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잡러 시대에 직업 하나 느는 일 자체는 딱히 큰 일이 아니지만, 보험설계사가 되는 건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건 벚꽃이 피기 시작한 4월 초,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다팜(@dapalm_)이라는 공간. 그곳에선 “지금은 100세 시대가 아닌 기후위기 시대”라고 전하는 이들이 만든 프로젝트, 미래생명의 ‘MZ무배당 기후위기 바로행동 보험’이 안내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대구에 위치한 복합예술공간/채소기반 레스토랑/제로웨이스트 상점인 더커먼(@common.for.green)의 강경민 대표, 더커먼의 김하경 크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의 김주온 활동가, ‘오늘의풍경’의 신인아 디자이너가 합심해 만든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 어떻게 대비하실래요?
“기후위기 당사자들이 만든 최초 기후위기 보험”인 미래생명의 ‘MZ무배당 기후위기 바로행동 보험’은 “매년 급변하는 이상기후로 불안함을 느끼는” 이들, “물가상승과 식량난, 생계 위협을 느끼는” 이들에게 함께 기후위기를 대비해 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만들어 졌다.
-저희의 바람은 단순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쯤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암보험처럼, “평생 동안 보장이 잘 되는 기후위기 보험을 만들어 보자.” MZ무배당기후위기바로행동보험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보험상품설명서 중
하지만 자고로 사보험이라 함은, 국가나 정부가 응당 부담하고 책임져야 하는 부분을 민간에 떠넘기는 측면이 있다.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는 부분을 메꾸기 위해 꾸역꾸역 사보험을 가입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여러 보험들을 비교/검토해야 하고, 보험설계사가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지 의심하기도 하며 불안감을 떠안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은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왜 기후위기 ‘보험’인가? 의문이 드는 지점도 있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주온 활동가는 “본인 또한 처음 이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 고민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기후위기를 보험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잘 전달될 수 있을까 하고. 그러나 “프로젝트 팀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보자”는 생각에 다다르게 됐다고 했다.
프로젝트 팀은 “당장 앞으로의 10년, 20년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노후 보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회의감” 속에서, 기후위기 시대엔 “기존 보험이 흔히 보장하는 교통사고로 인한 골절, 암, 치매나 임플란트 외에 어떤 것에 대비해야 할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래생명이라는 가상의 보험회사와 ‘MZ무배당기후위기바로행동보험’이라는 가상의 보험상품”을 만들기로 했다.
한편으로 “세계곳곳에서 기후변화를 방치하는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한 기후 소송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개인들의 실천을 보험료로 납부하고, 기후행동에 따른 손해를 보상 받는다는 설정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고심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우리가 지금 행동하기 시작하면 분명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함께 나누고 싶었”기에, 이 보험을 홍보해 보기로 했다.
보험료는 돈 대신 ‘인식의 전환’과 ‘행동’으로 내주세요
미래생명에 들어서면 5가지 단계가 안내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MZ무배당기후위기바로행동보험’의 소개부터 가입조건 확인, 납부 보험료 선택 등이 설명되어 있다. 가입은 행사장에서 QR 코드로 접속하거나 온라인(theclimateinsurance.org)에서 가능하다.
가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구든 보험에 가입 가능”하다. 김주온 활동가는 “전시장을 찾은 교사인 분으로부터 ‘학생들에게 기후위기 설명하기 너무 좋은 프로젝트’라는 이야기를 듣고, ‘참, 이 보험은 청소년도 가입 가능하구나’ 생각했다”며 “’MZ’라는 말이 붙어있긴 하지만, 정말 누구든 환영”이라고 웃었다.
보험상품설명서엔 ‘특별 가입 권고 대상’도 나와 있는데,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사람’부터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기후위기에 관심은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사람’ 등 30가지 유형이다.
이 보험은 기본계약 외에도 ‘식생활 특별약관’, ‘기후위기 취약 거주지 특별약관’, ‘기후위기 취약 업종 특별약관’, ‘성·재생산 권리 특별약관’, ‘반려 동·식물 특별약관’ 등 11개의 특약도 선택할 수 있다. 각각의 계약엔 보상하는 손해 항목과 보상하지 않는 손해 항목이 설명되어 있는데, 내가 언제 이렇게 보험약관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보험료를 돈이 아닌 것으로 지불한다는 점이다. 프로젝트 팀이 “돈이 아닌 다른 방식의 보험료”를 상상한 결과, 보험료는 “‘시간’일 수도, ‘정치적 행동’일 수도, ‘함께할 동료’일수도 있”다.
제4관 보험료의 납입, 제8조 보험료 납부 방식은 크게 ‘에너지 사용’, ‘자원 순환’, ‘식생활’, ‘돌봄’, ‘이동’, ‘정치적 행동’, ‘인식 전환’으로 나눠져 있다. 각각의 하위 항목엔 ‘샤워 시간 줄이기’, ‘동네의 제로웨이스트샵 이용하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기후 우울로 고립되어 있는 친구들에게 안부 연락하기’, ‘주4일만 근무하기’, ‘기후 유권자 되기’, ‘편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 돌아보기’ 등 아주 다양한 예시들로 채워져 있다. 보험료를 돈으로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줄었는데,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다 그 중에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보험료가 지급된다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함께 기후위기 보험설계사가 되어보지 않을래요?
가입 조건도 확인하고, 생애 처음으로 보험 약관도 전부 다 읽고 나니 이 보험에 들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보험 가입 사이트로 들어가, 신중히 나에게 필요한 선택계약을 고르고, 보험료 납입 방법도 골랐다. 그렇게 MZ무배당기후위기바로행동보험에 가입한 나는, 더불어 설계사 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됐다. 이로써 기후위기에 맞서 함께 행동할 동료들을 찾을 준비가 된 것이다.
MZ무배당기후위기바로행동보험 상품설명서의 마지막, 5장은 ‘미래생명 보험설계사 활동하기’다. 보험설계사로 활동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하고 있다. 그 내용은 어렵지 않다. 그저 각 약관에 해당되는 건 무엇이며, 빠진 건 없는지, 보험료를 어떻게 산정할지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가입자 수를 늘리는 것”이 미래생명의 목표다. “소수의 가입자가 높은 보험료를 내는 것보다, 다수의 가입자가 적게라도 보험료를 내고 설계사로도 활동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방식”이니까.
미래생명의 MZ무배당기후위기바로행동보험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보험이 실제 만들어져야 한다거나 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보험의 양식을 빌려 우리 사회가 대비해야 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그 방식을 고민하자는 거다. 또한 돈으로 기후위기를 해결하겠다 혹은 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벗어나 지금 할 수 있는 행동들에 주목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아가 사보험의 한계이기도 한, 개인에게 지워지는 책임을 함께 나누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이번 을지로에서의 전시는 4월 7일까지였지만, 하반기엔 미술관 전시도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함께 보장하는 공동의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메시지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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