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돌봄 시스템의 모든 틈을 메우는 이름, ‘보호자’

‘받고 싶고 하고 싶은 좋은 노년 돌봄’을 고민하다⑥

전희경 | 기사입력 2023/10/16 [18:12]

의료‧돌봄 시스템의 모든 틈을 메우는 이름, ‘보호자’

‘받고 싶고 하고 싶은 좋은 노년 돌봄’을 고민하다⑥

전희경 | 입력 : 2023/10/16 [18:12]

※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okeesalon.org)은 모든 나이듦이 존엄한 사회, 다양한 나이대가 호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 연구소입니다. 지난 3년간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노인요양시설 안팎의 돌봄에 대해 고민해온 바를 시민들과 나누려 합니다. 이를 통해 ‘정의로운 돌봄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페미니스트 사유 지평을 넓히며, 변화의 지향점을 좀 더 구체화해나갈 수 있는 토론의 장이 열리길 기대합니다.

 

노년을 돌봐야 하는 책임은 누구의 몫?

 

이제, 그간 옥희살롱이 연재해왔던 ‘요양시설’ 둘레의 노년돌봄과 돌봄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일단락하고, ‘보호자’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해야 할 시점이다. 여러 날 동안,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망설이느라 새벽까지 뒤척였다. ‘보호자’라는 단어 앞에서 즉각적으로 밀려드는 기억과 감정의 덩어리에 멍해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거라 되뇌며, 뒤죽박죽인 책장과 방바닥에 널브러진 문서 더미 사이에서 여러 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 선 문장.

 

[나는 현기증 나는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아버지에 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 모두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분의 간병인이십니까?’ 그럼 나는 매번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딸입니다.’ (...) 간병인 carer, 또 이 말이다. 갈수록 사람들이 나에게 이 이름표를 붙이려 하는데 나는 여전히 이렇게 불리는 게 이상했다. 간병인이라고 하면 청색 가운을 입고 고무장갑을 끼고 침대 시트를 교체하는 사람이 연상됐다. 한없는 인내와 에너지와 사랑을 품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

 

조현병을 앓는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는 영국 작가 샘 밀스의 책 『돌보는 사람들 - 버지니아 울프, 젤다 피츠제럴드 그리고 나의 아버지』(정은문고, 2022)의 첫 장(章)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분명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무언가 낯설게 느껴져 멈추었다. “그분의 간병인이십니까?” “아니요, 저는 딸입니다.” ― 특히 이 대목. 한국 사회에서, 이런 문답이 흔할까?

 

무엇보다 “그분의 간병인이십니까?”라는 질문이 특이했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이 필요한 노년 곁에 머물며 다급하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주로 듣게 되는 건 ‘보호자냐’는 질문이지, ‘간병인이냐’는 질문이 아니다. ‘간병인’이라고 대답해도 ‘그럼 보호자는 어디 있냐’고 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년을 돌봐야 하는 건 가족이니까.

 

보호자라는 단어의 모호성

 

한국 사회에서 ‘보호자’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막상 ‘그래서 보호자가 정확히 뭐냐’고 물으면 거의 대답할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다른 언어로 번역되기 어려운 단어. 그 위치와 경험이 너무나 다양한 나머지, ‘공통의 경험’을 중심으로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이 막막해져버리기도 한다. 서류(가족관계증명서)에만 있을 뿐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보호자도 있고, 모든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오직 서류에만 없는 보호자도 있다. 어떨 때는 ‘돈 내는 사람’이 보호자고, 또 어떨 때는 찌개를 끓이고 밥을 차리는 사람이 보호자고, 또 다른 날에는 병원 의료진이나 원무과에서 ‘연락할 사람’이 보호자다.

 

민법상 가족이(가족만) ‘보호자’여야 하는가? 한국의 가족규범 속에서 누가 어떤 순서로 ‘보호자’로 호출되는가? 그를 부르는 말이 ‘보호자’라는 이름이어야 하는가? ‘보호자’라는 자리는 사라져야 하는가, 지켜져야 하는가? ‘보호자’라는 개념의 모호성만큼이나, 고민해야 할 질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애초에, 이 개념의 모호성 자체가 적극적으로 조장되어 온 사회적 부정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의료와 돌봄의 단계마다 호출되는 그 이름

 

‘돌봄은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지도 20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갑작스런 돌봄 필요가 생겼을 때 호출되는 것은 가족이다. 이 호출 앞에서 계급이 뚜렷하게 작용한다.

