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의 ‘표준’에 내 가족은 왜 없을까요

가족 형태에 따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업 내규 바꾸려면

열쭝 | 기사입력 2023/04/21 [15:49]

노동부의 ‘표준’에 내 가족은 왜 없을까요

가족 형태에 따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업 내규 바꾸려면

열쭝 | 입력 : 2023/04/21 [15:49]

-혼인, 혈연, 입양 관계만 ‘가족’으로 정의한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 1항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시민들이 지난해 10월 25일 국회 앞에 모였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25개 단체가 주최한 시민 발언대 “우리의 연결될 권리를 보장하라”에서 나온 다양한 목소리를 연재합니다.

 

▲ 한국여성민우회 카드뉴스 〈기업 내규 실태 설문조사 분석 1탄-통계편〉 중 “회사 내규에서 내 '가족'을 찾아봤다

 

“가족 형태 때문에 기업 복리후생에서 차별을 받았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해 4월 13일부터 5월 8일까지 가족 형태에 따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업 내규 실태를 조사하였습니다. 또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차별 없는 새로운 내규를 기업들에 제안하는 활동도 펼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다양하고 생생한 차별 상황을 확인했는데요. 시민 129명이 참여해준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드러난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

 

“개인적 사정으로 8년 동안 사실혼 관계로 살았는데, 그 기간에 직장 내규 상 가족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문제 제기했지만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결혼을 하면 되는데 왜 사실혼을 유지하려 하냐’는 말만 들었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꼭 보고 싶습니다.”

 

“(직장에서) 동성 파트너에게도 가족 휴가를 적용하도록 내규를 개정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혼인신고를 안 했는데 진실된 사랑인지 어떻게 아느냐’, ‘혼인을 반복하며 휴가제도를 악용하면 어떻게 하느냐’ 등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성혼의 경우는 혼인신고를 했는지, 결혼식을 진행했는지 여부로 관계의 진실성을 의심받지 않는데 말입니다.”

 

가족관계 안에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이 촌수에 따라서, 혼인신고 여부에 따라서 달라집니까? 혼인과 혈연 관계가 아니면, 함께 사는 사람을 돌보지 않고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내팽개쳐도 됩니까? 혼인신고 안 하면 거짓된 사랑입니까? 회사가 뭐길래, 내 인생과 내 가족이 정상이 아니라고 규정합니까?

 

▲ 한국여성민우회는 2022년 가족 형태에 따른 기업 내규의 차별에 관한 설문조사 실시 이후, 5월 18일 직장 내규 성토 집담회 〈내 ‘가족’ 앞에서 멈춘 복리후생〉을 열고 대안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출처: 한국여성민우회)

 

안타깝게도 이런 차별은 일부 노동자들이 겪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우회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명 중 1명은 “가족 형태 때문에 기업 복리후생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응답했습니다. 동거인이 아파도 “휴가를 쓰겠다”고 회사에 말하지 못했고, 동거인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도 감염 및 격리에 따른 돌봄 휴가와 수당을 받지 못했습니다. 바이러스는 같이 사는 사람들의 혼인‧혈연 여부를 따지지 않는데 말입니다.

 

이러한 차별이 가져온 피해는 뚜렷합니다. 조사 결과를 보면,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해 생계 부담이 늘었습니다. 노동시간 관련 혜택을 받지 못해 스트레스가 늘고, ‘시간 빈곤’도 발생했습니다. 직장에 대한 소속감과 업무 의욕은 줄었고, 자신의 정체성과 생활방식에 대한 자존감도 떨어졌습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차별 시정을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직장에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10명 중 3명도 안 됐으며, 문제 제기 이후에 규정이나 관행이 개선됐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했다가 차별 발언을 들으면서 “내가 잘못된 건가” 자책하고, “조직에서 보호받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응답했습니다.

 

노동부의 표준취업규칙이 바뀌어야 한다

 

민우회는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기업들에게 내규를 바꿔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캠페인을 통해 ‘노동자가 지정한 1인을 선택가족으로 인정’하는 등의 가족 규정 개정을 요청했는데요. 6곳의 기업이 우리의 제안에 ‘약속문’으로 응답해주었습니다. 캠페인에 참여해준 노란들판, 동구밭, 마포의료생협, 문학동네, 빠띠 등에 이 지면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작지만 이렇게 이미 우리의 일터는 달라지고 있다고,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여성민우회 카드뉴스 〈‘선택가족’을 인정하는 기업으로 레벨업! - 직장 내규 바꾸기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중

 

그러나 우리 사회엔 더 크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캠페인을 마치면서 민우회는 내규를 바꾸기로 약속한 기업과 이미 바꾼 기업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요.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모두 가족의 범위를 넓히자는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이걸 어떻게 구체적인 규정에 담을지 고민이 컸습니다. 인사나 조직운영을 담당하는 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내규를 새로 만들거나 바꾼다는 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행정 인력이 부족한 소규모 회사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럴 때 마음껏 가져다 쓰라고 만든 것이 바로 노동부의 표준취업규칙입니다. 그런데 표준취업규칙에서 경조사휴가의 가족 범위는 혼인·혈연·입양 관계만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민법의 규정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노동부가 법적 가족만을 ‘표준’으로 인정하는 동안, 기업들은 알아서 대안적인 내규를 고민해 만들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노동자의 실제 가족을 취업규칙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노동부가 먼저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노동자의 다양한 가족을 인정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도전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터에서, 집에서, 병원 등에서 모든 가족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낡은 가족 규범에 기댄 민법 제779조, 건강가족기본법 제3조 1항의 가족 규정을 삭제하고, 노동부의 표준취업규칙을 비롯한 각종 법과 제도도 바꿔야 합니다. 가족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도 함께 달라져야 합니다. 어떤 가족도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필자 소개] 열쭝. 전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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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쿤 2023/04/25 [14:49] 수정 | 삭제
  • 맞아.. 보호자가 될 수 있는 1인을 돌봄휴가 관련해서 설정해두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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