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음지에서 안 봐요, 태국 GL/BL 드라마의 인기

세계적인 문화 트렌드로 자리매김할까 주목

박주연 | 기사입력 2023/04/10 [18:02]

이제 음지에서 안 봐요, 태국 GL/BL 드라마의 인기

세계적인 문화 트렌드로 자리매김할까 주목

박주연 | 입력 : 2023/04/10 [18:02]

어느 날 친구에게서 태국 드라마를 추천 받았다. 〈Gap The series〉(갭 더 시리즈)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5화부터 더 재밌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보다 보니, 어느새 매주 토요일 밤 방영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주인공 역의 배우들이 나오는 태국 방송도 챙겨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갭 더 시리즈의 매력에, 나아가 태국 드라마에 빠져버렸다.

 

▲ 태국 드라마 〈Gap The series〉(갭 더 시리즈) 공식 트레일러 사진

 

지난 3월 9일, 영국 언론인 더 이코노미스트는 “태국의 게이 드라마가 넥스트 케이팝일까?(Are Thailand’s gay TV dramas the next K-pop?)”라는 기사를 발행했다. 태국의 게이 드라마, 흔히 BL(비엘)이라고 하는 장르의 드라마가 세계적 인기를 얻은 케이팝(K-pop)에 이어 또 하나의 문화 트랜드로 자리매김 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도였다. 남성들 간의 로맨스를 다루는 BL(Boy’s Love)이 ‘넥스트 케이팝’이라니 무슨 가당치 않는 소리냐고 놀라는 이도 있겠지만, BL 그리고 GL(Girl’s Love) 드라마의 인기는 이미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비엘(BL) 드라마 열풍

 

태국의 BL 드라마 시리즈는 1960~1970년대 시작된 일본 만화 Y(야오이) 시리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 작가들에 의해, 여성 팬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Y 시리즈는 두 남성 간의 ‘금기된’ 로맨스를 아름답게 그리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당시에도 일본을 넘어 다양한 국적의 팬들이 Y 시리즈, BL 만화를 즐겼다.

 

태국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BL 만화와 소설을 쓰고, 소비해 왔다. 본격적으로 BL 드라마가 등장하기 시작한 건 2013~2014년이다. 2013년 태국의 10대들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Hormones〉에서 남성 캐릭터 간의 로맨스가 이야기 중 하나로 등장했다. 2014년엔 〈Love Sick〉이라는, ‘최초의’ BL 드라마가 나왔다. 주인공인 남성 청소년 둘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 시리즈였다. 이 드라마의 성공 이후, 2016년 〈SOTUS〉와 〈Make It Right〉이 등장했고 특히 〈SOTUS〉는 큰 인기를 얻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태국의 BL 드라마는 흔히 ‘하위 문화’(서브 컬쳐)로 분류되던 것에서 벗어날 정도로 전세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팬데믹으로 인해 격리 상황에 놓인 이들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BL 드라마를 접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태국의 스트리밍 플랫폼인 LINE TV는 코로나 격리로 인해 플랫폼 역사상 가장 큰 시청률 증가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19년 5% 관객 점유율에서 2020년 1분기에만 34% 점유율을 기록한 거다.

 

▲ 태국 드라마 〈(Still) 2gether〉 공식 티저 사진

 

2020년 2월부터 공개된 〈2gether〉는 특히 인기몰이의 주역이었다. 제작사인 GMMTV가 유튜브에 공개한 동영상은 수억 조회수를 기록했다. 일본의 스트리밍 서비스 라쿠텐 TV가 일본에서 방영을 시작한 이후 〈2gether〉는 연간 영화 및 드라마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2gether〉외에도 태국 BL 드라마는 2위와 4위에도 자리했다. BL 드라마 구매 비율이 전년 대비 8배 상승했고, 30~40대가 아닌 10대와 60대 이상에서도 10배 이상 증가한 점도 도드라진 점이었다. 〈2gether〉의 온라인 팬미팅은 베이징, 도쿄, 뉴욕, 런던, 서울에서 열릴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얻었다.

 

태국 정부 또한 이 산업의 발전을 인지하고 있다. 2021년 6월 태국 국제무역홍보부는 BL 콘텐츠를 위한 온라인 비즈니스 미팅을 열었고, 많은 아시아 기업들이 참가한 가운데 3억6천만 바트(약 136억원)가 거래됐다. 이런 흥행과 함께 2021년엔 약 30개의 BL 드라마 시리즈가, 2022년엔 50개가 넘는 BL 드라마 시리즈가 제작됐다. 태국 BL 드라마의 인기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진화하는 BL 드라마, 다양한 시도와 도전

 

