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전쟁 중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고 있다. 언론은 교묘하게 전쟁의 편을 들고, 무기를 파는 국가는 그 신문지로 은밀한 미소를 감춘다. 학살과 폭격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이어진다. 난민 캠프, 학교, 병원이 무너졌고 사람들의 일상 역시 완전히 무너졌다. 전쟁은 잔인하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명제는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가끔은 그 ‘잔인함’이 추상으로 다가와, 보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목전의 이익에 밀리기도 한다. 그 이익은 때때로 종교, 이념의 탈을 쓰고 나타나 폭탄을 던진다.
얼마 전 열렸던 서울동물영화제의 개막작 〈니카를 찾아서〉(스타니슬라프 카프랄로프 감독, 2023)는 잔인하다는 추상을 헤집는 다큐멘터리다. 우크라이나에서 피난 중이던 감독의 가족은 폭격 소리에 놀라 뛰쳐나간 반려견 ‘니카’를 놓치고 만다. 감독은 니카를 다시 찾기 위해 전쟁이 휩쓸고 간 지역으로 돌아오고, 거기서 감독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피난민들이 집에 두고 오거나 차 트렁크에 두고 온 반려묘를 구조하는 사람, 폭격을 받으며 떠돌이가 된 생명들을 돌보는 사람, 동물원에 남겨진 야생 동물을 구조하는 사람, 그 생명들을 위해 폭격 와중에도 남아 치료를 하는 수의사 등을 만난다. 인간이 만든 전쟁이 다른 동물들까지 죽이고 있었다. 수많은 말들이 죽었고, 고양이가 죽었다.
러시아군은 동물보호센터도 공격을 했다. 무수히 많은 총알 자국와 폭탄의 흔적이 센터 곳곳에 선명히 보였다. 술 취한 러시아군이 타조 농장에 들어와 게임처럼 타조를 쏴 죽이기도 했다. 타조와 삶을 함께했던 인터뷰어가 눈물을 머금으며 말했다. “전쟁 상황에 어떻게 동물권을 말하나요?” 나도 학살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타조가 러시아를 공격했습니까?
관능적인 미사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는 이렇게 전쟁을 하는 사람들의 비논리적 사고를 극대화하여 블랙코미디로 표현한다.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첫 번째 공간은 미국 공군의 리퍼 장군과 그의 부관인 영국 공군의 맨드레이크의 장소다. 리퍼 장군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물에 불소를 넣어 미국인들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오염시키려 한다는 망상에 빠져 핵폭격기를 소련으로 출격시킨다. 맨드레이크는 이를 되돌리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한다. 두 번째 공간은 전투기 안이다. 전투기 안의 공군들은 출격 명령을 받고 당황해 재차 확인하지만, 진짜 출격 명령임을 확인하고 공격에 돌입한다. 세 번째 공간은 미국 대통령과 고위 간부들이 모인 전쟁 상황실이다. 소련 대사까지 함께하는 전쟁 상황실에서 대통령은 공격을 취소하려하지만 리퍼 장군과 연결이 되지 않고, 핵폭격기가 소련에 닿을 시 소련의 핵무기 ‘멸망의 날’이 자동 발발되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소련 대사의 말을 듣는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는 풍자의 날을 세운다. 느리고 나른한 음악과 함께 전투기, 미사일 등이 등장한다. 전투기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 시퀀스에서 전투기는 위력과 잔인함 대신 우아함과 평화를 뽐낸다. 전투기끼리의 교착 장면은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이 씬 안의 전투기와 전쟁은 폭격, 폭력, 폭발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관능, 매혹, 우아함이 걸맞는다. 이 말도 안 되는 연출을 통해 스탠리 큐브릭은 전쟁을 추진하는 자들의 머릿속을 극대화하여 표현한다. 또한 관객에게 이러한 묘사가 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언제든 누구든 쉽게 전쟁에 매혹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2007)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폭력을 연출했다. 폭력적인 씬을 매혹적으로 연출하고, 때로는 과한 폭력을 정의로 포장하기도 한다. 폭력에 매혹된 사회를 비난함과 동시에 인류가 얼마나 폭력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지 지적하며 그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이 섹시한 오프닝 시퀀스는 엔딩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영화의 마지막은 핵폭발 장면들의 교차편집이다. 역시 나른하고 근사한 음악 〈We’ll Meet Again〉과 함께 나오는 연이은 폭발은 멸망이 아름답고 우아해 보이는 착시를 일게 한다. 이 착시에 속고 있는 사람들이 전쟁을 만드는 걸까. 그들은 멸망을 바라는 걸까. 그리고 뻔뻔하게 “We’ll Meet Again”(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걸까.
