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 <rss xmlns:media="http://search.yahoo.com/mrss/" version="2.0">
 <channel>
    <title>&lt;페미니스트 저널 일다&gt;</title> 
    <link>https://www.ildaro.com</link> 
    <description></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item>
       <title><![CDATA[보호출산제는 어떻게 가부장제 유산을 이어가고 있나]]></title>
       <link>https://www.ildaro.com/1050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530ce;">[기획 의도]</span>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위기 임산부의 익명 출산을 지원하는 ‘보호출산제’가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행되었다. 2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보호출산제의 문제를 환기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를 통해 “위기 임산부”를 단순한 정책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사회가 구성한 범주로 파악하고, 보호출산제 역시 중립적 제도가 아니라 특정한 가족 규범과 젠더 질서를 전제하고 작동하는 장치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로써 여성의 재생산권과 아동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보호출산제가 전환되는데 기여하길 바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돌보는 국가로의 전환’인가, ‘가부장제 유지’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7월 19일부터 ‘보호출산제’가 시행 중이다. 정부는 위기의 임산부, 즉 “경제적‧심리적‧신체적 사유로 출산 및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에게 긴급 주거 지원과 의료비 지원 등을 함으로써 안전한 출산을 유도하고, 태어난 아동의 생명을 보호하여 국가의 돌봄체계 안에서 안전하게 양육한다고 입법 취지를 밝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언뜻 ‘돌봄’을 정치적 의제로 다루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돌보는 국가’의 등장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보호출산제’는 저출생, 인구절벽의 시대에서 한 명의 아이라도 확보함으로써 국가의 미래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에 가깝고, 임산부 당사자나 태어날 아동의 삶과 권리, 정서적 영향은 물론이고 복지에 대해서도 무심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앞선 연재 기사에서 상세히 짚었듯이, 보호출산제는 “익명 출산과 친권 포기”라는 비윤리적 동의를 사실상 임산부에게 강제하고 있다. 그리고 임산부가 겪는 경제적·심리적·신체적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완화할 수 있는 별도의 지원체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권희정, 「보호출산제, ‘생명 우선’ 논리가 지우는 존엄」 <a href="https://ildaro.com/10482" target="_blank">https://ildaro.com/10482</a>)</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입법자들의 셈법이 간과한 중요한 사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위기 임산부’가 출산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삶의 취약성으로 인해 아이에게 온전한 삶이 아니라 상처와 고통만을 안겨주리라는 현실적 판단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이는 세상에 내놓는다고 저절로 목을 가누거나 일어서지 못한다. 생후 일 년만에 성묘가 되는 고양이와 달리, 인간은 성인이 되어 자립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린다. 가난해서 돌봄 상품을 이용할 수 없거나, 양육을 같이 할 ‘곁’이 없는 고립된 처지의 임산부에게는 경우에 따라서 ‘임신중단’이라는 선택이 ‘출산’보다 더 윤리적인 결정으로 다가올 가능성도 있다. ‘위기의 임산부’에게 생명윤리를 이야기하며 무조건 낳기를 권유하는 것은, 중산층의 입장과 경험에 근거한 ‘윤리적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221828900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제시카 앤 시츠-응우옌(Jessica A. Sheetz-Nguyen)의 저서 『빅토리아 여성, 미혼모와 런던의 기아탁아소』(Victorian Women, Unwed Mothers and the London Foundling Hospital, 2012) 표지 이미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낙인과 가난으로 아기를 키울 수 없는 여성이 바구니에 아기를 넣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러한 현실 속에서 보호출산제는 무엇이 윤리적으로 좋은 결정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은 임산부를 위한 훌륭한 해결책처럼 보이기 쉽다. 임산부의 안전한 출산에만 초점을 두고 당사자 여성의 자립이나 모자(母子) 가정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약속하지 않음으로써, 보호출산제가 ‘보호’의 명분하에 임산부에게서 아이를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기 어렵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입법 취지에 밝혔듯이, 입법자들은 산술(算術)을 하듯이 ‘위기 임산부’에게 안심 출산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모체가 임신중단이라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태어나지 못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을 짊어진 채 살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을 것이다. 태아의 생명을 지켜줄 뿐 아니라, 양육 여건이 더 나은 새로운 부모를 찾아줄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으로 얘기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인구절벽의 위기에서, 이 법률이 여전히 생명을 인구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함으로써 여성의 모성권이나 아동의 심리와 삶에 무관심하다는 점은 이런 논리와 계산에서는 간과되기 쉽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보호출산제, 국가의 새로운 인구관리 정책?</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리스크’를 관리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혹은 더 이상 희생과 인고를 운명으로 수락하지 않는 젊은 여성들에게 출산은 위험한 선택으로 인식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야흐로 혼인율이 줄고 1인가구가 늘면서 ‘누구나 혼자인 시대’로 사회는 급속히 변화 중이다. 출산은 드문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부 정책 입안자들이 이른바 “정상 가족” 바깥에서 출산하거나 친권을 포기하는 여성들을 과거처럼 방치하지 않고 ‘보호’하겠다고 나섰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보호출산제는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국가의 새로운 인구관리 정책의 일환으로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물론, 신자유주의로 인한 “돌봄의 약탈”(낸시 프레이저)과 가족의 해체 그리고 여성의 개인화라는 사회변동의 흐름에 대항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개개인의 삶을 지켜낼 수 있는 여러 정책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이러한 시절에 우리에게 정작 더 쓸모가 있는 것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산술법이 아니라, 낯선 타자의 삶과 다양한 경험들에 우리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윤리적 삶의 새 지평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학적 상상력일지도 모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호출산제를 시행한 이후 보호 대상 아동 중 유기 아동 수가 감소했다는 점을 들어, 제도 운영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숫자를 맹신하는 데이터의 신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프의 막대가 보여주지 못하는, 혹은 막대가 비스듬히 드리운 그늘진 영역을 응시해야 한다. 입법자들의 논리와 계산에 의해 간과되거나 무시된 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의미에서 조해진의 장편소설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은 국제입양인의 삶과 존재에 관한 이야기로, 보호출산제가 제도의 대상인 당사자, 즉 어머니와 아이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상상하고 사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221901738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는 암흑에서 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단순한 진심』(조해진 작가, 민음사, 2019)은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계 극작가 ‘나나’의 이야기를 통해 해외입양인의 삶과 존재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자기 존재에 대한 “온전한 앎”과 “환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단순한 진심』은 어린 시절에 프랑스로 입양된 여주인공 ‘나나’가 영화감독인 ‘서영’으로부터 국제입양을 주제로 한 독립영화 출연을 요청받아 한국에 머물며, 자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이름인 ‘문주’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서사화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극배우이자 극작가인 ‘나나’는 현재 미혼모로 아이를 잉태한 상태이다. 한국으로의 귀환을 통해 자기의 이름 문주가 ‘먼지’의 다른 표현이 아니라, 찬연히 쏟아지는 빛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태어날 아이에게 ‘우주’라는 이름을 붙여주리라고 결심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나의 이야기는 모국과 이주국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해 방황하는 주인공이 한국인으로서 자기 뿌리를 확인하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익숙한 틀과는 거리가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차역 철로에서 발견되어 한국인 위탁가정에서 일 년을 살다가 국제입양된 ‘나나’는 “이식된 나무 같은 내 정체성”이라는 서술이 암시하듯이 오랫동안 자기 존재에 대한 서걱거리는 감정에 시달려 왔다. 나나의 고독은 이방인 혹은 프랑스 내 인종적 소수자로서 겪는 차별이나 정체성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나나의 고통은 삶에 발생한 어떤 공백, 즉 ‘기원의 부재’로 인해 자기 삶의 서사를 완전히 구성할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친부모의 존재를 숨기고, 면접교섭권도 보장하지 않는 보호출산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나는 인간은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로서 본능적으로 내러티브를 찾아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는 문학적 존재임을 암시한다. 나나의 삶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주거지와 보호자만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온전한 앎 혹은 이해임을 보여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나는 학대와 우울 그리고 너무 이른 죽음으로 요약되는 국제 입양인들의 이야기와 달리, 양부모의 관심과 보호 속에서 성장한 ‘운이 좋은 아이’였다. 그러나 성장기 내내 자기의 친생부모는 누구이고 왜 자신이 기차역에 혼자 있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 거대한 결락감에 시달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나는 자신이 기차역에서 발견된 것은 부모로부터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나나로서는 다른 상상력이 가능하지 않았기에, 유기의 서사로 공백과 틈을 메꾸고 자기 존재를 은밀히 박해하며 성장한 것이다. 나나는 좀체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떼를 쓰지도 않는 동양에서 온 순종적인 아이로 자라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나의 이야기는 성년이 되기까지 친부모의 존재를 아동에게 알리지 않고, 친부모와의 면접교섭권을 보장하지 않는 보호출산제가 ‘자기 존재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권리’를 외면하는 무심한 폭력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아동이 자기 존재의 공백을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유기와 추방의 서사로 채움으로써, 자기 존재를 사로잡는 상실을 애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고 혈연적, 생물학적 친부모만이 아동의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과 만족감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가족은 결코 스위트하지 않고, 친생부모가 가장 이상적인 부모인 것도 아니다. 입양 제도는 혈연을 물신화하지 않고 정서적 친밀성에 기반한 대안가족을 만드는 적극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호출산제가 과거 국제입양의 구조와 문화적 무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발상인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진심』은 유용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소설은 가부장제와 혈연주의를 넘어서는 여성들의 돌봄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세계적인 ‘고아 수출국’이 되어 온 한국사의 민낯을 들춘다. 나나는 한국에서 생모와 생부를 찾지는 못하지만, 입양을 가기 전까지 자신을 길러준 기관사의 가족과 상봉함으로써 자신이 낯선 사람들의 환대 속에 길러졌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나나는 복희 식당을 운영하는 추연희의 ‘환대하는 삶’을 통해 자신을 사로잡은 유기의 서사로부터 자유로워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나는 어쩌면 추연희가 정성껏 기르다가 벨기에로 입양을 보낸 혼혈아 ‘복희’의 분신 자아로서, 추연희의 마지막 메시지가 가닿아야 할 복희라고 볼 수 있다. (추연희는 1970년대 후반에 간호사로 일하며 백복순의 출산을 도운 것을 계기로, 그녀가 낳은 아이에게 ‘복희’ 즉 기쁨과 축복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어 키웠다. 백복순은 열일곱의 나이에 기지촌에 유입되어 ‘서비스 이코노미’(성매매 경제)에 종사하며 달러는 버는 “양공주”였다. 출산한 지 얼마 후 백복순이 사망하자 추연희는 복희의 새로운 ‘엄마’가 되었지만, 사춘기의 복희를 국제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호출산제는 국제입양과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지만, 이른바 “정상 가족”, 즉 가부장제 가족 바깥에 있다는 이유로 아이가 자기가 살아갈 곳을 선택할 권리나 어머니의 양육권은 무시된다는 점에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부장제 유산 속에서 아이와 분리되는 여성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랫동안 세상은 ‘돌봄’을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주제로 여기지 못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도시는 디스토피아와 다를 바 없고, 아이는 물론이고 모든 인간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인간의 디폴트값을 ‘성인 비장애 남성’으로 설정하고, 의존과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개인으로 가정하였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결과, 돌봄은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에게 할당된 대표적인 부불노동으로 존재해 왔다. 따라서 이 일을 군말 없이 수행하지 않는 여성에게는 ‘미친년’ 혹은 ‘마녀’의 꼬리표가 붙여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돌봄을 정치적, 정책적 주제로 채택한 국가의 등장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임산부에게서 아이를 분리함으로써 사실상 친모권을 부정하는 보호출산제는 가부장제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강제적으로 모국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국제입양인들의 생모 다수가 미혼모나 이혼녀 등 “정상 가족” 바깥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이렇다 할 일자리를 갖기 어려운 ‘젠더화된 가난’의 굴레와, 가부장적 친족공동체의 아이를 보내라는 끈질긴 압력, 그리고 민간입양사업자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아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강제적으로 모체로부터 분리된 국제입양인들이 성년이 되어 자기의 기원을 찾기 위해 한국 사회로 귀환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호출산제가 국제입양의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무의식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530ce;">[필자 소개] 김은하 :</span>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저서 『개발의 문화사와 남성 주체의 행로』 와 공저로 『소녀들 : K-pop 스크린 광장』,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실격의 페다고지』, 『한국여성문학선집』 등이 있다. 주간경향에 ‘거꾸로 읽는 백년의 한국여성문학사’를 연재 중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22 12:16: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은하)]]></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222103465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222103465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Queer Workers’ Experiences of Safety and Threat in the Workplace]]></title>
       <link>https://www.ildaro.com/1050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the only place in his world where he felt the air made way for him. When he arrived, it seemed to shift, to slide over, like a school friend making room for him on a classroom bench.”—Arundahti Roy, The Ministry of Utmost Happines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Anjum, the main character in Arundahti Roy’s 2017 novel The Ministry of Utmost Happiness, is born with both male and female genitalia. She [Anjum eventually comes to identify as a woman] escapes from her parents, who are trying to raise her as a son, and goes to live in Khwabgah, a community of hijra (people who are neither conventionally male nor female but a third gender). Anjum feels that Khwabgah is the only place that makes room for her.</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sense that you aren’t sa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is very important to have a safe space where you can be comfortable and act naturally. For some, it may be a familiar neighborhood street, a store that suits your tastes, or a workplace where you work with people you like. For others, it may be no more than a place where you live alone, the bed in your room, or your desk. Sometimes, a space that you thought was safe can feel threatening and scary, and a space that was wide enough can suddenly feel suffocatingly narrow. The sense of safety varies from person to person and also changes depending on the time and circumstance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211601563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ari, this article’s author, presenting the results of “A Study on Sexual Minority Workers’ Labor Conditions and Mental Health” at a March 28th event at the Korean Metal Workers’ Union. (Photo credit: Jindol)</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Even if I was walking hand in hand with my partner, we would let go once we got to our neighborhood. But I didn’t think that was a big deal. But as those kinds of things piled up, piled up, piled up, I realized that they were eating me up inside.”—Participant 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really depressed, and I had no self-confidence. I was very concerned about the way I walked when I was around other people, and things like that, and I think I had a harder time than my friends because I was uncomfortable with people looking at me as a woman.” —Participant B</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such a small company, and you can hardly expect things like queer sensitivity or gender sensitivity. Even if you try to prepare yourself by thinking, ‘This isn’t that kind of place [where one could expect that],’ sometimes when we’re chatting, or eating together, or talking during break time, times like that—that kind of prejudice is so prevalent, and I feel consumed by it. Emotionally.” —Participant C</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 March 28th, 2025, the Queer Labor Legal Support Network and the Gender and Labor Health Rights Center of the Korea Institute of Labor Safety and Health presented “A Study on Sexual Minority Workers’ Labor Conditions and Mental Health.” The research participants were 1) Korean nationals residing in Korea, 2) workers aged between 19 and 65, and 3) sexual minorities. A survey and interviews were conducted jointly from March 2024 to March 2025. A total of 720 sexual minority workers responded to the survey, and 19 sexual minority workers participated in the interviews. The interview excerpts quoted above appeared in the research repor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articipant A is a lesbian and lives with her partner. The pair is free to express their love at home, but when they go out and walk around the neighborhood, they don’t even hold hands. Participant B is a trans man. He says that even walking feels uncomfortable to him because of the gazes of people who see him as a woman. Participant C [gender identity not stated] is gay and is not out at work. They try not to have expectations about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t work, but they eventually become emotionally depleted and exhausted by the rampant homophobic comment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eeling of being unsafe narrows the space in which someone can exist, stifles them, and ultimately makes them i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sexual minorities, what are safety cues and threat cu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merican psychologist Lisa M. Diamond explains “social safety” as a concept encompassing trustworthy social bonds, a sense of belonging, inclusion, and social protection, as well as an essential human need. People consciously and unconsciously try to prepare for threats they face (or may face), and as a way to prepare, they constantly stay on guard to protect themselves in spaces they perceive as unsaf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particular, socially stigmatized minority groups are highly vigilant because they expect others to pose a threat to them, and they do not easily let down their guard because they know that others will not protect them. Maintaining this high level of vigilance continually makes them more likely to become exhausted and experience chronic anxiety and depress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owever, the level of this vigilance is not fixed. In other words, as the threats to someone decrease and their sense of safety increases, their vigilance will also naturally drop. Dr. Diamond explains this by distinguishing ‘safety cues’ and ‘threat cues.’ So, what are the threat cues for sexual minorities? Let’s look at some cases introduced in the “Study on Sexual Minority Workers’ Labor Conditions and Mental Healt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Examples of objective experiences of social thre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Witnessing or experiencing discriminatory laws or policie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Witnessing or experiencing violence or harassmen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Being publicly rejected by my family member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Hearing people make derogatory jokes about sexual minoritie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Being legally disadvantaged because the wrong gender is listed on my ID car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Examples of subjective experiences of social thre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ear of exclusion or violence in public place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ear of being cut off from my family</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ear that my identity will not be respected</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ear of being bullied by those around me</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Concerns about disadvantages due to my ID card listing the wrong gend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Now let’s consider the opposite: what are some objective and subjective experiences of safety cues for sexual minorit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Examples of objective experiences of social safe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Legislation that punishes crimes against sexual minorities and prohibits discrimination</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eeing friends/colleagues/media criticize discrimination against sexual minoritie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eeing sexual minority pride flags in businesses or government office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Being treated with consideration when being asked about my interpersonal relationships, life, and interest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Receiving positive support when coming out or sharing other meaningful information about myself on social media</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eeing other people coming out as sexual minorit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Examples of subjective experiences of social safe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Knowing that people are not allowed to harass me and that there are people who will protect me if that happen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Knowing that I can surround myself with others who understand my experiences and can offer support and protection</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Knowing that I do not have to face discrimination or hide my identity in public places</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Knowing that people in my workplace understand and respect diversity</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Knowing that I am not alone</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o make a safe place for us in the workpla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neighborhoods where we live, in the public spaces we must pass through to get to work, and at the workplace where we spend the most time during the day, sexual minorities do not often feel safe. However, that does not mean that we can just stay at home, or commute by car, or not work. Ultimately, sexual minority workers go out, walk on streets where other people are walking, and build relationships with our coworkers, even if it is not safe. We live our lives while maintaining a constant and high level of alertnes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time goes on like this, invisible wounds accumulate, we become susceptible to burnout, and we experience depression. The results of the “Study on Sexual Minority Workers’ Labor Conditions and Mental Health” revealed that depressive symptoms are more commonly suffered by sexual minorities (24.6%) than by the general population (4.9%).</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terribly lonely island. I’m a terribly lonely island.”