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시대 생겨난 ‘업무 공백’ 누가 메워야 하는가?비영리 이주인권단체 활동가의 질문-이주민의 접근성에 관하여업무라는 것은 뭘까. 나의 일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혹시 이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지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지 따지며 억울해 본 경험은 없는가. 사람들은 업무 매뉴얼에는 적혀있지 않은 수많은 ‘일’들을 업무가 진행되게 하기 위해 수행하고 있다.
매뉴얼에는 적혀 있지 않은, 이주노동자 관련 민원들
이주노동자 상담을 많이 했던 시기에, 나는 고용노동청의 고용센터 업무행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일들 때문이다.
한 이주노동자가 사업주와 갈등을 겪었는데, 사업주가 기숙사와 공장에서 그 노동자를 말 그대로 쫓아냈다. 징계 및 해고 통지와 같은 절차를 밟은 것도 아니다. 사업주는 자신의 승인이 없으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과, 거주할 곳도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사적 보복 행위를 했던 것이다. 고용허가제도 하에서 고용센터는 노동자의 고용, 사업장 변경, 민원 등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다. 나는 그 이주노동자와 함께 고용센터에 찾아가 ‘사업주가 이 사람을 쫓아냈으니 사업주에게 해고절차를 밟거나, 사업장 변경을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만난 대부분의 고용센터 직원은 “그것은 내 업무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업무는 접수된 서류를 처리하는 것이지, 그들의 갈등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다 드물게 사업주에게 설명을 하는 직원도 있었다. ‘이렇게 노동자가 일을 못하게 쫓아내는 것은 허용되는 일이 아니고, 일을 안 하게 할 거면 해당 노동자의 고용변동에 관한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말이다. 고용센터 담당자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이주노동자가 겪는 고난이 몇 달이 넘도록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수 시간 안에 짧게 끝날 수도 있다. 매뉴얼상의 ‘서류업무’를 둘러싼 많은 일들에 대해서,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선택의 상황들에 놓이게 된다. 어쩌면 보람을 느낄 수도, 어쩌면 내 의무사항도 아닌데 잘못 얽혔다고 억울해할 수도 있는 수많은 일들.
외국 국적 아동이 취학하려면 어떤 ‘일’이 필요할까
내가 일하는 한국이주인권센터는 이주민들이 한국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상담해주고 있다. 애초에 우리 기관은 산업연수제 시기 이주노동자 상담소로 출발했었고, 나는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12년간 상담 업무를 하고 있다. 한국으로 오는 이주민들의 배경도 다양하고, 체류비자도 다양해지면서 이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의 내용과 범위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일했던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상담이라는 것이 쉽게 하면 쉽게, 어렵게 하면 어렵게 할 수 있다고. 상담을 하는 활동가로서 어떤 것은 ‘할 수 없다’면서 상담을 종결할 수도 있고, 어떻게든 제도와 자원을 찾아 해결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제도와 자원이 없는 것도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이니, 없는 것이 생기도록 장기간 노력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상담 업무 뒤에 놓여진 수많은 선택지들이다.
2월, 3월이 되면 우리 기관은 유치원을 찾는 가정들,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려는 가정들을 돕느라 분주하다. 외국 국적의 아동들의 경우, 취학통지서가 따로 발급되지 않는다. 거주하는 곳의 관할 학교를 찾는 것도, 그 학교에 가서 입학상담을 하는 것도, 입학과 관련한 서류를 작성하는 것도 모두 각 가정이 알아서 해야 한다.
그 모든 일 앞에서 벽을 느끼는 이주민들이 우리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고, 나는 아동이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기 위한 과정들을 함께 하게 된다. 정말 다양한 이유로 아이들의 학교 편입학이 늦춰지고 학력공백이 생기는데, 이 이야기는 언젠가 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한국에 오는 이주민의 배경도, 체류비자도 다양해진 시대 행정과의 거리와 장벽에 부딪히는 이주민들
최근에는 장애아동 업무를 하는, 교육청의 한 친절한 공무원과 통화하면서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저희 기관이 이주민 분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드리고 있지만, 저희가 정부기관도 아니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기관도 아닌데, 학교에서 도와달라는 것까지 해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배경은 이렇다. 우리 센터에서 장애가 있는 아동의 학교입학을 도왔다.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에 배정되려면 교육청에서 특수교육대상자 진단을 받아야 한다. 진단을 받으면 교육청에서 지급하는 바우처를 통해서 학생의 외부치료비 일부를 보조 받을 수도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특수교육대상자 진단을 받기 위해, 우리 기관에서 통역까지 조력해야 했다. 최근에는 교육청에서도 자체적으로 다양한 언어권의 통역 풀을 양성하여 학생들이 특수교육대상자 진단을 받을 때 파견한다.
