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소개] 문아영. 퀴어예술매거진 them 에디터. 퀴어 웹툰에 관한 인터뷰와 대담을 기획했다. 사랑하는 동료들과 제6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준비하고 있으며,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 중이다. 여성 영화와 퀴어 영화를 관람하고 연구한다.
퀴어 영화와 드라마 속 ‘나’의 이야기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한 여자 사랑 이야기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스스로 퀴어-페미-덕후로 정체화하는 저자 개인의 경험과 작품에 대한 감상을 중심으로 한 권의 퀴어 영화/드라마 가이드북을 표방한다. 차례에서 각 소제목은 작품의 제목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이름을 병기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 여자 이야기 질리도록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12쪽)는 저자의 의중처럼 지독하게 사랑했거나 뒤늦게나마 주목하고자 했던 ‘여성’ 캐릭터들을 연달아 호명한다.
동시에 각 부의 구성은 작품의 제작 순서나 장르 범주가 아닌 어릴 적부터 여자를 좋아했던 저자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고 훗날 페미니즘을 알게 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때문에 1부에서는 저자가 여성 인물 간의 스킨쉽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순간과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기억, 그리고 벽장을 나서 레즈비언 클럽에 방문했던 경험이 작품과 함께 언급된다.
이와 달리 2-4부에서는 여성과 소수자의 시점으로 작품을 관람할 때 마주하게 되는 세계의 다양성과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 속 세계는 저자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인 동시에 이성애중심성에 들어맞지 않는 낯선 여자들을 마주하고 소수자가 관여하는 창작 환경을 아우른다.
한편,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는 책에서 언급된 작품 목록이 퀴어 영화와 드라마를 범주화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성소수자에 관한 용어를 설명하면서도 “레즈비언 중심의 퀴어 여성애자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것”(14쪽)이라며 주관적인 서술을 강조한 저자의 태도와 연결된다. 선정된 작품 또한 영화 〈동방불패〉(1992)와 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2022)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여성애자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이 같은 지점은 저자가 각 작품의 퀴어한 지점을 등장인물의 정체성에 한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중요한 건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가 무슨 작품에 레즈비언이 등장하는지 알려주는 역할 외에도 해당 영화와 드라마가 어떤 지점에서 저자 자신을 이쪽/이반, 퀴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게끔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는 책 자체가 전통적인 비평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퀴어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내 이야기’를 발견하는 즐거움에서 비롯된 하나의 퀴어 아카이브를 형성하고자 한다.
퀴어 당사자와 창작자가 서로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저자인 박주연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의 기자로 일하며 오랫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미디어 속 퀴어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해 왔다. 사회, 정치, 문화 분야를 망라하며 국내 언론에 필요한 퀴어 페미니즘적 시각을 더해온 박주연은 일찍이 드라마 〈마인〉(2021)의 방영 당시 한국 드라마 속 성소수자 재현이 변화한 궤적을 짚어냈으며(‘마인’…한국 드라마에서 성소수자 재현 어디까지 왔나), 미디어가 현실의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창작자를 포함한 제작 과정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니 LGBT가?” 이후, 우린 더 나아갈 수 있다!) 피력한 바 있다.
이러한 활동은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의 ‘케이팝을 퀴어링’, ‘퀴어돌 영업왕’에 출연하거나, 퀴어예술매거진 them의 행사 〈퀴어, 피메일, 판타지〉에서 〈퀴어베이팅을 먹고 자란 여덕의 몸엔 사리가 몇 개나 될까?〉라는 제목의 발표를 진행하는 등 미디어 문화 속 퀴어베이팅(Queer Baiting; 퀴어를 재현하는 듯한 행위로 퀴어 시청자의 관심을 낚지만, 실제로 퀴어를 재현하는 건 아니어서 동성애혐오 세력의 비난은 피하는 것) 사례에 목소리를 높여온 일과도 연결된다.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는 박주연의 앞선 활동과 주장을 한 권의 책에 집약한 결과물이다. 저자의 여자 사랑에 진정성을 느끼는 이가 있다면, 이는 그의 연애사나 그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꿰고 있는지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아온 그의 퀴어 콘텐츠에 대한 관심과 활동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실제로 각 페이지 하단의 각주에서 저자가 쓴 기사가 참고문헌으로 인용된 모습을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으며,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각 작품의 상세한 정보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책은 차례에서 언급된 영화와 드라마 이외에 책, 노래, 만화,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 작품 간에도 연결 고리를 찾아 이야기하는 글의 방향은 자기 장르를 영업하고자 하는 덕후로서의 면모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나아가 저자는 책 전반에서 퀴어/성소수자 캐릭터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행복한 결말에 대한 개인적 선호를 넘어서 “2010년대 이전 시기의 퀴어 서사는 주로 우울하고 불행”한 데다가 당시 미디어가 “‘결국 퀴어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자주 반복해서”(55쪽) 보여줬기 때문이다. 저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퀴어 캐릭터를 보면서 느꼈던 충격과 절망을 고백하는 한편, 관련된 통계와 캠페인 사례를 통해 미디어에서의 성소수자 재현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이렇듯 성소수자에 대한 왜곡된 재현과 퀴어베이팅의 문제는 저자의 주요 논지인 만큼 1-3부에 부록으로 첨부된 〈퀴어 페미 덕후의 한풀이〉라는 제목의 챕터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앞선 문제의 연속선상에서 저자는 “당사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퀴어 콘텐츠가 가능한가?”(258쪽)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변으로 퀴어/성소수자인 제작진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당사자와 연구자, 활동가가 합류할 수 있는 창작 환경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저자는 퀴어 영화와 드라마를 주요한 텍스트로 삼는 것에서 나아가 제작 당시 어떠한 논의가 발생했는지 그리고 감독과 배우, 작가가 훗날 어떤 퀴어 콘텐츠에 참여했는지 짚어냄으로써 각 작품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퀴어 페미니즘적 비평과 제작진의 필모그래피 전반으로 확장한다.
