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더십, 지금 한국에서 왜 아이슬란드인가?아이슬란드 톺아보기① 2008 ‘프라이팬 혁명’과 국민참여형 헌법 개혁올해 세계여성의날 진행된 ‘3.8 여성파업’에 참여하기로 한 건, 〈일다〉에 게재된 「3.8 세계 여성의 날 ‘꽃보다 여성파업’」 (https://ildaro.com/9829) 기사를 읽고 나서다. 내 경우, ‘세계여성의날’인 금요일에는 일이 없어 파업에 참여하기 어려우니, 자원활동가로라도 여성의날 행사에 참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만일 그날 교육 일정이 잡혔더라면, 나는 여성파업에 동참하기 위해 강의를 하지 않겠노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상상이지만 암담한 기분을 느끼며, 아무 일도 없는 날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이슬란드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여성 총파업’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하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아이슬란드는 전체 여성의 90%가 참여한 1975년의 총파업 이후, 50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정치, 고용, 교육, 보건 분야 등에서 성별 격차를 크게 줄였다. 세계경제포럼이 펴내는 ‘글로벌 젠더 격차 보고서’(The Global Gender Gap Report)에서 14년째 성평등 지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
최근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소멸, 지역소멸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한국 사회에 성평등 1위 국가 아이슬란드의 부모휴가 제도(Parental Leave)나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제 의무화법(The Law on the Equal Pay Certification) 같은 정책과 사례들이 종종 소개되고 있다. 저출생이나 인구소멸 문제도 ‘일-가정 양립’으로 대표되는 성평등 문화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한 구조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주요한 과제다.
반면, 현재 아이슬란드는 한국이 처한 과제 즉 ‘성평등이 지금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논의 단계를 넘어서, 아직도 남아있는 격차를 해소하고 더 다양한 이들의 권리를 보장할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래서 아이슬란드의 현황과 역사, 문화를 알아갈수록 지금 우리의 상황에 도입하기에는 이미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확실하게 변화를 일궈온 아이슬란드의 궤적을 보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마리가 되어 줄 무언가가 담겨 있지 않을까? 이미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만약에 …했더라면’을 대입해 보는 아쉬움 대신, 아이슬란드는 어떻게 우리와 다른 선택을 해올 수 있었는지 톺아보면서, 다가올 날들을 만들어 가는 게 어떨까.
유조선 아닌 쾌속정, ‘작은 나라’의 강점 살려
아이슬란드에 대한 호기심으로 펼쳐 든 책은 『세계 성평등 1위 아이슬란드의 비밀 스프라카르』(지은현 역, 꾸리에북스, 2022)였다. 저자 엘리자 리드는 캐나다 출신의 기업가이자 작가이다. 또한 2016년 취임해 최근까지 집권한 구드니 요하네손 아이슬란드 대통령의 부인으로, ‘이민자의 시선’에서 성평등한 국가 아이슬란드의 사회 전반을 훑어본다.
아이슬란드가 저출생 대책으로 많이 언급되었기에, 처음에 놀랍게 다가왔던 건 생각보다 훨씬 적은 인구였다. 한반도와 비슷한 땅 크기에, 2024년 7월 기준 아이슬란드 총인구는 37만 7천여 명이다. 강원도 원주시나 서울 영등포구, 부산 해운대구 정도 규모다. 인구 1천만에 가까운 서울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한 나라 사람들이 한두 다리를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상태, 심지어는 11세기부터 기록된 아이슬란드 모든 가문의 족보를 디지털로 변환해 처음 만나는 상대와의 친인척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앱을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엘리자 리드는 그런 아이슬란드를 세계적 맥락에서 ‘거대한 유조선’이 아닌 ‘작은 쾌속정’에 비유하며, 작은 나라의 강점을 이야기한다. 소규모이기에, 뭔가를 요구하고 이행하고 조치하는 과정이 빠르고 수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린 경제, 기능하는 민주주의 제도, 근소한 빈부격차, 높은 교육 수준과 국제적 마인드, 첨단 기술 사회’는 작은 나라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 지역주의와 독단주의를 보완하고도 남는 크나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한국과 정반대로 IMF 외환위기 극복, ‘복지예산 오히려 확충’ 냄비 들고 의회 앞으로…‘프라이팬 혁명’이 이끈 경제-정치적 변화
아이슬란드의 역사에서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자, 한국도 유사한 경험을 한 바 있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해 온 과정을 살펴보자.