—Participant 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think it’s clear that for me, community is a window that lets me breathe a little.” —Participant 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people I came out to were people who seemed to be somewhat (queer-)friendly, who gave off that vibe. I was a little selective, but I did keep looking for the right moment to come out. Because I was so frustrated. And compared to when I wasn’t out, I think it is a little less awkward being at my workplace now.” —Participant F</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211629522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ari (left) and Mun-yeong Yang participating in the discussion after their presentations on the “Study on Sexual Minority Workers’ Labor Conditions and Mental Health”</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Sexual minority workers are exposed to various stresses due to social stigma, but they do not passively let themselves be swallowed up. Even when they feel like a “lonely island” in the workplace, they actively seek out lovers, friends, and communities outside of the workplace that can support them, or they may choose to find a new job where they can feel safer. Or, they find allies in their workplace by coming out, and respond actively when problematic situations aris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xual minority workers are trying to expand the spaces where they can spend time, expand comfortable and safe spaces, and create breathing room for themsel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oming out’ is something that you can choose not to do, after all. It’s hiding [one’s identity] and then saying, ‘I want to come out.’ But for transgender people, the term ‘coming out’ doesn’t quite fit us. Because [our identities] can become known in different ways. And our appearance changes….” —Participant 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actually revealed (my identity) a few times, but I didn’t get fired or anything because of that. But I think I just had a strong feeling that ‘they don’t believe me.’ […] One of the things I heard a lot (after coming out) was, ‘You’re pretty, you’d be prettier with long hair.’ But I want to be handsome, not pretty.”—Participant 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non-cisgender workers, such as transgender or non-binary workers, coming out does not mean the same thing as it does to cisgender sexual minority workers. Their physical appearance may reveal their identity so that ‘coming out’ is rendered moot, or people may not believe their revelation about their identity because they are passing as their assigned gend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n for cisgender sexual minority workers, coming out in the workplace does not mean that all kinds of discrimination and hatred will disappear all at once. Sometimes, coworkers will leave sexual minority workers out of light conversations about how each other’s spouses are doing, and when a colleague who knows about the sexual minority worker’s identity leaves and a new person joins the company, they are faced with the difficult task of coming out agai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is way, creating a safe ‘my place’ in the workplace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done alone. Just as the air naturally flows back to accommodate someone, so people must make space for others. There needs to be someone who listens carefully to the stories of sexual minority workers, and if there is a colleague going through a medical transition, there needs to be someone who watches this process with a supportive gaze. We all need to constantly signal safety to each other and actively create space for each other. Only then can everyone lower their boundaries and exist in the space where we all deserve to be.</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workplace full of safety cu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signal of safety may be a legal measure like an anti-discrimination act, but it is also important that there be someone who affirms the identity of sexual minorities, shares anger about discrimination against sexual minorities, and continuously conveys the message that they are not alone. When there is an ally who can stand up and speak out against hate speech when it happens, when there is someone who can change the mind of another who previously had no actual knowledge of or experience with sexual minorities, sexual minority workers can breathe, and can exist more fully in that spa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non-queer people] start actually seeing queer people around them more often and just realize, ‘Ah, they’re just people like me,’ then it won’t be that hard to live as a queer person. A society where people will no longer ask what ‘queer’ means or be able to never use the word ‘queer.’ […] When it doesn’t matter at all whether a person is dating a man, a woman, or a trans person. They’re just respected for who they are.”—Participant H</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21165174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ari’s office workstation, featuring a pride flag and laptop stickers supporting queer rights, veganism, and animal rights.</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 started a new job last week. The scale and atmosphere of my new workplace is quite different from what I’m used to. I pay attention to other people’s glances and comments, and I’m on guard. Nervous. Luckily, I have family, a partner, and friends who support my identity. I have people who will curse out anyone who says something hateful to me, and I believe that I’m not alone. Still, I’m afraid.  I know that I won’t be disadvantaged because of my identity, and I don’t have high expectations for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t work, yet I keep shrinking awa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think back to F’s words. On Monday, I brought my laptop covered in stickers supporting queer rights, veganism, and animal rights to work. I was afraid that someone might see the stickers and say something, but I also hoped that someone else would gain strength from seeing them. On Thursday, I wore a necklace supporting transgender people. I hoped someone would notice. On Friday, I put a rainbow flag in my pencil case. Little by little, the space that felt like someone else’s space has begun to feel like my own. I want to reveal my existence as much as I can. I want to breathe with others in the space I gained that way. Queer people are working next to you at this mom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bout the Author: Tari loves walking her dog ​​every day and expanding her safe spaces. She spends each day finding space to breathe in and squeezing in as much happiness as she can with her loved ones. <span style="color: #c52cd2;">[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s://ildaro.com/10170"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70</a> Published Apr. 29, 202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21 17:13: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Tari)]]></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73'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212119124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212119124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미등록 이주민 구금이 해답 아니다, 대안이 있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50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년 7월, 〈이주민센터 친구〉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화성 외국인보호소에서 온 편지였다. 편지의 주인공 A씨는 난민 신청을 위해 한국에 왔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체류자격을 얻지 못한 채 공장에서 일하다 단속되었다.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보호소에 구금되었고, 밖에는 그가 돌봐야 할 아내와 아이가 남아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A씨가 전해준 보호소 안에서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이주민들은 철창이 있는 작은 방에서 12~16명이 함께 생활한다. 하루에 햇볕을 볼 수 있는 시간은 30분뿐이고,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일주일에 두 번에 불과하다. A씨는 외국인보호소를 “원수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표현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일부러 생활환경을 어렵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한국 체류를 포기하고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렇게 열악한 시설에 가두는 걸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악명 높은 외국인보호소, 감옥과 다르지 않은 환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센터 친구에 자원활동을 하러 온 학생들에게 물어봤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외국인보호소가 무엇인지 아나요?” 대부분 처음 들어본다고 답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해진 체류기간 안에 체류자격을 연장하거나, 변경하지 못하면 미등록 이주민이 된다. 이들에게는 한국을 떠나라는 강제퇴거명령이 내려지고, 출입국 단속을 당해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될 수 있다. 외국인보호소는 강제퇴거명령을 집행하기 위해 사람을 구금하는 시설이다. 이름은 ‘보호소’이지만, 그 안에서의 생활은 감옥과 크게 다르지 않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204738969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1월 30일, 외국인보호소에 감금된 이주민 대면 법률상담 및 인터뷰를 위해 화성외국인보호소에 방문한 변호사들. [사진 제공] 정효주</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외국인보호소에 방문해 이주민을 상담하면서 느낀 가장 어려운 부분은, 우리나라에서는 한번 미등록이 되면 다시 체류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특히 보호소에 구금된 경우, 이 사람이 언제까지 구금되어 있을지, 언제 강제추방 당할지 알 수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호소 생활을 견디는 이유는 그곳이 살 만해서가 아니다. 난민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유가 있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한국에 가족과 삶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출국하는 순간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헌법재판소 ‘강제퇴거 위해 반드시 구금할 필요 없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물며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에게도 형기가 있다. 그러나 외국인보호소는 달랐다. 과거 출입국관리법은 ‘송환할 수 있을 때까지’ 외국인을 보호할 수 있도록 규정해, 사실상 구금 기간의 상한이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헌법재판소는 2023년 이러한 규정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이후 법이 개정되어 원칙적으로 최대 9개월, 예외적으로 난민신청자 등 일정한 경우에는 최대 20개월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기간 상한이 마련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과정에서 헌법재판소는 강제퇴거를 위해 반드시 구금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실제 강제퇴거(송환)가 집행될 때까지 주거지를 제한하거나 정기적으로 출석하도록 하는 방법, 신원보증인이나 보증금을 활용하는 방법, 보호관찰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관리·감독하는 방법 등 신체의 자유를 덜 제한하는 여러 대안을 제시했다. [헌법재판소 2023. 3. 23. 선고 2020헌가1, 2021헌가10(병합)]</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식사를 하다가, 일을 하다가 단속을 당해, 살던 집을 정리하거나 최소한의 짐을 챙기지도 못한 채 곧바로 보호소로 향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204850229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6월 16일, 이주구금대응네트워크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외국인보호제도의 개선을 촉구하며 열린 기자회견 및 사례보고회’를 개최했다. 출입국관리법 개정 이후에도 지속되는 장기 구금 및 인권침해 실태를 고발했다. [사진 제공] 이주구금네트워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그렇다면 외국인보호소에서 나온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출입국은 보호 해제를 하며, ‘취업 등 영리활동은 할 수 없다’고 안내한다. 현장에서 보면, 출입국은 기본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째, 만약 풀려난 이주민이 임금체불 건 때문에 한국에 남아야 한다고 했다면, 그 사람은 ‘노동청 진정 사건만’ 처리해야 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이주민이 소송 때문에 체류하고 있다면 ‘소송 진행을 위한 행위만’ 해야 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 머물러야 하지만, 생계를 유지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더 큰 문제는 다시 구금될 수 있다는 불안이다.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보호 기간의 상한은 생겼지만, 동시에 ‘재보호’ 제도가 도입되어 다시 보호소에 구금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보호소에서 나온 사람들은 다시 단속될까 두려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금의 통로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보호소에 있는 것도 나쁘지만, 풀려난 상황은 어쩌면 더 나쁠 수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국 A씨처럼 임금 체불을 당한 이주민은 극한의 생활을 견디며 임금을 받아내거나, 권리를 포기한 채 한국을 떠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이주노동자의 체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버티면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왜곡된 유인이 생기기도 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구금 대신 지역사회에서 관리…해외 대안들</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독일 둘둥(Duldung) 제도와 ‘사례관리 중심’의 전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년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최한 ‘이주 구금 대안 해외사례 모니터링 결과보고회’에 참석했다. 이미 많은 나라들은 시설 구금 대신 지역사회에서 이주민을 관리하는 다양한 대안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등록 체류자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상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관리 중심’의 접근으로 전환하고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독일의 둘둥(Duldung) 제도도 그중 하나다. 출국 의무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강제송환이 어렵거나, 중요한 인도적·개인적 사정 또는 공익적 이유가 있는 경우 일시적으로 체류를 허용하는 제도다. 현실적으로 추방이 어려운 사람을 무기한 구금하는 대신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도록 하면서 행정적으로 관리한다. 특히 직업훈련을 꾸준히 받았거나, 안정적으로 일하며 독일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에게는 취업이나 거주를 허가받을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등록 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단속하고 구금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왜 이들이 미등록 상태를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머무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임금체불이나 소송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 이미 지역사회에 정착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을 시설에 가두는 것보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더 인간적인 해법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b30ce;">[필자 소개] 정효주 :</span>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상근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활동에도 열심히, 재미있게 참여하고 있습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20 16:41: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정효주)]]></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2050569904.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2050569904.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전직 ‘마사지걸’ 치히로 상이 햇볕 아래 많은 기회를 누리길]]></title>
       <link>https://www.ildaro.com/1050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대한 많은 기회를 누리며 있는 힘껏 자유롭기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얼마 전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에서 발표한 논평의 제목이다. BJ 여성이 화장품 광고 모델로 발탁되었다가 소비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국 광고가 내려간 사건에 대한 논평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는 여성들이 같은 이유로 방송에서 하차하고, 해고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런 사건들을 보며, 성노동을 했다는 사실이 흠집이 되고 낙인이 되는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러던 중 읽게 된 차차의 논평은 나에게 큰 공부가 되었다. 특히 이 문장이 인상에 남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차는 BJ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이 최대한 많은 기회를 누리며, 있는 힘껏 자유롭길 바랍니다. 여자가 옷을 좀 덜 입으면 뭐 어떻습니까. 여자가 카메라 앞에서 섹시 댄스 추는 게 뭐 어때요. 여자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그렇게 일하는 이유가 다 있겠죠.”(본문 링크 <a href="https://sexworkproject.tistory.com/524" target="_blank">https://sexworkproject.tistory.com/524</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스트인 나는 왜 성매매 산업이 성 착취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은 쉽게 설명하면서, 성노동자 여성의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했을까. ‘그냥 그렇게 일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왜 어려웠을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90650443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왼쪽에는 원작 만화 〈치히로 상〉(ちひろさん) 속의 한 장면이고, 오른쪽은 동명의 영화 속의 한 장면이다. 치히로 상이 벤또 가게에서 도시락 주문을 받고 있다. 출처-ⓒ야스다 히로유키(아키타쇼텐) 2014, ⓒ2023 Asmik Ace, Inc. /Netflix</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그즈음 친구의 추천으로 〈치히로 상〉(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 2023)이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다. 야스다 히로유키의 만화 〈치히로 상〉을 영화화한 넷플릭스 작품이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렇게 시작했다. ‘바닷가 도시락집에서 일하는 전직 성노동자.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진 그녀가 당신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 준다.’ 친구는 이 영화가 좋은데,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토로하며 영화를 소개했다. 나는 친구의 그 애매한 감상평에 호기심이 생겨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당신이 누군지 안다고 생각하는 환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인공 치히로는 평화로운 바다 마을에 사는 해사한 미소를 가진 여성이다. 지금은 벤또 가게에서 일하고 있지만, 자기가 ‘마사지걸’이었다는 사실을 ‘아침에 사과를 먹었다’라는 얘길 하듯이 자연스럽게 한다. 친절하기는 또 얼마나 친절한지. 솔직하게 말하면, 봄날의 밝은 햇살 아래서 친절을 베푸는 치히로 상과 전직 성노동자라는 설정이 주는 낯선 조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노동이라는 소재를 너무 낭만화한 거 같아 별로다’라는 의심이 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순간, 이런 나의 의심이 ‘음지의 성노동자가 양지로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낙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에서, 현실에서, 영화라는 매체에서 성노동자의 존재가 드러나지 못하게 막는 사고방식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 생각을 한 후, 영화 〈치히로 상〉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영화는 답답한 현실과는 다른 자유롭고 충만한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치히로 상의 일상은 단조롭다. 노코노코 벤또 가게에서 주문을 받고 재료를 손질한다. 출근길에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저녁에는 업소에서 같이 일을 했던 언니와 한잔한다. 그는 해변에 치는 잔잔한 파도처럼 자신의 리듬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생활인이다. 영화는 치히로의 과거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치히로의 등에 남아 있는 칼에 맞은 흉터라던가,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순간, 이상한 전화 통화들을 통해서 그녀의 역사를 추측해 볼 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단한 악인도 큰 갈등도 없는 영화적 세계에서, 치히로의 일상에 일어나는 사건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이다. 치히로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능한 사람이다. 그가 가진 특별한 의사소통 능력은 편견 없는 태도로부터 나온다. 치히로는 길 위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들과 느슨하게 친구 관계를 맺는다. 상대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고생 오카지는 치히로를 따라다니면서 몰래 사진을 찍는 이상한 아이다. 치히로는 그걸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오늘은 사진 안 찍어?’라고 말을 건넨다. 들켜버린 오카지는 깜짝 놀라 도망갔다가 곧 쭈뼛쭈뼛 치히로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왜 그랬는지 안 물어볼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잖아요. 이름이나 나이나, 목적이 뭔지...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아요?” 치히로 상은 이렇게 답한다. “그런 걸 믿은 적이 없거든. 그 말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아? 성매매 업계는 그런 곳이었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마도 치히로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호기심이 충족된다고 해서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치히로는 이유를 묻는 대신 오카지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솔직히 네가 싫지는 않아.” 굳이 깊이 캐물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치히로가 보여주는 신뢰이고,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9071826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치히로 상〉 스틸컷 (©2023 Asmik Ace, Inc. /Netflix)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치히로 상과 고등학생 오카지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서 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대화를 나누는 둘은 해 질 녘의 잔잔한 바다에서 맨발을 담그고 서 있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갈등이나 로맨스 같은 극적인 감정으로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대신 넓은 풀샷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담는다. 이 영화는 사건과 인물과 감정에 많은 여백을 남겨둠으로 관객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 이야기에 바닷바람이 부는 것 같은 시원함이 있어 좋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길 위에서 먹는 도시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영화에는 다양한 식사 장면이 나온다. 맛있는 음식은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접착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식이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와 함께 어떤 공간에서 먹는지에 따라서 체할 것처럼 속을 꽉 막기도 하고, 허기진 몸과 마음을 기분 좋게 채워주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치히로는 자기가 일하는 노코노코의 도시락을 정말 좋아한다. 입이 싼 나가이라 아줌마가 만드는 짜디짠 매실장아찌가 얼마나 입맛을 돋우는지, 정성스럽게 손질한 죽순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감탄하며 맛있게 도시락을 싹싹 비운다. 길에서 만난 짓궂은 꼬마 마코토에게도 도시락을 먹이고, 노숙인 아저씨에게도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한다. 이들은 테이블도 없는 길가에서 한 손에 도시락을, 한 손에 젓가락을 들고 먹지만 남부럽지 않은 한 끼의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다. 흔히들 길에서 먹는 음식은 짠 내가 난다고 하는데, 이들이 먹는 도시락은 나도 한 입만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하고 맛있어 보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90742253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치히로 상〉 스틸컷 (©2023 Asmik Ace, Inc. /Netflix) 낡은 건물 안에서 치히로 상과 노숙인 아저씨가 도시락을 함께 먹고 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것과 대비되는 식사 장면은 오카지네 저녁 밥상이다. 오카지의 집은 말끔하고 번듯한 중산층 가정이다. 식사하는 내내 아버지는 권위적인 태도로 가족들을 통제하고, 온 가족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숨 막히는 공기가 흐른다. 음식은 푸짐하고 화려하게 차려져 있지만 권위적인 밥상에서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치히로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어두워지는 오카지의 표정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해 준다. “음식은 함께 먹을 때 더 맛있다고 하지만, 오히려 밥맛을 떨어지게 하는 사람도 있어. 맛있는 음식은 혼자 먹어도 맛있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짓궂은 초등학생 마코토는 싱글맘인 엄마가 밤에 일을 하러 가면 혼자 저녁을 챙겨 먹는 게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코토는 엄마가 해 준 야키소바가 정말 정말 맛있다고 한다. 그 말에서 마코토가 엄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양한 식사 장면들은 따뜻한 집, ‘정상 가족’이라는 환상을 깬다. 사람은 신뢰하는 사람들과 안전한 공간에서 밥을 먹을 때 맛있다고 느낀다. 안전하다는 감각은 번듯한 지붕이 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보장되지 않는다. 취약한 존재들은 자신을 편견 없이 받아주는 상대를 만났을 때 비로소 안전함을 느낀다. 그게 길 위에서 먹는 도시락과 주먹밥이 더 맛있는 이유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90804314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치히로 상〉 스틸컷 (©2023 Asmik Ace, Inc. /Netflix) 여고생 오카지와 남자 아이 마코토가 티격태격 하고 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같은 별에서 온 사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영화 속 사람들은 모두 고립감과 외로움 속에서 넓은 바다를 떠돌다 우연히 어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섬에서 만나 모닥불을 함께 쬐는 것 같다. ‘인간은 다 다른 별에서 왔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회의감을 전제로 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 보면 같은 별에서 온 사람을 한 명쯤은 만나게 된다는 희망으로 천천히 나아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는 과거를 보여주는 플래시백 장면을 매우 드물게 사용하는데, 관객들이 충분히 치히로를 이해한 후반부가 돼서야 그의 과거가 등장한다. 그 에피소드들은 고립되어 있던 치히로가 어떻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9083841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치히로 상〉 스틸컷 (©2023 Asmik Ace, Inc. /Netflix) 어린 시절의 치히로가 어느 밤 길에서 만난 또 다른 치히로가 벤치에 앉아 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치히로의 삶에는 중요한 두 명의 여자가 있다. 이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외로운 치히로를 물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 첫 번째 여자는 주인공 치히로가 어린 시절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치히로이다. 꼬마 아이였던 치히로는 어두운 밤 혼자 돌계단에 앉아 김밥을 먹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업소에서 일하다 쉬러 나온 것 같은 지친 얼굴의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혼자 김밥을 먹고 있는 꼬마의 김밥을 한 개 뺏어 먹는다. 꼬마는 함께 김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전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꼬마에게 “겁내지 마, 밤은 우리 편이니까.”라는 조언을 해 준다. 그녀가 부라자(브래지어) 안에서 꺼내준 명함 속에 쓰인 예명이 ‘치히로’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 번째 여자는 노코노코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의 아내인 타에이다. 치히로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병실에 누워 있는 타에를 종종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데, 그 둘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밝혀진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밤, 치히로는 병실에 있는 타에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간다. 빗소리가 세상의 잡음을 모두 지운 어두운 밤, 타에와 치히로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초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순간이 ‘사랑의 도피라기보다는 동반 자살’ 같다고 말하는 두 여자는 서로 같은 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치히로 상의 진짜 이름이 아야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치히로 상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신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는 존재가 전직 성노동자였던 치히로 상이라는 것이 좋다. 이 지면에는 미처 담지 못한 빛나는 순간들을 영화를 통해서 경험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치히로 상이 “최대한 많은 기회를 누리며 있는 힘껏 자유롭기를”. 낙인 찍히고 취약한 존재들 모두 그럴 수 있기를.</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90929878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치히로 상〉 스틸컷 (©2023 Asmik Ace, Inc. /Netflix) 치히로가 두 눈을 감고 바다 바람을 느끼고 있다.</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a39c6;">[필자 소개] 권오연 :</span> 2024년부터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를 담은 단편 다큐멘터리 〈X에 대하여〉와 한국과 일본에 사는 네 명의 페미니스트의 우정을 그린 〈순간이동〉을 공동연출했다. 10.29 이태원 참사 미디어팀으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별은 알고 있다〉를 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a39c6;">[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span>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다큐멘터리·극영화·웹 콘텐츠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a href="https://pinks.or.kr/" target="_blank">pinks.or.kr</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19 11:03: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영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권오연)]]></author>
