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당신은 욕망하기 때문에 나쁜 엄마입니다.”(제서민 챈 지음, 정해영 번역, 『좋은 엄마 학교 The School for good mothers』 439쪽)
영화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감독, 2011)에서 주인공 에바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갓난아이 케빈 때문에 힘들어하다, 거리의 공사장 근처에 유아차를 세워둔 채 가만히 서 있는다. 다른 사람이라면 귀를 막고 얼른 지나갔을 시끄럽고 육중한 기계소음은, 온통 신경을 긁는 아기 울음소리를 덮어주어 에바에게 잠시나마 해방과 휴식을 준다.
나는 그 장면을 보다가, 실제로 어떤 엄마가 공사장에서 그렇게 아이를 둔다면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생각했다. 아이의 안전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무책임한 엄마? 아이의 신체나 정서 발달에 해를 끼치는 위험한 엄마? 무엇보다, 아이보다 자신을 중요시하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나쁜’ 엄마라 여기지 않을까?
아빠가 집에 없어도 나와 동생에겐 늘 엄마가 있었다. 아빠가 누구와 무엇을 하던 그건 사회생활의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언젠가 엄마가 친구들과 만나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왔을 때, 우리 가족은 모두 놀라고 당황했고 아빠는 화를 냈다. 엄마의 행동은 아빠처럼 ‘사회생활’이 아니라 ‘일탈’로 여겨졌고, 자식과 가족에 대한 역할에 소홀하다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혼자만의 공간이나 시간을 원하면 안 되는 것 같다. 그녀는 2시간 반 동안 그것을 원했다가 아이를 잃었다.”(66쪽)
한동안 국내외의 SNS에는 “아빠에게 아이를 맡기면 안되는 이유”라는 밈 영상이 유행했다. 아이보다 철이 없거나 아이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는 아빠, 아이와 함께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엄마를 힘들게 만드는 아빠의 모습 등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이것은 단순히 유머로 끝나지 않고, “남성에게는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없다, 이래서 아이는 엄마가 봐야 한다”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남성은 육아에 서투르거나 돌봄 역할에 맞지 않고, 여성이 그에 더 우수할 거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남성에게서 육아에 대한 책임을 덜고, 여성에게는 모성애가 당연함을 강요하는 바탕이 된다.
양육 과정에서 엄마와 아빠의 역할과 책임, 기대에 대한 이중잣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육아에 동참하는 남성을 두고 “저 집은 아빠가 애를 참 잘 본다”고 특수한 일인 듯 칭찬하는 것이 기이하게 들린다. 엄마에게 “자기 애를 참 잘 보네요”라고 칭찬하는 경우는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주 양육자임이 당연하게 여겨지기에, 혼자 외출한 엄마들은 사람들로부터 “애는 누가 봐주냐”는 질문을 돌림노래처럼 듣곤 한다. 반면 아빠들은 그런 질문을 매번 받지 않는다.
한 모임에서 만난 여성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왠지 눈치가 보이고 잘못한 게 없는데도 죄책감이 건드려진다고 털어놓았다. 마치 엄마와 아이가 한 세트인 것처럼 보는 사회에서, 자신은 육아를 뒤로 하고 나온 이기적인 엄마가 된 기분이라는 것이다. 아이 아니면 나, 엄마들은 육아 기간 내내 이 양극단의 선택지 앞에서 갈등한다. 또는 둘 다 잘 해내야 한다는 요구와 강박에 질식한다.
“엄마에게는 언제나 인내심이 있다. 엄마는 언제나 친절하다. 엄마는 언제나 베푸는 사람이다. 엄마는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다. 엄마는 아이와 잔인한 세상 사이의 완충재다. 교사들은 말한다. 감내해라. 받아들여라. 받아들여라.”(178쪽)
주인공 프리다는 바람피운 남편과 이혼하고 18개월 된 딸 해리엇을 키우는 싱글맘이자, 대학에서 일하는 워킹맘이다. “모든 일이 지독하게 꼬인 그날” 프리다는 집에 아이를 혼자 두고 2시간 정도 외출했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당해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경찰과 사회복지사는 그를 조사하며 집이 불결하다는 점과 프리다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가 육아에 적합한 상태인지 의심한다. 가정점검을 나온 아동보호국에서는 집 곳곳을 뒤지고 방마다 카메라를 설치해 그 영상자료를 프리다의 양육권에 대한 평가 증거로 사용하겠다고 한다. 이제 프리다가 딸을 되찾으려면 모든 것이 ‘엄마다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다는 아이를 ‘방치 및 유기(프리다의 법정 죄목이다)’했던 순간, 커피를 사러 집에서 나와 홀로 차에 탔을 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자신의 삶을 망각하는 즐거움이었다.” 육아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며 불면증에 시달린 프리다는 일상에서 온전한 자유와 쉼을 갖기 어려웠다. 그러나 판사는 프리다의 아동학대가 딸에게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그 때문에 딸의 뇌가 다르게 발달할 수 있다고 비난했다.
“그녀의 마음은 아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었다.”(119쪽) “엄마는 결코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225쪽)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니어서 혹시 내 아이가 아프거나 불행해질까 봐, 프리다뿐 아니라 현실의 많은 엄마들 역시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진다. 아이의 상태는 곧 엄마로서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엄마의 역할과 책임은 더욱 강조된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아이들 교육이 집에서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보육기관마저 운영되지 않았을 때, 육아를 위해 휴직이나 퇴직한 여성의 수는 급증했다. 그래서 프리다의 이야기는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서늘한 현실로 다가온다.
‘좋은 학교 엄마’에 입소한 엄마들은 매일 인공지능 인형을 돌보고 달래는 법을 배운다. 인형은 엄마의 체온과 자세, 눈맞춤 횟수, 감정 상태를 계속 체크하며 엄마의 진정성과 사랑을 측정한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유아어(엄마와 아이가 온종일 쾌활한 고음으로 주고받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수업 첫날 프리다는 인형 앞에서 종일 가짜 미소를 짓느라 교육이 끝나고 얼굴 근육에 통증을 느낄 정도다. “인형들은 대화를 중단할 수 있지만, 여러분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학교의 감시와 통제, 비난 속에서 계속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욕구’를 지우라 요구받는 엄마들은 억압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거나 자살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 프리다는 딸 해리엇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체제에 순응하고, 잘못된 일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남편에게 상처받고 육아에 치였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사랑에 빠져 ‘정상가족’을 꾸리는 것을 상상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는다. 그런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한편, 가부장 사회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좋은 엄마 학교’에서 규율을 어긴 엄마들은 “저는 나르시시스트이고, 제 아이에게 위험한 존재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왜 ‘나르시시즘’일까. 엄마의 자기애는 ‘병증’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아가 ‘있’으면 욕망을 가진다. 욕망하는 엄마는 이기적이다. 커피를 마시고 싶고, 커리어를 보장받고 싶고, 성적 존재로서 살아가고 싶던 프리다는 두 시간 동안 아이보다 자신을 우선시했다. 그런 엄마는 아이에게 ‘위험’하므로, 엄마 역할에 결격사유로 충분하다.
“외로움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자녀와 사이좋은 엄마, 아이의 삶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엄마는 결코 외롭지 않다. 아이를 돌보는 것을 통해, 모든 필요가 충족되기 때문이다.”(305쪽)
프리다는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세상의 엄마들이 자아를 찾고, 욕망을 분출하고, 더 이상 참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곳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필자 소개] 달리.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며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에서 프로그램과 모임을 기획한다. 지역에서 여성들과 글을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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