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나는 도넛으로 나를 표현하는 거야” 도넛교 창시자를 만나 도넛교에 입문하다
일본에서 가장 작은 빵집은 문 여는 시간이 좀 늦어서, 오노미치 상점가에 있는 맛있는 빵집에서 아침 요기거리를 좀 샀다. 하나면 충분한데, 배고플 때 음식을 고르면 늘 그렇듯 세 개나 골랐다. 숙소에서 녹차 한 잔을 우려 빵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남은 빵은 간식거리로 가방에 잘 넣어 두었다.
이날 계획은 자전거로 섬 건너기. 자전거 대여점이 문을 열 때까지 전날 걸었던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육교와 바로 연결된 마을의 입구를 조금 지나면 절이 나온다. 밤도 좋았지만 아침의 골목 역시 또 다른 매력으로 빛난다.
오노미치 하면 절과 고양이가 많은 동네로도 유명한 모양이다. 좁은 골목 코너를 돌 때마다 마을 홍보대사라도 되는 듯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된 골목, 오래된 집들이 부산의 우리 동네를 떠올리게도 했지만, 목조 건물과 디테일이 남다른 장식, 예쁜 조경을 구경하며 걸으니 ‘The 일본’이로구나 감탄하게 된다. 산책이 너무 즐거워서 자전거 여행 포기 선언의 직전까지 갔다.
물건을 챙기러 잠깐 숙소에 들른 게스트하우스 주인 히로와 마주쳤다. 어제 우유 씨네 집 파티에 초대해 준 거 너무 고맙다고, 너무 즐거웠다고 인사를 하니, 내가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던 영상을 에어드롭으로 전송해 준다. 그 꿈같았던 시간의 영상 기록이 남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관련 기사: 도시재생 마을에서 ‘어쩌다 보니 글로벌한 파티’ https://ildaro.com/9738)
히로짱의 인스타에 도넛 사진이 많이 있어서 궁금하던 차에 이유를 물었다가, 엄청난 대답을 들어버렸다. 히로는 올해 초부터 갑자기 도넛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창 연구 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가오픈 느낌으로 판매도 하고 있는데, 내년에는 정식으로 가게를 열 거라고도 했다.
“네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나도 도넛으로 나를 표현하는 거야.”
엥?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더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젊은 시절 독일에서 DJ를 했다는 히로짱은 선반에서 작은 LP판을 꺼내 보여주며 그걸 ‘도넛판’이라고 부르고, 그때 공연하던 라이브 바의 이름도 ‘도넛’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올린 추억과 도넛의 모양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공동체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아가 도넛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우주를 상징하고 있다는 영감으로 결국, 직접 도넛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연!
도넛을 닮은 공동체를 상상하며
사실 처음에는 그저 좀 특이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네 싶어 장난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도넛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진지한 눈빛으로 말할 때는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나 한편, 인간이 혈연이나 애정으로 묶이지 않고도 서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를 이어갈 수 있는 존재인 것 같지는 않았다. 또,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는 강경한 규칙과 시스템 혹은 리더 없이는 유지되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내가 가장 못 견디는 게 바로 그런 강렬한 ‘힘’들이다.
그래서 나름의 결론으로 나의 공동체를 ‘파도’의 이미지로 정했다. 인력과 바람이 이어 준 어느 순간의 피어남,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역할을 다하면 다시 흩어진다. 내 안에서 다양한 조합의 공동체는 흩어졌다 모이고 흩어졌다 모이는 파도의 반복을 이어간다.
반면, 히로의 공동체는 도넛처럼 이어져 있다. 아주 동그랗고 단단한 듯 말랑말랑하다. 가운데가 비어 있다는 건 카리스마형 리더나 단단한 중심 없이도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심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비어있는 건 아니란다. 중력, 인력 등 온갖 에너지의 영향 아래 있는 우주의 존재들은 서로 작용-반작용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도넛 속 빈 공간은 그런 에너지들이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장소다. 가치도 의미도 리더도 정체되거나 굳어버리지 않으려면 늘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파도는 형태가 없지만, 도넛은 형태가 있다. 내가 그려온 공동체는 멈춘 적이 없는데도 돌아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다는 허무함이 남곤 했다. 그래서 히로의 도넛 공동체론에 눈물이 나려고 했나 보다. 상징만으로 현실이 굴러가지는 않을 테니 우리의 대화는 그저 이상주의자들의 막연한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엄청난 사랑과 헌신으로 크고 작은 인간의 무리가 굴러가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슬쩍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이 마을 공동체의 면면을 알 도리는 없다. 다만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곱게 접어서 챙겨두었다.
다음 날 히로는 계획에 없던 도넛을 부랴부랴 만들었다. 내가 떠나기 전에 맛볼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거라고 맘대로 믿고 기뻐했다. 트레이 위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해서 가장 동그란 형태를 골랐다. 보통은 모양도 맛도 별로 따지지 않아서 가장 못생긴 걸 고르는 성격인데, 히로의 도넛론을 따라 가장 반듯한 동그라미를 골랐더니 “바로 그거야!” 하며 칭찬해 주었다. 폭신하고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찼다.
둘이 나란히 앉아 도넛교 창시자와 도넛교 입문자의 만담을 하고 있으니, 앞에 앉은 도이(다음 편에 등장할 예정)가 “와, 나 이 방송 계속 보고 싶어!”라고 말했다. 일본어로 농담도 주고받는 내가 자랑스러워서 자꾸 실실 웃음이 났다.
떠나던 날, 히로가 인사하며 건넨 말도 잘 챙겨두었다. “오노미치는 여행도 좋지만 살기에 더욱 좋은 곳이지!” 타마가 알려준 히로의 별명인 “여행자 호이호이(누군가를 부르는 모양)”다운 인사말이었다.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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