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는 취직을 위해 고용주에게 보여주는 노동자의 구직 자기소개서이다. 이와 의미가 좀 다른 이력서로서, 청년 페미(feminist)+워커(worker)들이 같은 노동자의 위치에서 서로 “지금까지 해온 노동 이력”을 질문하고, 이야기하고, 소개하는 연재를 싣는다. 기록자와 인터뷰이는 모두 한국여성노동자회 청년여성 소모임 페미워커클럽 6기 노동기록팀이다. [편집자 주]
주로 ‘노동’은 나의 시간과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쏟는 ‘힘든 것’, 나의 ‘고생’과 ‘임금’이라는 가치를 교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노동은 ‘힘들지 않은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그 일 자체가 이미 보상이기 때문에 적절한 임금이나 휴식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긴다.
좋아하는 일을 밥벌이로 하고 있는 난정 씨를 만나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들어보려 한다.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소개 부탁드릴게요.
드라마 편집실에서 편집 보조로 일을 하고 있어요. 제가 출근해서 하는 일은 촬영이 진행되는 데이터를 받아서 순서에 맞게 편집을 하고, 가편집자와 메인 편집자가 편집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CG 작업이 필요한 것들을 체크해서 CG실에 촬영본을 보내거나, 색보정실에 색보정할 것을 보내고, 믹싱, 음악이 필요한 부분도 체크해서 소통하는 것 등등이에요.
-드라마 편집실에서 일을 구하게 된 과정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영상과 관련된 일을 어릴 때부터 하고 싶어서 영상과 입시를 준비하다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그냥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계약직으로 사무직을 하다가, 너무 미련이 남아서 다시 시험을 보고 학교에 다니게 됐어요.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가 알고 지내던 선배가 졸업할 시즌 즈음에 저한테 “일할 생각 없냐?”고 해서 들어가게 됐어요.
-다른 친구들은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거나 구직을 하고 있나요? 업계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코로나가 한창 심하던 시기에 오히려 일이 진짜 많았어요. 그래서 저도 최대한 빨리 일을 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코로나가 끝나고 제작이 줄어들어서 일자리가 많이 줄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일자리 구하느라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요. 편집실 같은 경우는 공고가 작년, 올해 딱 두 군데 떴어요. 그만큼 공고가 너무 적어요. 그리고 일이 안 구해지니까 일하는 곳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조금 더 버티자는 분위기가 강해진 것 같아요.
“여자들만 있는 것도 성차별…업계 구조 자체에 성차별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사무직 계약직으로 일할 때 느끼는 감정이랑, 지금 일터에서 느끼는 감정에 차이가 있을까요?
그때는 거쳐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일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내가 평생 할 일이라는 생각에 욕심나고 긴장하는 게 있어요. 계약직으로 사무직을 할 때는 내가 오래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제가 처음에 들어갔을 때 팀장님이랑 부장님이 여성분이셨는데, 두 분이 제가 일한 지 3개월이 채 되기 전에 그만두셨어요. 잘 모르겠지만 승진이 안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어요. 두 분이 그만두시고 원래는 주임이었던 남자분이 갑자기 팀장 자리로 가시고, 관리자 분들이 다 남자로 바뀌었어요. 사원은 전부 여자였고요. 그런 걸 보면서 ‘오래 다닐 곳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지금 일하는 쪽에선 여자라서 승진이 안 되는 환경은 아닐 것 같아요.
그런 환경은 아니에요. 하지만 여기는 대다수가 여자에요. 그래서 여노(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처음 수업을 들었을 때 인상 깊었던 게 ‘여자만 있는 것도 성차별’이라는 말이에요.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 연출은 남성의 비율이 높고, 그 외 스탭은 성비가 반반인데, 그 안에서 조명이나 촬영 같은 기술 스탭은 대부분 남자예요. 반면에 환경이 열악하고 박봉인 의상, 메이크업, 편집실 같은 곳의 스탭은 대부분 여자예요. 승진에 있어서 여자라 차별받는 건 없긴 하지만 업계 구조 자체에 성차별이 있다고 생각해요.
