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9일은 1998년 2월 19일에 태어난 이영만 씨가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생일이었다. 영만 씨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4.16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열일곱 살의 나이였다.
세상을 떠난 이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건 어떤 걸까? 누군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2월 19일, 故 이영만 씨의 생일에 열린 〈이영만 연극상〉 시상식을 보며, 세상을 떠난 이의 생일이 이렇게 행복하고 충실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작년 처음 진행된 〈이영만 연극상〉은 “세월호가 남긴 가치인 ‘몸과 마음이 안전한 사회’,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갖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 ‘청소년의 권리 존중’을 담아 연극을 만들고 삶을 영위하는 수상자(작품)를 선정, 축하하는 자리”다.
올해는 마로니에 촛불에 특별상, 박진아 무대감독에게 스태프상, 〈이런 밤, 들 가운에서〉(설유진 작, 연출)에 작품상, 극단 애인의 백우람 배우에게 배우상을 시상하며 연극인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수상하는 사람, 축하를 건네는 사람 모두 함께 울고 웃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시상식 개최와 영만 씨 생일 축하 영상을 보내고 이 날의 의미를 짚었다. 누군가를 추억하고 애도하는 일이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정되지 않고 얼마나 풍부해질 수 있는지,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연결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목격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시간을 만들어낸 건 이영만연극상집행위원회(고주영, 김태현, 신재훈, 양근애, 유병진)의 위원장 이미경 배우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에서 활동하는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이소현 감독, 2023)에서도 뛰어난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또한 그에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영만엄마’.
시상식이 끝난 후,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에게 후기를 전하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엄마가 될 일은 극히 희박하겠지만, 만약 엄마가 된다면 영만 어머니, 이미경 배우님처럼 되고 싶다”고.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미경 배우가 보여준 모성이 희생이나 가족주의에 갇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확장’의 형태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영만엄마’이면서도 ‘이미경’임을 보여주는 사람, 이미경 배우를 만나 연극에 빠진 계기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눴다.
-작년에 산울림소극장에서 했던 〈연속,극〉(4,16가족극단 노란리본 다섯 번째 작품)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란리본의 활동을 담은 영화 〈장기자랑〉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연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동혁 엄마(김성실 씨)와 같이 416 합창단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어요. 동혁 엄마가 희곡 읽기 모임이 열린다고, 거기도 같이 가자 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이렇게 연극 배우가 될거란 생각을 전혀 못했죠. 당시는 겪어보지 않은 일을 한창 헤쳐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어떤 결론에 대한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주어진 일상을 살아나가야 했던 때였거든요. 근데 그 희곡 읽기 모임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사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슬픔을 어떤 방법으로 덜어내야 할지 몰랐어요. 원래 내 성격은 쾌활하고 활발한데, 자꾸 그걸 점점 감추게 되더라고요. ‘유가족다움’이라는 프레임도 있고, 그에 따른 시선이 느껴지니까 나 자신을 숨기는 삶을 살게 됐던 거죠. 그런데 희곡 읽기 모임에선 어떤 표현을 해도 괜찮더라고요. 연극을 통해서 하는 거니까요. 마음껏 웃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어서, 정말 숨통이 트였던 것 같아요.
그렇게 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현재 4.16가족극단 연출인) 김태현 연출이 공연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와 그녀의 옷장〉 공연을 하게 됐죠. 세월호 이야기는 아니고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였어요. 2016년 7월에 쇼케이스 하고 11월에 바로 대학로에서 공연했어요. 한참 광화문에서 촛불 투쟁하고 있을 때여서, 거기 참여하느라 공연은 못 본 사람도 많았어요. 그런데 관객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뭐 연기를 잘했겠어요?(웃음) 엄청 어설펐겠죠. 그렇지만 무대에 선 엄마들의 마음이 관객들에게 전해졌던 것 같아요. 그때 받은 박수로 인해 연극을 계속하게 됐죠.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무대에 선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스트레스 받는데(웃음), 긴장되진 않으셨어요?
긴장감은 없어요. 오히려 설렘과 기대감이 훨씬 크죠. 내가 흔히 말하는 ‘무대체질’인 것 같아요(웃음).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성격에 잘 맞는거죠.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는 것도 진짜 좋아했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유가족 모임 활동으로) 합창단도 하고 연극도 하게 된 것 같은데, 이런 활동 덕분에 슬픔을 견디며 헤쳐나올 수 있었던 같아요.
또 뭔가를 하면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강한데, 그런 성격과 기회가 잘 맞았던 거죠. 지금도 난 공연 잡혔다 그러면 설레요. 빨리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죠. 근데 다른 엄마들 보면 긴장하고 그러더라고요. 이런 성격은 배우로서 큰 장점이라 생각해요. 항상 무대가 기대되고, 더 많이 못해서 아쉽거든요.
-연극의 매력에 푹 빠지셨네요.
연극할 땐 ‘내가 영만이가 돼서, 영만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특히 연극 〈장기자랑〉 할 때 그렇거든요. 지인이 〈장기자랑〉 보고 나서 “언니, 영만이를 보는 것 같았어”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연극의 매력인 것 같아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요. 정말 연극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다리에 힘이 없어서 무대 못 설 때까지 공연하고 싶어요.