	   <category><![CDATA[영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912569953.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912569953.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임신·출산도 하고 싶죠’ 트랜스남성의 이야기]]></title>
       <link>https://www.ildaro.com/1050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이라는 궤도를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만드는 이들의 삶엔 분명 무언가 다른 지점이 있다. 이름부터 성별, 그리고 가족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안목으로 삶을 재설계해온 박유안 씨(27세)가 그러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법원이 생식능력 제거 수술 없이 성별 정정을 인정한 첫 사례의 당사자(참고: <a href="https://www.khan.co.kr/article/202110220600001" target="_blank">[단독]법원, ‘생식능력 제거’ 없는 성별 정정 첫 허가···“신체 손상 강제 요구 지나쳐”</a> 경향신문, 2021년 10월 22일자)인 그는 현재 혼인평등 소송에도 참여 중이다. 한편으로 유안 씨는 그런 ‘다름’ 속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꿈을 향해 오늘도 ‘평범한’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사회인이기도 하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700364829.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유안 씨가 반려견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제공 유안)</p></td></tr></tbody></table><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유안(有眼), 내가 만든 이름으로 살아가기까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유안이라는 이름은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름이다. “글자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그 이름을 정해놓고, 한자 의미를 끼워 맞췄다”는 유안 씨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있을 유(有)’에 ‘눈 안(眼)’으로 설명했다. 세상이 정해준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취향과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흔한 글자들이지만 이 조합은 드물죠.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이렇게 ‘안목 있는’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유안 씨는 청소년기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부정하려는 사회의 압박 사이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학교 생활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시기 정신건강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해를 하기 시작했고, 부모가 그 상황을 눈치했다. 결국 유안 씨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부모는 정신과 진료를 받게 했고, 유안 씨는 “넌 아직 어려서 너의 정체성을 모른다.”라는 무책임한 의료진의 말을 들어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에 다니는 것이 의미가 없게 느껴져 자퇴를 결심하고, 학교도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부모는 이를 용인하지 않았고, 무단결석 대신 ‘병결’ 처리를 받게 하려고 그를 강제로 여러 병원에 끌고 갔다. 원래 유안 씨의 계획은 고2 초반에 자퇴하고 하반기에 검정고시를 보는 것이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자퇴가 미뤄져 결국 고3 하반기에 검정고시를 볼 수 있었다. 유안 씨는 “그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무의미했던 시기”라고 꼽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살이던 그 기간에 집에서 쫓겨났고, 얼떨결에 독립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성년자라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요. 미성년자면 일도 혼자 못 구하고, 부동산 계약도 안되고, 하다 못해 적금 하나도 못 깨더라고요. 그때 생활이 정말 어려웠어요. 지인들 집을 전전하며 그렇게 살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연히 정신건강은 불안정했고, 취약했다. 유안 씨는 “그 시기,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고 하면서도 “근데 삶의 목표가 잘 지내는 게 아니라, 그저 버텨내는 거였다”고 설명했다. 그리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참 안타까운 거 같다.”라고 씁쓸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취약한 상태였다 보니 대학에 진학을 한다던가 미래를 그리는 것 또한 힘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시 제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꽤 길었어요. 20대 초반은 거의 요양의 시간이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나를 돌보며 쉬다가 ‘이제 뭔가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되는 입장이더라고요. 바로 일을 해야 했고,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자아실현보단 ‘대출금 상환’을 위한 노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 시간을 지나, 유안 씨는 이제 매일 아침 출근길에 오르는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차량 관련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그에게 노동은 자아실현의 수단이기 이전에 ‘대출금 상환’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책임감으로 연결된다. “가장이 꿈”이라고 말하며 웃은 유안 씨는 가사노동이 적성이라고 밝힌 파트너와 반려견과의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그런데 얼마 전 진행된 팀 이동으로 인해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팀은 성비도 균등한 편이었고 다양한 연령대가 있었어요. 저한테 (남성)파트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거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였거든요. 근데 지금 속한 팀은 남성 위주이기도 하고 약간 연령대가 있어요. 그들만의 유대감 같은 게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 남성문화에 좀 들어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긴 해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70641668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유안 씨(왼쪽)가 파트너와 반려견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제공 유안)</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버텨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장을 다니는 유안 씨의 소소한 즐거움은 ‘식물 돌봄’이다. 한때는 200여개의 화분을 돌봤다고 한다. 이제는 30~40개 화분만 돌보고 있지만, 여전히 식물 돌봄 모임에 참여한다. 그 모임은 30~40대 기혼자가 주류지만, 유안 씨는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식물을 좋아하고 돌본다는 건 굉장한 관찰력을 요하는 일이기도 한데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모임 구성원들은 대체로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조용히 관찰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들은 날 남자로 알고 있고, 파트너가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 이상의 어떤 설명을 하진 않았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잘 받아들이더라고요. 알아서 잘 이해하는 느낌? 그걸 보면서 ‘한국 사회, 생각보다 꽤 나아가 있는데?’ 싶기도 했고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안 씨는 오히려 퀴어 커뮤니티 모임에서는 ‘우린 소수자니까 다 비슷하겠지’라는 안일한 전제가 개개인의 고유한 결을 지워버리는 경험도 했었다고 말했다. “공동체가 개인을 대할 때 ‘소수자’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일반화하기보다, 한 사람의 고유한 모습을 관찰하고 그 개별성을 마주하는 것이 진정한 존중의 시작인 것 같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임신, 출산도 직접 하고 싶지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안 씨에게 거창한 꿈이나 목표가 있는 건 아니다. 가정을 꾸렸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혼인평등 소송에 트랜스젠더 원고로 참여했고,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활동도 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사회적 효능감을 얻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사실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많다.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갔지만, 회사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휴학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만약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수능 시험을 치고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꿈꿨던 연구원(수학과나 화학과 같은 자연대 기초과학 분야, 혹은 의료 관련 연구 분야)이 되어 깊이 있는 학업과 연구에 매진하는 삶을 살고 싶기도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그 꿈을 이루기는 어렵기 때문에, 현실적인 삶을 사는 일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배우자, 반려견,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이까지, 함께 사는 가정을 꾸리고 싶다. 사실 이것도 원대한 꿈이라고 생각한다”는 유안 씨. 가능하다면 직접 임신, 출산을 하고 싶다. 하지만 성별 정정을 마친 상황이라 회사에서도 남성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가 임신·출산을 한다면 일이 복잡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상황에서 임신을 한다면… 회사를 그만둬야겠죠. 하지만 지금의 생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회사를 그만둘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단은 생각만 해보고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안 씨는 인터뷰 내내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털어놨다. 공부를 더 하고 싶지만 대출금이 먼저라는 이야기, 지금의 대출금을 다 갚아도 또 대출이 안 생길 거라는 보장이 어딨겠냐며 씁쓸한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녀를 가질 수 있을지, 가져도 되는 건지에 대한 걱정도…. ‘궤도’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아 보였던 유안 씨의 삶은 지금 2030 청년들의 고민들과 맞닿아 있었다. 그건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2030 청년이니까 말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17 14:58: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70213851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70213851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저는 페미니스트가 맞습니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50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용노동부가 인증한 직업능력개발훈련기관의 채용 면접에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라는 질문을 받고, 입사 후에도 “인류 역사상 성범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 등 성차별적 괴롭힘과 성희롱을 겪은 노동자가 침묵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바로 김민지 씨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51716442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7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직업능력개발훈련기관의 성차별적 괴롭힘 및 성희롱 진정 기자회견’이 열렸다. (출처: 페미니즘 사상검증 공대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김 씨는 노동 현장의 ‘페미니즘 사상 검증’ 피해자로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15일 오전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채용성차별공동행동(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외 12개 단체)으로 구성된 ‘페미니즘 사상검증 공동대응위원회’는 김민지 씨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당당히 변화를 촉구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면접 때부터 이어진 성차별적 괴롭힘, 사상검증, 외모 비하…</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 있지만 “5인미만 사업장이라 보호 못 받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자회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김민지 씨는 채용 면접 단계에서부터 심각한 ‘사상 검증’을 겪었다. 면접 당시 해당 기관의 대표는 김 씨의 이력에 성폭력 피해자 지원 비영리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이 적힌 것을 보고,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라며 성차별적인 질문을 던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입사 이후에도 대표의 언어폭력과 성희롱 발언이 계속되었다. 대표는 김 씨가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는 회식 자리에서 당시 상황을 캐묻는가 하면, 그에 대해 답변하자 “왜 너를…?”이라며 비웃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외모에 대한 지적도 일삼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느 날은 대표실로 불러 인터넷에 ‘오.타.쿠’ 세 글자를 검색한 뒤 제 외모를 만화 캐릭터와 비교하며 ‘거울 좀 봐’, ‘머리도 그렇고, 안경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풍채도 그렇고…’, ‘주말에 아울렛이라도 가서 옷도 좀 사고 그래~ 여기 주변에 싼 데 많아~’라고 말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심지어 몸에서 냄새가 나니 병원에 다녀오란 말까지 들었다. 김 씨는 “대표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와 모욕감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만 있는 시간들이 반복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민지 씨는 한 달 남짓한 근무 기간 동안 반복적인 모욕과 성희롱을 겪으며 무력감과 자괴감에 시달렸고,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인가?’, ‘내가 정말 문제인가?’라고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주변 사람들도 ‘내가 알던 민지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국, 회사를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라도 대응을 하려고 했지만, 해당 일터가 ‘5인 미만 사업장’에 해당해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제도의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 씨는 ‘성평등을 지향하는 사람을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면, 이 자리에서 선언하겠다’며 “저는 페미니스트가 맞습니다”라고 당당히 밝혔다. 이어 “누구도 성평등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검증당하거나 모욕당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인권위 진정 사유를 말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노동자에 대한 “평등권 침해”이자 “직장 내 성희롱”</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고용·계약 관계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한 불이익, 공격 심각한 수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진정 대리인을 맡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강미솔 변호사는 “2016년경 게임 및 콘텐츠 업계에서 ‘페미니즘 사상 검증’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이래로, 일터를 비롯한 생활영역 전반에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 노동자가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거나 관련 글을 공유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고용 또는 계약 관계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 변호사는 피진정인의 행위가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과 성별을 이유로 고용 영역에서 불리하게 대우한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라고 못박았다. 또한 연애 여부나 성적 지향에 대한 사적 질문을 하거나, 여성의 신체를 성적 시선으로 대상화한 발언을 하는 것은 “명백한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가해 사업장이 국가 공인 훈련기관으로서 일반 기업보다 높은 인권 감수성이 요구되는 기관임에도, “진정인에 대하여 여성혐오적, 성차별적 발언, 직장 내 성희롱을 반복적으로 하여 진정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인격적 존엄성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 사상검증 공대위’ 노헬레나 공동대표 역시 “2016년 게임업계의 ‘성우 부당해고 사건’ 이후, 페미니즘 사상 검증은 다른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고 설명했다. “기업과 공공기관은 논란을 피하겠다는 이유로 페미니즘 사상 검증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수용하며, 잘못된 선례를 만들어 왔다. 그 이후 여성혐오 세력은 더욱 대담해졌고, 기업은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 여성혐오에 편승하거나 침묵하는 길을 선택해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 대표는 “페미니즘 사상 검증은 여성노동자의 SNS를 파헤쳐 공격하는 것을 넘어, 여성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하고, 일터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칠 기회마저 빼앗고 있다.”고 그 심각성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피해자인 진정인이 직장에 적응하고 자신의 역량을 펼쳐야 할 중요한 시기에 피해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피해자는 존엄을 훼손당한 채 일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문제는 “개인 간의 갈등이 아니”라고 못박은 노헬레나 대표는 “여성노동자의 신념을 검열하고,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모욕하고, 성평등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조직에서) 배제하는 ‘페미니즘 사상 검증’에 기반한 차별”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51742775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기자회견이 끝난 후, ‘페미니즘 사상검증 공동대응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와 요구안을 전달했다. (출처: 페미니즘 사상검증 공대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국가인권위에 실태조사 및 재발방지 대책 세우도록 요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자회견에서 공대위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2020년, 페미니즘 관련 글을 공유하거나 지지를 표했다는 이유로 괴롭힘과 직업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러한 혐오와 배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 관행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이제 국가인권위원회는 자신이 세운 그 원칙을 이번 사건에도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더불어 “지금의 인권위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라며 “인권의 원칙보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혐오세력의 목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오는 상황” 속에서, 인권위가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대위는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 요구안을 제시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째, 피진정인의 행위가 성차별적 괴롭힘이자 성희롱이며, 사상 및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 행위임을 분명히 확인할 것.</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사업장 규모와 관계없이 성희롱·성차별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5인 미만 사업장을 포함한 실효성 있는 개선 대책 마련을 권고할 것.</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셋째, 직업능력개발훈련기관 지정·심사 기준에 성평등 규정과 성희롱 예방체계, 인권교육 이수 여부를 포함하고, 위반 기관에 대한 제재 방안을 마련하도록 권고할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대위는 “누구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존엄을 의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재차 목소리를 높이며, ‘성평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진정인과 연대하겠다고 밝혔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15 20:13: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519036315.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519036315.jpg]]></image>
     </item>

     <item>
       <title><![CDATA[피해자에겐 ‘경찰, 검찰 어느 한쪽만의 문제 아냐’]]></title>
       <link>https://www.ildaro.com/1050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검찰개혁’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검찰개혁은 매우 오래된 의제다. 독재·군부정권에서는 경찰과 정보기관, 군의 힘이 막강했다. 이후 검찰의 힘이 비대해지자, 다양한 개혁안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공안검사 견제, 특검 도입, 검사동일체 원칙 법적 폐지, 서열 파괴 인사, 비사시 출신 법무부 장관 임명,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등이 과거의 검찰개혁책이었다면, 문재인 정부 때부터 이재명 정부까지 오면서 고위공직자수사처 설치, 검경 수사권 분리, 검찰청 폐지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4535112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7월 13일 오전 11시 20분, 국회 소통관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장애여성공감, 민변 여성인권위원회는 김남희, 김동아, 손솔 국회의원과 함께 ‘검찰개혁’에 따른 형사소송법 개정이 여성폭력 피해자에게 개악이어서는 안 되며 피해자 권리보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검찰 중심’ 인식론에 갇혀 있는 정치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는 정치권이 검찰에 의한 피해자, 검찰을 개혁할 적임자, 검찰과 맞서는 자와 그에 맞서는 자 등 ‘검찰’ 중심 인식론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 이재명 정부를 거치면서 당대 국회, 특히 법제사법위원회는 ‘검찰’이 메인 테마였다. 다른 형사사법 현안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는 ‘친밀관계폭력’ 관련 개정안이 몇 건인가?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한국 사회에서 가정폭력을 범죄라기보다 ‘가정의 유지’ 목적으로 다뤄온 왜곡과 봉합의 방식대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에 대한 개정안이 39건이나 법사위에 제출되어 있지만, 이에 대해선 본격적인 논의조차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2대 국회 법사위에 제출된 〈강간죄 ‘동의’ 기준으로의 변경 촉구〉 국민청원만 해도 여러 건이다. 2025년 1월 20일에 회부된 ‘비동의강간죄 동의에 관한 청원’(52,160명), 같은 달 31일에 회부된 ‘억울한 흙수저 성범죄 피해자, 비동의강간죄 국회발의 통과 촉구에 관한 청원’(52,190명), 그해 11월 14일에 회부된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관한 청원’(115,126명) 등. 현재 ‘비동의 강간죄 도입 및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를 위한 형법 개정 촉구에 관한 청원’(7월 16일까지)도 진행 중이다. 앞선 세 건의 청원에 대해 법사위는 심사기한 연장만 반복해왔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고 장자연·김학의 사건·버닝썬…광장으로 나아간 미투운동</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들이 외친 경찰·검찰 개혁 요구는 어디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검찰개혁은 여성들의 의제이기도 했다. 2018년 미투운동 다음 해에 350개 여성·노동·시민단체가 참여한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은 2019년 7월부터 9월까지 10차례에 걸친 ‘페미시국광장’을 열었다. 주제는 〈다시 쓰는 정의–경찰·검찰 개혁, 여자들이 한다〉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45422491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은 2019년 7월부터 9월까지 10차례에 걸쳐 ‘페미시국광장’을 열었다. 주제는 〈다시 쓰는 정의–경찰·검찰 개혁, 여자들이 한다〉였다.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당시 문재인 정부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에서 고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을 다루도록 많은 여성들이 최대한 청원을 하였다. 그런데 2019년 5월 검찰과거사위원회가 고 장자연, 김학의 사건의 본질인 성폭력 범죄를 제외하고 축소하여 기소하고, 버닝썬 사태도 경찰의 유착 비리 혐의를 입증 못 한 채 수사 종결했던 것이다. 검찰 고위직에 의한 성폭력과 상납, 부패, 경찰에 의한 유착과 조직적 성폭력 범죄의 방조에 우리는 분노하였는데, 이를 개혁하겠다는 기구가 여성폭력을 또 배제하고 부차화하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같은 시기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했던 윤석열 당시 대검찰청장이 민정수석이었던 조국의 법무부장관 인사청문회 시기에 조국과 가족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자 ‘조국수호’ 집회가 서초동에서 시작됐다. 2019년 9월 16일 1차 집회를 시작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검찰개혁’과 ‘조국수호’를 외치며 집결했다. 검찰과 경찰에 대한 개혁, 개혁집단에 대한 개혁을 외쳤어야 하는 오랜 여성계 인사들도 ‘검찰개혁’과 ‘조국수호’가 동의어인 집회에 많이 참여하는 모습을 보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 여성가족부 폐지 공격, 조국혁신당의 시작, 윤석열의 내란과 탄핵, 이재명 정부의 출범이 이어졌다. 지금도 검찰개혁 관련 법안을 개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 가족을 도륙한 검찰이며, 검찰을 그대로 놔둔다면 내란이 또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는 배경은 이 과정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검찰 관련 법을 당장 바꾸지 않아서 내란이 발생했고, 검찰 관련 법을 지금 당장 바꿔야 내란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가? 형사소송법과 내란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검찰이든 경찰이든 국회든 대통령이든 정부든 법원이든 과도한 권력은 문제다. 이를 규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법이어야 하고, 누구라도 언제라도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규정되어야 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반성폭력 활동가들, ‘경찰이 문제냐 검찰이 문제냐’ 선후문제로 보지 않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검찰이 한국 사회의 문제라면 그를 규제하는 법은 검찰에 의해 피해를 당했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몇몇 정치인의 관점에서 다뤄서는 안 된다. 검찰 규제의 방안은 역사상 보았을 때도 한 가지만이 아니었고, 그것으로 완벽할 수도 없었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다. 검찰이 일으키는 문제에는 수많은 다른 국가기관과 사회적 구조가 연동되어 있다. 한편으로 검찰은 일부 정치인을 겁박하는 힘을 행사하는 정치적 성격의 기관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가 형벌권, 형사사법체계에서 존재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래서 형사소송법 개정 논의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행하게도, 최근 시민들을 분노케 한 광주 여성 살해사건이 형사소송법 개정 논의에 시민들이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해자 장윤기 부친이 해당 지역 경찰 경감인데, 장윤기의 원룸 비밀번호를 경찰이 알려줘 주요 증거를 인멸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또 장윤기를 단순 살인으로 볼 것인지, 강간 목적 살인으로 볼 것인지와 관련하여 경찰이 사건의 성격을 축소시켜 적용하려 했다는 정황도 제기됐다. 이런 내용이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충격과 분노가 커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시민들이 받은 충격은 자연스럽고 막을 수 없는 것임에도, 이 분노가 현재 진행 중인 형사소송법 개정안-특히 검사의 보완수사권 폐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자, 정치권에서는 그에 대한 반론이 나오고 있다. “검찰이라고 경찰보다 잘하는 줄 아냐”, “검찰에게도 가족이 있다”, “검찰이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검찰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 등. 검찰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이도 없고, 경찰만의 문제라고 말하는 이도 없는데 이렇게 반론하다니 실망스럽다. 검찰 중심 세계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한국 정치권의 현실을 실감하는 순간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45501595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7월 8일, 광주 여성살해사건에서 경찰의 부실·은폐 수사를 규탄하는 광주 지역 기자회견. (출처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2025년 9월 8일 ‘검찰개혁’(안)에 대한 의견서를 발표하였고, 2026년 6월 26일에도 입장문을 발표했다. ‘검찰개혁’ 방안 중 하나로 추진된 검경 수사권 조정이 2021년에 진행된 이후 지금까지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분석하며 짚었다. 회원기관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도 거쳤고, 정책대응팀이 오랫동안 논의한 내용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폭력 피해자 사건지원을 하는 활동가들은 이것을 경찰의 문제, 검찰의 문제, 어느 한 편의 문제로 결코 보지 않으며, 그렇게 볼 수도 없다. 사건 수만큼이나 상황은 다 다르다. 경찰은 열심히 수사했는데 검찰이 불기소하는 경우, 경찰은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는데 검찰이 기소한 경우, 경찰은 더 가벼운 죄명으로 보았는데 검사가 다른 혐의를 적용한 경우, 법원에 가서 공소장을 변경하는 경우, 법원의 새로운 판례를 검사가 적용하려는 경우, 경찰이 적용하지 않으려는 경우…. 