프리랜서가 이 업계에서는 흔해요. 그래서 한 작품할 때 “우리 지금 편집 보조 필요한데 너 아는 편집 보조 있니?” 하면서 구해요. 이렇게 한 작품을 할 때 프로젝트처럼 사람을 꾸리는 식이에요. 그래서 이직은 아니지만, 한 작품 하고 이 사람이 안 맞았다 싶으면 다음 작품은 다른 사람이랑 하고, 그런데 다른 일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사람이랑 하고 그러죠.(하하) 프로젝트 단위로 헤쳐모여 하니까 일반 회사의 이직 개념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리고 프로젝트에 따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바뀌기 때문에 잠깐 참으면 되니까 그동안은 불만이 있어도 버티는 것 같아요. 어차피 이 작품 끝나면 안 보니까.
-그러면 다들 계속 그렇게 일을 하나요? 다른 분야로 이직은 없나요?
3년 정도, 그쯤에 관두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연차가 되더라도 계속 보조라서 나가는 것 같아요. 보통은 몇 년 차 되면 다음 직급으로 올라가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제가 일하는 곳은 다른 곳보다 승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요. 그리고 오래 일했다고 해서 편집감독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인맥도 있어야 하고 연출 감독도 알아야 하고 누가 일을 넘겨줘야 해요. 그런 막막함 때문에 갑자기 퇴사를 하거나 이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쌓은 경력을 가지고 더 나은 조건으로 이직하나요?
편집실에서 만났던 분 중에는 과도한 업무가 싫고 규칙적으로 일하고 싶어서 마케팅 부서 쪽으로 취직을 하신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보통은 내부 조연출로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편집 보조 자체가 이 팀, 저 팀 조율하며 후반의 연출부처럼 일을 하기 때문에 업무가 비슷해서 내부 조연출 쪽으로 빠지는 분들이 꽤 많아요. 내부 조연출은 조감독이다 보니까 보조일 때보단 더 많이 받지만, 근무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만큼 업무를 과도하게 하는 건 똑같거든요. 그래서 이직을 한다 해도 더 나은 조건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쉬는 날은 어떻게 보내세요?
쉬는 날에는 연락을 안 받아요, 물론 일 연락이 오면 그때그때 바로 답을 하지만. 약속을 잘 안 잡게 되더라구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도 하고, 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조율하는 연락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까 연락하는 것 자체가 피곤해졌어요. 그래서 쉬는 날은 혼자 커피를 내려 먹기도 하고, 일하는 동안 밀렸던 집안일 가사노동을 하고 옥상에서 화분들 햇볕도 쬐고 하면서 편안함을 느껴요. 쉬는 날에는 그렇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요.
-쉬는 날은 정말 쉬는 데 집중하시네요. 그런데 한편으론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마음 편히 쉬지는 못할 것 같아요.
저는 원래 방해금지모드 같은 걸 잘 켜놔요. 잘 때도 전화 오는 거 싫어하고, 집에서도 일을 할 때도 연락을 잘 안 받는 편이었어요. 메인 편집 보조 하기 전에 서브 편집 보조 때 그냥 방해금지 모드를 켜놓고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터에서 전화가 오는 거예요. ‘뭐야?’ 하고 받았는데 카톡을 보라는 거예요. 카톡을 봤더니 일터에서 뭐 보내야 하는 게 있는데 저한테 가능한지 물어보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 연락을 늦게 봤다고 혼났어요. “연락하면 바로바로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 이후로는 언제든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시간의 주도권이 나한테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직장동료들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주변에 일하는 친구들은 “이 일 특성상 어쩔 수 없지, 해야지 뭐” 이런 반응이 많기는 해요. 저는 그게 사실 이해가 안 돼서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요. 정말 옛날부터 일하셨던 분들은 “예전엔 더 심했다”, “이 일 하면 어쩔 수 없지” 하면서 버티시고. 그리고 업계에 프리랜서 분들이 많잖아요. 프리랜서 계약으로 일을 하면 한 작품 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을 자기가 정할 수가 있으니까, ‘작품 하는 동안은 참아야지’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부당해도 견디는 게 있어요. 그래도 어쨌든 내 시간은 내가 챙겨야 돼요.
전에 친구가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상사가 이런 말을 했대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덜 권위적인데, 나를 못 버티면, 너는 이 업계에서 버틸 수가 없다. 너는 그만큼 편집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걸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일을 시작하고 그만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는데. 그 사람들이 들은 말이 다 똑같았어요. “그만큼 편집이 안 하고 싶은가 보지”, “못 버티면 못 하는 거지.” 근데 또 막상 나간 사람들 보면 편집 일을 정말로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나는 이런 곳에 더 이상 못 있겠다” 해서 나가시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만둔다고 하면, 근무 환경을 돌아보거나 하는 게 아니라 늘 “너의 마음이 부족한 거다”라는 식이에요.
