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 치지 않고 계속 쓸 수 있는 땅은 없을까요?”
한 주말농장을 3년 동안 계약해 밭 주인과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했을 때, 드디어 내가 원하는 조건을 내세워 협상을 시작했다. 1997년부터 주말농장을 운영해 온 밭 주인 부부에게 ‘로터리 치지 않은 밭(트랙터로 땅을 갈지 않은 밭)’을 요구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친환경 농법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밭을 갈 때마다 다년생 식물을 뽑아서 집에 들여다 놨다가 밭을 간 후에 다시 심어두는 ‘식물 이사’에 이골이 났기 때문에 이제는 한 땅에 정착하고 싶었다.
게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나침반 애플리케이션을 켜니, 정남향에는 아파트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아파트와 그 그림자가 남쪽 해를 가로막은 데다, 풀로 뒤덮인 쓰레기 밭이 바로 내 자리인 거다.
인생이 뭐 이렇게 ‘밸런스 게임(극단적인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게임)’ 같나 싶지만, 나에게 가장 간절한 건 오랫동안 쓸 수 있는 ‘내 자리’였다. 월동할 수 있는 다년생 식물을 심고, 씨앗이 떨어지면 이듬해 다시 같은 작물이 자라는 생명력 넘치는 그런 내 공간 말이다. 그것이 온갖 좋고 나쁜 가능성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판도라 상자인 줄도 모르고.
밭에서 쓰레기 줍다 ‘밭로깅’ 창시한 사연
밭 주인이 마지막으로 말끔하게 갈아준 밭 위에도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줍다 보니 50L 종량제 봉투가 꽉 찼다. 새로 장만한 땅에 ‘틀 밭(raised bed)’을 건설해 보겠다고 삽을 넣자 비닐, 부직포, 에너지 음료 캔, 가구, 전선, 심지어 군대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지뢰 모형과 폐기물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쓰레기 종류는 다 이곳에 묻힌 것처럼 느껴졌다.
밭의 가장 끝부분인 내 자리는 군인아파트 바로 밑이면서 군대 옆이자 버스정류장 바로 밑이기도 했다. 버스정류장 근처에서는 담배꽁초, 과자, 캔, 페트병, 마스크가 많이 발견됐고, 아파트 바로 밑에는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갔을 그릇 세트, 옛날 장판 같은 게 가득했다.
그 중에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다름 아닌 농업 폐기물. 비닐이나 그물망, 부직포는 얇고 가벼운 소재이지만, 넓고 기다란 면적이 땅속에 무질서하게 휘감겨 흙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척추 건강과 바꿔가면서 집착하며 캐내야 했지만 그마저도 땅속 깊은 곳에 돌이나 통나무 밑에 깔린 농자재는 발굴을 포기해야 했다.
틀 밭만 만들었다면 닷새 만에 끝났을 작업이었지만, 쓰레기를 캐내며 만들어서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처음에는 50L 종량제 봉투를 사서 집 앞 쓰레기장에 내놨지만, 나중에는 감당이 안 돼서 밭에 굴러다니는 상토 포대, 비료 포대를 동원해 담으니 50L 용량 포대가 40개나 나왔다.
개인적으로도 치우고 구청까지 동원해서 쓰레기를 겨우 청소했다 싶었는데, 텃밭 이웃들은 내가 쓰레기를 치운 자리에 모종판부터 비료 포대, 씨앗 봉투까지 다양한 쓰레기를 얹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언 1년 반, 쓰레기를 쌓는 놈과 치우는 놈의 핑퐁은 계속됐다.
참가자들 모두 농사나 텃밭 생활에 대한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는 반응이었지만, 궂은일도 함께하니 화가 나는 노동이 아닌 재미있는 이벤트가 됐다. 밭로깅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밭에 쓰레기가 잔뜩 쌓이면 종종 열리고 있다. ‘쓰레기 줍는 사람이 쓰레기 투기하는 사람들을 이기는 그날까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음쓰’와 오줌 모아 키운 작물
밭에 마구잡이로 버린 쓰레기처럼 나를 미치게 하는 쓰레기도 있지만, 세상에는 좋은 쓰레기(?)도 있다. 바로 사람들이 가장 혐오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음식물 쓰레기(음쓰)다.
사람들은 ‘음쓰 전용 냉장고’나 전기로 음쓰만 따로 말려주고 갈아주는 신문물(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까지 동원할 만큼 음쓰를 골칫거리로 여기는데, 전기를 쓰지 않고 일을 많이 하지 않아도 좋은 퇴비가 되는 방식도 있다.
이 좋은 걸 혼자만 하는 게 아쉬워서 2021년, 동네에 음쓰를 퇴비로 만들어 모두를 위한 꽃을 기르는 ‘귤현동 분해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농부시장 마르쉐@’에 ‘퇴비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마르쉐 소비자들의 음쓰 퇴비를 마르쉐 농가에 순환하는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나 혼자서는 음쓰와 휴지나 박스 같은 썩는 쓰레기를 연간 200L 정도 퇴비로 쓰고, 분해정원에서는 2022년 총 1400L의 음쓰를 퇴비화했으며, 퇴비클럽은 작년에 620L의 음쓰를 퇴비로 순환했다.
게다가 정성 들여 다듬은 채소 자투리와 과일 껍질, 마른풀을 섞어 며칠 동안 발효시키면 어찌나 기분 좋은 향이 나는지! 탄산처럼 톡 쏘는 꿀 향을 풍기는 것이 꼭 콤부차 같다. 땅을 마지막으로 간 지 3년이 되고 음쓰와 오줌을 모아 땅 위에 꾸준히 양분을 쌓아 주는 지금, 텃밭에는 쓰레기 대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지렁이가 가득하다.
두 가지 이상의 환경이 만나는 경계는 생태계가 중첩되어 다양한 자원과 생존 조건을 만들어 생물다양성이 확장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현상을 생태학에서는 ‘가장자리 효과(Edge Effect)’라고 부른다. 지금의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는 중앙에서 자꾸만 밀려난 존재들이 닿는 곳이 변방이지만, 사실 가장자리는 다양한 존재들을 품어내는 풍요로운 공간이다.
사실 작물을 아무리 생태적인 방식으로 길러보고자 노력하는 작은 밭이라도, 기후 위기의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작년에는 자급용으로 고작 열 포기 정도 심은 고추에 노린재가 득실거려 남들은 끝물 고추를 수확할 때 고추가 잔뜩 달리기 시작했다. 밀원수(꿀벌이 꿀과 화분을 수집하는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도 벌이 한동안 사라진 적도 있었다. 가물어서 잘 자라지 못하는 작물도 있고,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속절없이 말라 죽는 작물들도 있다.
텃밭 이웃들은 비닐로 땅을 가리고 농약을 더 자주 치는 것으로 극복하고 있지만, 나는 더 다양한 곤충과 야생동물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균형을 맞춰 보려고 한다. 그것이 사람의 집과 길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은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의 방식이니까.
-‘기후위기 체감하는 여성 농부들의 메시지’ 기록은 아름다운재단(beautifulfund.org) 지원으로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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