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슬픔을 ‘자기책임’으로 돌리지 않기

‘케어 미츠 아트 연구소’ 설립한 이리에 안

무로타 모토미 | 기사입력 2024/05/07 [10:32]

상실의 슬픔을 ‘자기책임’으로 돌리지 않기

‘케어 미츠 아트 연구소’ 설립한 이리에 안

무로타 모토미 | 입력 : 2024/05/07 [10:32]

‘그리프 케어’(grief care)라는 말이 지금 조용하게 일본 사회에 침투하는 중이다. ‘그리프’는 상실의 고통을 의미한다. 사고나 사건, 재해, 병 등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일은 누구에게든 견디기 힘든 일이다.

 

세타가야 일가 살인사건의 유족이 된 경험

 

“극복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기답게 슬퍼하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문필가 이리에 안(入江杏) 씨. 그녀는 8년간 영국에서 생활하다 가족과 함께 귀국한 직후였던 2000년 12월, 도쿄 세타가야 일가 살인사건으로 가까이에 살던 여동생 가족 네 명을 잃었다. 이 사건은 23년이 지난 지금도 미제 상태다.

 

▲ 이리에 안(入江杏) 씨. 1957년 도쿄도 출생. 문필가. 조치대학 ‘그리프 케어 연구소’ 비상근 강사. 2000년 말, 도쿄 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으로 여동생 일가를 잃음. 2006년에 ‘케어 미츠 아트 연구소’를 설립. 『나로부터 시작한다』, 『슬픔과 함께 어떻게 살까』 등의 저서 다수. 페이스북 @irie.ann.1 (사진: 오치아이 유리코 ©落合由利子)


그 후 긴 시간 동안 이리에 씨는 쏟아낼 곳 없는 슬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등 다양한 고뇌에 사로잡혔다. 말을 잃고, 좋아하던 책조차 읽지 못하게 됐다.

 

“저는 나서서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는데, 언론 등 외부로부터 ‘사건의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 ‘유족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낙인이 찍혔어요. 그것 때문에 한층 더 막다른 곳으로 몰렸죠.”

 

살인사건의 첫 번째 발견자였던 이리에 씨의 어머니(작고)는 세간의 차별적인 시선과 편견을 염려해, 은행이나 병원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일조차 두려워했다.

 

“살인사건의 유족이 된 경험은 말이나 이념, 상식으로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비합리성이었습니다.”

 

그리프 케어란, 연루되는 것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손을 움직이고 있는 사이, 한 장의 그림이 완성됐다. 그것을 엮듯이 이었더니 그림책이 됐다. 2006년에 출간한 『계속 이어져 있어~ 작은 곰 미슈카 이야기』가 그것이다. 미슈카는 이리에 씨의 조카 니나와 레이 남매가 아끼던 인형의 이름. 그림책 출간은 이리에 씨가 자신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외부에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에서 그리프 케어를 공부하고, 2006년 12월에 슬픔에 대한 사유를 나누는 모임 ‘미슈카의 숲’을 개최. 지금은 작가와 소아과 의사, 종교학자 등이 각각의 관점에서 그리프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양한 고통, 슬픔과 마주하고 서로 공감을 나누는 장으로 발전했다.

 

2023년에는 ‘케어 미츠 아트’(Care Meets Art)라는 제목으로 참여자들이 예술을 매개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기획도 시작했다. 예전의 자신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괴로움이나 여러 어려움을 갖고 있을 때에는 그림과 음악이 그 힘을 빌려준다고 믿으며.

 

▲ 이리에 안(入江杏) 작가의 책들. 『슬픔을 사는 힘-피해자 유족으로부터 당신에게』, 『나로부터 시작한다』 표지 이미지.


사건으로부터 10년 후, 항상 의지가 되어줬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어머님의 임종까지 겪어야 했던 이리에 씨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획을 통해 만난 분들 중에는 ‘가족이나 친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야기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었고, ‘말기암인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극복하세요.’라는 말은 결국 자기책임을 강요하는 거죠. 자신의 슬픔에 연루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거나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게 합니다. 그것이 슬픔을 극복하거나 해소하는 것이 아닌, 제가 생각하는 ‘그리프 케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케어란 ‘연루되는 것’.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처음에는 점이었던 것이 선으로 연결되고 면으로 펼쳐진다는 점을 이리에 씨는 실감해왔다. 타인의 슬픔에 마음을 쓰고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이 사회는 더욱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집도 직장도 아닌 ‘제3의 장소’ 만드는 꿈

 

“제게 어떤 사명감이 있어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원래 목표를 정하고 움직이는 것을 잘 못해서 항상 표류해요.(웃음) 표류의 장점도 있잖아요. 지금은 이걸 하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하면 그게 저쪽에서 나타나거든요.”

 

이리에 씨가 고백했듯이, 습관적인 일은 잘 못 하지만 매일 아침 불단에 물을 올리는 일은 빼먹지 않는다. “넣어야 하는 안약이 거기 놓여 있거든요.(웃음)” 표류하는 자유로움과 장난기가 그녀의 장점이다.

 

올해,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일이 있다. 직장이나 학교, 가정 등이 아닌 제3의 장소, ‘서드 플레이스’(Third place)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디어의 계기가 된 것은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시바노이에’(芝の家, 잔디집)라는 곳이다. 미나토구와 게이오대학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간으로, 인근의 어린이들도 노인들도 자유롭게 드나들며 놀거나 차를 마실 수 있다.

 

도쿄 출신인 이리에 씨는 본인이 나고 자란 마을에 ‘서드 플레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누구든 마음 편히 찾아갈 수 있는 장소,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손을 내밀어주는, 그런 연루가 발생하는, 연루가 자라는 장소.

 

“사건 후에 저 역시 오랫동안 사회에서 튕겨 나와, 있을 만한 곳이 없었어요. 자기의 장소를 잃어버린 사람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공간, 주변 사람들이 그냥 불쑥 찾아와도 되는 따뜻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지역의 민간학교를 운영했던 여동생과 이리에 씨에게는 꿈이 있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각자 자기다운 시간을 보내는, 다양한 것을 보고 듣고 숨돌릴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좋겠다고. 동생과 함께 꾸었던 꿈도 이루게 된다. [번역: 고주영]

 

-〈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제공 기사입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ㅈㅇㅎ 2024/05/12 [09:33] 수정 | 삭제
  • 서드 플레이스 필요함. 나이들수록..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