모든 사건에서 피해자와 조력자가 발로 뛰거나 일일이 알아내서 문제 제기하거나 의견을 개진해야 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범죄 피해자의 위치에서 시작하는 검찰개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요구한 사항들 역시 완벽한 안은 아니며, 숙의를 거쳐 더 나은 시스템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형사소송법상 피해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형사사법은 피의자–검사–재판부 3자의 관계다”라고 잘라 말하거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것은 “특별법에 특례로 넣으라”고 하거나, “그것은 지금 쟁점과 안 맞으니, 나중에 말하라”거나. 이런 말들을 지난 2주일 동안 들어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조항이 필요하다, 어떤 조항은 우려된다고 의견을 내면 “검찰이 잘한다는 거냐”, “경찰이 못한다는 거냐”, “검찰개혁에 반대한다는 거냐”, “검찰개혁에 대해 이해를 못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당황스러운 편 가르기를 겪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온라인에서는 어떤 검찰에 의해 정당방위 유죄가 났던 피해자가 수십 년 지나 재심을 청구했던 사건을 인용하며 ‘검찰이 문제다’라고 하거나, 구체적인 여성폭력 사건들을 거론하며 ‘경찰이 문제다’라고 하거나, 또 다른 사례를 나열하며 ‘검찰의 성과다’, ‘경찰의 성과다’라는 글이 속출한다. 이것은 여성폭력과 피해자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아전인수, 일방적인 사례 이용에 해당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폭력과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경청’, 제도 전반에 대한 ‘점검’,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형사사법 시스템의 고도화와 보편화, 개인이 비용을 들여야만 해결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게 하는 것, 여성폭력 입법 및 정책 미해결 과제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와 해결로 나타나야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4554255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형사소송법 개정, 피해자에게 개악이면 안 된다.” 7월 13일 국회 소통관에서 〈‘검찰개혁’에 따른 형사소송법 개정에 대한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 기자회견〉이 열렸다. 필자(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의 발언 모습. (출처: 한국성폭력상담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형사소송법 개정에 대한 제안의 두 방향성을 말하자면, 첫째는 복잡하지 않고 명확한 법적 절차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피해자 접근권과 참여가 기본원칙 차원에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상충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참여하라는 것은 복잡한 것 아니냐?’ 혹은 ‘명확한 절차는 특정 기관이 다 알아서 해준다는 것 아니냐?’는 반문은 두 방향의 공존과 고도화를 깊게 고민해보지 않은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검찰을 개혁하고 견제하려 한다면, 피해자에게 더 큰 참여와 접근권을 보장하면 된다. 독일처럼 검사가 항소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피해자가 항소할 수 있는 제도, 독일과 일본처럼 공판에 피해자가 참여하여 검사가 사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거나, 피고인 측의 사건 실체진실을 왜곡할 때 직접 피해자가 질문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일도 가능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검찰의 독점기소권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니, 경찰의 독점수사권도 바꿀 수 없어야 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탁상공론이다. 그렇게 접점 없는 이원화를 하면 권력이 팽팽하여 서로 과도해지지 않으리라고 보는 것은 빈약한 개혁안이다. 수사권을 독점한 경찰이, 기소권을 독점한 검사가 협력하지 않는 채 둘 다 권력이 비대해지면 어떻게 하나 피해자는 질문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c4bb4;">[필자 소개] 김혜정 :</span> 2004년부터 반성폭력 운동판에서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성폭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사려깊고 해방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고, 상근활동가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14 15:50: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혜정)]]></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458096385.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458096385.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나를 보세요, 이렇게 살 수도 있어!”]]></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유호, 노 보더〉(遊歩 ノーボーダー)는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가이자 장애인 동료 상담의 선구자로 불리는 아사카 유호(安積遊歩) 씨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유호 씨와 같은 장애를 가진 딸 우미 씨와의 관계, 그녀를 돕는 젊은 활동가들을 통해 ‘장벽을 허문’(노 보더 no border) 자립생활과 ‘확장된 가족’, 그리고 자매애를 보여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324562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아사노 유미코(浅野由美子)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유호, 노 보더〉(2026)는 일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로 꼽히는 장애여성운동가 아사카 유호(安積遊歩) 씨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 영화 〈유호, 노 보더〉(遊歩 ノーボーダー) 공식 사이트 <a href="https://yuho-noborder.com" target="_blank">https://yuho-noborder.com</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유호(遊歩)라는 이름은 ‘한가롭게 걷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 작품은 아사카 유호라는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아사카 유호 인터뷰 기사 </span><a href="https://ildaro.com/5268" target="_blank">https://ildaro.com/5268</a><span style="font-family: 바탕;">)을 글자 그대로 ‘자유롭고 자긍심 높게 놀 듯이 걷는’ 사람으로 그려 관객을 매료시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호, 노 보더〉는 판화가이자 화가인 아사노 유미코(浅野由美子) 씨가 감독한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렇다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시작점은 어디일까? 아사노 유미코 씨에게 들어보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찍길 바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난 2011년의 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있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원전에 대한 비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무력감을 느끼던 와중이었습니다. 지역 사회의 동료들과 함께 ‘에베츠 탈원전예술제’(홋카이도 에베츠시)를 기획했어요. 예술제에 유호 씨를 강사로 초빙했는데, 영화 초반 장면이 바로 그때예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시 아사노 씨는 탈원전예술제의 주최 측으로서 행사기록용 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시간여의 유호 씨 강연에 심장이 덜컹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무튼간에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젊은 사람들 모두 눈이 초롱초롱했어요. 그래서 강연을 마친 후에 그 자리에서 유호 씨에게 ‘영화를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그랬더니 유호 씨가 ‘지금까지 방송에 나와도 정치적인 발언은 삭제되고, 장애인으로서의 역할만 요구 받았다’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찍길 바란다’고 말하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사카 유호 씨는 선천적으로 뼈가 약하고, 어릴 때부터 가혹한 의료개입과 ‘정상인’모델의 교육으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뇌병변장애인 당사자 단체 ‘푸른잔디회’(青い芝の会)와 만나면서, 장애를 만들고 있는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행동에 나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에서 페미니즘을 접한 후 돌아와 일본 최초로 장애인 당사자에 의한 자립생활센터 설립에 참여하고, 우생보호법의 우생조항(유전적 질환이나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태아에 대한 임신중지)을 삭제하는 데에 기여하는 등 일본 사회의 변화를 꾀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싸우는 몸’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싸우지 않고 서로 돕는 사회를 요구하며, 탈원전과 반전(反戰)에도 목소리를 내고, 에너지의 화신처럼 행동하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장애 그리고 여성…페미니즘으로 포착한 복합차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너무도 농밀해서 모든 이야기를 담자면 대하드라마가 되어버린다”는 유호 씨의 인생. 거기에는 감독인 아사노 씨가 세계의 선주민 운동에서 배워왔던 ‘복합차별’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어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애인 권리운동 안에도 남성중심주의가 있지만, 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제가 바깥에서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는 어려워요. 장애와 성의 복합차별. 유호 씨는 그 복잡미묘한 과제를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였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3261167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아사노 유미코(浅野由美子) 씨. 홋카이도 출생. 전문대를 졸업한 후 일하며 미술학교에서 공부, 판화가이자 화가로 활동하였다. 2012년에 후지노 토모아키 씨와 함께 다큐멘터리 제작회사 영상공방 조시마를 설립.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인 〈유호, 노 보더〉는 현재 도쿄 및 일본전역에서 상영 중이다. [촬영] 우이 마키코(宇井眞紀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성차별은 어린 아사노 씨에게도 깊이 새겨져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서 자라서,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18살이 되면 건물에 올라가서 떨어져야지, 그런 글을 쓴 적도 있었어요. 두 오빠는 놀고 있는데 막내인 저만 밥 차려라, 목욕물 받아라 하며 혼나고, 부모님이랑은 싸우기만 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영화 〈유호, 노 보더〉의 시사회 반응도 흥미로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복지 영화 관점에서 보는 남성 관객이 많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장애 얘기를 하다가 방향을 틀어 페미니즘 얘기로 흘러가니 당황하는 것 같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사노 씨와 함께 영상공방을 설립해 이번 작품에도 편집 등으로 참여한 후지노 토모아키 씨도 이렇게 말한다. “저 혼자였다면 깨닫지 못했을 질문들. 아사노 씨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영화이고, 거기에 이 영화의 현재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시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해 판화가가 된 아사노 유미코 씨는 자신이 살던 지역의 영화제 일을 돕다가, 후지노 토모아키(藤野知明) 씨와 만나게 되면서 자기 손으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 후지노 씨는 7월 말 한국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どうすればよかったか?, 2024) 감독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영화관조차 없는 농촌에서 자란 저에게 영화는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것이었어요. 요도나가 나가하루(1909~1998, ‘영화비평의 거인’으로 불렸던 영화평론가)로 성장한 세대예요. 내가 영화를 직접 만들다니, 생각도 못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지만 사회적 관심에서 창작하는 점은 그림이나 영화나 똑같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만, 그림은 혼자서 완결하기 때문에 평상시에 곰처럼 산에 쳐박혀 있죠. 이따금 산에서 내려와 사람이랑 교류하면서(웃음). 논리를 근거로 작품을 만들면서도 설명은 잘 못 해서 인간관계도 잘 못 해요. 하지만 영화는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려야만 하니, 지금은 기간한정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유호 씨를 마주하는 것도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하지만, 서로 두 팔로 꽉 껴안지 않으면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32651999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아사노 유미코(浅野由美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유호, 노 보더〉(2026) 중에서 아사카 유호(安積遊歩) 씨의 모습. 출처: 영화 〈유호, 노 보더〉(遊歩 ノーボーダー) 공식 사이트 <a href="https://yuho-noborder.com" target="_blank">https://yuho-noborder.com</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한편, 영화 〈유호, 노 보더〉에는 유호 씨를 계속해 조력해온 여동생 아이코 씨도 등장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동생에 대해) ‘후쿠시마의 마더 테레사’라고 유호 씨는 말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아이코 씨는 영케어러인 자신의 이야기를 했는데,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씬이 되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 완성된 영화를 유호 씨는 어떻게 봤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작품을 만들기 전에 아사노 씨는 함께 영상공방을 운영하는 후지노 토모아키 감독의 〈어떻게 해야 했을까?〉 제작에 관여했다. 조현병이 발병한 누나를 둘러싸고 후지노 씨 본인의 가족을 찍은 영화다. (관련 기사: 인권의 문제입니다, ‘조현병의 문제’가 아니고요 <a href="https://ildaro.com/10102"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02</a>) 그런데 유호 씨는 자신을 찍은 이번 작품(〈유호, 노 보더〉)이 바로 그 영화의 질문(어떻게 해야 했을까?)에 대한 응답이라는 걸 간파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유호)를 보세요, 이렇게 살면 됐을 텐데요, 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사노 씨도 촬영 중에 유호 씨에게 “제가 너무 서툰 감독이죠?”라고 말했다가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라, 자신감을 가져라!”라고 허를 찔린 적이 있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니 남 신경 쓰다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지금의 젊은이들도 이 영화를 통해 분명히 힘을 얻을 겁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원문 번역하고, 국내 독자들을 위해 〈일다〉 편집부가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인터뷰: 나카무라 토미코(中村富美子), 촬영: 우이 마키코(宇井眞紀子), 번역: 고주영)</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13 14:22: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장애]]></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나카무라 토미코)]]></author>
	   <category><![CDATA[장애]]></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32805310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32805310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늦게 발견되는 여성의 ADHD]]></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ADHD(활동성 및 주의력 장애)를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 있다. 수업 시간에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장난을 치며, 교사의 말을 끊고, 복도를 뛰어다니는 ‘남자’ 어린이. 실제로 ADHD 연구와 진단 역시 오랫동안 이러한 모습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소녀는, 여성은 ADHD가 적은 것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활동성 및 주의력 장애’(ADHD) 진료 현황 자료(2021)에 따르면, ADHD 진료를 받은 어린이·청소년은 남성이 여성보다 약 3.5배 많다. 물론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일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큰 격차를 온전히 생물학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혹시 사회가 ADHD를 발견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특정한 학생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다. 학생들이 일상에서 큰 비중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학교는 ‘좋은 학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가르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래 자리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 차례를 잘 지키는 학생,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학생, 감정을 조절하는 학생, 교사의 지시에 순응하는 학생….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배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학생다움’이 사회가 오랫동안 여성에게 요구해 온 ‘여성다움’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는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23837947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는 성인이 된 이후에야 ADHD(활동성 및 주의력 장애) 진단을 받았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과연 학창 시절에는 ADHD 증상이 없었던 것일까 질문하게 되었다. (촬영-이은선)</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보이지 않는 ADH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 역시 ADHD를 진단 받은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어린 시절이 아니라 비청소년(성인)이 된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울증 치료를 받던 중 담당 의사가 ADHD 검사를 권했고, 그제야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여러 경험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는 충동이 계속 올라왔지만, 교실을 돌아다니면 선생님에게 혼이 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혼나지 않으면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교실 뒤 사물함에 두고 온 물건이 있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고, 졸린다는 이유로 교실 한편에 있던 스탠딩 책상으로 가서 서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있기 어려운 나의 몸과 학교가 요구하는 규범 사이에서 나름의 타협점을 찾으려 했던 것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정말 어린 시절에는 ADHD 증상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문제 행동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좋은 학생’이 되고 싶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조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많은 여성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얌전해야 하고, 조용해야 하며,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다. 뛰어다니면 “여자애가 왜 그렇게 산만하냐”는 말을 듣고, 자기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면 “드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참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규범 역시 비슷하다.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오래 앉아 있어야 하고, 교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자신의 욕구보다 규칙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좋은 학생’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좋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놀라울 만큼 겹쳐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학생들이 ADHD 진료를 받는 비율이 적다고 해서, 그만큼 ADHD를 덜 경험한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소녀들은 자신의 산만함을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 손을 들기보다 참고, 몸을 움직이기보다 손톱을 물어뜯고, 교실을 돌아다니기보다 머릿속에서만 생각이 흩어진다.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자책하고, 충동적인 행동 대신 완벽주의로 스스로를 통제하려 애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발표된 여성 ADHD 연구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마스킹(masking)’ 또는 ‘가면쓰기’라고 부른다. ADHD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23914231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여성과 소녀의 ADHD는 사회적 기대와 ‘가면쓰기’(masking) 등으로 인해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는 미국 ADHD 당사자 카를리 마르텔리 도브론스키(Karley Martelli Dobronski)의 TEDxRutgers 강연 「Invisible Struggle of ADHD in Women and Girls」(여성과 소녀들의 ADHD, 보이지 않는 고군분투) 중 한 장면이다. <a href="https://youtu.be/Px_EPsMt71Y" target="_blank">https://youtu.be/Px_EPsMt71Y</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학교에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던 학생이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간 뒤 비로소 무너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 이상 부모나 교사라는 외부의 구조가 삶을 관리해 주지 않게 되면 시간관리, 집안일, 행정처리, 감정조절 등의 어려움이 한꺼번에 드러나면서 성인이 되어 ADHD 진단을 받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나는 학교가 ADHD를 발견하는 공간인 동시에, ADHD를 숨기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그렇다. 흔히 “여학생이 더 학교 생활을 잘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정말 소녀들이 적응력이 뛰어나서일까. 아니면 학교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어기지 않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들여 자신을 통제한 결과일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정상성’이라는 이름의 교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는 오래 앉아 있는 몸을 ‘정상’으로 만들고, 한국 사회는 얌전한 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으로 만든다. ADHD를 가진 여성은 이 두 규범 사이에서 자신의 몸과 행동을 끊임없이 조정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ADHD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2394710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책 『걸 페미니즘 : 청소년인권×여성주의』(교육공동체벗, 2018) 본문 이미지. 소녀들이 ‘여성다움’에 맞춰 길러진 결과가 착하고 수업 잘 듣는 학생의 모습과 겹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촬영-이은선)</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어쩌면 우리가 다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여성의 ADHD는 늦게 발견되는가?”가 아니라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끝까지 숨겨야만 했는가?”일지 모른다. ADHD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서 발견되는지는 개인의 특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학교가 어떤 학생을 ‘정상’이라고 정의하는지, 사회가 어떤 여성을 바람직하다고 여기는지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비로소 ‘늦게 발견되는 여성의 ADHD’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는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며, 같은 속도로 학습하는 것을 기본으로 설계되어 왔다. 물론 공동체에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교와 같은 공동 배움의 장에서 요구하는 ‘좋은 학생’의 모습이 단 하나뿐이라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학생들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과 행동을 끊임없이 교정해야 한다. ADHD를 가진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학교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기준과도 맞닿아 있다. 교육은 모든 학생들을 하나의 기준에 맞추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 다른 학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배우고 경험하며,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12 09:37: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의료/과학]]></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은선)]]></author>
	   <category><![CDATA[의료/과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24217159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24217159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죽음의 실감, 그토록 멀고 이토록 가까운]]></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긴 망설임 끝에 〈힌드의 목소리〉(카우테르 벤 하니아 감독, 2025)를 보았다. 영화를 보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총탄 앞에서 “데리러 와 주세요, 제발요! 나 혼자에요”, 5시간 넘게 호소하던 여섯 살 소녀의 목소리와 끝내 도달하지 않는 구원의 손길.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음을 목격하기 위해서는 얼마큼의 용기와 힘이 필요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구원에 필요했던 시간은 단 8분이었다. 8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그곳에 구조대는 그러나 영원히 도착하지 못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05729531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튀니지 출신의 카우테르 벤 하니아 감독이 연출한 〈힌드의 목소리〉(2025) 한 장면. 2024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차 안에 고립되었던 소녀 힌드 라잡의 실화를 다룬 작품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죽음은 점점 많아지고, 우리의 감각은 점점 줄어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이제 재현의 윤리를 깨야 하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과 평화연대를 이어온 활동가가 어느 날 집회에서 비탄에 무너지며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자지구의 알 아크사 병원 응급실에 한 소녀가 실려왔다. 소녀의 온몸은 불에 그을렸고, 살갗 밖으로 튀어나온 심장은 희미하게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소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의사 알리 가잔은 참담한 심정으로 내부인들만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소녀의 영상을 올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이 영상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상상하기조차 두렵고 끔찍한 집단학살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데, 이걸 알면서도 방임하는 나라들과 사람들이 이 영상을 보면 달라지지 않을까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말 그럴까. 더 참혹한 영상을 보여주면,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이들의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할까. 끊긴 숨의 진실이, 그 사람의 사랑과 고통의 이야기가 전해질까. 뭐라도 해야겠다고 신발 끈을 다시 묶을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모함메드 엘쿠르드가 한탄하듯, 그곳에서 일어나는 너무나 많은 죽음은, 그저 매일매일 보도되는 일기예보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숫자에 불과하다면? “하늘에 구름이 끼고 가벼운 소나기가 내리는 한편, 지난 열흘 동안 팔레스타인인 3000명이 사망했습니다.”(모함메드 엘쿠르드, 『완벽한 피해자』, 19)</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너무 많은 죽음을 ‘안다’. 저곳 팔레스타인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이란에서, 그리고 이곳 바다에서, 불타는 공장에서, 골목에서···. 저곳과 이곳의 죽음 장소는 계속 늘어난다. 죽음은 점점 많아지고, 그리고! 우리의 감각은 점점 줄어든다. 역설이다. 이 역설이 너무 괴롭다. 도대체 이 역설에 맞서는 길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죽음은 어떻게 공동의 경험이 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죽음은 나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없다. 나는 내 죽음을 살 수 없다. ‘나는 죽는다’라는 일인칭 현재형 문장은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어 만드는 문법적 뜻은 있지만, 실존적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으로만 다가오고, 이 타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감하거나 무력하다. 잔혹한 폭력에 의한 죽음이 아니더라도, 어떤 마땅한 죽음에서조차도 죽음의 목격자가 되는 건 ‘다른 자기’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감당하는 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우리는 보지 않는다. 보지 않으면서 본 척한다. 이미 무의식의 차원에서 본 척하며 타인의 죽음이 내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게 한다. ‘나’의 울타리 너머에는 그을리고 찢긴 피부 아래서 마지막 파동을 가까스로 견디는 심장이 있고, ‘나’는 뼛속 깊이 제 살을 파먹는 수치심을 무기력하게 방치한다. 그러나 이게 다일까. 몇 번이고 되새김질한 이 질문 앞에서 나는 김혜순의 문장을 다시 읽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죽음 사건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의 연대와 죽음의 선험적 직관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 시들을 쓰면서 저는 죽은 후의 ‘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시적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복수의 화자가 말하는 시끄러운 시들이 폭주했습니다. 그 복수의 존재가 저에게 말을 걸었어요.” (김혜순/황인찬, 『김혜순의 말』, ebook, 10)</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05800372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김혜순 시인이 2016년에 발표한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은 영혼이 이승을 떠나기 전 머무는 49일의 시간(49제)을 모티브 삼아 49편의 시를 실었다. 사회적 참상과 개인의 죽음을 구조적으로 직조해낸 놀라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 독일 세계문화의집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세월호 참사 이후 줄곧 단원고 운동장에 서 있곤 했다는 김혜순 시인은 죽은 ‘혼’을 애도하는 49편의 시를 쓰게 되는데(『죽음의 자서전』), 그때 살아있는 ‘나’가 아니라 그 죽은 이들의 ‘혼’이 시적 화자가 되어 말했다는 거다. ‘죽은 자이면서 다시 돌아온 자, 늘 다시 돌아오는 자’인 바리데기의 역할 수행이라고 그는 설명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게 그가 쓴 시들은 살아있는 우리가 어떤 비탄의 몸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연행하는 시도들이다. 죽음들이 서로 만나기 시작하는 몸, 하나의 죽음이 다른 죽음을 부르는 몸. 바리데기(한국 무속 신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무조신 이야기로, 바리데기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음에도 결국 부모를 구하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죽음들이 자기 안을 지나가도록 몸을 여는 애도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게 죽음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서로를 부르는 복수의 이름들, ‘너(희)’가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리데기가 전승하는 이 여성적 애도의 연행은, 소중한 너/타자의 죽음 속에서 직관적으로 어렴풋이나마 ‘나’의 죽음을 엿볼 수 있다는 장 켈레비치의 철학적 통찰을 넘어선다. 죽음을 ‘경험’하는 게 이곳 삶에 중요하다면, 그 삶은 ‘나’의 영토를 가리키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탈영토화를 감내하는 어떤 사랑의, 비탄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죽음과 작별하지 않는 방식</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아직 들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그 많은 죽음이 우리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우리는 아직 이 죽음‘들’에 닿고자 소망할 수 있을까?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죽음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을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얽히고설켜 함께 뒹굴 수 있을까, 해변에 앉아 함께 화장하며 희희낙락 웃을 수 있을까. 그러길 원하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비탄하고 죽을 수 있는 건, ‘나’ 개인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복수적이고 집단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라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이 집합적이고 복수적인 존재가 행하는 사랑과 비탄을 가리킨다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105824671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제주 4·3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낸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프랑스 메디치상 외국문학상 등을 수상한 이 작품의 제목-작별하지 않는다-는 기억하고 애도하기를 끝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죽음(과 삶)의 이런 유령적 복수 화자의 몸과 말이 얼마나 깊이 내려갈 수 있는지 경험한다. (타자의/나의) 죽음의 실감이 얼마나 먼지, 그러나 또 얼마나 가까운지, 전율한다. 새 ‘아마’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기 위해 제주로 떠난 경하는 그 길 끝에서 깨닫지 않는가. 자신이 따라온 건 인선의 부탁이 아니라, 총살되고 수장되고 갱도에 버려진 저 무수히 많은 죽음의 부름이었다는 걸. 그 부름은 경하의 몸에 깃들어 목소리를 낸다. 하나의 죽음이 다른 또 하나의 죽음을 만나 어루만지고 속삭이며 흐느낀다. 참으로 다정하고 너무나 애통한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은 끝끝내 죽은 이들 곁에 있기를, 사랑하기를, 오로지 비탄으로 애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가 마침내 도달한 ‘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에서 경하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일인칭인지 이인칭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성적 왜’가 아니라 ‘서사적 어떻게’를 붙들고 작별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유령과, 아직 채 죽지 않은 죽음과, 아니 죽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몸들과 함께 하룻밤이라도 같이 기거할 수 있겠는가? 이 ‘어떻게’는 ‘함께’를 향한 몸의 상태, 삶의 지향성, 감각의 재조율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한강이 들려주는 이 ‘어떻게’에, 이 ‘작별하지 않는 방식’에 우리는 감염되어 우리의 ‘어떻게’를 더듬어나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면의 어두운 우물 속에 갇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어서 빨리 이 우물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통증에서 해방되고 싶다’가 아니라, 이 통증과 아픔과 비탄으로 연대하는 방식은 무엇일까를 바로 그 통증 한가운데서 질문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상처입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슬퍼하는 몸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구원에 내 삶과 죽음의 몫이 있다는 걸 계속 감각하고 깨달으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죽음이 다른 죽음을 부를 수 있도록 자기 안에 길을 내는 일, 저 부름이 내 몸에서 끝나지 않게 하는 일. 어느 죽음도 다른 죽음을 대신하지 않고, 어느 죽음도 홀로 남겨지지 않는 세상. 사랑으로 비탄하고, 비탄으로 연대하고, 연대로 죽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세상을 나는 ‘죽음의 실감’이라고 부르고 싶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432cd;">[필자 소개] 김영옥 :</span>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10 10:54: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영옥)]]></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001226719.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1001226719.jpg]]></image>
