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가 있는 장소, 빛바래지 않는 여행의 기억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2편: 후쿠오카 비건 식당과 헌책방

이내 | 기사입력 2023/09/23 [19:06]

환대가 있는 장소, 빛바래지 않는 여행의 기억

동네가수 이내의 로컬여행 2편: 후쿠오카 비건 식당과 헌책방

이내 | 입력 : 2023/09/23 [19:06]

 

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나는 낯선 곳에서 누군가의 생활이 한껏 묻어나는 골목을 발로 충분히 걷고, 그 위에서 다채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듣기 원하는 여행자다. 밤에 걷는 골목을 특히 좋아한다. 후쿠오카 숙소 주변 동네는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워서 밤에 걷기 좋았다.

 

낡은 분위기의 소바 정식 가게에 관심이 가서 전날 일기장에 ‘내일 꼭 가보겠다’고 적어두었는데, 딱 내가 여행하는 기간을 포함해 긴 휴가 중이었다. 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독립서점 북스큐브릭도 정기 휴일이었다. 이번 여행은 계획 따위는 절대 세우지 말라는 듯이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추천 받은 히로시마 식당도, 오노미치의 밤에만 여는 책방과 또 다른 작은 책방도 내가 가려고만 하면 죄다 휴일이었다.

 

하지만 전혀 실망할 필요가 없다. 우연은 걷다 보면 어디서든 주울 수 있다.

 

▲ 천변을 걷는 아침 산책길, 까만 새들 하얀 새들을 잔뜩 만났는데, 걔네들이 먹다 남긴 홍시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 (촬영: 이내)


여행 계획 차질, 동네 탐방으로 모드 변경

 

후쿠오카 비건 식당을 검색해 보니 소누소누(sonusonu)라는 가게가 있다. 그 밖에 검색된 곳들은 샐러드 가게이거나 비건 옵션이 있는 곳들 같아서 일단은 소누소누에 가보기로 했다. 아침 8시부터 영업을 시작하고 숙소에서 걸으면 20분쯤 걸린다고 나오길래 아침 산책을 나섰다.

 

어제는 퇴근길의 사람들, 오늘은 출근길의 사람들과 마주친다. 사회의 바퀴를 열심히 굴리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응원과 감사 인사를 한다. 나는 겨울의 해 질 녘 햇살만큼 아침 햇살도 좋아한다. 후쿠오카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과 천이 있어서 걸을 맛이 났다. 사람 사는 곳에는 쉼표가 되는 물길이 꼭 있어야 한다. 천변을 걸으며 아침부터 까만 새, 하얀 새들을 잔뜩 만났다. 걔네들이 먹다 남긴 홍시가 여기저기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게 귀여웠다.

 

소누소누에 도착해서 보니, 인기척은 있는데 아직 오픈한 느낌이 아니다. ‘어라, 지도에 나온 정보와 다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금 더 낯선 동네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배가 고파서 일단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토스트와 커피를 시켰다. 출근 전 잠깐 들러 아침을 먹는 정장 입은 사람들이 많다. 성실한 사람들 속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9시가 가까워지니 하나 둘 자리를 떠났지만.

 

간단한 아침은 해결했으니 비건 식당은 점심때 가기로 하고, 하카타(博多)역에 레일패스 예약권을 표로 교환하러 갔다. 하루 일찍 가는 게 좋을 거라는 일본어 선생님의 조언을 따르길 잘했다. 일본의 기차역 티켓 창구에는 언제나 긴 줄이 있어 대기 시간이 길다. 한참을 기다려 표를 받고 다시 하카타, 나카스, 텐진(天神) 사이를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녔다.

 

▲ 아침 산책길에 눈에 들어온 모습. 바닥에 앉아 화단을 정리하는 할아버지. (촬영: 이내)


절과 신사가 정말 많았는데 규모와 스타일이 각양각색이다. 호텔처럼 모던한 곳부터 궁궐처럼 전통적이고 화려한 곳까지 눈요기가 충분하다.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재미있는 건 사람 구경이다. 다리 밑에서 배를 타고 강을 청소하는 아저씨들, 화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끼 같은 생물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할아버지, 누가 봐도 관광객, 잔뜩 멋 부린 힙스터들, 거리에서 비질하는 스님까지, 비비안 고닉의 책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눈에는 무작정 도시를 걷는 내가 외로운 방랑자로 보이려나.

 

여행의 진짜 미션: 일본어 실컷 쓰기 돌입

 

점심을 먹으러 다시 소누소누에 갔다. 손님은 없었지만 입간판이 밖에 나와 있길래 용기 내서 들어가 보았다.

