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목소리를 가진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번영을 누린다.”(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빈 일기 - 침묵을 넘어 진화하는 여자들』 142쪽)
“어머니의 부재는 어머니의 존재가 되었다.” 지금 내 곁에 없는 엄마가 가끔 떠오를 때면 엄마가 나에게 남긴 유산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곤 한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여자는 자기 힘으로 돈 벌고 여행을 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게 행복한 인생이라고. 그 시절에 흔한 가정교육(?)은 아니었다. 나는 엄마의 가르침에 따라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적는 종이에 ‘독신주의자’라 쓴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을 정도로 비혼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언어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그럼 엄마는 왜 결혼했어?” 나는 엄마에게 묻곤 했다. 혹시라도 나의 존재가 엄마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엄마는 엄마고, 너는 너야.”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나서야 그 말이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의미임을 깨닫게 됐지만, 어린 나에게 엄마의 대답은 조금 서늘하게 들렸다. 나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한 엄마의 말은 내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퍼즐에서 잃어버린 조각으로 시리게 남아 있다. 그때 엄마는 내 앞에서 어떤 말을 삼켜야 했을까. 그 안에 숨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라는 단어는 나에게 쓴 눈물을 즉각 소환하는 말이자 외침이 되었다. 왜 그 말은, 부를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을까. 엄마가 평생 자신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삼킨 것처럼, 나 또한 엄마 앞에서 침묵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차마 그것을 전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일기는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혀 있다.” (40쪽) “어머니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 있을 때도, 자신의 목소리를 억누름으로써 내게 목소리를 주었다.” (179쪽)
20대 후반 삶의 위기를 맞으며 처음 심리상담을 받게 됐을 때, 정신 차리는 약이나 처방해주길 바란 나에게 상담자는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 말을 듣자마자 오랫동안 내 피부처럼 두르고 있던 갑옷이 해체되는 것 같아 나는 두려웠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한 마디가 나를 한 방에 무너뜨린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엄마랑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저는 제 이야기를 하러 왔는데요.” 그때 나는 몰랐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 없이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고, 엄마를 밀어낸 만큼 누구보다 엄마인 채로 살아왔음을. 엄마들도 자식에 대해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딸들에게도 ‘엄마’는 끈끈하게 응어리져 분리되지 않는 존재이자 가장 깊은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침묵으로 남긴 목소리
미국의 야생 지역 보존주의자이자 여성주의 작가인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어머니는 죽기 직전 딸에게 일기장을 남기며 자신이 죽고 나서 보아 달라 부탁한다. 어머니가 매년 구입해 세 개의 선반에 진열해놓은 일기장들은 펼치자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윌리엄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 54세가 되었을 때 그 일기장에 자신의 일기 54편을 써 내려가 『빈 일기』를 채운다. 엄마의 유산으로 남겨진 빈 일기장과 그것을 채우는 딸의 이야기라는 소재를 듣자마자, 이 책으로 달음질하는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엄마가 ‘침묵’으로 남긴 어떤 목소리를, 딸은 과감하고 자유롭고 아름답게 새겨놓는다. 『빈 일기』는 윌리엄스의 회고록이자 모계의 역사에 대한 기록, 생태관찰기, 페미니즘 선언문, 산문시, 그리고 기도문 같은 강렬하고도 신비한 글들로 엮어져 있다. 문장마다 맥박이 뛰는 듯 ‘살아 있는’ 힘이 느껴지는데, 책의 마지막 글인 에필로그도 ‘Live(살아가다)’로 끝나 더욱 인상적이다.
“말에 관한 한, 우리는 진실하고 연습을 거치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대신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훔쳐서 자신의 두려움을 가린다. 그리고 내 어머니의 경우, 내가 공백을 메우게 했다. 이것은 나의 유산이다.” (185쪽) “르완다에서는 한 사람의 침묵이 사자의 으르렁거림으로 들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206쪽)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강한 것으로 알려진 모르몬교 가정에서 자란 윌리엄스는 종교적 신념을 거슬러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은 집안 여자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윌리엄스의 어머니는 페미니즘 교육을 받았고, 딸에게 쓴 편지에 “그 누구도 너의 창조력을 침범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 흔치 않았던 피임수술을 받고 자식들 앞에 말한다. “자유다.”
