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6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학생인권 조례 폐지안」이 가결됐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 12년만의 일이며, 이는 서울시의회 다수당인 국민의힘 의원 60명이 찬성 표를 던진 결과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30명은 표결에 불참하며 보이콧 했지만, 결과를 막을 순 없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제안한 이유를 살펴보면, “일선 교육 현장에서 교권 추락의 주된 원인으로 학생인권조례가 지목”되고 있다는 점, “현행 학생인권조례는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등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항목들을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포함”시킨다는 점, 그리고 “학생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조성한다는 비판 여론이 있다”는 점을 거론한다. 과연 정말 그러한가?
17일 오전 서울특별시의회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규탄하는 여성/페미니스트들이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서울시의회는 학생인권조례를 존치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가자들은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얼마나 후퇴적인 행보인지 목소리 높여 비판했다.
스쿨미투가 보여준 학교의 현실을 잊었나?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의견 중 하나는 이 조례가 학생들에게 과도한 인권을 보장하여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빈둥 활동가는 “여태껏 학생인권이 제대로 보장된 적이 없었음을 떠올리며, 절망감을 느낀다”고 분노했다.
“학생인권 과잉이라는 헛소리와 달리, 조례는 제정된 지역보다 제정되지 않은 지역이 더 많고, 조례가 제정된 지역들에서도 학교장에 따라 학생인권 상황은 들쭉날쭉인데다 체벌, 두발복장 규제, 보충야간학습 강제 등 학생인권 침해의 문제들이 온전히 근절된 적이 없다”는 것.
이어 빈둥 활동가는 “조례가 법적인 강제성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 학교에서 따르지 않는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학생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학교와 교육구조, 관계 등을 바꿔나가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짚었다.
정말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이 과도하게 ‘보장되고’ 있다면, 학교와 관련된 학생들의 비판의 목소리 또한 응답 받아야 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례가 제정된 지역의 학교 역시 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거나 정치적 실천을 하면 해당 학생을 색출해 징계를 내렸다. 학교 성폭력/성차별의 문제를 고발한 학생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멸시와 조롱을 겪어야 했다.”
“학생인권조례는 나를 교사로 계속 살게 했다”
학생인권조례와 소위 ‘교권’을 자꾸 대립시키는 방식에 대해서도 강한 비판이 쏟아졌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소속의 이희진 초등교사는 “후배교사들 앞에서 체벌의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 시절”부터 교사 생활을 했다며, 당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괴로웠다고 밝혔다. “학교는 내가 학생일 때도 끔찍했고, 교사일 때도 끔찍했다.”
그런 이희진 교사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학생인권조례 덕분이었다. “내가 학생일 때 싫었던 일을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학교는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학생들의 다양성을 격려하며 민주시민으로서 함께 인권 보장의 방법들을 탐색해가는 교사의 모습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구나. 드디어 내가, 우리가 학교에서 덜 고통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
이희진 교사는 “학생인권이 과잉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당최 모르겠다”며 “한국은 매번 UN인권위에서 어린이-청소년 인권 실태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국제적인 권고를 받는 나라”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는 “인권이 과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권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민이 알고 있듯이 한국의 10대 자살률은 엄청나게 높고, 공적 안전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삶의 불안정성은 교육을 계급 상승의 사다리로 여기게 하고, 학교와 교사들에게 필요 이상의 엄격함을 요구하게 만든다. 학교 교육에서 실수하게 되면 이후의 삶이 큰 타격을 받으니 학생과 보호자들은 혹여나 하나라도 불이익을 받을까봐 교사에게 날을 세우고 대하게 된다. 인권이 과잉한 것이 아니다. 부족한 것이다.”
백래시 부추기고 혐오를 양산하는 정치를 멈추라!
“학생인권조례의 당사자이자 핵심 주체인 학생들을 철저히 삭제한 채로 폐지안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현실이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몽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지적했다. “주민참여와 지방자치를 위해 만들어진 주민조례발안 제도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시스템으로 회귀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몽 공동집행위원장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사회공동체에 속한 동료로서 다른 사람의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서로의 존엄과 권리를 상호인정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라며 “학생인권조례가 그 기회의 토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생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조정하고 젠더갈등을 부추긴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교권이 무력화되어 교사들의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그 이유를 학생인권조례로 돌리기도 한다. 마치 학생인권과 교권이 대립하여 무언가를 취하면 다른 무언가는 빼앗기는 것처럼 호도한다. 백래시가 거세진 학교 현장에서, 이들의 주장은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혐오와 차별을 양산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이 조례뿐 아니라 “우리사회의 인권의식의 퇴행”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했다. 최란 부소장은 “한국정부는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며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저출생인구대책부를 신설하겠다고 하며, 14일 이뤄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제9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에서도 ‘사회적 공감대, 토론, 검토’ 등 구체적 계획 없는 형식적인 답변만 내놨다”고 지적했다.
기자회견에 모인 여성/페미니스트들, “학생인권조례 폐지 규탄” 서명에 참여한 이들은 “‘과도한 인권’, ‘조기 성애화’, ‘동성애 조장’과 같은 반인권적인 혐오 선동을 벌이는 세력의 갈채 속에 학교와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주의 가치가 무너져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학생 인권의 보장을 위한 더 보편적이고 힘 있는 제도의 마련이 절실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학생인권법 제정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국회는 학생 인권과 학교 현장의 보편적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책임을 다하라.”고 함께 목소리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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