급상승한 태국 BL 드라마 산업에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단편 다큐멘터리 〈BL: Broken Fantasy〉(2021)에 등장하는 아누손 소이아응짐(Aam Anusorn Soisa-ngim) 감독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임에도 자신에게 3편의 BL 드라마 연출 제의가 올만큼 산업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여러 이면이 존재한다고 밝힌다. 그 중 하나는 BL 산업 현장이 생각만큼 성소수자 친화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BL과 현실의 성소수자와의 거리감이다. 2020년, 아누손 소이아응짐 감독은 자신의 SNS를 통해 “남성 둘이 사랑에 빠지고, 키스를 하고, 성관계를 맺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BL 팬이 어떻게 동성결혼을 반대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BL은 정말 그냥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냐”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사실 BL 장르는 매력적인 남성 캐릭터들의 낭만적인 로맨스에만 집중하고,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기만 할 뿐 현실의 성소수자의 삶을 다루지 않거나, 혹은 왜곡한다는 점에서 항상 비판 받아 왔다. BL 문화를 상세히 다룬 미조구치 아키코의 책 〈BL진화론〉에서도, 현실의 게이가 BL을 비난한 ‘야오이 논쟁’을 깊이 다루고 있다. 이는 드라마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주인공들은 미소년이어야 하지만 너무 ‘여성스러우면’ 안 되고, 이 남성들이 사랑하는 건 남성이라기보다 그 상대일 뿐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성적지향을 밝히는 것을 피해가는 등의 ‘BL 공식’이 그대로 적용됐다. 현실의 성소수자들이 겪은 차별과 혐오가 이야기에 등장하거나, 성소수자로서의 자긍심이 이야기되는 일도 없었다.

 

▲ 드라마 〈Not Me〉 7화 장면들 중

 

하지만, 이런 부분도 변화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부모나 친구 등에게 커밍아웃하고, 더 나아가 성소수자로서의 장벽과 ‘동성혼’이라는 현실적인 이슈를 다루기도 한다. (2022년 6월 태국 의회에서 혼인평등법안이 1차 의결되었지만, 최종적인 법제화까지 아직 갈 길이 남은 상태다.)

 

2021년 연말부터 2022년 봄까지 방영된 BL 드라마 〈Not Me〉에선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평등과 정의를 외치는 시위 장면이 등장한다. 혼인평등권을 위해 시민 서명을 받는 부스와 그곳에서 서명하는 주인공들의 모습도 나온다. 부스에서 서명할 수 있는 QR코드도 보여 주는데, 이 QR코드는 실제로 태국의 혼인평등을 위한 서명 링크로 연결된다. 또한 거대 무지개 깃발을 들고 집회를 여는 장면에선 태국 현지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군중 역할로 등장했다. 이 장면은 이후 2022년 6월 열린 방콕 프라이드 집회에서 거의 유사하게 재현됐다.(참고: https://twitter.com/PunthiiraS/status/1533425830655041537?s=20)

 

BL 드라마로 정확히 분류하기 어려울 순 있지만, 다양한 퀴어가 등장하는 〈The Warp Effect〉(2022)도 상당히 현실적인 재현을 보여준다. 주인공 알렉스와 진은 이성애 관계성을 보여주지만, 이들의 친구는 게이, 레즈비언,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BDSM 플레이어 등이다. 진은 고등학교 때부터 여성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단지 이들을 등장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고민, 그리고 삶의 즐거움을 다채롭게 담아낸다.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 임신중지, 몸 긍정하기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또한 게이 섹스를 단지 아름다운 장면으로만 소비하지 않고, 섹스를 둘러싼 현실적 문제도 짚는다.

 

BL 관계가 포함된 드라마, 그리고 BL 드라마에서도 성소수자의 현실이 드러나게 된 거다. 이런 변화와 시도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몇 가지 추론해볼 수 있다. 일단 일본 BL 만화가 흥행했던 예전 시대엔 BL의 주요 타깃이 ‘여성 =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여성들이 BL을 즐기고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두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는 시대가 됐다. 특히 콘텐츠가 국경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상대적으로 성소수자 인권이 잘 보장된 사회의 시청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BL은 이제 ‘판타지’로만 계속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된 거다.

 

▲ 드라마 〈The Warp Effect〉 9화 중

 

또한 양적으로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콘텐츠가 만들어지게 됨으로써 기존의 ‘BL 공식’을 조금 벗어난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장르적, 내용적 변화는 새로운 시청자들을 유입시키는 효과도 낳았다. 거기다 성소수자 당사자가 제작자/창작자로 현장에서 활동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Not Me〉를 연출한 누치 아누차 분야와타나 감독이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점, 〈The Warp Effect〉의 프로듀서이자 〈Dark Blue Kiss〉, 〈Bad Buddy〉 등 여러 BL 드라마 극본과 연출을 담당한 아옾 노빠낫 차이위몬 감독이 남자친구와 약혼한 게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이들 외에도 커밍아웃한 제작자들이 BL 산업에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는 건, 긍정적이다.