영상과 상반된 음악이 주는 감흥은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200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폭력을 보여주는 영상, 그리고 9.11 테러 영상 위로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흐른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노래와 강대국의 폭력을 담은 영상이 나란히 재생될 때 음악은 반어가 되며 영상은 진상의 보고가 된다. 더 이상 원더풀하지도, 다시 만날 수도 없는 세상을 인간이 만들고 있다.
카우보이의 정의
리퍼 장군의 지시를 받고 소련으로 향하는 전투기에는 공군들이 타 있다. 진짜 출격 명령임을 확인한 한 공군은 카우보이모자를 꺼내 쓴다. 카우보이모자에서 연상이 되는 이미지는 유색인종을 처단하는 서부극 속 미국 백인들이다. 서부극은 유색인종을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의 상징으로 소비했고, 그에 반하는 이성적이고 문명화된 백인 남성들의 학살은 정의로 포장했다. 초기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장르이지만 그 오류 또한 분명했다. 큐브릭은 이 그릇된 상징을 비꼰다. 공산주의 국가를 폭격하러 가는 백인 공군에게 카우보이모자를 씌움으로써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얼마나 한정적인지 보여준다.
탁상공론, 전체주의, 성차별주의가 만나면
전쟁 상황실의 상황 또한 우스꽝스럽다. 대통령과 고위 간부들의 대화는 답답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이 곧 죽어갈 텐데 정작 이들의 대화는 조금도 진척이 되지 않는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중년 백인 남성들의 무능력함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상황에 놓였다. 이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둔 허구는 분노의 데자뷰다.
전쟁을 앞둔 정치인들은 민간인을 도구, 수단으로 취급한다. 하나하나의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고 뭉뚱그린 수치로만 바라보는 이 방식은 성차별적 사회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과 흡사하다. 이 영화 속에서 여성이 그려지는 방법 또한 그러하다. 여성은 단 한 번 등장하는데, 고위 간부의 비서이자 전쟁을 앞두고도 같이 있기를 원하는 소위 ‘골 빈 내연녀’로 그려진다. 그들의 시각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개별 존재가 아닌 사유재산처럼 여겨지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 학살은 감내해야 한다는 잔인한 결론에 쉽게 다다르게 된다. 민간인도 같은 인간임을 망각한 채 대화는 진전 없이 흘러가고 멸망이 코앞이다. 마침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등장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나치주의자였던 천재 과학자다. 그의 팔은 기계로 되어있는데 제멋대로 움직여 자신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인류의 멸망을 앞두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대통령에게 제안을 한다. 광산 갱도에 들어가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곳에는 엘리트층만 뽑아 들어가야 하며, 인구 확충을 위해 남자 1명 당 여자 10명이 배정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류의 멸망 앞에서도 전체주의와 성차별주의는 끝이 없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인 중년 남성들은 진지하게 끄덕인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말하면서 점점 흥분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팔은 더 제멋대로 움직이고, 휠체어에 앉아있던 박사는 마침내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외친다. “총통 각하, 이제 내가 걸을 수 있다니!” 제멋대로 움직이던 팔이 마침내 나치식 경례를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멸망의 엔딩이다.
나치즘과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이 캐릭터의 설정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휠체어를 타고 온 박사의 한쪽 팔은 기계로 되어있다. 기계화되어가는 인간, 그리고 전쟁에 물들어가는 인간을 은유하기 위한 설정이었겠으나 이는 장애인에 대한 혐오로 초점을 잃게 한다. 의수를 사용하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기계화로 일축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다. 전체주의의 부활을 암시하며 박사가 일어나는 장면 또한 장애가 치료되는 것처럼 묘사되어 불쾌함을 남긴다.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
이 영화 속에서 배우 피터 셀러스는 무려 세 역할을 홀로 연기했다. 반공주의 망상에 휩싸인 리퍼 장군을 저지하던 맨드레이크 장군, 역시 전쟁을 막으려 했지만 무능력하고 결국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수상한 제안에 솔깃하는 대통령,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까지 1인 3역을 소화했다. 전쟁을 이끄는 사람도, 무능력하게 갈피를 못 잡는 사람도, 끝까지 막으려 했던 사람도 다 같은 사람이었던 셈이다. ‘다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현실에서 자주 망각하게 되는 감각이다.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은 민간인을 ‘다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 또한 전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다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언제든 총을 들 수 있고 또 언제든 총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이다.
앞서 언급했던 〈니카를 찾아서〉에서도 그런 오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타조를 쏘는 사람도 인간이고, 끝까지 치료하는 사람도 인간이다. 타조를 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폭탄의 유혹을 경계해야 하고 학살의 잔혹함을 외면해선 안 된다. 영화의 원제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 또는 어떻게 내가 걱정을 떨치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폭탄을 사랑하지는 말자고 세상의 모든 걱정들과 함께 약속하고 싶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멈출 수 있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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