     </item>

     <item>
       <title><![CDATA[“After the theater world’s MeToo, time didn’t move backwards for us”]]></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 March 5th, 2018 , there was a press conference entitled “MeToo’s Aftermath: Victims Speak!” at the Seoul Bar Association Ha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event was held to expose the sexual violence that Lee Yoon-taek, known as the “master of the theater world,” had inflicted for a long time, and it had a considerable impact on society at the time. The force behind the press conference was the “Joint Countermeasure Committee within the Arts and Culture World,” (the National Sexual Violence Counseling Center Council, the Korea Sexual Violence Counseling Center, Theater People’s Action Against Sexual Violence, Korea Women’s Associations United, the Korea Women’s Hotline, the Korean Women and Children’s Human Rights Center, and the Korean Women Lawyers Association), which included 16 victims and 101 attorneys. Shortly after, on March 23rd, Lee Yoon-taek was arrested, and the following year, on July 24th, 2019, the Supreme Court sentenced him to 7 years in pris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on March 22nd of this year, Lee is scheduled to be released at the completion of his prison term.</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91607908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10th Daehakro X Forum, “After the Theater World’s Me Too Movement, Time Didn’t Move Backwards for Us.” Director Lee Yeon-joo served as moderator, playwright Jeon Seo-ah and Korea Sexual Violence Counseling Center director Kim Hye-jeong gave opening remarks, actor Lee San, dramaturge Jang Ji-young, and producer Shalmue gave presentations for the first part, and Song Jin-hee, head of the Busan Culture and Arts Solidarity Against Sexual Violence, Eo Ji-young, director Shim Ji-hoo, and director Lee Jae-ryeong gave presentations for the second part. ©Ild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 Daehakro X Forum, a group created to foster a culture of voluntary discussion among theater people on various current issues in the theater industry, held its 10th forum, “After the Theater World’s Me Too Movement, Time Didn’t Move Backwards for Us,” to discuss the MeToo movement once again at this moment in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aking place at the main auditorium of the Gangbuk Workers' Welfare Center in Seoul from 2:00 PM on March 17th, the forum attracted an audience packed with members of the theater industry, theater patrons, and art college students, showing there is keen interest in the situation of the post-MeToo theater worl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ooking back at Lee Yoon-Taek’s crimes: how were such things possi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her presentation “After the Conclusion of Lee Yoon-taek’s Sexual Assault Case:  Questions for Solidarity for Surviving Daily Life as an Involved Person,” Lee San, actor and director of Gender Equal Artists’ Workroom Yiro, explained the circumstances of the crim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ee Yoon-taek had a robust career in the theater world and ran the largest theater company in Korea, Theatre Troupe Georipae. After prosecutor Seo Ji-hyeon sparked the MeToo movement in Korea by speaking out  in 2018 about her experiences of sexual harassment in the prosecution service, many victims in the theater world came forward to accuse Lee of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ccording to Ms. Lee’s presentation at the forum, the scale of the misconduct was so significant that “at least 26 victim statements were submitted to the defense team.” She said, “Only crimes that had not yet passed the statute of limitations were dealt with in the trial; the number of victims was actually much hig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ow could such a thing be possible? Analyzing the cause is an essential point for change. Ms. Lee pointed out that “there were 18 victims whose ages could be confirmed in the statements obtained by the plaintiffs, and 15 of them were first victimized when they were under 25 years old,” and explained, “So the proportion of those who had just graduated from high school or college and were just entering the workforce was high.” This is not to say that Lee Yoon-taek targeted them because they were young or naïve but rather that he was well aware that they were in a vulnerable position as the youngest [maknae] and newest members of the theater troup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of the statements they heard a lot from victims was, ‘At the time, I didn’t realize I was being victimized,’” Ms. Lee sai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continued, “Even if (the victims) recognized that [Lee Yoon-taek’s] actions were wrong, it was extremely difficult for them to interpret or describe them as abuse or unethical. The troupe members did not have the authority to make such interpretations. Instead, victims were likely to blame themselves for being unable to tolerate these sexual assaults in the form of massages given to ‘Teacher’ or part of the acting guidance provided by ‘Teacher,’ or they were discouraged by the fear that people around them would accuse them of trying to use sex transactionally to get a rol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9163271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ctor Lee San (seated) giving her presentation “After the Conclusion of Lee Yoon-taek’s Sexual Assault Case: Questions for Solidarity for Surviving Daily Life as an Involved Person” at the 10th Daehakro X Forum, “After the Theater World’s Me Too Movement, Time Didn’t Move Backwards for Us.”</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 way the troupe was run and the way guidance was provided to actors were also problematic. “All decisions and all evaluations of members were under Lee Yoon-taek’s authority,” and it is said that the evaluations could be drastically different “depending on his moo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garding the situation faced by the members of the troupe at the time, Ms. Lee explained, “Today they might be the best actors, but tomorrow they’re unfit for any role. One day, they’re suddenly ordered to leave the troupe, and even after leaving, slander continues to be spread to damage their reputations. Or he might demand very hard work from them, which makes it hard to maintain mental and physical stabil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s. Lee also said that the victims had a more difficult time because “due to the fact that it wasn’t a situation in which they could look into their own minds or those of their colleagues, they could not help but feel isolated despite living together in a communal environment, and had to simply continue to carry considerable anxie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fore, “Lee Yoon-taek was able to easily transform sexual violence into ‘massage’ and ‘method acting,’” and “since the troupe members had already learned the actor’s norm that they should always be willing to do whatever is necessary for the performance, they could not help but feel that attempts to distinguish between method acting and sexual violence were inappropriate or dangerou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anges after the MeToo movem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ince Lee Yoon-taek’s sexual assaults became public knowledge, many people in the theater world have sought change. Dramaturge Jang Ji-young explained, “In addition to accusing individual perpetrators, efforts have continued to create a safe and equal theater world, and various groups have been created and are in operation, regulations have been made, and the atmosphere in the theater world as a whole has chang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the MeToo movement in 2018, the ‘Theater People’s Action Against Sexual Violence’ was formed and continues to be active, and the KTS Working Group was created and distributed the ‘Korean Performing Arts Autonomy Regulations’. (Related [Korean-language] articles: <a href="https://ildaro.com/8404" target="_blank">‘Sexual violence must not occur in our theaters’: The promise of performing artists’</a>,  ‘<a href="https://ildaro.com/8405" target="_blank">Sexual/violence prevention regulations do not hinder creativity</a>’) In Busan, the Busan Cultural Arts Community Anti-Sexual Violence Alliance was formed, and groups were also formed throughout the provinces, like the Jeollabuk-do Women’s Cultural Arts Alliance in North Jeolla Provin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ater patrons also called for and sought change. “Starting with the #WithYou rally in February 2018, audiences raised their voices about the theater industry’s unequal culture both online and offline,” Ms. Jang sai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ng Jin-hee, head of the Busan Cultural Arts Community Anti-Sexual Violence Alliance, said, “Through the MeToo movement in 2018, sexual harassment and sexual violence incidents in the Busan area were publicized by the victims. Afterwards, the Busan Women’s Association and artists worked together to establish MeToo measures in the arts community, and the Busan Cultural Arts Community Sexual Violence Special Response Center was created and operated temporari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ile “this special response center was closed down after four months,” Ms. Song continued, due to the resulting outcry arguing for its necessity, “Busan City has been operating the Busan Cultural Arts Community Sexual Harassment and Sexual Violence Prevention Center since 2019.”</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ngs that haven’t changed, and backlas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the theater world’s MeToo movement, many artists have made a variety of efforts towards putting structures in place to prevent the recurrence of its caus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s. Song reported, “As the organization tasked with operating (the Busan Cultural Arts Community Sexual Harassment and Sexual Violence Prevention Center) has changed in 2025 due to the role being opened up for public bidding, operation of the prevention center in its existing form, which had been focused on victim support and incident response, has been suspended.” She continued, “We have reached a point where we need to think about the meaning of the prevention center, the direction of its operations, and a stable financing and operating mode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continued, “In fact, the backlash against the prevention center continues. We continue to talk about the necessity of the prevention center, but on the other hand there are still those who say, ‘Why should the arts and culture community provide support for victims? This kind of thing is not our job.’ Also, there are local sites where cartels of perpetrators are firmly established, spreading rumors about the prevention center like ‘they don’t have expertise in victim support’ and ‘the center lacks credibility,’ to discourage or attack its activit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was also criticism of schools for falling behind in this area when they should be the first to create change and provide equal spaces for both students and facul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im Ji-hu, a theatrical director who is active in the ‘Joint Countermeasures Committee for Resolving the Sexual Harassment Case of Professor P and the Drinking Class Problem at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KNUA),’ told the audience about several problems she discovered while working on the committe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school mistakenly believes that the core of post-incident measures is to understand and comfort the hurt students; they try to have private conversations such as phone calls or one-on-one meetings instead of communicating officially by email; there is no bridge for departmental issues to be passed on to the Office of Academic Affairs and handled— except perhaps the department professors, but they are very tired of that work; there is no one to solve the problem so there are only repeated apologies; the school is more concerned about the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s opinions than expected, and so they ask the students if they can let it go at this poi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aving criticized the school’s irresponsibility, Ms. Shim continued, "As of 2024, no fewer than six professors at KNUA have been accused of and disciplined for abuse of hierarchy and sexual violence incidents," and "While the disciplinary action against Professor P has not yet been made public, the others received suspensions of one month, three months, and dismissal from their professor emeritus positions. I don't know the specifics, but there are too many (offending professors), and the disciplinary action is too ligh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he also pointed out that “what is just as problematic as the slap-on-the-wrist punishments is the [other] post-incident measures that stop at gestures,” explaining, “In the case of Professor P, our committee demanded that a fact-finding committee be immediately convened to protect the victim, and that the school examine and resolve as a community its hierarchical environment that enables power-based sexual abuse and obstructs proper measures. In response, KNUA formed a ‘Task Force for Creating a Safe Learning Environment’ in December of last year and held an initial meeting. And then it never met agai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garding a professor who committed an offense and was reinstated after a suspension, producer Shim Ji-hoo criticized, “Even though many students opposed the professor’s reinstatement by taking a leave of absence, the school did not take this seriously and did not take action,” and raised her voice in anger to say, “By continuing to act irresponsibly and turning a blind eye, the school seems to be condoning professors’ abuses of power and sexual violenc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91657218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picket sign at “2018 Minutes of Continued Speaking,” an event put on by “Citizens’ Action with the #MeToo Movement” at Seoul’s Cheonggye Plaza on March 22-23. ©Ild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What Lee Yoon-Taek’s victims did to protect each o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10th Daehakro X Forum was also planned as a follow-up to the 9th forum, “How to Deal with Backlash in the Theater World – Via the Movement to Boycott Medea and Its Dou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laywright and director Jeon Seo-ah explained, "[That forum] was a public opportunity created to discuss the unresolved issue of perpetrators’ reinstatement, the backlash throughout the theater world, and the responsibility of public theaters who’ve ignored demands for a safe creative environment. However, these intentions were made meaningless [when some attendees made] advocacy statements representing the feelings and position of the perpetrator, statements that did not consider the victim and constituted secondary victimization, and statements that exactly parroted the hierarchical violence of the theater world. It was chao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owever, the Daehakro X Forum’s organizers did not back down after the experience, but instead planned the 10th forum to hear more diverse stories from more people. They did not stop taking steps to create changes in the performing arts world. The most mentioned and emphasized sentiment not only among the presenters at the forum but also from the floor was “Nevertheless, solidar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ng Jin-hee said, “Solidarity is not some grand thing. It can start from just sharing what each person is experiencing in the field.” She continued, “Each person’s situation is different but similar, so there is a point where they can connect, and there are moments of solidarity that arise from sharing and providing support for each other’s situations. That is why we need a process of acting together even in uncertain moments that are hard to gras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atrical director Lee Jae-ryeong, who was present at the press conference held by Lee Yoon-taek’s accusers seven years ago, said, “These days, I sometimes do theater work and sometimes work night shifts at Coupang.” At the online shopping giant as well, she noted, “When the manager yells and disciplines someone, the air around them freezes. I think creating fear like this (with power) happens in any group. If that fear continues, people end up living with it without even realizing it’s fear, and the members [of the group] end up not being able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That’s why, she emphasized, “being together, talking to each other and communicating, and giving opportunities  for conversation are very helpfu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ee San revealed that Lee Yoon-taek’s victims worked ceaselessly to protect both themselves and others from hi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ven in a situation where they could not confront Lee Yoon-taek, the victims tried to minimize the harm he inflicted. There was a victim who was giving him a massage with a younger member of the troupe when Lee Yoon-taek tried to send her away so he could be alone with the younger member. She anticipated that sexual assault would occur and volunteered to stay instead. There was also a victim who gave a massage in the place of a colleague who had lost sleep because of the [hours-long, late-night] massages. It was only when this power was put toward a collective effort rather than individual efforts that Lee Yoon-taek could be punish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ost of the accusers shared their experiences of victimization that they would never want to bring up again more out of a desire to see justice for the crimes committed against their colleagues. And while they desperately hoped for more victims to testify so that Mr. Lee would receive a longer sentence, to this day they have not revealed the identity of any victims who did not agree to give a statement and so have allowed those women to protect their daily li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y ran to comfort each other without hesitation, held the hands of the victims who came to testify in court, fed them, put them to bed, and spent time with them.” <span style="color: #d925bc;">[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 <a href="https://ildaro.com/10142" target="_blank">https://ildaro.com/10142</a> Published Mar. 21, 202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09 13:13: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Park Ju-yeo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98'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91836498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91836498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투표할 수 있는 권리는 얼마나 보장되고 있었을까?]]