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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 한해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간단한 신변확인(?) 이후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박근혜를 지지합니까?” 작년 대선을 앞두고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이 한나라당 입당을 했다. 당시 나는 여성신문사 기자였다. 그리하여 이런 질문도 받아야 했다. “사장님이 한나라당 입당했는데 당신도 지지합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박근혜를 결코 지지하지 않으며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의 판단을 수긍할 수 없다. 재고할 일말의 가치도 없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구구절절 그 이유를 설명할 것도 없다. 한명의 여성이라도 정치판에 들어가는 것보다 아버지에게 충실하게 배운 박근혜의 독재 정치가 실제 여성들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생각하는 것이 여성주의니까. 언론사 사장이 정치활동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짓이니까. 혹자는 그것이 ‘급진’이라고 했지만 전투적인 것과 막 나가는 것은 다르다. 설득할 수 없는 급진은 전투적일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질문을 감당해야 했을까. 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면 으레 박근혜를 지지하고 여성언론 사장의 한나라당 입당을 어떤 의미에서건 환영한다고 믿었던 걸까.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절차와 과정, 그리고 상식 없이 “여성도 더러워져야 한다”는 한목소리를 내리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단일한 목소리를 내리라 생각하는 그들의 무지함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틀렸다”라고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페미니즘 수난 시대였다.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 모를 여성 정치세력화 논의는 마초들의 공격 대상이 됐고 분위기에 힘입어(?) 여성들은 그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말자고 다독였다. 무엇이 옳은 건지에 대한 냉철한 논의는 뒷전으로 가버렸다.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발언이 김규항과 같은 마초들에게 얼마나 좋은 먹이를 던져준 꼴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고달프게 살아 온 여성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인가. 경솔한 정치적 선택과 그 선택이 가져온 파장을 비판하는 것이 14년간 여성언론을 이끌어온 노고를 무시하는 것인가. 둘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비판의 지점은 명확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랬다. 우리끼리 얼굴에 먹칠하지 말자는 것이었고 서로에게 상처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서로를 감싸 안아라, 비판하지 말아라. 그것이 ‘자매애’였다. 그녀들 간의 더러운 연대에 ‘나’는 없었으되 비판하면 안되었다. 비판하는 것은 ‘자매애’가 부족한 경솔한 행동이므로, 선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페미니즘의 분열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불행히 나는 어렸고 아무도 말 걸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마 전 이계경 여성신문사 전 사장의 퇴임식이 있었다. 알만한 여성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격려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간 힘들었다는 심경 고백 후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은 눈물을 비췄지만 “떳떳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난 떳떳하지 못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로 정리되는 안일한 ‘자매애’가 난 떳떳하지 못하다. 원칙 없는 온정주의가 어느새 ‘자매애’로 둔갑해 페미니즘을 얼마나 웃긴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여전히 강하게 머리를 잡아 끌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상처주지 않고 감싸 안느라 성찰 없는 궤변이 페미니즘이 되어버린 것을. ‘웃긴’ 페미니즘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페미니즘이, 누구를 설득하고 또 누구를 위협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성찰과 비판적인 토론문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 비판은 생산적인 담론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누구도 비판없는 담론을 원하지 않으며 성찰하지 않는 페미니즘을 원하지 않는다. 더 이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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