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인 이내가 최근 가지게 된 꿈은 “마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 꿈을 꾸게 만든 씨앗 같은, 짧지만 강렬한 여행이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후, 일본 여행이 재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떠난 그녀의 우연한 여행은 거기서 그치질 않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내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연결되어 있었던 우리의 이웃 마을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인연의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이내의 로컬 여행기, 종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마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팬데믹의 불안과 궁핍에 시달리던 그때, 문득
2023년은 10년이 되는 해였다. 완전히 0의 상태에서 삶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한 지. 삶을 실험으로 여기며 무사히, 아니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10년을 지내왔다. 이제부터 뭔가 달라지는 것 같다고, 인생 주기는 10년에 한 번씩 바뀐다고 줄곧 말하고 다녀서 그런지, 변화가 극명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래 끌면서 ‘이제 일이 저절로 들어오지 않을 건가 봐'라고 자주 생각했더니 정말로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돈 걱정에 밤잠을 설치고, 극도로 예민해져서 가까운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앞날의 불안에 몸을 떨었다. 밤을 새워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 버스에 실려 몇 시간을 가서 택배를 분류하는 일은 당장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안이 되었다. 그러다 지인의 도움으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텔에 일당 1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메이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청소 대행업체가 바뀌는 바람에 3일밖에 일하지 못했지만, 몸 쓰고 땀 흘리는 노동은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움직이면 어떻게든 된다는 자그마한 경험이, 불안과 걱정에서 나를 조금 물러서게 해주었다.
생각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고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던 때와 비교하면, 이미 나는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다. 그때도 걱정 없이 삶을 믿었는데 지금 못 믿을 이유가 없다. 부정적인 생각이 찾아오면 곧바로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고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 원하는 것에 집중하고 가능한 작은 행동을 찾아서 움직이는 연습에 매달렸다.
부산에 여행 온 낯선 일본인 ‘소라'에게 점심을 함께 먹자는 메시지를 보낸, 바로 그 무렵의 내 상황이다.
시작은 언제나 작은 날갯짓
나비효과라고 부를 만했다. 그날의 의식적인 작은 날갯짓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딱 한 번 잠깐 만난 일본인에게 “같이 점심 먹을까요?” 하고, 낯선 사람에게 받는 식사 제안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잠깐 머뭇거리다가 메시지를 전송한 순간이었다. 두 달 후, 나는 그의 시골 고향마을에서 일본어로 라이브 공연을 했다. 꿈에 그리던 일본 데뷔라고나 할까!
게다가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말을 할 때 보통은 일단 미소를 장착하고 열린 태도를 보여주는데, 무슨 말을 하면 소라의 미간에 계속 주름이 잡혀 내 일본어가 이상한가 계속 주저하고 긴장하게 되었다.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만남 후 ‘조금 무섭다'는 느낌이, 예의상 웃는 일이 거의 없는 소라의 첫인상으로 남은 이유다.
그날 밤에 소라로부터 인스타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너무 반가웠고 고마웠다”, “도쿄에 올 일이 있으면 안내해 주겠다”는 다정한 인사에, 말 그대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예의를 갖춰 답장을 보냈다. 소라는 다음 날은 혼자 부산을 여행한다고 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지만, 별다른 계획이 없어 나에게 ‘일본어 실컷 쓰기’ 선물을 줘 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무서운 인상이 꽤 커서 평소보다 오래 고민하다가, 점심 식사 제안을 했다. 매우 빠르게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기서 잠깐, 소라와 나의 캐릭터 차이를 조금 소개한다. 소라는 라인(일본이나 대만에서 주로 쓰는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을 엄청 자주 보내는 일본인이다. 일본 사람들이 연락 잘 안 한다는 인상이 강했는데 소라는 달랐다. 반면, 나는 한국사람치고는 카톡을 좀 멀리하는 편. 그래서 소라가 일본어로 너무 자주 메시지를 보내와서 처음엔 당황했다. 지금은 소라의 의도치 않은 특훈 덕분에 내 일본어 자판 쓰기 실력이 크게 향상되어 고마운 마음이다. 그 밖에도 내가 일본 드라마만 봤던 반면, 지난 3~4년 동안 소라는 BTS 세계에 입문해 한국 드라마만 섭렵했다. 결국 두 사람의 드라마 대화는 어긋나기만 하고… 대신 서로를 위해 자기 나라 정보를 소개하는 시간이 재밌다.
여행자가 오면, 일상도 여행이 된다
마흔세 살의 생일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길을 나섰다. ‘오늘 내 생일이에요!’ 같은 이야기는 먼저 꺼내지 않는 중년이 되었지만, 카카오톡 생일 공개 설정은 그대로 두어서 예상치 못한 지인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기도 한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곤란해하다가 이참에 안부를 가볍게 물어본다.
소라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 중앙역 13번 출구 앞에 서 있었다. 새파란 하늘 위에 새하얀 구름이 동글동글 떠 있는 기분 좋은 날씨. 고개를 드니 커다란 건물 위 간판에 새빨간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밤에는 불도 켜지는 네온사인이다. “된다! 된다! 잘 된다! 더 잘 된다!”