></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5</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바탕;">질문: 6.3 지방선거 이후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인해 불거진 일련의 상황을 보며 참정권에 대해 관심이 생겼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선거권,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었을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 style="color: #b735c9;">장혜영:</span> 많은 사람들이 여당의 압승으로 지루하게 끝날 거라고 예측했던 6.3 지방선거 이후 ‘참정권’이 우리 사회의 핫이슈가 되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서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고, 이런 사태가 다수 발생한 서울 잠실 지역의 올림픽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참정권 침해를 규탄하며 이른바 ‘재선거’를 요구하는 올림픽공원 시위, 약칭 ‘올공 시위’의 시작입니다. 시위는 6.3 지방선거가 마무리되고 약 한 달여가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시위의 양상은 ‘재선거’만을 외치던 초기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선 ‘부정선거 재선거’ ‘당일투표 수개표’라는 구호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단순히 침해받은 나의 참정권 회복을 호소하는 것을 넘어, 다른 시민들을 사적으로 검열하고, 경기에 나가야 하는 스포츠 선수들이 장내 입장이나 필요 물품 반출을 방해하는 한편, 현장을 지키는 경찰들을 모욕하거나 압박하는 등 민주주의 기본 가치에 입각한 것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공 시위’는 이를 직접적으로 촉발한 선관위의 무능과 무책임부터 법치의 기술과 시민들의 원초적인 정치적 요구 사이의 긴장까지,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한 다양한 주제에 맞닿아 있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질문자 님이 질문해주신 주제, 즉 우리 사회의 참정권 가운데 선거권이 얼마나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참정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투표할 권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선거권, 쉽게 말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는 참정권의 대표주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참정권’이라는 단어에서 곧바로 선거권을 떠올립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선언하고, 공직선거법 제15조 ‘선거권’ 조항은 18세 이상의 국민은 선거권을 가진다고 명시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선거인 1948년 5.10 총선거는 미 군정이 정한 법령에 의거해 이미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에 입각한 선거였습니다. 선거권은 만21세에 달한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었습니다. 민주주의 후발국가인 한국은 정부 수립 직후부터 보통선거권이 모든 시민에게 부여된 상태로 출발한 셈입니다. 이것은 국적은 다르지만 민주주의와 차별 없는 보통선거권 쟁취를 위해 피땀 흘려 싸워온 세계의 민주주의자들에게 물려받은 귀중한 정치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만 선거권은 참정권의 대표주자이지만, 유일한 주자는 아닙니다. 선거권뿐만 아니라 출마할 권리인 피선거권도 대표적인 참정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대의제 민주주의 안에서 기능하는 간접적인 참정권입니다. 직접적인 참정권도 있습니다. 바로 ‘국민투표’입니다. 우리 헌법은 헌법을 개정할 때 국회 의결 이후 30일 이내에 반드시 국민투표로 찬반을 묻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지금 국내에 도입되지는 않았지만 자주 이야기되는 직접적 참정권은 ‘국민발안제’나 ‘국민소환제’가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민발안제는 지자체로 따지자면 주민발안조례처럼 대리하는 정치인을 통하지 않고 국민들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는 제도입니다. 국민소환제는 선출직 공직자들을 일정 수 이상 국민의 동의를 통해 임기 중에 파면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다양한 참정권 제도를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지만, 오늘의 테마는 선거권이니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정부 수립 직후부터 주어진 보통선거권, 형식과 실질 사이의 괴리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말씀드렸다시피 우리나라에는 정부 수립 당시부터 친일에 부역했다든가 하는 예외를 빼고는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국민들에게 원칙적으로 보통선거권이 주어졌습니다. (친일 부역자에게 선거권을 박탈하는 조항은 나중에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은 과연 명목상 평등하게 주어진 선거권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모든 시민들에게 보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상적인 선거라면 선거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율이 100%일 것입니다. 하지만 2024년 OECD 리포트를 보면 총선을 기준으로 OECD 국가들의 평균 투표율은 약 65%이고, 한국은 그보다 조금 높은 67%입니다. 과거에는 어땠을까요? 낮게 시작해서 조금씩 올라왔을까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84150162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1948년부터 2024년까지 국회의원선거 투표율.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회의원선거 투표율 분석」)</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역대 국회의원 선거 중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는 1948년의 첫 국회의원선거로 투표율이 무려 95.5%에 달합니다. 90%가 넘는 투표율은 1960년 총선 이후 빠르게 70%대로 떨어지고, 1985년에 잠깐 84.6%로 치솟은 뒤 1987년 이후 2000년까지 하락 일변도로 변화합니다. 2000년 총선에서 투표율은 57.2%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50%대를 기록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역대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한 총선은 2008년 총선으로 투표율이 46.1%입니다. 1948년 총선에 비하면 거의 반토막이 난 셈이죠. 당시 이렇게까지 투표율이 낮아진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누구를 뽑아도 거기서 거기’라는 정치 불신을 꼽습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로지 공천을 둘러싼 거대 정당 내부의 계파 싸움만 두드러진 정치 상황이 이어지며,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기대 자체가 크게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많은 유권자들이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선거권을 ‘못’ 행사한 것이 아니라 ‘안’ 행사했다는 것인데요. 다행히 바닥을 친 이후로 지금까지 투표율은 꾸준히 오르는 추세입니다. 추세가 반등하게 된 여러 요인 가운데 공통적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사전투표제의 도입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의 사전투표제는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그 해 선거에서 사전투표율은 약 11.5%였고 이는 전체 투표율의 20.2%에 육박했습니다. 선거마다 등락은 있지만 12년이 지난 22대 총선의 사전투표율은 무려 31.3%에 달하고, 이는 전체 투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전국에 설치된 사전투표소 어느 곳에서나 투표를 할 수 있고 평일과 토요일을 포함해 선거일을 사실상 3일로 늘린 사전투표제도는 유권자들의 투표 편의를 크게 향상시켰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전투표 도입 이전의 부재자 투표 과정은 훨씬 복잡합니다. 사전에 부재자 신고를 하고, 투표용지를 등기우편으로 받아서, 읍면동이 아닌 시군구 단위의 투표소를 찾아가 투표를 해야 했죠. 이러한 시간적·공간적 제약이 개선되자 수많은 시민들이 보다 원활히 자신의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참정권 보장을 확대해 온 사전투표 제도가 최근에는 오히려 시민들의 참정권을 침해한다는 음모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는 공권력에 의한 장애인 참정권 침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통선거권의 형식과 실질 사이를 가늠하는 또 다른 방법은 차별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제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선거 시기가 다가오면 빠짐없이 참석하던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바로 장애인들의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하라는 기자회견입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84325337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0년 4월, 서울 청계천에서 발달장애인들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피켓 시위가 진행됐다. (출처: 피플퍼스트서울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최근에는 발달장애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가 뜨겁습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점자 투표용지를 제공하듯 발달장애인에게 출마자들의 사진이 포함된 그림투표 보조용구와 이해하기 쉬운 공보물을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공직선거법에 나와 있는 투표보조를 발달장애인에게 허용해달라는 내용도 꼭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공직선거법 157조 6항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조항을 가능한 좁게 해석하여 발달장애인들에게 투표보조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손이 떨린다든가 신체적 협응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선거 때만 되면 투표소에서 발달장애인과 그 지원인력이 선거관리인과 옥신각신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손이 떨리냐고 반복적으로 물어보거나, 가족이 아닌 사회복지사나 활동지원사는 지원할 수 없다며 발달장애인 당사자를 혼자서 무리하게 기표소에 들어가게 하거나, 처음 보는 선거관리인들이 멋대로 투표를 보조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투표관리인의 ‘아량’에 따라 투표보조의 여부와 방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같은 일이 반복됨에 따라, 발달장애인들은 최근 서울과 부산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고 1,2심을 모두 승소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선관위의 선거 지침에 정신적 장애인들에게도 심리적·사회적 어려움이 따를 경우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라고 권고했지만, 선관위는 이를 무시하고 상고했습니다. 법원뿐만 아니라 6.3 지선을 앞두고 국가인권위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발달장애인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취지의 구체적인 시정 권고를 내렸지만, 선관위는 형식적으로만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권고를 불이행하였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은 이번 지선에서 겪은 투표보조 차별 사례를 온라인으로 수집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점자용 투표 보조용구를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한 선관위 관계자는 대선과 총선에 비해 지선은 투표용지가 기본 7장이나 되는 복잡한 선거이기에 지선에서는 보조용구를 지급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의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조치를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황당합니다. 만일 이 나라의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다수가 장애를 가졌다면, 선관위원장이 발달장애나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래도 선관위는 같은 답을 내놓았을까요? 선관위의 구조적 부실과 직무유기가 국정조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는 지금, 헌법이 명시하는 모든 시민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실효성 있는 개혁이 시급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84402205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0년 5월 19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진행된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장애인 참정권 침해, 선관위는 책임져라” 기자회견 모습 (출처: 피플퍼스트서울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투표소에서 기표할 권리’를 넘어 ‘원하는 후보에게 투표할 권리’로서의 선거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 가지 논점을 더 제시하고 싶습니다. 앞서 예시로 든 자의적이고 차별적인 모든 선거권 행사 제약의 요소들을 선관위 개혁을 통해 시정한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의 선거권은 참정권으로서 온전히 보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선거권이란 단순히 누구의 외압도 받지 않고 투표소에서 기표하고 이를 투표함에 넣을 물리적 권리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투표소에서 무사히 기표할 수 있었다 해도, 투표 전후로 어떤 사람들의 표를 아무렇지 않게 ‘사표’ 취급하는 우리의 정치 세태를 생각한다면, ‘원하는 후보에게 마음껏 투표할 권리’로서의 선거권이 과연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투표란 단순히 물리적 행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투표에 참여한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는 실질적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선투표제 없는 단순다수대표제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최대한은커녕 최소한으로 반영하는 시스템입니다. 쉽게 말해 당선된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의 표는 아무 의미 없는 ‘사표’로 취급됩니다. 당선자가 과반 이상의 득표율을 얻지 않는 한,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지역에서 다수가 아닌 소수 주민들의 의사로 결정되는 셈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어떤 시민의 표도 ‘사표’로 취급받지 않고 온전히 포함되는 다양한 투표 제도가 세계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국회의원을 전부 비례대표로 뽑는 완전 비례대표제, 후보 명단은 정당이 정하고, 정당만 고르는 비례제가 아니라 아예 후보에 대한 선호를 유권자가 직접 고를 수 있는 선호투표제…. </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내 권리’ 넘어 ‘모두의 권리’로 나아가는 참정권 논의를 위하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러 참정권 가운데 선거권 하나만 가지고도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껴지셨을지 궁금합니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참정권을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의 권리’를 넘어 ‘모두의 권리’를 고민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정과 왕정을 넘어 시민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민주공화국의 체제에서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는 권리는 동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침해받은 나의 권리’에 대한 분노를 ‘내 곁의 약자가 침해받은 권리’에 대한 분노로 확장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참정권 논의는 정말로 풍부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735c9;">[필자 소개] 장혜영 :</span>  21대 국회 정의당 국회의원.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감독이자 동명의 책을 썼다. 현재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이자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 [장혜영에게 정치를 묻다] 여러분이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습니다! </span></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a hre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 target="_blank"><span style="color: #0000f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span></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08 09:39: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장혜영)]]></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84536503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84536503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이기적인 조선동’과 ‘도가니’]]></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기적인 조선동〉 다큐멘터리 영화(황나라 감독, 2025)는 시설에서 나온 선동의 ‘서울 상경기’다. 황당무계함과 날것의 현실감이 동시에 육박해오는 이 영화는, 2026년 박종필상을 받았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64013592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서울시청 로비에서 조선동이 와상농성 중이다. 간이침대 옆에는 “서울시민이고 싶다. 장애인지원주택 보장하라”, “나는 ‘3구간’이 아니라 조선동이다.” 등이 쓰여있다. *출처- 미니다큐멘터리 영화 〈이기적인 조선동〉(황나라 연출, 2025년) 캡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최중증 뇌병변장애인이자 언어장애인 조선동은 잘 걷고 잘 뛰는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이었다. 이동권 투쟁을 함께 하기도 했다. 장애가 심해지며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2008년, 활동지원을 받지 못했던 선동은 결국 시설에 들어가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2022년, 선동은 시설 밖으로 나온다. 14년 만이었다. 동료들은 김포자립생활센터에 터전을 마련한다. 그리고 3년 후, 선동은 집을 새로 구해야 한다. 센터의 거주기간 3년이 끝났기 때문이다. 센터를 나가기 하루 전날. 그는 활동가들을 불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내일 서울로 간다. 용달 두 대 불러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울 종로가 그의 고향이고, 노들장애인야학 동료들이 있는 곳이라는 이유다. 동료들은 한사코 만류한다. 서울에 간다고 당장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뚝딱 나온단 말인가? 게다가 김포에서는 24시간 활동지원 시간이 제공되지만, 서울은 턱없이 못 미친다. 최중증 와상장애인인 그에게 활동지원은 생존의 문제,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는 오히려 묻는다. “같은 몸인데 왜 김포는 되고, 서울은 안 돼?”,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사는 게 권리라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2025년 3월. 시청, 종로구청, 국민연금공단을 넘나드는 “조선동(독)립투쟁” 와상노숙농성이 시작된다. 공무원들은 ‘이기적’이라 비난하고 야학 동료들도 쩔쩔맨다. “우리가 가르친 거에 우리가 당한 거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64055665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노들장애인야학 활동가 영희와 선동의 인터뷰 장면. *출처-영화 〈이기적인 조선동〉 캡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영화는 선동과 노들장애인야학 동료들이 함께 찾아가는 새로운 언어 탐사기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야학 활동가 영희가 선동을 인터뷰하는 장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인터뷰라기보다는 스무고개 같다. 그것도 영희가 묻고 영희가 맞추는. 선동이 하는 발화는 “어” 정도, 대부분 비언어적 소통을 한다. 눈빛, 표정, 손짓, 팔짓, 고개 젖히기…. 선동의 모든 동작, 온몸이 언어다. 그걸 읽어내기 위해 영희는 끝없이 스무고개를 넘는다. 문제는 질문이 단답형이 아니라는 것. 영희는 열린 질문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에서도 자고, 길바닥에서도 자고 공단에서도 자고 노들야학에서도 자고… 힘들었어?” 선동이 긍정의 신호를 보낸다. 다시 영희, “어떤 게 좀 힘들었어?” 선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몸을 흔든다. 다시 영희. 선동의 몸짓과 표정을 음성 언어로 번역한다. “밥을 못 먹어서?” 선동을 살핀다. 선동의 표정이 마땅치 않다. “씻지를 못해서?” 이것도 아닌 듯. 다시 영희가 묻는다. “아니면 잠자는 데가 불편해?” 선동을 살피던 영희는 다시 고쳐 묻는다. “세 개 다?” 선동이 눈매가 누그러지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제야 영희는 그의 뜻을 받아 적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드디어 종로 집을 얻어 이사하는 날 장면도 재밌다. 노들야학 동료들이 이사짐을 나른다. 거실 한복판, 선동은 휠체어에 앉아 동료들을 지켜보고 있다. 침대 놓을 자리로 토론이 붙는다. 선동은 작은 방에 두라고 했지만 동료들은 큰 방에 두자고 한다. 작은 방에 전동침대가 들어가지 않으며, 다용도실로 갈 때는 침대를 건너다녀야 한다며 한목소리로 선동을 설득한다. 설득이 안 되자 동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활동가 명희가 나선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두 조용해 봐.”</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좌중이 조용해지고 모든 동작을 멈춘다. 명희가 선동을 향해 묻는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형! 침대, 작은 방에 놓을 거면 손 들어봐.”</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선동이 손을 번쩍 든다. 결국 침대는 작은 방을 향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인간이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장면들이다. 동료들은 선동을 살피며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을 추론한다. 모르면 다시 묻는다. 알아맞히기 위해 질문을 수정해가며 계속 제출한다. 오래 걸려도 그의 답을 기다린다. 소통에 방해가 되는 잡음을 끄기도 한다. 마음결을 맞추고 선동이 향하는 곳을 같이 향한다. 선동 역시 최선을 다해 듣고 묻고 답한다.  좋은 질문, 좋은 답에 조금씩 다가가기 위해 이들은 스무고개든 손짓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그 모든 것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언어장애는 소통을 멈추기는커녕, 섬세하고 정교한 소통의 장, 상호작용이 들끓는 장으로 모두를 이동시킨다. 언어장애가 있는 와상장애인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한 사람의 온전한 시민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노들야학에서 시청으로, 다시 공단으로 간이침대를 옮겨다니고, 그의 질문과 요구를 피켓에 적어 선동 옆을 지킨다. 그가 공무원들과 협상하는 테이블도 지켰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이 하나 둘 선동이 시작한 투쟁에 참여하고, 그의 노숙농성은 장애활동지원제도 전국동시다발 투쟁으로 확장된다. 결국 전국 162명의 장애인이 필요한 활동지원을 받게 되고, 장애인활동지원 심사제도의 판정 기준 문제를 드러낸다. 선동과 이들의 소통은 장애운동의 한 발짝을 내딛게 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인류의 ‘상호작용 엔진’을 장애 앞에서 꺼버리는 사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언어인류학자 스티븐 C. 레빈슨은 청각·시각·촉각의 여러 채널, 음색과 억양, 동작 등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소통하기, 상대의 의도를 예측하기, 타이밍을 포착해 말할 순서를 주고받기 등, 진화가 다져온 이 정교한 능력의 집합체를 ‘상호작용 엔진’이라 부른다. 이 ‘상호작용 엔진’이 사회적 삶과 인간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강조한다. 그 결과 언어가 만들어지고,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언어가 있어 상호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엔진이 가동한 결과가 언어인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아기가 태어나 보호자에게 안기고,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고, 눈 맞추며 웃는 시간. 아기의 욕구가 충족되고, 서로의 마음을 잇는 시간은 언어 없이 충만한 상호작용의 시간이다. 부모가 치매가 있다서 사람들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다. 더 조심스럽게 묻고 귀 기울인다. 인간 종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반려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의견이 없거나 소통이 불가능하지 않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이런 당연한 상식이 장애 앞에서는 멈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해 1월, 세종, 40대 남성 지적장애인 입소자가 거주시설 직원으로부터 ‘신체적 학대’를 당해 갈비뼈 6개가 부러지는 등 전치 12주 중상을 입은 사건이 올해 4월 보도되었다. 이미 1년 여가 지난 시간이었다. 피해자 가족의 신고를 받은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신체적 학대를 받았다고 결론짓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개월 후, 경찰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입건도 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직접 증거가 없고 목격자인 장애인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취재 결과, 경찰은 법적 의무인 ‘진술조력인’을 제공하지 않았고, 피해자에게 단 한 차례의 방문조사만 실시했을 뿐, 정식 진술도 확보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64127469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영화 〈도가니〉(Silenced, 황동혁 감독, 2011년) 한 장면. 법정에서 진술조력인이 증인과 수화로 소통하고 있다. ‘진술조력인’ 제도는 2013년 도입, 장애인차별금지법 26조 6항에 근거해 의사소통이 어려운 장애인의 형사사법 절차를 돕도록 한 제도다. 실제 ‘도가니’ 사건(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아동 성폭력 사건)의 주임검사였던 신승희 검사는 “2006년 도가니 사건이 처음 문제가 됐을 때, 의사소통과 표현이 미숙하고 낯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피해자들이 진술조력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재수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무혐의의 이유,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기적이다”는 말과 한 쌍의 폐쇄회로다. 장애인이 무언가를 요구하면 ‘이기적’이라며 입을 닫게 하고, 증언하면 ‘신빙성이 없다’고 입을 닫게 한다. 이 회로는 처음 보는 성인 장애인에게 반말을 하게 만들고, 장애인의 말을 가로채고 넘겨짚게 한다. 논의 테이블에서 장애인 자리를 없앤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이 회로는 “장애인 학대·집단 성폭행·보조금 횡령–신고-조사-은폐 담합-무혐의 사건 종료”의 무한 연쇄를 돌리는 엔진이기도 하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엔진은 20년 전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인 성폭행 사건에서 2025년 인천 색동원 거주 여성장애인 성폭행 사건까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반복시켰다. 또한 이 엔진은 장애인의 진술을 듣기를 거부한 무책임을 장애인에게 떠넘기고, 부정의와 비효율, 담합과 범죄의 위험을 무릅쓰고 가해자들을 지켜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종 장애인 학대 사건은 지난 5월, 관련 단체들의 항의 시위로 1년 만에 재수사에 들어갔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2011년 영화 〈도가니〉가 상영된 이후, 우리 사회는 가해자를 처벌하고, 학교를 폐교시키고, 장애인 대상 성범죄 공소시효와 친고죄를 폐지시켰다. 다시 2026년, 〈이기적인 조선동〉이 세상에 나왔다. 이 영화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334cb;">[필자 소개] 호미 :</span>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06 14:38: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장애]]></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장애]]></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64611402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64611402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점령과 가부장제 사이에서…동예루살렘 여성들의 삶]]></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스라엘의 점령과 팔레스타인 사회 내부의 가부장제, 양쪽 모두로부터 괴로움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 인권활동가 아비르 자이야드(Abeer Zayyad) 씨는 2007년에 여성들의 권리와 역량강화를 목표로, 동예루살렘 실완지구에 ‘실완 알투리 여성센터’(Silwan AlThouri Women’s Center, AWC)를 설립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5310189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07년, 동예루살렘 실완지구에 설립된 ‘실완 알투리 여성센터’(Silwan AlThouri Women’s Center, AWC)는 이스라엘 점령과 가부장제 사회로부터 이중 삼중 억압을 겪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지원하는 단체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프로그램 중 요리 코스 연수 모습. (사진 제공: JVC-일본국제볼런티어센터 <a href="https://www.ngo-jvc.net" target="_blank">https://www.ngo-jvc.net</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동예루살렘 고유의 사회적 특성이 무엇인지 자이야드 씨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여성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루살렘은 1948년에 동서로 나뉘어 서측이 이스라엘령이 되었다. 동측은 1967년에 이스라엘이 다시 점령하여 병합됐지만, 1948년에 발생한 난민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도 다수 살고 있다. 자이야드 씨가 결혼 후 살고 있는 실완은 구시가지에서 가깝고 빈곤이 만연한 곳으로,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주민 추방의 표적이 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토지 수탈과 생활 파괴, 신체적 폭력과 학살로 이어진 ‘나크바’(대재앙)가 시작됐다. 거듭되는 전쟁과 체포, 수감으로 인해 남성이 부재한 가운데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공동체를 운영했지만, 이후 돌아온 남성들은 여성들의 리더십을 빼앗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재, 동예루살렘에는 36만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 이주민 23만 명이 살고 있다. 증가하는 이스라엘 이주민에 의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이 확대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제사업기관(UNRWA)의 활동을 위법화하고 시설을 파괴하고, 일부 국가 비정부기구의 활동도 금지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정폭력을 겪어도, 이스라엘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처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들은 이스라엘에 의한 점령과 식민지배 폭력, 그리고 팔레스타인 공동체로부터의 폭력-법적, 경제적, 사회적 폭력-에 복합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그것은 여성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측면에 영향을 준다.”라고 자이야드 씨는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점령에 의한 폭력은 나열하자면 수없이 많지만,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우선으로 꼽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허가가 나지 않아 학교를 짓지 못하며, 동예루살렘의 학교에 다니는 비율은 남녀 모두 낮다. 고등학교가 없는 지구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동예루살렘의 경찰권을 쥐고 있는 이스라엘 경찰이 팔레스타인 여성을 신체검사라는 명목 하에 성희롱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러한 피해는 가족에게 오점이 되기 때문에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일도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빈곤도 큰 요인이다. “통학에 돈이 드는 경우, 남자가 우선시된다.” 자이야드 씨는 이마저도 “교육을 받아 보다 나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을 이스라엘인을 모시는 저임금노동자로 고착화시키는 (교육)정책”이라고 지적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53133403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스라엘의 점령과 팔레스타인 사회의 가부장제 양쪽으로 억압을 받는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상황을 이미지화한 것. (출처-아비르 자이야드 씨의 강연 자료 중)</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여성들은 가정폭력의 위협에도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폭력을 겪어도 공권력에 신고하여 보호를 요청할 수가 없다. “이 역시 사회적 낙인과 연관되어 있다. 피해자가 신고했다가 이스라엘 경찰에게 성희롱을 당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공권력과) 내통자가 될 것’을 요구받기도 하며, 가족관계가 파괴되어 버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이야드 씨는 “강간을 당해도, (팔레스타인) 공동체 안에서는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비판하며, “가족에 대한 평판과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침묵하며 견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라고 고발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해방된 팔레스타인, 평등한 공동체’를 꿈꾼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완에 살게 되면서, 이렇게 보수적인 땅에서 네 딸들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불안했다.” 그래서 설립한 것이 ‘실완 알트리 여성센터’(AWC)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완 알트리 여성센터(이하 ‘여성센터’)가 지향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다.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확보하는 것, 공동체 안에서 결정권을 갖고 리더십을 향상시키는 것, 경제력을 끌어올리는 것, 사회 참여를 추진하는 것 등을 활동의 목표로 삼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구체적으로는 경제적 지원, 심리상담과 안전한 장소 제공, 물리적·신체적인 자기방어 세션도 있다. 여성들의 수요를 조사해 취업 지원 코스로 요리나 그래픽디자인, 휴대폰 수리, 네일아트나 메이크업 등도 있고, 교육을 과정을 밟은 후 소규모 사업으로 연결해 수입을 얻는 사람도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53205580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여성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사회를 지향하며, ‘실완 알투리 여성센터’를 설립해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아비르 자이야드(Abeer Zayyad) 씨. 여성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자립을 지원하고, 공동체에서 결정권을 가질 수 있게 임파워링하며 사회 참여를 추진한다. 촬영-시미즈 사츠키(清水さつき)</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여성센터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다수 여성들의 인생에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직도 ‘강한 여성’을 바라지 않는 남성이 많지만, 우리 활동 참여자의 가정에서 가정폭력이 줄거나, 아들 딸 모두 학교에 다니는 가정이 늘거나, 여성의 조혼이 줄어드는 등. 일부이기는 하나 공동체와 가정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점에는 자부심을 느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센터의 활동 예산은 외국의 지원단체들에 의존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경제적으로 붕괴된 상태라 의지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뿐 아니라 자치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으면, 이스라엘 경찰로부터 단체 폐쇄를 명령받거나 활동가들이 체포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이야드 씨는 “우리는 사회를 바꾸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강하게 말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곧장 이스라엘의 점령을 끝내게는 할 수 없더라도, AWC의 활동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작지만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포기하지 않는 것, 언젠가 점령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을 때, 지금까지 준비해온 것들이 보다 좋은 공동체로 연결될 것”이라고 희망을 이야기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원문 번역하고, 국내 독자들을 위해 〈일다〉 편집부가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인터뷰·촬영: 시미즈 사츠키(清水さつき) 통역: 와타나베 마호(渡辺真帆), 번역: 고주영)</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05 14:29: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세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시미즈 사츠키)]]></author>