 

▲ 후쿠오카에 있는 비건 식당 소누소누(sonusonu)의 비건 피자. (촬영: 이내)


각 테이블에 주문 페이지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있는 세련된 곳이다. 말 걸 틈이 없네, 아쉬워하며 비건 피자 한 조각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눈앞에 오렌지 주스를 만드는 기계가 보였고, 점원은 원하면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며 오렌지 몇 개를 내 손에 쥐여줬다. 오락실 농구 게임기처럼 위에 있는 구멍에 오렌지를 넣으면 아래로 과즙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내가 하나씩 공처럼 넣으니 점원이 옆에 서서 ‘옳지, 옳지’ 느낌으로 응원을 해준다. 그 상황이 너무 귀엽고 웃겼다.

 

손님도 나밖에 없고 피자는 오븐에서 시간이 꽤 걸리는 음식이니까 셰프에게도 말을 걸어볼까. ‘비건 햄버거를 테이크아웃해서 가면 언제까지 먹을 수 있나요?’ (좋아, 자연스러웠어!)

 

셰프와 대화가 이어지고, 내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고 하니까 자기도 이번 달 말에 서울에 여행 갈 계획이라고 반가워했다. 나는 서울 비건 식당 ‘다켄시엘’을 추천해 주었다. 내가 히로시마로 간다고 하니까 “친형이 거기 살아서 종종 간다”며 비건 옵션이 있는 오코노미야키 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비건 피자 맛있게 먹고 셋이서 신나게 수다 떨고 셀카도 찍고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소누소누를 나와서 보니, 원래 알고 있던 친구들이랑 만나서 가볍게 놀다가 헤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일본어 실컷 쓰기는 목표가 낮은 미션이었나 보다. ‘그야 여기는 모두가 일본어를 쓰는 일본이잖아!’

 

▲ 비건 식당 소누소누(sonusonu)에서 점원, 셰프와 함께 찰칵. 오른쪽이 필자. (촬영: 이내)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하루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오늘의 남은 우연을 찾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내 여행 가방의 선물들

 

뭐든 초기 세팅 값이 중요한가 보다. 나에게 여행은 ‘현지의 사람들에게 환대 받는 것’으로 입력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내가 있는 곳에서 여행자를 충분히 환대하는 것’ 역시 내 여행의 정의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20여 년 전에는 해외여행을 갈 때 ‘한국적인 선물’을 챙겨가라는 팁이 있었다. 인삼 껌이라도 챙겨 가는 게 예의라는 분위기였다. 여행지에서 지인을 위한 기념품을 사 오는 문화는 더욱 확산된 것 같은데, 우연히 만날지도 모르는 타인을 위한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줄어든 느낌이 든다. 세계화 시대에 새로운 문화는 여행자가 아니라 미디어와 온라인으로 전해지고 있으니까.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내 여행 가방에는 아직도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선물이 들어있다. 한국이 드러나는 기념품은 아니지만,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내가 만든 물건을 조금 챙겨 넣어 둔다. CD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점점 없어지면서, 앨범의 재고가 없어도 더 만들지 않는다. 즉, 안 팔린다는 말이다. 덕분에 아직 조금 남아있는 3집 앨범 다섯 장을 이번 여행의 선물로 가방에 챙겨 넣었다. (일본은 아직 CD플레이어 쓰는 사람 있겠지…) 결과적으로 앨범이 모자랄 정도로 여행자를 환대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 훌륭한 여행이었다.

 

막상 선물을 꺼낼 순간을 찾는 건 어렵기도 하고 자연스럽기도 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CD를 꺼낸 곳은 루모 북스앤웍스(Lumo Books and Works)라는 헌책방 겸 갤러리였다. 구글 지도로 책방을 검색하다가 화요일에 여는 곳 중에 가장 재미있어 보여서 들어가 보았다.

 

▲ 헌책방 겸 갤러리 루모 북스앤웍스(Lumo Books and Works) 전경. (촬영: 이내)