이 아동은 특수교육대상자가 되었고, 한 초등학교 특수반에 배정되었다. 학교 잘 다니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어느 날, 교육청에서 우리 센터에 전화가 온 것이다. 정리해보면 ‘아동이 입학한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가정과 의사소통이 안되어서 힘들어 한다. 아동이 학교 수업만으로는 적응하기가 어렵고, 외부치료도 받아야 하는데 하나도 못 받고 있다. 학생이 외부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바우처를 아직 신청하지 못했으니, 바우처를 신청하여 치료센터에 다닐 수 있게 센터에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바우처 신청은 담임선생님한테 하면 된다는 안내와 함께, 교육청 직원은 그 지역에 있는 치료센터들의 리스트도 만들어서 보내주었다. 우리 센터는 이주민을 돕는 기관이지, 교육청과 학교를 돕는 기관은 아니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나를 한 켠 이해해주면서, 그 공무원은 “지역에 있는 치료센터 리스트 보내드리는 것도 원래 가정이 알아서 찾는 것이지, 저희가 하는 일은 아니에요.”라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그런 정보를 찾아서 보내주는 공무원도 처음 만났다. 그 전의 다른 상담에서는 내가 지역의 치료센터들을 지도 앱을 통해 찾아서 어떤 치료를 하는지, 바우처 사용이 되는지를 일일이 물어봐야 했다.
이것은 누구의 일이란 말인가
다시 일을 둘러싼 경합이 시작된다. 이것은 누구의 일이란 말인가.
사회적 소수자가 제기하는 물음과 도전이란 이런 것일 거다. 지금까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또는 나름 안정적으로 분리되었던 분담들에 대해서 질문하고, 이 분리체계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도전한다. 그 과정에서 업무를 둘러싼 일의 재배치들이 일어난다. 외국인 가정의 장애아동이 교육청의 바우처를 사용하지 못하고 외부치료를 받고 있지 못하는 문제는 과연 가정의 일인가?
여기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것이다. ‘그건 담임선생님이 어떻게 해서든 신청하고 이용하도록 도왔어야지.’ ‘한국인 가정들도 다들 알아서 하는 건데, 당연히 외국인 가정이 알아서 해야지.’ ‘그런 거 도우라고 상담센터가 있는 거 아니냐, 당연히 상담기관이 해야지.’
나는 ‘누구의 책임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암묵적인 학교와 가정, 공과 사의 업무부담의 질서 속에서는 이 외국인가정의 아동이 바우처도 신청하지 못하고 치료센터를 이용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공공기관이 ‘업무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서류에 ‘사인하라’
최근에는 한 난민신청자 가족이 난민신청체류비자를 받지 못하고 출국유예 상태가 되어서 출입국‧외국인청에 동행하였다. 난민 신청(난민과 업무)과 체류비자 신청(체류관리과 업무)은 분리되어 있다. 난민신청자들은 난민과에서 난민 신청을 하고, 그에 대한 비자를 받으려면 체류관리과에 가서 체류비자 신청을 다시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가족은 난민 신청을 하면 자동적으로 비자 신청도 되는 줄 알고 따로 비자 신청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존의 체류허가 기간이 만료되었다. 만료된 지 30일이 넘었기 때문에 출입국‧외국인청에 벌금을 200만원 정도 내고, 난민 신청에 대한 비자는 받지 못하고, 출국만 유예된 상태로 있게 되었다.
난민 신청에 대한 체류비자가 없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 자기 이름으로 핸드폰을 장만할 수도 없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일들을 할 수가 없다. 당장 아이가 입학한 학교에서는 체류비자가 있어야 발급되는 외국인등록번호를 알려달라고 수 차례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은 해당 가족은 그 동안 이미 여러 번 난민과에 가서 ‘언제 비자가 나오냐’고 물었다. 난민과는 이 가족들이 무슨 문제로 난민과를 찾아왔는지 경청하고 물어보기보다, 난민 신청에 대한 결과를 물어본다고 예단했다. 때문에 ‘기다리라’고만 했고, 가족들은 기다렸다.
우리는 체류비자 신청에 대한 안내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출입국‧외국인청은 난민 신청에 대한 서류를 받을 때, 난민 신청과 체류 신청은 별개라는 내용이 포함된 중요 정보들을 그 나라 언어로 번역해서 읽게 하고 확인했다는 사인을 받았기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했다. 가족들은 그 서류는 그냥 난민 신청할 때 제출해야 하는 서류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사인해서 제출했고, 어떻게 비자 신청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했다.
공공기관으로서 ‘업무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서류적 완결성을 위해, 이주민들은 실제로 무슨 내용인지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해야 할 사인들만 늘어나고 있다. 정부기관인 고용센터도, 학교도, 출입국‧외국인청도 마찬가지이다.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그 ‘일’
바우처를 이용할 수 있는 장애아동의 가정이 바우처를 이용하고, 체류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난민가정이 체류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그 ‘일’은 지금까지 익숙하게 해온 일들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쉬운 길은 ‘일’이 넘어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그 일은 ‘가정(개인)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계속해서 벽을 세우는 것이다. 어려운 길은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통한 ‘알아차림’과, 그에 기반한 행동을 통해 접근성의 장벽을 이동시키거나 낮추는 것이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각자의 역할에 대한 열린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닌 거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일이다. 나 자신도 민간 이주인권단체에서 일하며 늘 선택의 상황들에서 갈등과 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주민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평등한 세상을 고민한다면, 그 일은 모두가 해야만 한다.
[필자 소개] 박정형. 한국이주인권센터 사무국장. 현재는 아랍여성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위해 한국이주인권센터에서 만든 공간인 ‘오아시스 와하’의 공간지킴이 역할이 크다. 이주민들이 처하는 어려움들을 상담하고 이주민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존재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쌓여갔다. 그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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