	   <category><![CDATA[세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534486342.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534486342.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예루살렘에서 사는 것 자체가 ‘저항’이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휴전 합의 이후에도 이스라엘군의 단속적인 공격에 의한 희생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지난 2월에 요르단강 서안 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 인권활동가이자 고고학자인 아비르 자이야드(Abeer Zayyad) 씨가 일본을 방문해 각지에서 강연을 펼쳤다.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지원하는 여성운동가이기도 한 자이야드 씨를 인터뷰하여, 현지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41655135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팔레스타인 자수가 수놓인 의상을 입고 도쿄 강연에 나선 아비르 자이야드(Abeer Zayyad) 씨의 모습. 1976년 팔레스타인의 동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07년에 동예루살렘 실완지구에 ‘실완 알투리 여성센터’를 설립해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촬영-시미즈 사츠키(清水さつき)</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 선주민인데 ‘일시적 거주자’ 신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를 품고 있는 동예루살렘에서 아비르 자이야드 씨는 나고 자랐다. 자이야드 씨는 도쿄 강연에서 알록달록 아름다운 색감의 팔레스타인 자수가 놓인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예루살렘은 가자지구나 요르단 서안과는 다른 점령정책 하에 놓여 있다.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인도 살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곳을 폭격하지는 않지만, ‘불가분의 수도’로서 동예루살렘을 사실상 병합하고, 한층 더 강력하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추방을 꾀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총기를 휴대한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스라엘 경찰과 군인, 그리고 극우 성향의 이스라엘 이주민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저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이야드 씨도 체포를 당하고 총격을 겪은 적도 있다고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뿐 아니다. 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사실상 지배자인 이스라엘로부터 예루살렘의 ‘일시적 거주자’라는 ID를 부여받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불안정한 신분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이야드 씨는 “1967년의 3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래, 거주자에게 집의 건축이나 수리도 허가하지 않고 있다. 허가 없이 건축이나 수리를 하면 법을 위반했다며 가옥파괴 명령이 내려진다. 2025년에는 538채가 파괴당했고, 1천7백 명 이상이 집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70% 가까이가 빈곤층임에도, 물가는 계속 오르고 세금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취업 또한 어렵다. 특히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으며, 생계를 위해 일을 한다 해도 임금이 낮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옥파괴 피해자의 다수가 여성과 아이들이다. 집을 잃은 이들은 예루살렘이 집세가 비싸기 때문에 친척 집에 얹혀살다가, 친척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범죄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41845682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 동예루살렘에는 36만 명의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 이주민 23만 명이 살고 있다. -이미지 출처: ⓒOpenStreetMap contributors/Datawrapper (영국 BISI 보고서 인용)</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우리는 어떤 위협을 당해도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비르 자이야드 씨는 제1차 인티파다(1987년 시작.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비폭력 저항운동)를 경험하고, 저항과 사회운동을 하는 강한 여성들을 보며 자랐다. 자립심을 키웠고, 대학에서는 고고학을 공부해 팔레스타인 여성 최초로 구시가지 관광가이드 자격을 따서 일하기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고학을 선택한 이유는, 어릴 때 이스라엘인 가이드가 예루살렘에 대해 해설하는 것을 보고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배운 후, 점령자가 역사를 개찬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와 제노사이드(인종청소)를 정당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고학을 배우길 잘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도쿄 강연에서 자이야드 씨는 “유적을 통해 팔레스타인에는 1만 년 전에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에 비해 유대인의 등장은 3천 년 전이니, 이스라엘에게 유리하도록 건국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선주민족”이라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이스라엘 극우 세력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일부까지 포함한 ‘대이스라엘’ 구상을 내걸고, 성지인 알 아크사 모스크를 파괴하고 유대교 신전을 짓겠다고 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월 말, 온라인으로 다시 한 번 자이야드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이야드 씨가 일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귀국한 것이 2월 중순. 그 직후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공격, 전쟁이 시작됐다. 이스라엘군은 이란이 발사한 미사일을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인 거주지 상공에서 요격했다. 미사일 파편이 도망칠 곳 없는 팔레스타인인들 위로 뿌려졌고,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사망자도 발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의 상황은 가자지구에서만큼 명확하지 않아,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라고 말하며 “우리는 어떤 위협을 당해도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저항이다. 이 땅에서, 우리나라에서 나갈 생각이 없다.”라고 단언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이야드 씨는 또한 “일본 체류 중에 제노사이드에 반대하는 반이스라엘 집회에 참가하는 분들과 팔레스타인 국기를 든 분들을 봤다”며, “먼 나라라고 생각했던 일본에서도 제노사이드에 항의 의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큰 희망을 느꼈다.”라고 전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세계가 팔레스타인을 올바르게 이해하길 바란다. 이스라엘 제품의 보이콧이나,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항의 행동도 요청하고 싶다.”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원문 번역하고, 국내 독자들을 위해 〈일다〉 편집부가 수정 보완한 내용입니다. (인터뷰·촬영: 시미즈 사츠키(清水さつき) 통역: 와타나베 마호(渡辺真帆), 번역: 고주영)</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04 10:15: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세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시미즈 사츠키)]]></author>
	   <category><![CDATA[세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421065407.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421065407.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성별 임금격차, ‘임금 형평성’에 대해 문제 제기해야]]></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노동시장의 성별 임금격차는 단순한 통계의 불명예를 넘어 ‘사회 정의의 결핍’을 드러내는 심각한 지표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약 30%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 포함된 1992년부터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더불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5년 성격차 지수(Gender Gap Index)에서 한국은 148개국 중 101위, 성평등 수준이 100위권 밖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은 남녀의 고용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있고, 이에 따라 성별에 따른 채용 또는 노동 조건에서의 차별이나 불이익을 금지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효력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이 법이 ‘300인 이상 공공기관과 500인 이상 민간기업만을 대상으로 하여 매우 협소’하며, ‘시정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 기업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이 전부’라는 점 등이 이유로 꼽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다면 성별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에 어떠한 전략이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해 국제포럼을 열었다. 지난 6월 24일, 서울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노동조합의 교섭전략 국제포럼〉에선 이탈리아, 뉴질랜드, 일본, 독일, 한국에서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포럼에서는 ‘성평등’이 선언적 구호를 넘어, 임금체계의 실질적 재편과 노동조합의 전략적 교섭권을 통해 쟁취해야 할 생존의 과제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이 기사에서는 이탈리아와 뉴질랜드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가 참고하고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을 정리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24759444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6월 24일,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노동조합의 교섭전략 국제포럼-성평등으로 교섭하라〉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주최,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후원으로 열렸다. 뉴질랜드노동조합총연맹의 멜리사 안셀브리지스 사무총장은 요양보호사 크리스틴 바틀렛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설명했다. 크리스틴은 같은 일을 하는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돌봄노동 자체가 ‘여성의 일’로 간주되어 구조적으로 저평가되었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소송은 성별 임금격차 문제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아니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동일노동 동일임금’만으로는 안 돼: 뉴질랜드의 임금 형평성 투쟁</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여성 노동의 ‘구조적 차별’에 맞서 소송 제기한 요양보호사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72년부터 「동일임금법」(Equal Pay Act)이 시행된 뉴질랜드의 사례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에서 나아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뉴질랜드노동조합총연맹의 멜리사 안셀브리지스 사무총장은 뉴질랜드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세우고 발전시켜나간 역사를 설명하였다. 먼저 “뉴질랜드는 1890년대 여성 참정권 운동 시기부터 ‘임금평등’을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논의해 왔다.”고 했다. 이후 1972년 ‘동일임금법’이 제정되면서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직무’를 수행할 때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제화했다. 멜리사 사무총장은 “이 법 덕분에 단기간에 여성의 임금이 남성 대비 70%에서 79% 수준으로 뛰어오르는 성과가 있었으나, 여성이 지배적인 직종 자체가 구조적으로 저평가받는 문제에 대해서는 본질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진정한 변화는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뒤, 요양보호사 크리스틴 바틀렛과 노조가 고용주인 테라노바 홈스 앤드 케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크리스틴은 노인요양시설 돌봄노동자로 노인 돌봄 부문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당 13.50달러라는 최저임금을 겨우 넘는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크리스틴과 노조는 “돌봄노동이 ‘여성의 일’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되어 왔다고 주장하며 청구를 제기”했다. “주장의 핵심은 그녀가 같은 일을 하는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성별에 기반한 구조적 저평가로 인해 직종 전체가 저임금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용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테라노바 측이 항소했지만 항소법원 또한 판결을 유지했다. 법원은 ‘주로 또는 전적으로 여성이 수행하는 업무에 대한 여성의 동일임금은 남성이 같은 일을 한다면 받게 될 임금을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하며, 이때 기술·책임·근무조건·노력의 정도는 물론, 현재적·역사적·구조적 성차별에서 비롯된 일체의 구조적 저평가를 배제하고 산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판결을 바탕으로 ‘2015년 임금 형평성 원칙에 관한 공동작업단’(노·사·정 협의체)이 설치되었고, 2017년 돌봄·지원 노동자 합의가 이뤄졌다. “노인 돌봄, 재가 지원, 장애인 지원 분야의 약 5만5천 명의 노동자가 15%~50%에 이르는 임금 인상을 받는” 성과를 거뒀다. 멜리사 사무총장은 사실 임금 인상이 아니라 “원래 받아야 했던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임금을 정상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2020년 7월, 동일임금 개정법(Equal Pay Amendment Act 2020)이 의회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11월 6일 발효되었다. 이를 통해 “2023년 7월, 당시 뉴질랜드 국가 보건의료 시스템 ‘테 파투 오라’에 고용된 3만 명이 넘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역사적인 임금형평성 합의에 표결했다. 일부 간호사는 소급 임금과 조정분으로 최대 2만8천 달러(한화 약 2,400만원)에 이르는 일시금을 수령”했다. 이후에도 2025년 초까지 14건의 합의가 완료되었으며, “그 합의는 17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포괄했으며, 평균 30~40%의 임금 시정이 이뤄지는” 성과로 이어졌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이탈리아의 역설’: 차별금지법도 있고 단체교섭률도 높은데, 성평등은 왜?</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직무·승진·돌봄 책임·시간제 노동…단순히 기본급만의 문제가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탈리아 노총(CGIL) 전문직 노조의 페데리카 코기 위원장은 “이탈리아 또한 많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법에선 동일임금 원칙을 형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며, 그러나 “성별 임금격차는 단지 낮은 임금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경력 경로, 직무 분류 체계, 재량적 임금, 의사결정 직위에 대한 접근, 돌봄 책임, 시간제 노동, 불안정 노동, 그리고 투명성의 부재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24841601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탈리아 노총(CGIL) 전문직 노조의 페데리카 코기 위원장이 성별 임금 평등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페데리카 코기 위원장은 “이탈리아는 90% 이상의 높은 단체교섭 적용률과 강력한 차별금지법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포럼의 성격차 지수(Gender Gap Index)에서 85~87위권에 머무는 낮은 순위를 기록하는 ‘이탈리아의 역설’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탈리아는 2021년 임금평등법 제162호가 만들어짐에 따라, “남녀 노동자 현황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기업의 기준을 기존 100인 이상에서 50인 이상 규모로 확대”했고, “이 보고서에 채용, 직무 분류, 교육, 승진, 급여, 고용계약, 일·가정 양립 등 세부적인 정보를 포함시키도록 하는 변화”가 만들어졌다. 더불어 “국가 주도의 ‘성평등 인증 제도’를 도입하여 성평등 문제를 기업 정책과 공공 논의, 공공 조달 기준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으며, 기업들이 내부의 성평등 현황을 측정하고 관련 데이터를 축적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도 생겼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페데리카 코기 위원장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짚었다. “인증제는 기업이 실질적인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단지 대중적 이미지를 개선하거나 공공 인센티브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며, 인증 과정에서 노동조합 등 노동자 대표가 구조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기업의 ‘자체 평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집계된 데이터가 너무 포괄적(통합적)으로 제공되어,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채용, 직무 분류, 보너스, 승진 등)에서 불평등이 발생하는지 노조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도 지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2023년 5월에 공식 발효된 EU(유럽연합) ‘임금 투명성’ 입법 지침은 “임금 차별이 개인의 법적 소송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진전”을 보였다. 또 “공동 임금평가,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원칙, 객관적이고 성중립적인 기준 사용을 의무화하여 불평등 시정을 위한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EU 지침을 국내법으로 전환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고 페데리카 코기 위원장은 말했다. 이탈리아의 이해 법령은 “가사노동자, 간헐적 노동자, 경제적으로 종속된 자영업자 등 불평등에 가장 많이 노출된 계층을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고, “EU 지침은 임금을 폭넓게 정의하여 변동 급여를 포함하도록 했으나, 이탈리아 법령은 ‘개인적 재량에 따른 보상’이나 ‘일시적 수당’을 임금 투명성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의 한계를 드러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보이지 않는 임금’을 드러내야 한다: 단체교섭으로 불평등 바로잡아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노조는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코기 위원장은 이탈리아는 단체교섭 적용률이 90%에 달하지만, 성별 임금격차가 여전히 공고한 이유를 “기본급이 아닌 ‘보이지 않는 임금’”으로 꼽으며, 해결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 문제는 성별 임금격차가 명시적인 ‘기본급’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겉보기에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다양한 임금체계와 노동 환경 이면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24907702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이탈리아 노총(CGIL) 전문직 노조의 페데리카 코기 위원장이 효과적인 ‘임금 투명성’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탈리아 노조(CGIL)는 특히 고숙련 직종이나 관리직으로 갈수록 성별 임금격차가 기본급이 아닌 보너스, 성과급, 재량적 수당, 현물 급여, 그리고 단체협약으로 정해진 최저 기준 위에 추가로 지급되는 급여 등에서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보이지 않는 격차는 비자발적 시간제 노동,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직종 분리 등 구조적인 요인에 크게 기인한다. 여성들은 돌봄 책임 등으로 인해 근로 시간이 짧은 직종에 집중되거나 경력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출근율이나 성과에 연동된 보너스 시스템에서 여성이 간접적으로 불이익을 받게 만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코기 위원장은 “과거의 낡은 산업 모델에 맞춰진 직무평가 시스템 속에서 여성이 주로 수행하는 감정노동, 돌봄, 소통, 관계적 기술 등의 가치가 저평가되면서, 개인의 임금 인상률이나 진급 과정에 격차가 은폐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의 노동조합은 성별 임금격차가 바로 그 보너스와 수당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기본급뿐만 아니라 모든 변동 급여와 개인 수당을 포함한 ‘총수입’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투명하게 공개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단체교섭을 통해서만 숨겨진 불평등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코기 위원장은 “불평등이 확인되면 반드시 노동조합이 개입하여 시정조치를 이끌어내는 단체교섭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좋은 법이 문을 열어줄 수는 있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단체교섭이어야 한다”며, “임금이 단순히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을 넘어, 노사 간에 교섭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여성이 주로 수행하여 저평가되어 온 돌봄, 소통, 감정노동, 관계적 기술 등의 가치를 명시적으로 인식하고 정당하게 평가하는 ‘성중립적 직무평가’ 제도의 도입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자신의 노동 가치를 깨달은 여성 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뉴질랜드는 임금 형평성 면에서 선진적인 변화를 만들어냈지만, 그렇게 쌓아올린 제도와 시스템이 정권의 변화로 격변을 맞이했다. 우파연합 정부가 들어선 이후 2025년 5월 6일, 정부가 ‘긴급절차’를 통해 1972년 「동일임금법」에 중대한 변경을 가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멜리사 사무총장은 “진행 중이던 34건의 임금형평성 청구가 아무런 협의 없이 하룻밤 사이에 취소되었고, 새로운 청구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제한되어, 사실상 여성 집중 직종의 수천 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임금형평성 청구를 할 수 없게 됐다.”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25002282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지난 5월 26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전국여성노동조합, 한국여성노동자회 등의 여성노동단체들이 2026년 제10차 여성비정규직임금차별타파주간 기자회견 “여성비정규직 낮은 임금, 구조적 차별을 멈춰라!”를 열었다. 참가자들이 ‘일제강점기의 일본 남성 노동자 대비 조선 여성 노동자의 임금’과 ‘현재 한국의 남성 정규직 노동자 대비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비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전국여성노동조합</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이고, 인권법 위반 소송 및 UN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제소 등 맹렬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멜리사 사무총장은 “무엇보다 직무평가 과정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여성노동자들은 과거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가장 강력한 투쟁의 주체로 변모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조합 또한 임금형평성 청구를 포기 않았다. 멜리사 사무총장은 “뉴질랜드간호사조직은 새로운 기준을 넘어서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2건의 임금형평성 청구를 밀고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성별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한 뉴질랜드 사회의 노력과 변화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교훈을 한국 사회에 전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 번째 교훈은 ‘조직된 힘’의 필요성이다. 법전에 좋은 법률을 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충분하진 않다. 그 성과를 지켜낼 노동조합과 노동자 운동의 조직된 힘이 없다면 그 성과는 언제든 뺏길 수 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 번째 교훈은 ‘진보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거다. 오늘 어떤 권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일도 존재하리라고 그 누구도 단정해서 안 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 번째 교훈은 ‘개개인의 이야기의 중요성’이다. 요양보호사 크리스틴 바틀렛의 사례는 한 나라 전체의 법적 지형을 바꿨다. 정책 토론과 기술적 논변만으로는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목소리를 내는 간호사, 돌봄노동자, 교사 보조원, 사회복지사 등의 목소리를 듣고, 그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02 13:44: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2522446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2522446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We Must Go through Rites of Passage]]></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9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123382994.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Campaign to Outlaw Genetically-Modified Seeds,” started mainly by foreigners in Xela, is now in its third year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Making nixtamal, Guatemalan traditional foo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my last year in Guatemala, I cooked for people many times. I wanted to make meals for the people who had done so much for me. It was nearly impossible to find in Xela the ingredients required by the Korean food recipes I found online, but finding substitutes was a task more fun than difficul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even had a party on special days. On Chuseok [Korean Thanksgiving], I ground rice in the blender to make stuffed rice cakes; on the winter solstice, I made red bean porridge; on Seolnal [Lunar New Year’s Day], I made dumpling soup instead of rice-cake soup. I also used the blender to make red pepper power for cabbage kimchi; I made anyone who visited me taste it. Most of my guests liked the food I made. Although of course, there were many times when I had to serve whatever it was—bibimbap or bulgogi and rice, kimbap or mung-bean pancakes—with tortilla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cause I shared the house with several other people, it wasn’t uncommon to hold large parties together in which we had 10, 20, or more people over. We often had parties in which people cooked together and shared the food. One of the scenes from Xela that I miss is when we would make a campfire in the large front yard, or even without a campfire, when we would gather together to enjoy food from several countries or of unknown origin, laughing and chatting and running back and forth from the kitch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oreigners in Xela depended on and supported each other in this kind of way. Most of them had come to Xela to courageously attempt a new life, whether it be for a few months or a several years. They brought with them assets—both visible and invisible—that they had been storing up, and were using creativity to cultivate a new home. When faced with sudden changes, they naturally knew how to roll with them, as if riding waves. Because we had friends to gather with like this, to eat with and talk with, we were able to momentarily forget our fear and lonelines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124005988.