 

‘가족이 아니면 누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십수 년이 흐르는 동안, 노년돌봄은 민간/시장에 맡겨져 왔다.(‘공공 요양시설 1%대’라는 숫자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가족이 못하니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적응했다. 간병보험 시장은 날로 팽창하여, 최근 보험업계는 무려 간병보험 시장의 ‘과열’을 걱정(?)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다른 한켠에서는, ‘가족이 못하니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시민들이 ‘돈으로 못하니 가족이 해결’해야 하는 상황 속에 남겨졌다.

 

▲ 의사나 간호사가 찾을 때 항상 대답해야 하는 사람, 병원이 해주지 않는 것들을 해내야 하는 사람, 환자의 치료와 회복의 단계마다 많은 것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사람, 의료전달체계의 빈 곳과 돌봄 시스템의 모든 공백을 ‘알아서’ 메꾸며 필요한 일들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보호자’다. (이미지: pixabay)


그렇다면 ‘가족이 해결해야 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한국의 노년돌봄 현실이 처해 있는 괴로운 상황을 분석할 때 반드시 거론되어야 하는 것이 의료와 돌봄 시스템의 분절성이다. 의료전달체계가 분절되어 있어서 환자가 치료와 회복의 단계마다 많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적정의료를 위해 필수적인 간호 인력조차 필요보다 훨씬 적게 고용하는 관행은, 땀을 닦아주고 소변량을 체크할 누군가를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오랫동안 의료에서 돌봄을 배제하고 비가시해왔던 탓에, 간병인부터 앰뷸런스 이동까지 환자에게 필요한 많은 일들을 ‘누군가 알아서’ 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보호자’다.

 

병원에서 해주지 않는 모든 것을 수행해야 하는 자리, 의사나 간호사가 찾을 때 항상 대답해야 하는 자리, 급성기 치료가 끝난 이후 ‘퇴원하라’는 말을 듣고 난 다음,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하고 실행해야 하는 자리. 간단히 말해, 듬성듬성하게 짜여지고 각자 분절되어 굴러가는 의료/돌봄 시스템의 모든 틈을 메울 것으로 기대되는 이름이 ‘보호자’다.

 

이런 점에서 ‘보호자’라는 이름이 지닌 모호성은 불평등한 시스템이 조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모호성이 해명되지 않은 채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것은 ‘보호자’ 노릇의 하중과 고통을 여성들에게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도 보상도 조력도 없이 주로 여성들이 언제나 해왔던 일. 막상 닥치면 좋건 싫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지금 이 순간에도 덜컹이는 제도의 틈새에 몸과 마음을 욱여넣으며 취약한 이의 하루를 함께 버티고 있는 보호자들이 있다.

 

‘느닷없는 예외상황’에서 재등장하는 가족규범

 

노년돌봄의 현장에서, ‘보호자’는 선택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닥치는 일이고, 뛰어드는 일이라기보다는 호출되어 불려 나가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돌봄노동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예기치 않게 보호자가 된다. 그래서 보호자들의 이야기는 대개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시작된다. 엉망이 되어버린 일상, 중단되어 버린 계획, 끝을 알 수 없고 알고자 해서도 안 되는 미래의 불확실성... 닥치기 전에는 생각하지 않고, 닥친 후에는 생각을 공유할 여력이 없는 일이 바로 ‘보호자’가 되는 일이다.

 

인간의 취약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도, 초고령사회 진입이 코앞에 닥쳤다는 지난 수년간의 경고에도, 여전히 노년돌봄은 우리에게 ‘느닷없는 예외상황’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닥쳤다는 바로 이러한 예외성은, 그간 많이 사라졌다고 생각해왔던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규범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요양원에서의 연락은) 며느리한테 좀 많이 가요. 주 보호자한테 많이 정보가 가고요. 걔를 통해서 또 나한테 오기도 하고 저는 또 별도로 받기도 하고 하여튼 그랬었어요. (...) 엄마는 그냥, 음. 큰아들이 좀 책임지는 거죠.” - 60대 여성 보호자 (며느리로서 시부모 돌봄, 딸로서 부모돌봄)

 