아이슬란드는 어업이 국가 제1산업이었으나, 과도한 어업으로 자원 고갈 위험이 커지면서 경제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산업을 다각화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이슬란드는 지열과 수력 자원이 풍부했기에 에너지 집약 산업인 알루미늄 제련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1990년대부터는 다국적 기업들이 아이슬란드의 저렴한 에너지 자원을 활용하고 알루미늄 제련소를 건설하려고 투자하면서, 본격적으로 외국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확산되던 시기였기에, 아이슬란드도 금융 부문을 개방해 외국 자본 유입을 증가시키고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은행과 여러 공기업을 민영화했고, 금융 규제를 완화한 덕에 세계 금융 시장에서 급작스럽게 강세를 보이게 된다. 이때 아이슬란드 은행들은 고금리 금융 상품을 개발해 해외 자금을 유치했고, 이를 다시 미국의 고금리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행들의 투자 실패와 미국발 금융위기로 국가 부채가 급증하면서 은행 부채가 국가 GDP의 10배에 달했고, 아이슬란드 통화인 크로나(ISK)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2008년 아이슬란드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아이슬란드 3대 은행이 파산하고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기업들도 잇달아 파산하거나 축소 운용하게 되어 실업률이 급증했다. 수입품의 가격이 상승하며 생필품 물가도 폭등했다.
위기가 닥치자 정부는 주요 은행들을 국유화하고,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엄격한 외환 통제 조치를 도입했으며, 국제통화기금(IMF)과 북유럽 국가들로부터 구제 금융을 지원받았다. 이에 IMF는 아이슬란드에 재정지출을 줄이기 위한 긴축정책으로 각종 연금과 수당을 삭감하고 국립병원을 폐쇄하는 등 복지예산을 축소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위기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아이슬란드는 급격하게 증가한 실업자를 위해 오히려 실업급여 지급 기간을 늘렸다. 또한 건강보험과 양육비 등 복지예산을 더욱 확대하여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소득세와 법인세를 인상하고, 자산을 동결하는 등의 방법으로 재원을 확보했다.
프라이팬 혁명 참가자들은 당시 정부가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총리와 정권 사퇴를 요구했고, 채무 상환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것을 반대하며 은행 경영진의 책임을 묻고 처벌을 주장했다. 또한 조기 총선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정부와 금융기관의 경제 정책과 운영 투명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등, 금융위기 대응에 대한 불만과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한 사안들을 제시했다.
그 결과, 시위가 절정에 달했던 2009년 1월, 당시 총리 게이르 하르데(Geir Haarde)와 정부가 사임하고, 2009년 4월 조기 총선이 실시돼 사회민주동맹(Social Democratic Alliance)과 좌파-녹색운동(Left-Green Movement)의 연립 정부가 출범했다.
또한 은행 경영자에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두 차례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은행 부채 상환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것을 93%라는 압도적 비율로 반대하며, 채무 상환 안을 거부했다. 이는 은행 경영자들이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으로 처벌받고, 금융 시스템이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분야, 연령, 성별 균등한 ‘국민의회’ 통해 국가 시스템 재편 위기를 기회로…획기적인 ‘참여 민주주의’로 헌법 개혁 이뤄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요구했던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이후 정책 결정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새로 구성된 정부는 경제 정책과 금융 시스템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는데, 가장 핵심이 된 것이 헌법 개혁이다.
이 자리에 1천5백 명의 사람들이 초대되었는데, 1천2백 명은 국가 등록부에서 무작위로 선택되었고, 3백 명은 기업, 기관 및 기타 조직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참여자들은 18세부터 88세까지 아이슬란드 사회의 여러 측면을 대표하면서, 6개 선거구에서 고르게 선정되었으며, 참석자의 47%는 여성, 53%는 남성이었다.
국민의회에서 훈련된 모더레이터(moderator)를 포함해 각각 9명씩, 162개의 워킹그룹으로 나뉜 참여자들은 아이슬란드 사회를 뒷받침하는 가치와, 아이슬란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이 국민의회에서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채택된 것은 진실성(integrity), 정직성(honesty), 평등한 권리(equal rights), 존중과 정의(respect and justice), 다음으로 사랑, 책임, 자유, 지속 가능성과 민주주의, 가족, 평등(equality), 신뢰(trust)였다.
그 외에도 교육, 가족, 복지, 경제, 환경, 지속가능성, 기회, 공공행정을 주제로 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국민의회 이후, 아이슬란드 정부는 새 헌법에 시민들이 의견을 내고 참여할 수 있도록 국민의회를 본뜬 ‘전국 포럼(Icelandic National Forum 2010)’을 개최했고,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시민 950명이 모여 자신이 바라는 아이슬란드의 미래에 대해 토론했다.
