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옷을 입었든 벗었든. 내 몸으로 뭘 하든’2023 시드니 마디그라 & 월드 프라이드에 가다 (하)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무지개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의 6색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지개로 물든 도시가 된 시드니에선 더 많은 색이 담긴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무지개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8색→6색 무지개와 “프로그레스” 플래그
1978년 미국에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뜨거워지던 때, 길버트 베이커(Gilbert Baker)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심벌로 8색(분홍,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하늘, 파랑, 보라) 무지개를 만들었다. 이후 당시의 몇 가지 현실적 문제들로 인해 핑크와 하늘색을 빼기로 하고, 6색 무지개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6색 무지개 외에도 다양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여러 색 플래그들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건 하늘색과 분홍, 흰색이고 인터섹스(intersex)는 노란색 바탕에 보라색 동그라미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도 더 많은 다양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2017년 미국 필라델피아 시청에서 인종차별 이슈를 제기하기 위해 검은색과 갈색을 추가한 플래그를 공개했다. 2018년 시애틀에선 거기에 덧붙여 하늘색, 분홍, 흰색을 추가해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젠더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플래그를 공개했다. 하지만 이 플래그 디자인은 너무 많은 색들이 쌓여있어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논바이너리(non-binary) 디자이너인 대니얼 퀘이사(Daniel Quasar)가 추가된 색들을 플래그 왼쪽에 화살표 모양으로 배치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우리가 앞으로도 (더 많은 포용을 위해) 계속 진전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플래그를 제안했다. 그렇게 “프로그레스”(Progress) 플래그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2018년 만들어진 이 플래그는 이후 퀴어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번 마디그라 축제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무지개도 “프로그레스” 디자인이었다.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계속해서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고, 그 진전의 발걸음을 많은 이들이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박해받고, 저항하는 몸
NSW 주립 도서관에서 열린 “PRIDE (R)EVOLUTION” 전시장 입구엔 이런 안내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 전시는 사랑과 축복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애도, 편견과 폭력 그리고 변화를 위해 투쟁한 힘든 시간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의 몸에 대한 것이다. 옷을 입었든 벗었든. 그 몸으로 뭘하든. 이 전시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했으며, 우리가 얼마나 변화해 왔는지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전시가 당신(혹은 당신의 아이에게) 조금 과하다 싶다면, 그 또한 괜찮다. 자기 자신을 잘 챙기시길.”
“이것은 우리들의 몸에 대한 것이다. 옷을 입었든 벗었든. 그 몸으로 뭘하든.”이라는 말에 눈길이 갔다. 역사적으로 세계 곳곳의 많은 퀴어들이 비퀴어들로부터 ‘몸에 대한 규제와 차별’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문란한 몸, 더러운 몸으로 비난 받았고, 봉건 질서를 비껴난 여성들이 마녀라 불리고 장애인들이 크립(Crip)이라 불렸던 것처럼, ‘퀴어’(Queer, 오랜 기간 성소수자를 ‘괴물’이라고 욕하는 말로 쓰여왔다. 21세기에 들어와 이 단어를 긍정적으로 전복해 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퀴어라는 말에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도 있다)라 불렸다.
그런 차별과 혐오의 역사로 인해 ‘퀴어’들의 몸은 더욱 더 드러나선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런 현실에 투쟁하고자 퀴어들은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자 했다. 더 이상하게, 더 과감하게.
시드니 퀴어 커뮤니티의 역사를 다룬 전시 “PRIDE (R)EVOLUTION”에서도, 시드니 퀴어 커뮤티니의 ‘파티’ 역사를 다룬 전시 “The Party”에서도, 논바이너리 활동가의 삶과 드랙킹 아티스트 이야기 등을 다룬 전시 “Absolutely Queer”에서도 그런 투쟁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진행된 “Opera Up Late” 공연에서도 상의를 탈의하고 바스트 가터벨트만 한 피아니스트, 엉덩이를 시원하게 드러낸 퍼포머, 젠더 구분 없이 다양한 패션을 선보인 아티스트가 무대를 채웠다. 그리곤 우아하고 아름다운 오페라를 부르는 모습이 그야말로 퀴어했다. 장소가 가진 상징성이 주는 감동,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은 정말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연이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도전과 시도를 하는 아티스트들이 있고, 국내 퀴어문화축제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까. 다만 이들이 설 수 있는 자리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 여전히 이들을 ‘괴물’로 바라보는 혐오의 시선과 날 선 공격의 말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 큰 차이일 테다.
45년 전, 경찰의 폭력을 마주했던 첫 마디그라
대망의 마디그라 퍼레이드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45주년을 맞이한 시드니 마디그라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본주의의 폐단과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목소리, 반전 운동과 함께 페미니즘, 성소수자 인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때다. 호주의 성소수자들 또한 미국 뉴욕의 스톤월 항쟁(1969년) 등에 영향을 받아, 동성 섹스를 처벌하는 법을 개정하는 것, 전환 치료 문제, 차별 문제, 레즈비언 엄마들의 아이 양육권 문제, 재생산권 문제 등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커밍아웃한 남성 동성애자로서 최초로 시의원으로 당선된 하비 밀크(Harvey Milk)가 6월 25일, 성소수자들을 위한 행진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 시점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호주 출신의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 사회주의자였던 앨리슨 브리튼(Alison Britton)은 시드니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대를 요청했다. 각자의 공간에서 퍼레이드를 열어 함께 메시지를 전하자는 거였다. 이 시점은 페미니즘, 성소수자 운동이 기독교 우파 그룹에 의한 백래시에 시달리던 때이기도 했다.