(막내인데 집에서 모시는 것에 대해) 다들 그걸 궁금해하지만 저는 저희 어머니가 제가 계속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아이를 봐주셨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온다고 말씀드렸을 때 시부모님께는 그냥 죄송하다고 정도 했고. 그랬더니, ‘아니다, 뭐 이미 결정한 거니까’ 별 거기에 대해서 토다시거나 다른 얘기 안 하셨을 거고. 죄송할 일도 아니고 사실은.” -40대 여성 보호자 (딸로서 어머니 돌봄)

 

“(시아버지가) 요양원에 가시게 된 게, 저희 아버님이 이제 새벽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시잖아요. 아버님을 부축하고 이러다가 어머니랑 같이 나뒹굴게 되신 거예요. 그러다가 막 어디 부딪혀서 피부가 찢어지거나 이러면서 어머니가 ‘도저히 안 되겠다. 나 혼자는 안 된다. 이러다가 다치고, 나도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아들들한테, '아버지를 어디든지 모셔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처음에 아들들이 다 반대했어요. 아들들은 그렇잖아요. ‘엄마가 있는데 왜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야 되냐’ 이렇게 나오죠. (...)

큰형님은 외국에 계시고, 둘째는 뭐 학원을 하느라 바쁘고 저는 이제 프리랜서인 거예요, 일이. 그러다 보니까 뭔가 일이 생기면 이제 제가 호출이 되는 거예요. 호출이 되지 않더라도 제가 가야 될 것 같고, 그리고 어머님이 혼자서 뭘 하실 수가 없기 때문에 일단 어머니가 가시면 제가 같이 가거나 최근에는 어머니는 안 가시고 저하고 저희 아들이 간다든지. (...) 근데 어떤 결정을 할 때 사실 제가 결정을 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결정을 하시거나 배우자니까, 또는 아들인 남편이 결정을 해야 돼요. 그니까 저는 항상 가긴 가는데 뭐 결정권도 없고 하여튼 그런 상황인 거죠. (…) 깍두기에요 저는. 깍두기.” -50대 여성 보호자 (막내며느리로서 시아버지 돌봄)

 

‘어머니는 큰아들 책임’,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시어머니께 죄송한 일’, ‘어머니가 있는데 아버지가 왜 요양원에 가냐’, ‘며느리는 언제나 움직여야 하지만 결정권은 없는 존재’... 너무 고루해서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가족 규범이, 그 어느 곳에서보다 노년돌봄 상황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다. 호주제가 폐지된 지 20년인데, 이 고색창연한 가족 규범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다시 등장한 것인지.

 

내게 닥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동안, 회피가 아니라 ‘준비’해야 할 미래라고 여기지 않는 동안, 누가 누구와 함께 어떻게 노년을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새로운 규범이 모색되고 훈련되지 않았을 때, 하지만 누구든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갑자기 닥쳤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존의 규범에 다시 기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 듣기 어려운 이야기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2022년 초,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노인요양시설 안팎의 돌봄’에 주목하는 1년차 연구인 요양보호사 연구를 딛고 2년차 연구로 ‘보호자’들을 만나려 했을 때, 인터뷰를 해 줄 보호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요양보호사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노년의 가족을 돌보고 있는 보호자를 만나는 것이 조금은 더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할 말 많은 보호자들이 금방 나타날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인터뷰이를 소개받기가 어려웠다. 신뢰를 쌓은 요양시설 관계자를 통해 보호자를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노년시민들이 요양시설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과 연결되어있는 ‘보호자’를 만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이것부터가 연구주제였다.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돌보다가 요양시설에 보낸 이들은 ‘이제는’ 할 얘기가 별로 없다고 했다. 인터넷 공지글을 보고 인터뷰에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해온 이들은 ‘요양시설에 계신 건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상과 달리 인터뷰이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요양시설에 있는 노년’을 돌보는 가족돌봄자를 만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잘 돌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에서, 보호자는 ‘이미 비난받는’ 자리다. 게다가 ‘끝까지 모시지 못하고 요양시설에 모셨다니?’ 직접 들은 적이 없는데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앞선 연재에서 다루었듯, 지금 한국 사회에서 요양시설은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최종 도착지, ‘포기’의 결과, 어떤 인식론적 한계선 같은 것이다. “‘더이상 ~~이 불가능해져서 결국 입소’하게 되는 곳”(기사 인용: ⌜시도: 요양시설과 집의 이분법을 질문하기」 https://ildaro.com/9672) 이미 요양시설에 가셨다면, 보호자로서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을 찾을 수 없고, 할 수 있는 말은 안 해도 되고, 할 수 없는 말은 끝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보호자의 경험을 ‘토론’의 대상으로 삼기