여자들이 새였을 때
윌리엄스가 생태주의자로 헌신하며 살아가도록 이끈 이는 할머니 미미였다. 『빈 일기』의 원제인 ‘When women were birds(여자들이 새였을 때)’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탐조에 눈뜬 윌리엄스가 여성을 날갯짓하는 새에 비유한 것이다. “어머니가 백지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할머니의 일기장은 현장 도감이었다.” 미미는 조류도감 책을 일기장 삼아 자신이 관찰한 새를 꾸준히 기록했고, 손녀에게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준다. 윌리엄스가 미미에게 결혼 소식을 전하자 축하하면서 바로 “잘 안 풀리면 언제든 이혼하면 돼”라 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한편으로는 자라며 이런 할머니나 어른의 존재가 가까이 있었다면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힘이 더 커졌을 텐데, 저자가 부럽기도 했다.
“우리의 살아 있음의 정도는 깨어 있음의 정도에 좌우됩니다. (중략) 여자의 인생에는 중요한 이틀이 있죠. 자기가 태어난 날, 그리고 그 이유를 발견한 날.” -윌리엄스의 어머니 다이앤 딕슨 템페스트의 여성모임 발표문에서 (231쪽) “넌 네가 뭘 봤는지 알잖아. 그 새는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어. 물론 너도 마찬가지고.” -미미가 어린 윌리엄스에게 한 말 (45쪽)
어머니의 미스터리 같은 빈 일기장에서 출발한 윌리엄스의 기록 여정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넘어 집안 여성들의 계보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자신의 존재로 귀결되기를 반복한다. 특히 가족 중 9명의 여자가 암 투병을 하고 그중 7명이 목숨을 잃은 일은 윌리엄스의 삶에 중요한 사건이자, “발언할 것인지 죽을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소환장”이 된다. 그의 고향땅 부근에서 과거 수백 번의 핵실험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윌리엄스는 가족의 병력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 반핵운동과 환경운동에 힘썼고 실제로 정치계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성스러운 분노로 그들의 죽음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한다” 말하며, 미국뿐 아니라 아프리카로 이어진 그린벨트 운동에 앞장섰다.
윌리엄스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비극’으로 남기지 않고 자신을 ‘외가슴 여인족’이라 부르며, 가족과 자신 모두를 희생된 피해자가 아닌 생존력 강한 아마존 전사로 승화시킨다. 그가 이렇게 주체적인 힘과 언어를 갖게 되기까지 그를 지지하고 키워준 여성공동체가 있었다.
『빈 일기』의 한 꼭지에서 소개된 중국 소수민족 여성들의 비밀문자 ‘누슈(女書)’에 대한 이야기 또한 가부장 사회에서 억압받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역사를 어떻게 전수하며 공동체성을 유지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우물 옆에서는 목마르지 않으리라. 자매 옆에서는 절망하지 않으리라.”
윌리엄스의 어머니는 집안에 왜 친구의 퀼트작품을 걸어두었는지 묻는 딸에게, “(퀼트는) 여자들이 자기에게 남겨진 자투리를 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엮어 가는지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위반’의 삶도 가능하다며 본인 대신 내 등을 슬쩍 밀어준 나의 엄마에게, 결혼생활은 자기만의 퀼트 작업에 열중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엄마 이슈’로 1년 가까이 받은 심리상담이 종결을 앞두었을 무렵, 나는 어쩌면 평생 엄마의 ‘변호사’가 되려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엄마를 함부로 단죄하지 못하도록, 엄마가 침묵한 말을 대신 찾고 이야기하고 결국은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 그래서 계속 세상에 말 거는 글을 쓴다. 언젠가 우리도 자유롭게 노래하고 비상하는 새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가 여자로서 서로에게 저지른 죄는 충분히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216쪽)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기를 거부할 경우, 그림자는 우리가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도록 다른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투사할 것이다. (중략) 나는 내 그림자와 대화하려고 일기를 쓴다.” (211~217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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