또한, 국민에 의해 선출된 2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헌법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헌법 위원회는 민주주의 정신을 반영해 법률 전문가부터 일반 시민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전국 포럼 결과, 아이슬란드의 천연자원 공영화, 의료 및 교육에 대한 동등한 접근성, 국가 재정 관리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 기성 정당에 유리한 선거구제 개편 및 대통령과 장관의 권한 제한 등의 개혁안을 도출하고, 의회 심의를 위한 700쪽 남짓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그리고 헌법 위원회는 헌법 수정 사항과 진행 현황을 홈페이지(stjornlagarad.is)에 공개하고, 페이스북(@Stjornlagarad)과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해 시민들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원하는 방향을 제안하고, 그 제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했다. 현대 기술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투명하고 포괄적으로 진행한 이 과정은 역사상 가장 참여적인 헌법 개혁 중 하나다.
‘여성 중심 리더십이었다면‧‧‧’ 금융위기 심각성 덜했을 것 2인 여성 공동대표가 설립한 금융사만이 유일하게 ‘고객 돈 지켜내’
IMF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있었던 또 한 가지 유의미한 변화는, 여성과 소수자의 정치 참여가 증가하며 성평등 정책을 본격적으로 입안해 시행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는 금융위기를 초래한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리먼 시스터즈 가설(Lehman Sisters Hypothesis)’에서 기인했다.
이 가설은 여성이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더 위험 회피(risk aversion) 성향이 있고,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다는 경향성에 따라, 금융 부문의 고위직에 여성이 더 많이 진출했더라면, 즉 ‘리먼 브라더스’가 아닌 ‘리먼 시스터즈’였다면, 금융위기의 심각성이 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당시 아이슬란드는 월스트리트, 런던 등 다른 지역과 같이 남성들이 금융 부문의 경쟁에서 결정권을 쥐고 있었고, 다양성의 결여와 일률적인 의사결정이 쏠림 현상을 만들어내 문제가 됐다. 즉 여성의 의사결정 참여가 높아질수록, 위험 관리와 규제 준수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 가설의 핵심이다. 이후의 다양한 연구들에서 성별 다양성과 조직 성과 간의 긍정적인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결과가 제시되었으며, 금융위기 이후 금융기관의 성별 다양성을 높이는 것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었다.
실제로 단 몇 주 만에 아이슬란드 경제의 85%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2인의 여성 공동대표가 설립해 운영하던 ‘아우두르 캐피탈(AUDUR Capital)’은 고객의 돈을 지켜낸 유일한 금융회사였다. 이들은 ‘위험 인지력(Risk Awareness)’을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삼고, ‘모르면 사지 않겠다’는 투자 원칙을 지켰다. 이러한 리더십 스타일은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고 단기적 이익을 추구했던 당시의 남성 중심 리더십과는 대조적이다.
구성원의 다양성으로 인한 긍정적 결과를 실질적으로 경험한 아이슬란드는 의사결정 과정에 다양성을 부여해 조직의 성과와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결과, 유리천장을 부수는 것을 구조 개혁으로 택하며, 보다 포용적인 사회를 구축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경제 위기 극복 과정에서 시민들의 연대와 신뢰가 강화되면서, 사회적 자본을 증대시키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올해 6월 2일 치러진 아이슬란드 대선에서 28년 만에 여성 대통령이 당선됐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뿐 아니라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3순위까지 모두 여성이다.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관련 뉴스를 보니,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환히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융위기 때 유일하게 고객의 돈을 지켜냈던 금융사 대표 중 한 명, 할라 토마스도티르(Halla Tómasdóttir)였다.
[참고 자료] -위키피디아: National Assembly of 2009 https://w.wiki/AtqA -Participedia: Icelandic Constitutional Assembly 2011 https://participedia.net/case/131
[필자 소개] 정이예슬. ‘함께 배우는 사람’. 나에게도, 지구에게도 다정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지속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클라이밋(Climeet)을 창업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역사회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사회적경제·기후환경·ESG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교육 워크숍을 진행한다. 2023년에는 울산 남구 장생포에서 지역문화기획단을 조직하고, 마을축제 ‘2023 다이버-시티(Diver-city) 장생포’를 열었다. 기후위기, 젠더,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탈성장과 다양성, 시민정치로 관심사를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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