 

“보호자라는 말에 대한 반성적 접근 환영합니다. 돌보는 자의 곤란함을 말하는 토론회라 너무 반가웠습니다. 바닥을 치는 찌질함을 다루지 않고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을 말하게 된다든가 회피하고 싶은 욕망을 합리화하는 논의가 아니라서 좋았습니다.” -2022년 옥희살롱 토론회 ⌜'보호자'라는 질문 : 집, 병원, 요양시설 사이의 노년돌봄을 생각한다」 참여자 소감 중에서.

 

작년 이맘때쯤 ‘보호자’ 연구 발표를 듣고 한 참여자가 남긴 소감은,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이나 ‘회피의 합리화’ 같은 위험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호자 논의는 선명해지려는 순간 납작해지기 쉽다. 그러나 “저 할 말 많아요.”라고 말하는 보호자의 긴 이야기에서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가 있다. “저 할 말 없어요.” 라고 말했던 보호자들 또한 바로 그 거절을 통해 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 같은 익숙한 언설의 등에 업혀 모른 척 심연을 건너뛰지 않고, 그 깊은 틈에 가까이 다가가 보고자 하는 용기와 방법이 필요하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인용한 샘 밀스의 대답으로 돌아가 본다. “그분의 간병인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아니요, 저는 딸입니다.”라는 저자의 대답. 분명 조현병을 앓는 아버지를 거의 전적으로 돌보고 있는 상황인데도, 저자가 ‘케어러(carer)가 아니라 딸’ 이라고 의식적으로 대답하게 되는 맥락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없는 인내와 에너지와 사랑을 품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없음, 그렇지만 바로 그러한 역할을 기대받고 있다는 분명한 실감, 그 역할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딸’이기 때문이라는 무언의 호소, 그러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 보호자의 고통 속에 있는 이런 복잡한 뉘앙스들을 조심스레 만져본다. 여기에는 분명, 해석되어야 할 두께와 질감이 있다.

 

또한, 전통적 가족규범이 재등장하는 한국사회의 노년가족돌봄 맥락에서 그 뉘앙스는 어떻게 다를지 생각해본다. “아니요, 저는 딸입니다.”라는 말은, ‘보호자라서 힘들겠네’ 하고 잠시 안타까워한 후 넘어가면 되는 말이 아니라, 함께 분석해야 할 말, 정확히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토론을 시작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

 

[필자 소개] 전희경.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공저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2020)와 『코로나시대의 페미니즘』(2020), 『페미니스트 모먼트』(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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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3/10/23 [10:51] 수정 | 삭제
  • 와, 정말 꼭 필요한 이야기들을 이렇게 담아내고 계시네요. 옥희살롱 선생님들 정말 존경합니다. 언제 정말 만나뵙고 배우고 싶어요
  • 캔디 2023/10/22 [14:56] 수정 | 삭제
  • 어느날 느닷없이 보호자가 되었었지요. 큰아이 18개월,둘째는 임신 3개월 입덧을 할 때 시어머니가 갑자기 뇌종양수술을 받아 큰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한달가까이 중환자실 대기실을 지키고 있었지요. 남편은 돈 벌어야 되고 남편은 동생은 몸이 아프고,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큰애를 아이 몰래 친정에 두고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 seung 2023/10/17 [11:03] 수정 | 삭제
  • 돈이 없으니 가족이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에 울컥했네요. 병원에서는 무조건 보호자가 상주해야 한다고 해서 보호자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싶었지만 결국은 누군가가 하게 되어있고 그 누군가는 대부분 여자들... 어쩌다 남자배우자가 지키고 있으면 훌륭하다, 부럽다 눈길을 받죠. 갑자기 효성이나 모성이나 인간성을 테스트받는 그 자리가 보호자의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의료 분절 시스템 때문이라고 짚어주니 뭔가 후련한 느낌도 드네요.
  • 지르코니아 2023/10/16 [20:29] 수정 | 삭제
  • "딸이세요?" "아니오, 저는 간병인입니다." "보호자는요?" 한국 병원에서라면 순서가 이렇게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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