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행위’도 ‘굶는 행위’도 정치적인 것이다[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다이어트의 성정치’ 이후 25년-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나는 2000년에 『다이어트의 성정치』라는 작은 책을 써서 세상에 내놓았다. 이 글을 통해 내가 1990년대 후반에 왜 이러한 주제로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며,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점차 커지는 섭식장애 당사자들의 목소리와 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나는지 성찰해보고자 한다.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페미니즘
1970년대 말, 한국에서 두 번째 군사 쿠데타로 인해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해직당한 후, 나는 해고자 가정의 자녀로 십대와 이후의 시기를 보냈다. 당시는 해고자 가정의 고통에 대한 인식도 미비했고 국가, 혹은 민간으로부터의 복지 지원이나 돌봄의 손길이 거의 전무하던 시대였다. 하루아침에 집에 사람들의 왕래가 뚝 끊겼고, 가장의 역할을 상실한 아버지의 방황과 생활고로 인한 가정불화를 경험하며 상당히 불행한 십대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이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때문에 더욱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성공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여느 한국 부모가 기대하듯, 좋은 대학 가서 사회적 성공을 하는 건 당연했고, 내가 딸이기에 그 “성공”에는 결혼 시장에서 잘 먹히는 외모를 철저한 관리를 통해 ‘획득’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여자로서 실패한 엄마의 삶을 보상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대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새로운 차원의 고민을 안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나의 ‘다름’, 그러나 정체를 알지 못해 계속 묻어두었던 그 문제가 페미니즘의 섹슈얼리티와 퀴어 이론에 의해 이름을 부여 받고 논의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앎’이 내게 바로 해방을 가져가주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존재가 조금씩 더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말할 수없이 ‘다름’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여성학도, 동료들도, 그리고 내 인생도 다 내던지고 싶어졌다.
그리고 여성학을 전공씩이나 하면서도 이토록 세상과 불화하고 속수무책이 되어버리는 나를 벌주는 방법으로, 내 몸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늘 외모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던 터라, 내 몸은 유일하게 내가 통제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타겟이었다. 이 과정에서 음식을 먹고 반복적으로 토하는 섭식장애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점 증상이 심해지고 있었지만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섭식장애 증상도 해결할 수 없어 절망하던 어느 날, 휴학계를 내고 집을 나갔다. 그리고 고심 끝에 찾아간 곳이 어느 시골의 단식원이었다.
‘여성학’과 ‘단식원’
왜 하필 그 시점에 단식원에 들어갈 것을 선택했던 걸까? 아마도 나는 몸을 바꾸는 것으로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섭식장애를 겪으면서 비정상적이 되어버린 ‘먹는 행위’를 음식을 완전히 끊는 것으로 교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단식원에서 만난 같은 또래의 20대 여성들과 생활하면서,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곳은 다이어트와 요요를 반복하며 절망하다 결국 단식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유일한 희망으로 선택해야 했던 여성들이 모든 일상과 일, 관계를 내려놓고 마지막 수단 삼아 찾아 든 곳이었다. 우리는 자는 시간을 빼면 음식 생각과 이야기로 시간을 채웠다. 누군가는 자신이 살을 빼면 입을 옷이라며 가져와 벽에 걸어 놓았다. 좁은 방에 십수명이 같이 생활하면서 각자 자기 몸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이 병적인 경험을 같이 하며 자연스레 강한 동지애가 솟아났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단식원을 나가면 다시 서로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암묵적으로 알았다. 우리는 단식의 결과로 갖게 된, 그렇게 원하던 몸으로 다시 사회에 나갈 것이지만, 그 과정의 처절함과 나의 ‘흑역사’를 생생하게 목도했던 사람들과 다시 마주하는 일은 원하지도,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식원에서의 경험으로, 나는 페미니즘을 다시 공부하고 싶었다. 복학을 하여 외모관리와 섭식장애 경험을 바탕으로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주제만큼은 피하고 싶기도 했다. 이걸로 논문을 쓰면 다시 내 외모와 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집중될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다른 주제로 달아나려고 해도 결국 이 문제로 돌아왔고, 젊은 여성들의 다이어트 경험을 여성주의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논문을 위해 인터뷰했던 연구참여자 여성들 중에는 섭식장애 증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누구도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진 못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가 ‘의료’적 접근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더 복잡한 층위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분석을 해낼 지식과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이 연구를 통해 1990년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자기 몸을 관리해야 한다는 강한 사회적 압력 속에 외모관리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면서 자신의 잠재력과 에너지를 크게 낭비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밝혔고, 이러한 현실이 성별 권력관계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당사자들이 한국 사회를 향해 목소리 내기 시작했다
내 연구는 많은 관심을 받았고 책으로도 출판이 되었다. 몇몇 언론과 인터뷰하고, 한동안 이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주제로 책을 내줘서 고맙다는 이메일을 보내는 독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운동 주제로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응집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했다. 당시만 해도 운동을 하려면 조직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무엇보다 논문을 쓰면서 깨달은 부족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고심 끝에 사회복지로 전공을 바꾸며 유학을 떠났고, 여성들의 삶에서 폭력과 빈곤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이에 대해 사회와 국가는 어떤 접근을 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공부와 연구를 이어나갔다. 더 이상 직접적인 학문적인 주제로 여성의 몸과 외모관리, 섭식장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진 않았지만, 계속 관심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일다」에 연재된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들을 통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행사가 라이브 스트리밍 된 덕분에, 외국에서도 관객으로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 섭식장애 경험이 있는 당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 받는 소중한 자리였고, 섭식장애로 고통을 받는 이들의 치료자, 조력자로 오래 일해 오신 분들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나는 마침내 당사자들이 한국 사회를 향해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문제를 제기하는 공적인 자리가 마련되는 것에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다.
무엇보다 당사자들과 치료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장애’가 결코 단순히 증상이 아니며 얼마나 복합적인 문제들과 중첩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의 피해경험, 딸의 외모에 대한 집착이 강한 어머니의 존재, ‘프로아나’(pro-anorexia의 준말)로 대표되는 마른 외모를 부추기는 사회분위기, 섭식장애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조차 없는 한국의 현실과 치료자의 부족, 좋은 치료자와 시설이 있다고 해도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고가의 의료서비스에 접근하기 힘든 상황 등.
이중에서는 지금 당장 국가가 정책을 만든다면 개선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로 당사자들이 겪고 있는 힘겨움이 무엇인지, 치료를 담당하는 조력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지원인지를 한국의 사회적 맥락에서 더 세밀하고 깊이 있게 연구하는 것이 이 문제의 사회적 해결과 예방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복합적인 사회 문제들이 개인의 고통으로 체현되는 이 ‘납작하지 않은 장애”에 대해, 평면적이고 단순한 해결방식은 결코 대답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당사자로서, 또 오래 전 미완의 연구를 세상에 던지고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연구자로서, 당사자들과 조력자들의 요구에 진정으로 부응하는 사회의 대응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에 나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 이렇게 뜻 깊은 행사를 기획하고 개최해준 ‘잠수함토끼콜렉티브’와 모든 참여자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
[필자 소개] 한설아. 미국 Western Carolina University 사회복지학과 부교수.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복지 실천과 연구를 지향하며 여성, 이주민 등 소수자의 삶에서 폭력과 빈곤이 어떻게 체현되고 극복되는지에 대해 공부하며 가르치고 있다. 여성주의 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 살림의 조합원이고, 지금은 직장 때문에 외국살이 중이라 언젠가 이 돌봄의 공동체 일원으로 살아갈 날을 꿈꾸며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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