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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오름 뒤에 가민 미나리밧이 잘도 좋아. 나만 아는덴디 잘도 좋아. 미나리 허곡 쑥 허곡. 논두렁에 쑥이 잘도 좋아. 꿩마농도 하고. 밧때기로 ᄑᆞᆯ당 보민 양배추가 요만씩 남아 이서. 그거 주서당 ᄑᆞ는 거라.” -양오생, ‘돌미나리할망’ 중에서 『그때, 그대는 어땠나요?』(김재담, 방이심, 양오생 글・그림)
※제주말 풀이- 신도오름 뒤에 가면 미나리밭이 참 좋아. 나만 아는 곳인데 참 좋아. 미나리하고 쑥하고. 논두렁에 쑥이 참 좋아. 달래도 하고. 밭을 통째로 팔다보면 양배추가 요만큼씩 남아 있어. 그거 주워다 파는 거야.(농민이 상인한테 밭을 통째로 넘기면 상품만 가져가고 비상품은 남기는데 남의 밭에서 그걸 주워다가 시장에 팔았다는 뜻)
올해 100세인 제주 사람 양오생 씨는 작년에 동네 책방에서 석 달간 그림을 그렸다. 제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물질 다닌 이야기, 대정읍 신도리에서 해녀회 회장을 15년간 한 이야기, 물질을 그만둔 후 밭이 없어서 노는 밭에서 돌미나리를 캐다가 오일장에 팔았던 이야기... 그림을 그리며 했던 입말은 고스란히 기록되어 그림책으로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그림으로 그린 자서전인 셈이다.
근육이 많이 소실돼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섬세한 그림까지 그려낸 양오생 씨는 이런 후기를 남겼다.
“그림 그리난 막 좋주게. 재미져. 근데 이젠 걷지 못해부난 힘들엄쩌. 손 털어부난 이젠 못 그리크라. 경해도 손지가 할망 그림 그리랜 책이영 연필이영 다 사다줜. 기분이 막 좋아.”
※제주말 풀이- 그림 그리니까 너무 좋아. 재미있어. 그런데 이제 걷지 못해서 힘들었어. 손이 떨려서 이젠 못 그리겠어. 그래도 손자가 할머니 그림 그리라고 책이며 연필이며 다 사다 줬어. 기분이 너무 좋아.
이 프로그램은 ‘어르신 그림 책방’으로 서귀포시 서부 종합 사회복지관에서 기획했다. 석 달 동안 세 명의 노인이 마을의 작은 책방 문턱을 넘나들었다. 바로 모슬포의 로컬 책방 ‘어나더 페이지’다.
잇는 사람, 신의주
‘어나더 페이지’는 2020년에 문을 열었다. ‘환경, 다양성, 로컬’의 주제가 있는 책을 골라 선보이는 큐레이션 서점이다. “지구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가 책방의 책들과 각종 프로그램에 담겨있다. 진열된 책을 찬찬히 둘러보다 보면 책방지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마침 집에 오고 싶기도 했고요. 제가 했던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스스로의 것을 만들고 싶었는데 (친)언니가 책방은 어떻냐고 조언해 줬어요. 생각해보니까 책은 좋은 매개체더라고요. 책이 다루지 않는 분야는 없으니까요. 제 이야기도 책을 통할 때 더 전달력이 좋은 것 같았어요.”
시작할 때 꿈꾸던 바를 달성했냐고 묻자 의주 씨는 웃는다. “처음엔 하루에 책 한 권 파는 게 목표였는데 일단 그건 달성”했단다.
“도서 정가제가 시작되면서 다양한 출판사들이 생겨났고 책 생태계가 활성화됐어요. 저처럼 ‘작은 마진이어도 괜찮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정책에 기대어서 책방을 열 수 있게 됐죠. 제주에도 책방을 통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또 다른 페이지가 펼쳐지는 곳
의주 씨는 “책방이 소매업자로서 책 파는 곳에 그치지 않고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길” 바란다.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가치를 잇는 “다양한 형태의 이음”에 관심이 많은 의주 씨가 지난 3년간 책방에서 해 왔던 작업은, 모두 그 ‘이음’의 일부였다.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제주 난민과 이주민’을 주제로 열린 북토크는 제주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잇는 기획이었다. 제주의 해양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와 함께 한 『바다, 우리가 사는 곳』 북토크는 제주의 자연과 인간, 비인간동물을 잇는 시간이었다.
이 외에도 지역 청년들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북클럽을 통해 페미니즘이라는 실로 청년들을 잇고, 농민장터에 책 보부상으로 참가해 사람과 책을 잇는다.
제주 어르신들과 함께, 과거를 잇다
작년에 진행된 ‘어르신 그림 책방’에는 당시 나이가 80세, 83세, 99세인 지역 노인 세 명이 참가했다. 제주그림책연구회 김정선 씨와 책방지기 의주 씨가 이끌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제주 4.3이나 한국전쟁 겪었던 이야기도 나왔어요. 우리는 역사를 텍스트로만 접하잖아요. 또 역사는 (우리에게) 굉장히 크게만 느껴지고요. 이 작업을 하면서 개인이 역사를 관통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었어요. 사라져가는 제주어도 들을 수 있었고. 사라진 문화를 접할 땐 즐거웠어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주제면 다양한 제주 음식이 나오고, ‘어렸을 때 살았던 우리 집 그려보기’를 하면 지금의 주거 형태와 정말 다른 집이 그려져요.”
처음에는 “책 못 해, 그냥 오일장이나 가자”라고, 그림 그리는 건 어린이들만 하는 거라고 손사래 치던 노인들이 결국엔 그림책을 내고 가족들을 불러 모아 발표회를 가졌다.
의주 씨는 “지금 아이들은 볼 수 없는 것들이 어르신들 입을 통해서 나온다. 그런 무형의 것들이 기록을 통해 유형의 것으로 만들어질”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주민 찬스”…마을이 품은 책방
어나더 페이지가 자리잡고 있는 모슬포는 제주에서 바람이 가장 세고 거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모슬포는 예로부터 어두운 역사가 많이 있는 곳이죠. 태평양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고 4.3의 역사도 남아있는 곳이고요. 저는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컸어요.”
이곳에서 나고 자라 “마을 곳곳에 추억이 있다”는 의주 씨는 바빠서 서점을 지킬 여유가 없을 땐 “엄마 찬스, 동네 주민 찬스”를 쓴다고 한다.
“제가 하는 게 많다 보니 엄마나 동네 주민이 가끔 책방을 봐 주세요. 밥 먹으러 나갈 때는 그냥 문 열고 가요. 자유롭게 책 보다가 구매를 원하면 전화하시라고.”
의주 씨는 “만약 타지였다면 책방을 못 했을 것 같다”라고 털어놓는다.
“마을이어서 도와주는 것들이 있거든요.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지역 관공서나 기업에서도 책 주문을 하시고, 지역 여성 농민회에서 독서 모임을 하는데 그 책들은 전부 여기서 구입을 하세요. 이게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큰 건 아니지만, 힘이 나요. 제가 주문을 누락했다거나 실수를 해도 ‘괜찮다’라고 보듬어 주시고요.”
자신에게 “책은 또 다른 페이지(another page)를 열게 해주는 매개체”라고 말하는 의주 씨. 마을이 품은 책방에서 의주 씨가 펼쳐갈 새로운 페이지가 궁금하다.
*‘어나더 페이지’ 인스타그램 계정 @anotherpage_books
[필자 소개] 나랑(김지현) 독립 인터뷰어. 글쓰기 안내자. 목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를 기록한다. 그런 목소리들이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게 안내한다. 지금은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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