 

GL 드라마 시장의 가능성을 연 ‘갭 더 시리즈’

 

태국의 BL 드라마가 10년 전 태동했다면, GL 드라마는 이제 그 시작을 알리고 있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태국의 Channel 3에서 방영되고, 유튜브에서도 스트리밍 서비스된 〈Gap The series〉(갭 더 시리즈, 갭더시)가 크나큰 인기를 얻으며 GL 드라마 시장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동안 GL 스토리는 BL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 캐릭터들의 관계로 종종 등장했을 뿐 전면에 내세워진 적이 없다. 갭더시를 제작한 Idol Factory(아이돌 팩토리)는 BL 드라마 〈Love by chance〉로 인기를 얻은 배우 세인트 숩파퐁 우돔카웨꽌자나가 만든 회사로, 갭더시는 BL 드라마 〈Secret Chush On You〉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다.

 

갭더시의 주인공 프린 사로차 찬킴하와 베키 암스트롱은 〈Secret Chush On You〉에서 조연 커플인 콩콴과 폰으로 출연, 그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케미’를 보여줬다. 이들의 가능성을 엿본 제작사가 갭더시를 제작하게 된 거다. 하지만 갭더시 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드라마 팬들과 함께한 종방 파티에서, 세인트는 갭더시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이 얼마나 긍정적이지 않았는지, 투자자들의 반응 또한 얼마나 냉담했는지 털어놓으며 GL 드라마의 성공 가능성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돈, 심지어 어머니의 돈까지 빌려 우여곡절을 겪으며 드라마를 완성시켰다.

 

아무도 성공할 거라 믿지 않았다던 GL 드라마였지만, 갭더시는 상상 이상의 성공을 이뤄냈다. 갭더시의 주인공 프린, 베키의 인기는 태국 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프린베키의 팬미팅은 태국에서 성황리에 마무리됐고, 월드투어를 앞두고 있다. 필리핀, 마카오, 베트남, 대만, 일본 그리고 서울 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 미국까지 내정되어 있으며, 이후 유럽이나 남미에서의 가능성도 탐색 중이라고 알려졌다.

 

▲ 태국 BL 드라마 〈Gap The series〉(갭 더 시리즈) 5화 썸네일

 

갭더시의 성공은 금세 새로운 길을 열었고, 또 다른 GL 드라마들의 제작 소식도 하나둘 들려오고 있다.  2022년 미스 태국 우승자인 엥파 와라하, 그리고 같은 해 미스 태국 참가자였던 샬롯 오스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GL 드라마 〈Show me love〉가 지난 2월부터 유튜브를 통해 방영 중이다. 이 외 공개 예정인 GL 드라마로는, BL 드라마 〈Bad Buddy〉에서 잉크와 파라는 캐릭터로 등장해 케미를 보여줬던 밀크와 러브를 주인공으로 한 〈23.5〉, 〈Be Mine〉이라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Be Mine: Be my baby〉와 〈Be Mine: More & More〉, 판타지 장르의 〈Reverse 4 you〉,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The Last Case〉 등이다. 앞으로 분명 더 많은 소식들이 들려올 것이다.

 

변화와 역동의 태국 GL/BL 드라마, 앞으로의 전망은

 

태국 드라마를 접하게 되면서 사실 많이 놀랐다. 태국이라는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GL, BL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심지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 또한 드라마에 담긴 이야기가 생각보다 진보적이고 다채로워서 더 놀랐다.

 

각기 다른 국적의 팬들이 이 드라마들을 통해 태국 성소수자들의 삶을 궁금해 하고, 태국의 언어로 논바이너리가 어떤 인칭을 쓸 수 있는지 등을 소통하며,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퀴어로서의 자긍심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로맨스’에 치중하는 장르로서의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창작자들의 노력도 돋보였다. 배우들 또한 GL, BL 배우로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고, 성소수자의 현실에 필요한 법과 제도가 변화하길 바란다고 밝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여전히 한계를 보여주는 지점들이 있고, 다큐멘터리 〈BL: Broken Fantasy〉에서 언급되었던 배우들이 겪는 성희롱, 성추행 등의 문제도 존재하지만, 이 또한 조금씩 변화해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태국의 소프트파워[군사력 혹은 경제력으로 대변되는 하드파워(hard power)와 달리, 강제나 보상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능력을 의미]가 된 GL/BL 드라마의 미래가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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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3/04/25 [14:51] 수정 | 삭제
  • GL드라마 콘텐츠 여전히 하늘에 별따기.. 의무적으로 보는 기분도 들 때가 있는데, 더 더더더 많아지길. ^^
  • 더더 2023/04/13 [14:16] 수정 | 삭제
  • 재밌고 기쁘네염.. 판타지에서 현실 문제를 다루면서 진화해나가고 있다는 게... 희망적이고 시대적인 변화를 느끼게 해주네요.
  • 비엘러브 2023/04/11 [14:55] 수정 | 삭제
  • https://blog.naver.com/jiwoomom_/223071319419 비엘웹툰 모음집 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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