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은과 진우가 서로에게 계속 질문할 수 있다면

다른몸들이 읽는 드라마 시리즈 〈사랑한다고 말해줘〉

박은영 | 기사입력 2024/04/25 [17:34]

모은과 진우가 서로에게 계속 질문할 수 있다면

다른몸들이 읽는 드라마 시리즈 〈사랑한다고 말해줘〉

박은영 | 입력 : 2024/04/25 [17:34]

[기획의 말] 주류 질병 서사를 비판하고, 새로운 질병 서사를 쓰며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을 하는 ‘다른몸들’에서 미디어 속 질병과 장애를 이야기합니다.

 

▲ 2023년 11월 27일부터 2024년 1월 16일까지 Genie TV와 ENA를 통해 공개된 지니 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청인 여성 배우(신현빈 분)와 농인 남성 화가(정우성 분)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출처-instagram.com/tojws)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궁금해서

 

청인 여성과 농인 남성의 로맨스를 그린 GENIE 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두 주인공 모은(신현빈 분)과 진우(정우성 분)는 제주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다. 진우에게 매료된 모은은 그를 다시 마주칠 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도 수어를 배운다.

 

서울에 돌아온 모은은 진우를 잊지 못하지만, 짧았던 만남에 대한 그녀의 기억에서 장애는 쉽게 낭만화된다. 모은은 새삼 도시의 소음이 싫어진다. 그는 ‘세속적인 도시의 소음’과 이를 듣지 못하는 진우를 분리시키고, 그를 소란스러운 세상과 동떨어진 타자로 소환한다.

 

이처럼 드라마는 툭하면 장애인을 타자화시키는 비장애인의 습관을 섣불리 삭제하지 않는다. 모은은 진우를 만난 후 진우의 조용한 세상을 갈망하지만, 카메라는 진우의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보여준다. 예의상 인사를 나눈 새 이웃이 뒤에서 수어를 따라 하는 손자를 혼내는 걸 느끼고, 질서정연하고 조용한 아침 길거리에서 뒤에서 오는 자전거의 경적 소리를 듣지 못해 충돌하고, 난데없이 파출소에 잡혀가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의 복잡한 거리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친다. 길 건너편에 있는 모은이 수어로 인사를 건네자 진우는 한동안 모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청인에게 먼저 수어로 인사를 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벼운 인사’마저 당연하지 않은 농인과 청인의 기울어진 관계가 서정적인 배경음악 속에서 드러난다.

 

▲ Genie 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두 주인공의 모습. 익숙하지 않은 수어로 진우와 대화하는 모은. (출처-instagram.com/tojws)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이어지지만, ‘소리’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을 하던 모은과 진우는 약속한 음악회에서 만나는 데 실패한다. 대신 음악회가 다 끝난 한밤중에 거리에서 모은은 진우와 공유할 수 있는 노래를 기어이 생각해 낸다. 두 사람은 겨우 노래 한 곡의 울림을 공유했을 뿐이지만, 그 순간 모은은 어쩌면 진우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 가닿는다. 그러고는 비로소 질문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질문을 하자 마자 신경 쓰지 말라고 급히 다시 취소할 만큼 용기가 필요한 한 마디였지만, 진우는 별 망설임도 없이 ‘깊은 바닷속’이라고 답한다. 살면서 종종 비슷한 질문을 받으면서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 둔 답이었을 것이다. 무례해 보일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지는 위험을 감수한 모은에게, 진우는 청인이 어느 정도 알아들을 법하면서도 장애인을 불쌍하거나 지나치게 신비화시키지 않을 수 있도록 고심해 만든 답을 건넨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서로를 침범하는 관계에 들어가려고 할 때, 그 입구는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 한없이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수많은 번뇌 끝에 질문 하나를 툭 던지면 생각보다 빨리, 그리 길지 않은 한 마디 답이 툭 날아오기도 한다. 왜 그토록 고민했는지……. 혼자 끙끙 앓았던 순간에 나는 상대를 존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화하고 있었구나 싶어 겸연쩍어진다. 그러고 나면,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떳떳하게 고개를 쳐든다. 상대와 소소한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 왜 안 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궁금한 마음에 물려놓았던 재갈이 어느 틈엔가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장애인 캐릭터답지 않게’ 너무 평범해서?

 

지난 몇 년간 장애인 인물이 나오는 드라마들이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에 비해, 〈사랑한다고 말해줘〉에 대한 반응은 잔잔한 편이었다. 드라마의 서사와 감정선이 비장애인 중심적이며, 장애를 개인화한다는 비판이 담긴 평론이 몇 편 나왔을 뿐이다. 나는 그 비판에 많은 부분 동의했고, 잔잔한 분위기의 멜로드라마에 사람들의 반응이 미지근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독 이 드라마에만 열광적이지 않은 반응에 반발심이 들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장애인이 ‘장애인답지 않게 너무 평범해서’ 다들 거리를 두었던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주인공 차진우는 새로운 관계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성격의 농인 남성이다.