-영만 씨도 랩하는 걸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여러모로 공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스탠딩 코메디, 모노드라마도 하고 싶고, 랩도 해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최근에 사회복지사 공부하고 졸업도 했는데요. 공부하면서 ‘회복탄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 내가 회복탄력성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했어요. 정말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무언갈 배우고 싶었거든요. 이런 배움이 나를 성장시킨 것 같다고 생각해요. 사실 여유도 좀 갖고 편안하게 멍 때리기도 해야 하는데, 그걸 잘 못하는 것 같아요. 특히 영만이 보내고 나선, 가만히 있으면 힘들고 아프니까 그걸 잊으려고 뭔갈 계속 했거든요. 그게 몸에 밴 것 같기도 하고요. 욕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 게 많고, 해야 될 일도 많은 것 같아요.
-〈이영만 연극상〉을 제정한 것도 그런 ‘열심히 하는 과정’ 중 하나였을까요?
일단 (현재 이영만연극상집행위원회 멤버인) 고주영PD 이야기부터 조금 해야 할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정말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만큼 고마운 사람이거든요. 고주영PD가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이었을 때 처음 만났고, 이것저것 하다 친분을 쌓게 됐어요. 그러다 2019년 〈연극연습2. 연기 연습 - 배우는 사람〉을 같이 하게 됐는데, 그 작품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계기라고 해도 무방해요. 말했듯이 원래 내 성격은 밝고 활발한데, (세월호 참사 이후) 슬픔을 가진 사람으로서 보여져야 했죠.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럽고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고주영 PD가 〈연극연습2. 연기 연습 - 배우는 사람〉을 제안하면서, “영만엄마로 살아온 시간 그거 말고, 엄마가 아닌 이미경 본래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정말 온전한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어요. 무대에서 좋아하는 노래 마음껏 부르고, 탬버린도 정말 열심히 미친듯이 흔들고. 그거 본 사람들은 충격 좀 받았을지 몰라요.(웃음) 그렇게 하고 나니까, ‘유가족다움’이라는 프레임을 탁, 놓을 수 있었어요. 누가 어떻게 나를 바라보든 나는 그냥 나답게, 내가 가진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며 살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정말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영만 연극상〉 만든 것도 고주영PD 도움이 커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니,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싶죠.
사실 영만이 보내고 나서,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안타깝고… 엄마로서 뭘 할 수 있을까 늘 생각했어요. 영만이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라고요. 그러다 연극을 하게 됐고, 연극하는 사람들을 점점 알게 되니까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근데 연극인들 생활이 참 힘들더라고요. 연출이고 배우고 몇 개씩 알바 하면서 작품을 만드는 거에요. 나도 극단 소속이고 배우로 활동하지만, 사실 생계 목적은 아니잖아요. 내가 좋아서, 공연으로 세월호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하는 거니까. 예전부터 ‘연극쟁이들 되게 배고프다’ 이런 말은 들었지만 그걸 실제로 보게 된 거죠. 그래서 가끔 아는 연극인들 공연 준비한다 그러면 간식 보내주고, 회식비 좀 보태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2022년에 고주영PD 만나 밥 먹으면서 “재단처럼 거창한 거 아니더라도 영만이를 위해서 뭘 좀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럼 이영만 연극상을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라고 하더라고요. 무릎을 딱 쳤죠. “그거 너무 좋겠다”고. 연극인들에게 도움되는 일도 하고 싶었는데, 딱이었던 거에요. 원래 2022년 연말에 하려고 했어요. 보통 시상식들은 그러잖아요? 그런데 연말이 다가올 때 고PD가 엄청 바빴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지 하다가 문득 영만이 생일이 2월이라는 생각이 난 거죠. 그럼 영만이 생일에 시상식을 하자고. 그렇게 2023년 2월 19일에 1회 〈이영만 연극상〉 시상식을 하게 된 거에요.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생일이라고 하면 축하하는 자리인데 영만 씨 생일의 경우엔 조금 의미가 다르긴 하잖아요. 아무래도 슬픈 감정이 포함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를 애도한다는 것도 뭔가 무거운 마음이 들고… 근데 이 시상식은 정말 새로웠어요. 떠난 사람을 이렇게 기억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약간 얼떨결에 이렇게 되긴 했지만, 영만이 생일에 시상식을 한 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사실 이 시상식 하기 전엔 영만이 생일이 돌아올 때가 1년 중 가장 힘들고 슬펐어요. 생일이 다가오는 게 두려웠죠. 내가 이 날을 어떻게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싶었는데, 작년부턴 시상식을 하게 됐죠. 많은 사람들이 영만이를 기억하며, 떠난 사람의 생일을 이렇게 축하한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영만이를 함께 추억하고 기억할 사람이 계속 생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젠 이 날이 오히려 기다려져요.
1회 시상식 끝났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응원과 찬사를 보내줬는데, 이번에도 다들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나 또한 행복했고요. 이 날의 기억이 날 앞으로 씩씩하게 살아가게 할 거라 생각해요. 다만 걱정은 이제 점점 기대치가 높아져서 3회 시상식을 어떻게 하나(웃음)인데, 그 땐 또 주변 인맥에 기대야죠.(웃음) 정말 〈이영만 연극상〉은 영만이 보내고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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