-일을 하면서 힘든 부분들이 있는데 계속하게 되는 동력이 뭘까요?
어쨌든 힘든 시기를 겪고 나니까 전우애가 생겨요. 그리고 무엇보다 편집 일이 좋은 이유가 집중을 할 수 있어서예요. ‘아, 이거 언제 끝나지?’ 이런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지’ 하면 ‘이거 여기에 붙어야 하는데 이거 안 찍었나?’, ‘얘 얼굴이 나와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정말 오로지 그 일에만 집중해서 하는 게 즐거워요. 그리고 선배들이 각각 한 씬 한 씬 편집한 것들이 다 모였을 때 느낌이 달라지는 걸 보고 나니까 저도 언젠가는 ‘그 끝을 보고 싶다.’ 싶었어요. 저는 제가 친구들이랑 우스갯소리로 ‘사랑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좋기만 하면 그거 그냥 ‘좋아하는 거’야”, “미워함과 좋아함이 공존해야 ‘사랑’이고, 더 깊은 감정”이라고 정의를 내렸죠. 이 일이 저한테 그런 것 같아요. 싫은 점이 있는데, 내가 이 싫은 점을 어느 정도 눈 감아 주면서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성공한 여자 편집 감독이 되고 싶어요”
-편집일을 설명할 때 난정 씨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어요. 편집일이 어떤 점에서 좋았나요?
연출 감독과 미술팀, 촬영팀이 A를 표현하기 위해서 1부터 10까지 촬영을 했어요. 편집 감독이 하는 일은 의도에서 벗어난 것들을 쳐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드라마든 영화든 시간이 정해있잖아요. 편집 감독의 일은 한정된 시간 내에 의도에 맞게 잘라주고 재편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편집자는 배우의 연기를 제일 디테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연출 감독이 1차적으로 의도하고 그려내지만, 편집자는 촬영한 걸 재구성할 수 있거든요. 이 배우가 표현하는 게 어느 시점까지는 표현이 잘 되는데, 어느 시점에서 ‘끊긴다.’ 싶으면 다른 장면을 가져와서 그 사이에 끼워 넣고, 표현된 걸 유지되도록 만들 수도 있거든요. 편집도 좋아하고 연기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고, 그래서 이 일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싫은 여러 요소와 적성에 맞는 여러 요소가 맞아서.
-난정 씨가 편집일을 하면서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여기서 탑이 되는 거겠죠. 저도 성공한 여자 편집 감독이 되고 싶어요. 지금은 더 좋은 환경에서 대우받고 싶기보다는, ‘참고 버텨서 위로 올라가자’는 마음이 커요. 내가 견딜 수 있는 선에서. 어쨌든 쭉 올라간 다음에 나머지 것들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본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지 않는 것 같아요.
새로운 신입분이 왔는데 바쁘니까 첫날이랑 일주일은 알려주다가 나중에는 매뉴얼을 주고, 매뉴얼을 봐도 모르겠으면 물어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친구랑 나누다가, 친구가 “그 사람이 매뉴얼 보는 게 편한지, 아니면 직접 물어보는 게 편한지 물어봤냐?”고 하더라구요. 아차 싶었죠. 그래서 신입한테 물어봤어요. 그러자 “매뉴얼을 보는 게 아직은 어렵고, 직접 물어보는 게 편하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지내면서 제가 고쳐야 할 점을 하나씩 알게 되더라구요. 쉽진 않지만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다만 걱정되는 건 올라가는 과정에서 제가 놓치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놓치는 게 있을 수 있고, 놓쳤다는 걸 알았을 때 고집만 부리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어요.
난정 씨를 통해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드라마 제작과 관련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 일로 인해 겪게 되는 모든 부당함을 참기를 강요당하고, 참지 못했을 때는 좋아하는 마음을 의심받고 참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드는 말들이 흘러넘치는 환경이었다. 난정 씨는 그 말들 가운데에 서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은 부당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일을 하거나, 부당한 현실에 일조할 수 없어서 또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장을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다.
꾹 참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또는 좋아하기를 포기하기라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난정 씨는 다른 선을 그린다.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자기를 위한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을 하나 둘 찾아나가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더 나은 씬(scene)을 고민하며 이어 붙이고, 아쉬운 부분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하듯 자신의 노동을 재편집해나갈 난정 씨의 내일을 응원해본다.
[필자 소개] 서서희: 서서(stand up) 희(喜 comedy) 하는 느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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