주인공 농인 남성 차진우는 화가지만 피카소 같은 천재도 아니고 재벌집 아들도 아니며 의협심이 넘치는 편도 아니다.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며, 밤에는 친구가 운영하는 술집에 찾아가 유부남 친구의 귀가나 지연시키는 중년 남성이다. 스스로의 장애에 대해 당당하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좀 멋있었을 테지만 그것도 아니다. 툭하면 옆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 전에는 겁부터 내는 소심하고 멋없는 성격이다. 배우가 정우성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만큼 영 매력이 없다.

 

바로 이 부분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난 나에게 사람들은 비범한 재능이나 천사 같은 순수함, 히말라야의 매서운 바람에도 끄떡없는 의지, 하다못해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천진한 눈망울이라도 기대했다. 당연히 나에겐 그중 무엇도 없었다. 비장애인에게 거슬리지 않을 만큼 ‘센스 있게’ 잘 처신하지도 못했다. 툭하면 날아오는 혐오발언에도 불구하고 내 장애에 대해 당당한 자부심을 유지했다면 조금은 멋있었겠지만, 나라고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일 리 없잖은가?

 

그래서 나는 답답한 진우에게 끌리고 말았다. 그는 모은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관계를 두려워하며 관계를 회피한다. 아니 왜!! 그러지 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에서 장애인은 민폐를 끼치고 비장애인은 일방적으로 희생할 거라는, 사회가 오랫동안 유포해 온 새빨간 거짓이니까. 답답하다고 짜증을 내며 채널을 돌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진우도 나처럼 옆 사람들에게 늘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길 일찍부터 강요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그에게 몰입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미안하고 고마워해야 해서 하고 싶은 역할과 말을 포기했던 나처럼, 쉽게 물러서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장애인이 주인공인 이 드라마가 싫지 않았다.

 

일상을 함께하는 사사로운 시간의 혁명

 

사회는 장애와 비장애에 대한 폭력적 허구로 가득하다. 혼자 맞서기에 그 거짓말은 너무 거대하고, 평등으로 향하는 길은 아득하고, 하루하루 걸림돌에 걸려 휘청인다. 차별이 사라진 세상을 향한 꿈만큼이나 내게 필요했던 건, 나와 다른 몸과 함께 일상을 공유하고 그들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데 성공하는 매일의 경험이었다.

 

나는 나랑 놀아‘주는’ 게 아니고 좋아서 같이 ‘노는’ 거라고 바로잡아주는 친구를 통해, 고맙다는 말을 줄이는 연습을 했다. 또한 떨리고 느린 손동작이 내가 함께하는 작업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명시해 주는 동료들을 통해, 내 노동권을 더 적극적으로 확보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늘 장애인만 비장애인의 장애 인식을 교정하는 건 아니다. 그 흐름이 정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며, 대부분은 서로를 통해 장애와 사회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해 간다. 장애를 다룬 대부분의 드라마가 그러하듯, 〈사랑한다고 말해줘〉 또한 장애의 문제를 정치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나는 관계가 고정관념과 사회적 위계를 해체하는 여러 순간을 모자이크처럼 보여주는 이 드라마의 다음 편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삶을 공유할수록, 농인 진우는 그를 가리는 딱딱한 도식을 벗고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연애를 시작하자 모은은 모든 단어의 수어 표현을 진우에게 자꾸 물어보고, 진우가 사용하는 다양한 소통 방식을 함께 경험한다. 도서관에서 두 사람은 수어로 쉴 새 없이 소리 없는 수다를 떨기도 한다. 이런 장면들은 장애를 과하게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일상인으로서의 장애인과 그들의 문화를 매력적으로 보여준다.

 

▲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한 장면. 진우의 절친이자, 진우를 통해 농인 여성 은소희(정새별 분)와 결혼하는 홍기현(허준석 분)은 진우의 입체적인 성격을 드러내 주는 캐릭터로, 진우에게 모은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그런가 하면 진우의 오랜 절친 기현(허준석 분)을 통해서는 진우의 입체적인 성격과 특성이 드러난다.

 

-기현: 너 옛날에 나 없으면 짜장면도 못 시켰는데. 예전엔 내가 너한테 짜증도 많이 내고 그랬는데.

-진우: 괜찮아. 대신 많이 맞았잖아, 나한테.