시드니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연대회의가 꾸려졌고, 이들은 6월 24일 센트럴 시드니를 중심으로 거리 행진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시위 성격이 강한 이 행진 외에, 조금 더 자유롭고 즐거운 축제 느낌의 퍼레이드를 밤에 진행하기로 했다. 그것이 ‘마디그라’(Mardi Gras, 마디그라 축제는 로마 시대 때부터 풍요로움을 기념하는 축제였다고 알려져 있고, 현재에도 미국 등 여러 국가, 도시에서 거대한 축제로 진행되고 있다) 였다. 밤에 진행할 경우 참여자들의 신상이 드러날 위험이 조금 줄어든다는 점, 재미있는 파티 분위기를 냄으로써 행진 참여에 두려움을 느끼는 성소수자들에게 진입 장벽을 낮춰준다는 점 등을 고려한 퍼레이드였다.
그렇게 1978년 6월 24일 밤 10시, 시드니 옥스퍼드 거리의 테일러 스퀘어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트럭 한 대와 마디그라 축제라는 컨셉에 맞게 다양한 화장과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거리에서 춤추고, 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걸었다. 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 축제가 끔찍한 현장으로 변한 건 밤 11시 즈음, 사람들이 킹 크로스 거리에 도착할 때였다. 신분이 드러나는 뱃지를 하지 않은 경찰들이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무작위로 경찰차에 실었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퍼레이드 참여자들은 그에 맞섰고, 당시 그 거리에 있던 선주민들, 홈리스와 성노동자들 또한 연대하기 시작했다. 경찰의 부당한 폭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53명이 체포됐다.
마디그라 참여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달링허스트 경찰서 앞에서 부당한 체포에 대해 항의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달라고 새벽 내내 자리를 지켰다. 다음 날 아침 약 3백명이 중앙 법원 앞에서도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성소수자 단체와 연대 단체들은 체포된 이들의 “혐의를 철회하라”는 캠페인을 진행하며, 보석금을 모으고 변호사를 마련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경찰의 폭력을 고발하는 시위와 행진도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1978년 겨울은(호주에선 6~8월이 겨울이다) 시드니 성소수자들에게 무척 뜨거운 시간이었다. 많은 성소수자들을 ‘활동가’(activist)로 각성하게 만든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이후 매년 마디그라 퍼레이드가 열렸다. 3번의 퍼레이드가 끝나고,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본래의 의도였던 ‘축제’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호주의 여름인 2월로 개최일을 옮긴다. 그렇게 시드니 마디그라는 2월의 큰 축제로 자리잡게 됐다. 지금 시드니 마디그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퀴어들의 축제이자, 시드니를 대표하는 축제다.
환호와 논쟁이 함께하는 뜨거운 퍼레이드
2023 시드니 마디그라 퍼레이드가 열린 2월 25일 토요일, 아침부터 거리는 분주했다. 수십만 명의 사람이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모여들기 때문이다. 퍼레이드를 잘 볼 수 있는 식당이나 카페 등은 몇 달 전에 자리 예약이 끝날 정도고, 당일 아침 일찍부터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선다. NSW 교통 최고 운영책임자 하워드 콜린스는 시민들에게 “이 날은 도시에서 운전한다는 생각을 완전 잊어야 한다”고 했다. 대신 전철, 트램, 버스 등이 추가로 배치됐다.
퍼레이드는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지며 200개가 넘는 단체 및 모임, 12,500명이 넘는 이들이 행진에 참여했다. 올해 행진엔 현재 호주 총리인 앤서니 앨버니지(Anthony Albanese)도 함께했다. 이로써 앨버니지 총리는 마디그라 퍼레이드에 참여한 첫 호주 총리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내가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첫 총리라는 점이 아쉽다”는 말도 전했다.
옥스퍼드 거리의 하이드 공원에서 시작되는 행진은 안작 퍼레이드의 무어 공원에서 끝나며 거리 길이는 1.7km 정도다. 짧지 않은 거리를 행진하는 퍼레이드 동안, 길의 양 옆엔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자들에게 환호를 보내고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축제의 일원으로서 그 몫을 톡톡히 해냈다. 거리를 가득 채운 환희와 기쁨, 자긍심, 지지의 감정들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물론, 축제의 모든 것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기업이 후원하는 지금의 시드니 마디그라를 상업화됐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이 문제는 시드니 뿐만 아니라 뉴욕, 런던 등 대도시의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또, 시드니 경찰이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 목소리가 부딪히고 있다. 1978년 첫 마디그라에서 경찰의 폭력을 겪었던 ‘78er’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인종차별적이고 선주민, 난민, 트랜스젠더 등 소수자에게 차별적이며 때론 폭력적인 공권력을 마주하는 소수자들도 경찰 참여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 녹색당 상원의원인 리디아 소프(Lidia Thorpe)는 퍼레이드 중에 “경찰들 엿 먹어라” 외치며 NSW 경찰 트럭 앞에 드러눕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는 행진이 끝나고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경찰의 폭력에 직면해 있다”는 문구를 SNS를 올렸다.
이 축제가 의미 있는 건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가 논의되고 드러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퀴어와 앨라이(지지자)가 함께하는 곳이며 퀴어와 소수자들이 연대하는 곳, 다양성을 포용하는 환대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그건 한국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들도 마찬가지다. 축제의 의미와 목적,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 확인할 수 있었다.
시드니 마디그라 & 월드 프라이드에서의 경험은 놀라웠고 때론 감동적이었고 조금 샘이 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 사회가 절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다만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마음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올해 한국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것이다.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힘차게 행진도 할 테다. 아직 한번도 이 축제에 참여해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올해 그 길을 동행해 보는 건 어떨까? 차별과 혐오에 맞서, 함께 환대의 장을 여는 특별한 순간을 맛보게 될 것이다.
※ 참고 자료 The Progress Pride flag https://www.vam.ac.uk/articles/the-progress-pride-f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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