주인도 손님도 없어서 뻘쭘하게 내부를 둘러보니 미스터리, 에로스, 역사, 인디매거진 등 나름의 큐레이션으로 재미있는 책을 분류해 두었다. 한쪽에는 돌멩이와 조개껍데기 등으로 만든 장식품이나 곤충 표본, 작은 박제도 있다. 글자를 잘 못 읽으니 선뜻 책을 고르는 건 무리군, 하고 느낄 무렵 손님 한 명이 책방에 들어왔다. “아무도 없네요”라고 말을 건 후 나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고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이렇게 일본어를 잘 하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마침 여자 사장님이 나오셔서 “대화가 들리길래 당연히 내가 일행인 줄 알았다”며 또 놀란 눈이 되고…. 서울의 헌책방에 가 본 적이 있지만 글자를 모르니 전혀 즐겁지 않더라며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밝은 분이다. 바로 그 심정이라고 내가 맞장구를 쳤다. 안쪽에서 눈 비비고 나온 남자 사장님도 대화에 끼어들었고, 세 사람은 ‘한국어 공부 조금 하다가 어려워서 포기했는데 핑계였군. 분발해야지’ 하며 나를 추켜세웠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디자인 작업을 한다는 여자 사장님은 손님과 함께 회의를 하러 자리를 옮겼고, 나는 일러스트 작업을 주로 한다는 남자 사장님과 책방에서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환대가 있는 책방

 

여행의 목적이 일본어 쓰기밖에 없다는 말에 책임감을 느끼셨는지, 수줍음이 많아 보이는데도 열심히 대화를 이어가 주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먼저 부산 여행 사진을 뒤져서 보여 주셨는데 역시나 내용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감천문화마을, 해운대 용궁사, 신창 토스트!) 어떤 일러스트를 하는 지도 보여주셨는데 캐릭터, 로고, 광고 일러스트 등 다양한 작업물이 가득했다. 학창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은 작업실 겸 갤러리를 꾸려 오다가 한 켠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헌책방을 시작했다. 곤충표본이나 돌멩이 같은 것도 어릴 때부터 수집하고 만들어 온 것들이라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며 다자이 오사무의 오래된 책 한 권을 들고나왔다. 종이 위에 ‘신주(心中)’라고 쓰고 뜻을 설명해 주었다. 몇 안 되는 아는 한자 두 개라서 반가워했더니, 뜻은 전혀 예상 밖으로 ‘연인과 동반자살’을 뜻했다. 다자이 오사무가 몇 번의 ‘신주’ 시도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펼쳐서 보여주었는데 책 제목과 구절은 잊어버렸다! 사진이라도 찍어 둘 걸 후회가 된다. (『츠가루』나 『사양』 중 하나일 것 같은데) ‘살아 있음’에 대한 희망 같은 것으로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몇 번의 죽을 결심과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후 쓰여진 한 문장이라 더욱 무게가 느껴진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일본어 쓰는 데 심취해서 중요한 정보를 놓치고 말았다.)

 

▲ 루모 북스앤웍스(Lumo Books and Works) 사장님들이 직접 만든 책과 굿즈. (촬영: 이내)

 

집중력을 잃을 정도로 외국어 대화를 길게 이어갔으니 선물을 꺼낼 타이밍이다. 3집 앨범을 내밀며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를 번역해 부른 노래가 있다고 했더니, 서가에서 미야자와 겐지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을 꺼내 보여 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판화로 된 그림책 한 권과 사진과 지도와 도표 등으로 작가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담긴 책을 사기로 했다. 책방 입구에 사장님이 디자인한 오리지널 책 포장지가 있길래, 한국에 가져갈 선물로 딱이다 싶어 왕창 집어 들었다. 또, 유일하게 로고를 아는 미시마 출판사의 책이 한 권 보여서 챙겨서 카운터로 갔다. 사장님은 할인까지 해 주면서 책방에서 만든 독립출판물과 자신이 디자인한 어느 축구팀의 캐릭터 인형을 선물로 내밀었다.

 

대화만으로 이미 넘치는 선물을 받았는데, 너무 고마워서 (마음으로) 팔짝팔짝 뛰었다. 바로 가방에 매달아서 지금도 여행의 기억을 지니고 다니는 중이다. 다음에는 부산에서 만나자고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나오며 ‘역시 여행은 책방 여행이지’ 콧노래를 불렀다. 책방은 언제나 환대가 있는 곳이니까.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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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25 [15:38] 수정 | 삭제
  • 여행 가면 언어도 잘 못 하면서도 책방이나 도서관에는 꼭 한번씩 들르는 사람이라 공감했어요, 그리고 꼭 책을 좋아해서 아니라 어떤 이유가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게 되네요.
  • 독자 2023/09/23 [20:41] 수정 | 삭제
  • 저도 해외여행 가거나, 우리나라로 여행오는 외국인들 만날 땐 작은 선물을 준비해요. 스쳐지나가듯 만나지만 친절하게 대해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비용 부담이 별로 없으면서 기념이 될만한 걸로 나전책갈피가 좋더라고요~ 직접 만든 걸로 선물하는 분들 보면 부럽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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