 

-기현: 너는 스스로 아주 착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하지? 착한 거 오케이. 따뜻한 거 아니야, 임마.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기현은 진우를 과묵하고 잘생기고 ‘신비로운’ 농인 화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뒹굴고 치고받으며 함께 자라온 시간을 끊임없이 끌어올리며, 그들의 관계가 배려심 많은 비장애인과 착한 장애인의 도식에 갇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진우는 옆 사람들과 함께 장애혐오와 자기비하에서 벗어나는 발걸음을 내딛기도 한다. 누구나 당연히 소리를 들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회에서 생기는 오해를 당연하게 감수해 온 진우는 모은과 함께 오해를 소통으로 바꾸어 간다. 그런가 하면 기현은 장애를 이유로 모은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를 주저하는 진우를 기꺼이 타박하고,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드라마의 한 장면 한 장면은 소소함으로 채워진다. 진우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슬렁슬렁 걸어 기현의 술집에 가고, 모은은 기타 연습을 하러 진우의 집을 찾는다. 슬렁슬렁 서로를 찾는 발걸음 속에서 진우와 모은과 기현은 서로를 통해 조용한 혁명을 일궈낸다. 기현은 진우를 통해 농인 아내 소희(정새별 분)와 결혼한다. 그는 친구와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딸에게 찾아온 난청에도 공포와 혐오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진우는 실패한 연애 경험에서 벗어나 기꺼이 모은의 손을 잡는다. 이 정도로 이들이 장애운동가가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세 사람의 통장에서 장애인 운동에 보내는 후원금이 매달 빠져나가고 있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이야기가 흐르지 않을 때

 

한편, 진우의 옛 연인 서경(김지현 분)의 등장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한다. 서경은 여러모로 모은을 긴장하게 한다. 무엇보다 모은은 이제 막 수어를 배우고 있는데, 그녀는 수어에 능통해 자유자재로 진우와 대화한다.

 

진우가 서경과의 지난 이야기를 해줄 때까지만 해도 모은과 진우의 관계에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은은 설레고 새롭기만 했던 진우와의 차이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이것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인 피로 때문에 실감하게 된 ‘현실’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둘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하는 시점은, 서경과 이어지는 관계에 대해 모은이 진우에게 질문하거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려워지는 순간과 일치한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한 장면. 진우의 옛 연인 송서경(김지현 분)의 등장으로, 두 주인공의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한다.


사실 어린 시절의 서경과 진우 또한 그랬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진우에게 자신의 문제를 숨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서경은 그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서경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동반자에서 진우를 제외시키는 순간부터, 그녀는 진우와 만들어갈 러브스토리에서 클리셰(뻔한 설정)를 몰아내는 데 더이상 성공하지 못한다. 두 사람 사이에 직조되는 이야기에 대한 해석권을 ‘비장애인은 희생하고 장애인은 의지한다’는 낡아빠진 허구에 넘겨버린 이후에 그들이 상상하는 미래 또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경과 헤어지고 힘겨운 방황을 하던 진우가 마침내 가닿은 사람, 모은은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그녀는 진우의 지나온 삶과 일상에 대해 궁금한 것이 넘쳐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제도 숨기지 않는다. 배우인 그녀는 연기에 대해 혹평을 들었을 때 진우의 등에 기대어 울고, 자신의 불안을 진우와 공유한다. 진우는 대사를 들을 수 없어도 관람석에 앉아 모은에게 수어로 격려를 보낸다. 나의 질문과 요청쯤 넉넉히 감당해줄 거라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서로가 더 궁금해지고 상대를 만날 생각에 설렌다.

 

다름은 분명 불편으로도 작용한다. 하지만 불편한 순간 내가 너를 위해, 네가 나를 위해 해주는 새로운 선택들도 기대되기는 마찬가지다. 모은이 진우와 함께 영화를 볼 때 자막이 있는 외화를 선택하고, 진우는 모은이 연기하는 연극의 대본을 읽는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말을 듣고 함께할 수 있는 것과 방식을 상상한다. 매번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 상상은 다른 관계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모은이 출연하는 연극에 수어 통역이 도입되는 것처럼 말이다.

 

질문할 자격

 

실제로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에피소드마다 장애에 대한 온갖 클리셰를 보란 듯이 피해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한 평론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결국 이 드라마도 농인 진우보다는 청인 모은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백수정, 무례한 짐작 그리고 상상,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함께걸음, 2024.2.20.)

 

일례로 모은은 서경과 진우의 관계에 계속 흔들리지만, 진우는 어릴 때부터 항상 모은 곁에 있었으며 조금만 살펴도 모은에 대한 사랑이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조한에게 아무 경계심을 갖지 않는다. 모은이 조한과 약속이 있다고 하면 흔쾌히 보내준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자면 진우는 모은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드라마는 마음이 넓고 사사로운 질투에 얽매이지 않는 성숙한 진우를 상정한 듯하다. 하지만 사소한 감정을 초월해 있고 비장애인보다 ‘성숙한’ 장애인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장애혐오가 되기도 한다.