평소엔 별난 사람들이라고 웃음거리로 삼고 넘어갈 시트콤 같은 장면인데, 나쁘게만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상황과 생일이 가져온 ‘다시 시작해 보자'는 기운 때문인지 누군가의 낯선 삶의 태도가 용감하게 느껴졌다. ‘나도 더 잘 되고 싶어요…’. 느낌표 자리에 말 줄임표 정도 넣어서 입 속에 굴려 보았다.
아침부터 먼 데 있는 그림책 책방에 가서 그림책을 잔뜩 사고, 숙소에 들러 어제 산 책들까지 챙겨 와 양손이 무거운 소라가 도착했다. 우편으로 책을 일본에 보내고 싶다고 나에게 도움을 구했다. 소라는 고서적을 매입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친오빠와 함께 헌책방을 운영하는데, 온라인 부분을 소라가 맡고 있다. “나는 책을 잘 안 읽어. 그냥 사고파는 사람이지.” 소라는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는 솔직한 사람이다. 얇고 긴 팔다리에는 무거운 책을 이리저리 나르다가 생긴 멍과 상처가 가득하다. 우체국에서 커다란 박스를 사서 책이 상하지 않게 잘 쌓아 포장하는 손길은 빠르고 정확하다. 무릎을 직각으로 들어 박스를 몸에 안고 옮기는 것까지 프로의 움직임이다.
부산에 친구가 놀러 오면, 나는 무조건 은수 언니네 비건식당에 데려간다. 언제나 만족도 100%의 선택이다. 점심에는 정성이 느껴지는 제철 나물밥 한 상, 저녁에는 비건 와인이나 내추럴 와인에 어울리는 뇨끼, 파스타, 야채구이 등 다양한 국적의 요리를 먹을 수 있다.
깊은 향이 일품인 나물 반찬에 뭐가 들어갔냐고 묻길래 ‘고마아브라(참기름)’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고미아브라(쓰레기 기름)’였다. 점 하나 차이에 이렇게 다른 뜻이 되어 버린 걸 눈치채지 못한 나에게 “방금 뭐라고 했어?” 화난 듯 묻는 표정에 얼어붙었다. 방금 내가 한 말실수를 깨닫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소라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도착한 긴 메시지에는 잊지 못할 행복한 부산 여행이라는 이야기 끝에 “쓰레기 기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라는 츳코미(일본 개그문화에 있는 ‘태클 걸기' 같은 것)가 담겨 있었다.
여행자가 오면 여행자의 행운도 같이 와서 일상의 공간이 다르게 느껴진다. 먹고 마시고 걷고 이야기하는 모든 과정에 새로움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늘 걷던 길인데 ‘저런 게 있었어?’ 하는 장소가 탄생하고,(그렇다. 발견은 탄생이다!) 카페의 고양이들이 초면인데도 무릎에 앉아 새로운 사람을 환영하고, 사장님은 갑자기 서비스로 구름 같은 카푸치노를 선물한다.
작은 날갯짓이 진짜로 비상하는 순간
어쩌다 보니 동네 맥주집 ‘담담’에 동네 친구들이 하나 둘 모였다. 약속하고 모인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생일잔치가 되었다가, 디제이를 자청하는 누군가 덕에 클럽이 되었다가, 그렇게 새벽까지 왁자지껄 달렸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소라가 신경 쓰여 괜찮냐고 물었더니 한국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며 좋아했다. 결국 호텔로 돌아가 1시간 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최근 단골이 된 동네 맥주집에 가면 나도 어느 시트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제껏 나는 매사 진지한 태도로 위트 없는 인생을 살아 온 모양이다. 삶의 번잡함과 자신의 초라함을 유머로 비틀어 버리는 시트콤에서 요령을 좀 배워야겠다고,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버린 여행 같은 생일날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소라가 언젠가 자기 고향마을에 놀러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나는 여전히 마이너스 통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먹고, 여행할 돈이 없다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일본을 신나게 돌아다니는 나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원하는 것에 대상을 맞추고 집중하는 연습을 재미 삼아 시작한 놀이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 여행, 오노미치와의 인연으로 행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무거웠던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더니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처럼 기쁨의 눈물이 쏟아졌다. 따뜻한 빛이 나를 오롯이 감싸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의 평화였다. 불안함과 위태로움으로 무감각하게 흘러가던 일상 속에, 행복했던 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충만함이 무거운 가슴 속으로 밀려왔다.
검색해 보니 마침 부산과 후쿠오카 사이에 뱃길이 열려 저렴한 가격의 배편이 있다. 소라와 후쿠오카에서 만날 날짜만 조율해서 일단 가는 날 배편을 예약했다. 돌아올 날짜와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다.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여행의 시작, 그리고 삶을 믿는 실험-그 두 번째 무대의 시작이다.
[필자 소개] 이내. 동네 가수. 어디서나 막 도착한 사람의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걸으며 발견한 것들을 일기나 편지에 담아 노래를 짓고 부른다. 발매한 앨범으로 『지금, 여기의 바람』(2014),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2015), 『되고 싶은 노래』(2017), 디지털 싱글 「감나무의 노래」(2020), 「걷는 섬」(2022) 등이 있고, 산문집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2018), 『우리는 밤마다 이야기가 되겠지』(2021, 공저) 등을 썼다. 가수나 작가보다는 생활가나 애호가를 꿈꾼다. 인스타 @inesbr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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