이로써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는 퀴어 영화와 드라마를 감독 한 사람의 영향 아래 두지 않고 배우, 작가, 제작자 그리고 성소수자 당사자의 역할을 조명해 독자에게 퀴어/성소수자 친화적인 제작 과정이 지닌 의미를 설득한다.
저자가 위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이 시기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문화 향유를 기억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말하기를 요구하고 수집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퀴어 콘텐츠 해적질의 기쁨
책의 마지막 장에 실린 영화/드라마 목록은 저자가 언급한 작품의 일부가 제작 연도, 제작 국가, OTT 플랫폼의 정보와 함께 기술되어 있다. 두 쪽을 가득 채운 목록을 보고 있으면 마치 우리가 볼 수 있는 퀴어 영화와 드라마가 매우 많은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와중에 이는 5월이 지나면 일부 수정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바로 국내에서 〈엘 워드〉를 독점 상영하고 있는 쿠팡플레이 측에서 5월 31일 이후 해당 작품의 서비스를 종료할 예정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의 서평을 쓰기 바로 며칠 전 관련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화가 난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건 〈엘 워드〉의 서비스 종료를 결정한 OTT 플랫폼에 대한 분노이면서, 처음 〈엘 워드〉가 스트리밍되기 시작했을 무렵 느꼈던 기쁨과 소중함을 잊은 채 아직도 전 회차를 모두 소화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기도 했다. 남은 기간 안에 〈엘 워드〉를 정주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에서 나를 비롯해 지금껏 관람을 미뤄온 이들은 그저 손을 놓고 〈엘 워드〉가 서비스 종료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또한, 현재 OTT 플랫폼에서 스트리밍되는 작품이라 해도 〈엘 워드〉와 같이 언제 갑자기 서비스를 종료할지 모르는 일이다. 책이 출간된 5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주요 작품의 서비스 종료 소식이 들려온 것처럼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가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시점에는 또 어떤 퀴어 영화와 드라마를 놓치게 될지 알 수 없다.
또 다른 예시로 드라마 〈포즈〉(2018-2021)는 국내에서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되기 시작했지만, 현재는 디즈니 플러스에서 스트리밍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디즈니의 경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전개되고 있음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면서, 디즈니 플러스의 구독을 해지하는 보이콧 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그렇다면 퀴어 영화와 드라마의 관객은 OTT 플랫폼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포즈〉가 또다시 다른 플랫폼에서 서비스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사실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에는 공식적인 경로로 관람할 수 없는 작품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일찍이 저자는 과거 OTT 플랫폼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소위 불법 경로를 통해 콘텐츠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10쪽)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은 이용하지 않는 방법이라며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각 작품에 대한 저자의 감상과 비평이 독자에게 설득력이 있고 매혹적으로 느껴질수록 정작 독자는 합법과 불법을 막론하고 해당 작품을 찾아내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일정 부분 퀴어 영화와 드라마의 해적질을 부추긴다.(공식적인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 영화를 훔치고 공유하는 해적질 문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민수, 『영화도둑일기』, 미디어버스, 2024)
본래 더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과 등장인물이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출간할 수밖에 없었다는 저자의 말은 추측하건대 현재 공식적인 경로로 볼 수 없는 퀴어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저자의 다양한 기록을 포함하지 못한 이유라 생각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볼 수 없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이 있다면, 이에 관한 기억과 감상은 더더욱 쓰이고 공유됨으로써 남겨져야 한다. 때문에 “어느 플랫폼에서든 볼 수 있는 작품 위주로 이야기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한 작품이 꽤 있다는 점”(13쪽)은 이 책이 가진 한계가 아니라 강점이다.
이 같은 이유에서 내가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를 읽으며 가장 반가웠던 작품은 저자가 비극적인 결말의 예시로 언급한 영화 〈식물학자의 딸〉(2006)이었다. 한창 레즈비언 영화를 해적질하던 시절에 관람한 작품으로 다른 영화에 비해 자주 언급되는 작품도 아닐뿐더러 이 책에서 다뤄질 거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책을 쓰면서 많이 떠올렸다던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없거나 보이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찾아다녀야 했던 사람들”(314쪽)에게는 퀴어 영화와 드라마를 접할 수 있는 공간과 성소수자 친화적인 제작 환경만큼이나 퀴어 콘텐츠를 찾아다니는 일의 기쁨이 필요하다. 때문에 나는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가 독자들에게 OTT 플랫폼 어딘가에 퀴어 영화와 드라마가 있음에 마음 놓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는 자극의 출발점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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