 

진우의 예민함은 오직 모은이 자신의 장애를 불편해하는 순간에만 작동한다. 그는 모은에게 예민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마치 자신은 질문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처럼. 오직 모은에 대한 미안함만이 그의 괴로움의 근저를 형성한다.

 

달콤하게 서로에게 뻗어나가던 모은과 진우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한다. 진우와 서경은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업무 파트너가 되고, 서경은 자신이 진우를 제일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며 계속 진우 근처를 맴돈다. 모은도 어느 정도는 서경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내뱉지 못하는 서운함과 불안이 쌓여간다.

 

마음을 솔직하게 표출하지 못하면서 모은은 대신 다른 곳에 감정을 투사한다. 자신의 어조 하나로 기분을 알아주지 못하는 연인과 시시껄렁한 수다로 밤새 통화할 수 없는 연애가 결핍으로 다가오고, 멀리서 부를 수도 얼굴을 보지 않고는 간단한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시간이 유독 답답하게 느껴진다.

 

진우와 모은의 관계는 몸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소통의 단절로 인해 클리셰에 점령당한다. 달콤한 시간을 가지는 동안 쉽게 의문을 제기했던 갖가지 편견에, 말문이 막힌 모은은 힘 한번 제대로 못 쓰고 항복한다. 모은의 답답함을 예민하게 감지한 진우 또한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 습관 그대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별을 통보한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농인 남성 주인공 진우는 질문을 하기보다는 질문을 받는 존재이지만, 마음에 뭉친 응어리를 고백하는 건 늘 상대방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진우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사과를 남발한다는 데에 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진우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 사과를 남발한다는 데에 있다. 진우는 질문을 하기보다는 질문을 받는 존재이지만, 마음에 뭉친 응어리를 고백하는 건 늘 진우의 상대이다. 친구와 연인, 전 연인, 그 전 연인을 짝사랑하던 남자까지 진우 때문에 힘들었던 과거의 감정을 풀어놓는다. 드라마는 진우에게는 그의 마음이 아닌 ‘장애인인데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장애가 있는 진우를 ‘견딘’ 비장애인들에게는 심정을 묻는다. 비장애인들이 심정을 토로하면 진우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진심 어린 사과’로 답한다. 진우는 그러므로 질문을 받지만 대답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질문도 대답도 모두 정해져 있다.

 

다시, 안부를 묻다

 

그러니까 매주 나를 설레게 한 이 드라마도 장애인에게 무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는 결국 끝까지 ‘본방 사수’하고 말았다. 나의 ‘찌질함’과 맞닿아 있는 진우의 ‘찌질함’을 다시 TV에서 볼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득시글거리는 비장애인들 틈바구니에서 나를 훼손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어기제 특히 ‘미안해’와 ‘고마워’로 나를 보호하며 조용히 생존하고 싶었던 나의 시간이 그의 시간에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장애인 캐릭터가 특별히 유능하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아닌, 성장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게 못내 좋았다. 비록 진우 또한 말 잘 들어주는 ‘선한 장애인’이란 이미지에 여전히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떤 드라마보다 더 섬세하게 장애인의 성장을 담고 있었다.

 

마지막 화에서 진우는 모은에게 돌아가, 성큼 먼저 인사를 건넨다. 진우가 인사를 건넨 이후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떻게 이어졌을지, 질문과 대답의 균형이 전과 달라졌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지 모른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기울어진 문화는 아직도 너무 강고하니까. 그래도 두 사람은 새로운 습관을 조금씩 더 익혀갈 것이다. 과거의 습관과 관습만으로는 같이 걸을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으므로.

 

스스로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최대한 소심하게 살지만,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성장할 수밖에 없어서 아주 천천히, 소심하게 자라고 있는 나처럼 말이다. 지난 겨울, 나는 그저 나만큼 소심하고 딱히 멋질 것도 없는 모은과 진우를 만나서 좋았고, 헤어질 땐 다시 못 볼 사람을 배웅하듯 울적했다. 제법 따뜻했던 겨울이었다.

 

[필자 소개] 박은영. 공부하고 글 쓰는 장애여성.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온 삶을 엮은 『소란스러운 동거』를 출간했다. 비영리단체 다른몸들 산하 모임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7년째 다른 아픈 여성들과 함께, 다양한 몸을 가진 이웃들이 동등하게 존중받으며 함께 사는 길에 대해 수다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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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4 [14:48] 수정 | 삭제
  • 나 이거 봐야겠네
  • ㅇㅇ 2024/04/30 [13:56] 수정 | 삭제
  • 섬세한 일상들이 가지는 힘이있다는 얘기가 참 좋다
  • 사월 2024/04/26 [16:48] 수정 | 삭제
  • 글이 너무 잔잔하고 조금 슬프고 좋네요. 이 드라마 봄밤에 정주행하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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