 엉엉 울었습니다.
  • 럴리 2023/02/09 [10:16] 수정 | 삭제
  • 썬크림 말고는 후회가 없다는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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