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aking nixtamal, a traditional Guatemalan food ©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f you ask me what the highlight of my cooking was, I would say it was nixtamal. Nixtamal is a paste made by boiling dried corn over a wood fire, letting it cool, and then grinding it. For a long time I wished to make—not just assist in making—this food that the average Guatemalan wouldn’t even tackle, and in my last year I finally found a neighbor with the same goal. We made tens of tamales by filling corn leaves with nixtamal and cooking them over a wood fire, and then gave them as gifts to our Guatemalan and foreign friend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Koreans don’t even acknowledge their neighbo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oming back to Korea after 6 years away, I was shocked at how the number of coffee shops had increased exponentially. I was even more surprised when I sat in one of the coffee shops and tasted a cup of Guatemalan coffee. It’s true that Guatemalans drink a lot of coffee, but there is no coffee there that has such a refined, elegant flavor. Most of the highest-quality coffee beans, which indigenous people cultivate, are exported abro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don’t criticize your life in Korea, as long as you’re happy. But how long do you plan to keep the chocolate that Angel gave you and the tortillas from Mexic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been 6 months since I started living with Ben, an English man who made nixtamal with me in Guatemala 2 years ago. Ben has said that he can’t understand why Koreans who live in the same building won’t even make eye contact with their neighbors, let alone hug or shake hands with the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the building’s owner would just allow access to the roof, a lot of communal activities would be possible, and we could invite people to eat. And we could grow a few vegetabl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seems like it would be hard for him to live in Korea for a long time. He bikes one hour to work, from Hongik University [subway] Station to Hwajeong Station, and back every day, but when I take him to Namdaemun Market, he yawns and says he is bored. As someone who has no interest in buying things and spending money, and whose partner is always working on her laptop, life in Seoul must be tough on him.</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124205816.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Foreigners in Xela support and rely on each other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I want to experience the wisdom and light of the land where I was bor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turning to Korea after entering the strange land of my 40s, I found that I had missed out on an important part of growing up. I had grown in a positive direction while I was having a variety of experiences in Guatemala, and I thought this was something that I couldn’t have done in Korea. I’m pretty sure of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I had overlooked was that there are rites of passage that people can only undergo in the land where they were born. Also, that there are psychological issues that can only be resolved in that certain place where you grew up. As if they had been waiting for me in a freezer for the past 6 years, my unresolved issues rose up from within, threatening to overwhelm me, within days of my return to Kore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ost distressing of the things I am fighting to accept haven’t changed in 6 years are none other than my own old habits. Things I had wanted to fix, had wanted to overcome, and had mistakenly thought that I had fixed and overcome through my trip—I still struggle with them now. Inexplicable anger and envy, psychological dependency, an urge to run away, depression, etc. These cause serious difficulties not just for my work but also for my life with my partner, who has come from a faraway country to be with me.</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una, if you quit your job, what would you want to do firs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et up early. Get up and do something, anything. I just want to voluntarily get up ear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s what I said. When I lived in Guatemala, I rose with the sun. I was under no pressure to do so, I just didn’t want to miss a moment of the dazzling sunlight. So the fact that getting up in the morning is so hard now makes me wonder if I haven’t lost something.</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7/2026070124428900.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ayans say that people were created from corn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Sometimes in my dreams, I see faces from Guatemala and Xela that I miss. My friend Lupe, a painter, wrote in a Facebook message that some helpful force must be bringing me to that place in order to give me strength. I don’t want to go back there as if I were running away from here. I want to complete the tasks I have here. Angel said he was glad to hear that I think that way. It’s natural that a life that had been tossed aside for 6 years would be difficult to resu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later, I want to experience the age-old wisdom and light of the land where I was born, like I had absorbed the age-old wisdom and light of Guatemala. This was my hope when I left Guatemal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your trip continues, I feel for some reason like you have always been travelling. The Luna that I met in this place also seemed like someone who was travelling.” (A message I received from a friend in Korea, while I was in Xela) <span style="color: #b132cd;">[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s://ildaro.com/7279" target="_blank">https://ildaro.com/7279</a> Published: November 4, 201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7-01 10:22: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una)]]></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9'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127121298.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7/2026070127121298.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연극이 끝나도 삶은 계속…혼인평등 향해 인생 2막]]></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게으르게나마 이 인터뷰 연재하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예전 동료들의 새로운 현장을 보는 일이다. 독립서점, 요리작업실, 그리고 이번엔 〈무지개행동〉의 사무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울 마포 공덕동 끄트머리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빌라 2층에 자리한 사무실은 화이트톤의 깔끔한 인테리어와 활동가들의 사무공간이 널찍하고 쾌적하게 배치되었지만, 당연히 상상했던 커다란 레인보우 플래그나 ‘혼인평등’ 구호가 적힌 슬로건이 붙은 벽면 같은 건 없었다. (사진을 어디서 찍나…) 오랜만에 만나는 송이원에게 선물로 준비한 꽃다발을 꽂을 꽃병은 없었지만 퍼레이드 차량, 부스를 준비하기 위한 산더미 같은 택배가 있었다. 퀴어퍼레이드를 한 주 앞둔 주말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300315470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연극계를 떠난 동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퀴어퍼레이드를 한 주 앞둔 주말,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 사무실에서 송이원을 만났다. (사진-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30대에 거의 연극만 하다가 갑자기 딱 연극을 그만뒀을 때, 나이도 그렇게 어리지 않은데 어떻게 살아야 되나 고민이 많았어요. 다행히 잘 풀려서 회사도 다니고 하다가 여기에 정착했는데, 이 인터뷰 기획이 다른 연극하는 분들에게도 (다른 삶을) 상상할 구실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획인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인터뷰에 앞서 “연극계를 떠난 동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내 앞길에 참고삼아 진행하는 인터뷰”라고 소개하자, 칭찬 섞인 그의 답변이 돌아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간 인터뷰이들을 섭외하면서, 그들과 연극/예술과의 현재의 관계를 정확히 몰라 “연극/예술에 거리를 두고” “활동의 반경을 넓힌” 등 완곡한 표현을 썼었다. 실제로 연극/예술과 현재 완벽하게 선을 긋고, 단절하고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데 송이원은 첫 마디에 “연극을 그.만.뒀.다”고 또렷하게 말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연극, 시작―갑도 을도 못되는 병의 이야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학 1학년 말에 성소수자 동아리에, 2학년 초에 중국어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연극보다는 ‘중국어’로 뭘 한다는 거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연극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그러다가 전공까지 경영학에서 미학으로 바꿨죠. 경영학은 어렸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해 선택한 전공이었는데, ‘휴먼 리소스’라는 생각해보면 충격적인 표현을 낙관적이고 긍정적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경영학에 계속 위화감도 들었고 위축도 되었고요. 미학은 그냥 교양으로 들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관심사에 따라 전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두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제적, 재입학을 거쳐 이미 연극 활동을 한창 하던 2020년에서야 거의 열 살 훨씬 넘게 차이 나는 후배들과 함께 간신히 졸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브레히트의 소격효과나 그런 걸 미학 수업에서 배우면서, 공간을 가지고 관계 맺기의 방식을 만들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연극은 뭐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닌가! 첫 공연 때는 배우를 했다가, 〈광인일기〉를 각색하며 극작도 해보고, 연출도 하고, 그렇게 됐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 친구들과 결성한 ‘병(丙)소사이어티’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고, 한동안은 해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작품을 만들어 참여했다. 함께 하던 대학 친구들 중 자신의 진로를 찾아 떠나는 사람도 생겼고, 작업하며 만난 인연들이 극단에 들어오기도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병(丙)소사이어티’는 갑도 을도 못되는 병의 이야기를 하자, 하며 만들었어요. 실제로 저를 포함해 그런 변방의 사람들이 모이기도 했고. 너무 팬시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보다는 좀 비주류적인 이야기 혹은 그 감성 자체를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어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연극을 한두 번 해보면서 저는 가장 딱 즐겁고 쾌감을 느꼈던 순간이 대사나 어떤 방식으로든 전달하는 내용 자체보다 그 내용과 공간의 분위기, 형식이 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엄청 짜릿하더라고요. 그래서 연극의 형식을 실험해보고 싶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무대의 언어를 발견하고 싶다, 하는 연극적 자의식이 생겼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만든 작품이 낙성대역 근처 지하 작업실에 학교 책상을 늘어놓고 그 위를, 관객들 사이로 돌아다니다가 책상으로 공간의 구조를 바꾸기도 하는 형식의 자기고백적인 작품 〈꼬마 짱꼴라〉(2015 서울변방연극제), 그리고 연극인이자 연출로서의 얼마간의 자기 트레이닝을 거쳐 선보였던 〈신토불이 진품명품〉(2019 서울변방연극제)였다. 〈신토불이 진품명품〉은 트랜스젠더, 병역거부자 친구들, 그리고 ‘소수성의 복합체’인 송이원 연출이 공동창작하여 선보인 작품이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21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3003488783.jpg" alt="" width="721"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는 송이원이 연극을 전공하지 않은 연극인이라는 점, 대본이 아닌 공간성에 집중하는 연출 방식, 그리고 그의 교차성(퀴어, 대만 국적자로서 이중언어 사용자)에 주목하였다. 연극 활동을 하던 시기 송이원은 ‘변방’연극제를 거점으로 새로운 실험을 계속하며 자기만의 연극 언어를 만들어갔다. (사진-송이원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연극, 승승장구―대만 국적자로서 ‘주류’ 연극계의 궤도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전에도 송이원은 연극계에서 감 좋은 사람들은 눈여겨보던 연출이었지만, ‘변방’연극제가 거점이었던 그녀는 〈신토불이 진품명품〉을 기점으로 ‘주류’ 연극계(란 뭘까요?)의 궤도에 오른다. 대기업 문화재단, 대기업 극장, 국립 공연단체 등, 공연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파하는 예산, 공간, 인적 서포트를 갖추고 자신의 공연을 정식으로 만들어 공연할 기회를 순차적으로 얻게 된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그때는 솔직히, 그러니까 그 순간을, 저는 되게 바랐어요. 오만한 말이지만 저는 제 무대 언어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제가 하는 게 논의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스스로 평가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연극 언어를 실험해보고 싶었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엇보다 국적 때문에 제 개인 명의나 제가 대표로 있는 단체로 지원사업을 신청할 기회조차 없는 제약이 있으니, 내가 계속 작업을 하고 실험을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제도권으로 가거나 제도권의 의뢰를 받거나, 아니면 (연극계에서 알아줄 만한) 상을 받거나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미친 듯이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송이원은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라고 쭉 살고 있지만, 대만 국적자다. 증조부모가 어린 조부모를 데리고 구한말에 한반도로 넘어왔고 한국전쟁 때 북한 영토에서 남한 영토로 이주했다. 초등학교는 한국 어린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잠깐 중국에 다녀온 후부터는 고등학교까지 화교학교를 나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상업적 소극장 연극은 공공지원금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문화예술 공공지원제도의 지원 요건의 제1항은 “대한민국 국적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30대 초반의 송이원에게는 연극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제도적 인정’밖에 없었던 셈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9년에서 2020년이 저의 연극 언어가 큰 전환점을 맞이했어요. 고주영 PD님이 소개해 참가했던 TPAM(요코하마국제공연예술회의, 현 YPAM)와 ADAM(The Asia Discovers Asia Meeting for Contemporary Performance) 덕이었죠.</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ADAM 프로그램에 참여해 타이완에 머물면서 홈리스 분들이 모여 계시는 어떤 공원에서 한 달 동안 리서치를 진행했어요. 메모와 노트로 작업스케치를 하면서. 그 전 작품들이 어떤 선을 타되, 거리를 두면서 구조에 대한 무력감을 조롱과 비웃음으로 표현하는 작업이었어요. 윤리적인 상대적 거리두기를 편하게 했었달까.</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홈리스 커뮤니티를 리서치 하면서는 어떻게 그 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만들어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2020년에 국립극단에서 한 작품부터 작업방식이 크게 달라졌죠. 뭔가를 완성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시아의 공연예술 플랫폼에 송이원을 소개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연극을 전공하지 않은 연극인, 대본이 아닌 공간성에 집중하는 연출 방식, 그리고 그의 교차성. 퀴어 연극인은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태생적으로 국적의 소수자성, 그로 인한 이중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은 예술창작에 있어서 독보적인 강점이며, 그래서 송이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금도 그 생각은 다르지 않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연극, 끝―여기에는 내가 필요없구나, 나도 안 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원하던 주류 연극계로부터의 ‘의뢰’ 작업을 통해 새로운 자신의 연극 언어를 한창 찾아나가던 중, 송이원은 연극을 불현듯 “그만뒀다”. 이원은 그 선언까지의 과정을 두 단계로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1년 연말에 마지막이 된 작업을 하던 중에 일단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 공황도 시작되고. 끝까지 하고 싶었지만 제 상태가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팀원들이 오히려 ‘같이 하기 어렵겠다, 빠지는 게 낫겠다’ 해줘서 연출이 빠지고 다른 멤버들의 공동창작으로 공연이 올라갔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잠시 작업을 중단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돼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2022년 여름,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큰 연극상에서 연락이 왔어요. ‘연출님, 아직도 대만 국적이세요?’ 그런데 그 상에서 국적 때문에 배제된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어요. 그 이전에도 한 번 국적 이슈로 수상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었거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적으로 인해 더더욱 필요했던 상과 제도의 인정을 너무도 명백하게 국적 때문에 두 번 놓치게 되었을 때의 박탈감과 소외감, 질투와 원망, 억울함은 미처 다 상상할 수 없다. “아, 여기에는 내가 필요 없구나. 나도 안 해”라는 어쩐지 나에게도 익숙한 감정.</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300420143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연극을 그만둔 후, 송이원은 생계와 어머니 부양을 위해 한동안 직장생활에 몰입했다. 그러다 〈모두의 결혼〉 활동가로 일하게 되었고, 지금은 한국성소수자인권단체연합 〈무지개행동〉 사무국 일을 겸하고 있다. (사진-송이원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그렇게 연극과 연결된 끈을 놓은 이원은 한동안 직장생활에 몰입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필요했다. 정부의 한 부처 대변인실 PR을 하는 회사에서 정치적 신념과는 다른 언어를 생산하다가, 현재 무지개행동 공동대표의 추천을 받아 시민사회단체 일을 시작했다. 작업에서 다루던 주제, 변화의 계기를 던지는 작업과 활동,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성소수자 커뮤니티 등을 생각하면 전혀 상관없는 일은 아니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 공공적 성격이 강하지만 영리회사였던 법률서비스 회사, 〈모두의 결혼〉 사무국을 거쳐 지금은 〈무지개행동〉과 〈모두의 결혼〉을 동시에, 이원에게는 연출작 리스트만큼 예술 외 직업인으로서의 이력이 쌓여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극할 때도 극작, 연출뿐 아니라 기획, 매니지먼트를 다 했어서 온갖 일을 다 해봤던 것 같아요. 예산도 직접 짜고, 세금도 신고하고, 그러다 보니 엑셀도 다룰 줄 알고…. 출퇴근도 없이 꿈에서조차 작업 고민을 하던, 24시간 머릿속이 전쟁이던 때에 비하면 출퇴근이 있고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일, 괜찮아요. 사실 연극이 제일 힘들었어요(웃음). 사실 직장 일 같은 건 연극 작업 구상할 때와는 머리 쓰는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이제는 연출 회로도, 아이디어 회로도 끊긴 것 같기도 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두의 결혼〉 활동가를 제안받았던 당시 일하던 법률서비스 회사는 수익구조와 경제적인 면에서 장래가 보장되는 곳이었고, 이원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사를 한 채 직장생활을 하는데, 그 역사적인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 소송’에서 승소 판결이 나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소식을 듣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나는 뭘 하고 있나. 이미 못하겠다고 얘기는 했지만, 마음은 이미 〈모두의 결혼〉에 가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제안을 했던 분에게 뒤늦게 다시 연락을 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두의 결혼〉에서 활동하다가 〈모두의 결혼〉을 포함한 여러 성소수자단체의 연대체인 〈무지개행동〉의 사무국 일까지 겸하게 됐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300452433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We Run For 동성결혼’은 사단법인 모두의 결혼(Marriage for All Korea)에서 진행하는 캠페인으로, 참가자들은 마라톤 대회 등에 참여하여 동성결혼 법제화를 촉구한다. (사진-송이원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제가 이제 2년 후면 마흔이에요. 10년 간 정말 열심히 했고, 어떤 결과를 보고 싶었던 연극이 삶에서 사라진 후에 사회초년생이 된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요. 〈무지개행동〉은 연대체인데다가 법·정책의 변화를 목표로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다뤄야 하는 영역이더라고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연극, 그 다음―동성혼 법제화될 때까지 이 일을 할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원은 “연극은 완벽하게 과거형”이라고 잘라 말한다. 영화관 가는 건 지금도 좋지만, 공연장은 솔직히 좌석이 너무 불편하지 않냐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에는 의도적으로 연극과 관련된 건 뭐든 보기가 싫었던 것 같아요. 친했던 동료들과도 단절됐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은 딱히 관심을 안 두고 살다 보니까 정보도 안 잡히고... 친한 배우나 연출이 하는 공연 가끔 보는 정도예요. 작년엔 딱 두 편 봤네요(웃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 생각해 보면 연극 작업할 때 저는 정말 막 쏟아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도 맡은 역할도 많았는데 서툴렀어요. 잘 해내고 싶어서 욕망과 악에 받쳐 있었던 것 같고요. 그걸 팀 사람들이 참 많이 배려해주고 받아줬구나, 내가 많은 걸 받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하는 작업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주신 분들에게 좀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들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지막 작업 때 책임을 끝까지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어서 작년 즈음부터 개인적으로 팀 사람들을 만나고 있어요. 이제라도 천천히 마무리를 해나가야죠. 퀴어퍼레이드 끝난 후에도 한 번 모임을 갖기로 했어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300521111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무지개행동〉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송이원. 책상에는 “동성결혼 불인정은 위헌이다.” 문구가 보인다. (사진-고주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원은 최소한 동성결혼이 법제화될 때까지는 지금의 일을 하겠다고 한다. 의외로 빨리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농담도 섞어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극을 할 때는 궁금한 걸 작업 핑계로 파고들었지만, 지금은 궁금한 게 생기면 일과는 별도로 홀로 공부해야 한다. 지금 관심이 가는 건 종교.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종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을 넘어 집단적으로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과 방식,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현실과 상징 등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고. 그리고, 그 다음의 미래는 아무 계획이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연출이 사주 공부를 한다고 한 번 봐준 적이 있는데, 제가 84세부터 104세까지 연애운이 너무 좋다는 거예요. 일단 104세까지 산다는 게 좀 충격이었는데, 지금까지 순탄하지는 않았어도 묘하게 다음이 오면 살아내겠거니 싶기도 해요. 제가 경험도 경력도 없는데 활동가로 초대해준 사람들에게도 감사하고…. 그리고 84세에는 사랑을 받는다니 쓸쓸히 외롭게 죽진 않겠구나, 그런 막연한 희망이 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72ed1;">[필자 소개] 고주영 :</span>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30 12:01:00</pubDate>
	   <section>sc8</section>
	   <section_k><![CDATA[일다의 방]]></section_k>
	   <section2><![CDATA[인터뷰]]></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고주영)]]></author>
	   <category><![CDATA[인터뷰]]></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300949109.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300949109.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여성 BJ에게 ‘양지로 나오지 말라’는 비난은 부당해”]]></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화장품 회사와 협업한 여성 인터넷 방송인(BJ)을 향해 쏟아진 거센 비난과 그로 인한 모델 기용 취소 사태가 있었다. 이른바 ‘음지’에 있어야 할 존재가 ‘양지’로 나온다는 인식에 따른 반발 때문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에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는 성명을 통해 “우리는 ‘양지’에 나올 자격 판단의 기준을 거부한다. 바꿔 말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그로 인한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며 성적 위계에 따라 여성의 ‘급’을 나누고 배제하는 통념에 반대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문제 의식을 확장하기 위해 지난 18일,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안젤라홀에서 5명의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여성 BJ를 둘러싼 페미니즘의 시선과 질문들〉을 주제로 집담회를 진행했다. 발제자들은 여성 BJ를 둘러싼 혐오의 본질과 이를 소비하는 거대한 산업 구조, 그리고 페미니즘이 나아가야 할 연대의 방향에 대해 각자 의견을 밝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83507192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6월 18일,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안젤라 홀에서 〈집담회: 여성 BJ를 둘러싼 페미니즘의 시선과 질문들〉이 열렸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신성연이,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나나,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신지영,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산, 한국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상담소 은수 활동가가 패널로 참여했다. (제공: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남성 수요와 자본과 구조 대신, 여성 개인에게 쏠리는 비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성매매 여성, 유흥업소 여성, AV 배우, 그리고 벗방 BJ 등을 ‘음지’의 존재로 간주해 왔다.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신지영 활동가는 “이런 논쟁은 항상 여성 개인한테만 집중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산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남성들의 수요, 플랫폼 자본, 남성들의 소비 문화는 질문 받지도, 비난의 중심에도 놓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정작 남성 소비자들에게 여성이 양지에 있는지 음지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광고 속 여성의 몸, 아이돌의 섹슈얼리티, 벗방과 포르노,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을 광범위하게 소비하며 클릭과 조회수, 수익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여성민우회 은수 활동가는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원으로 수익을 얻는 행위를 비난하기에 앞서, “정작 이 구조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엑셀 방송’이다. “여성 BJ들의 실시간 순위가 엑셀 표처럼 뜨며 경쟁을 유도하는 이 방송에서, 여성 BJ들은 끊임없이 다른 여성으로 대체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반면, 이들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남성들 간의 위계를 형성하는 호스트(사장)는 대체되지 않으며, 연간 수백억 원의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성폭력상담소 산 활동가는 유튜버 김계란이 기획한 걸밴드 ‘QWER’의 사례를 언급하며, “남성 타깃의 콘텐츠를 제작하던 여성 크리에이터들의 이른바 ‘나락’과 ‘음지’ 이미지는 남성 기획자에 의해 철저히 셀링 포인트로 설계된다”고 꼬집었다. 그리고 “착취적인 성산업 구조를 ‘양지화’하여 이윤을 얻는 실제 행위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대중의 비난은 철저히 여성 BJ 당사자의 몸이라는 경유지에만 쏟아지고 있는 형국”이라고 분석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83532130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집담회: 여성 BJ를 둘러싼 페미니즘의 시선과 질문들〉 현장 모습 중 (제공: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완벽한 피해자’에 대한 강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사태에서 특히 뼈아픈 지점은, 여성 BJ를 향한 비난과 폭력이 때때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한사성 신상연이 활동가는 “온라인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를 ‘여성 인권의 수호자’로, 스스로 성적 대상화가 되는 여성 BJ를 ‘사이버 창녀’이자 ‘여성 인권의 적’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지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디지털 성폭력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성적 대상화되지 않을 권리’가 강력한 구호로 떠올랐으나, 이것이 개인의 의지와 실천 문제로 환원되면서, 신체를 드러내는 여성들은 사회적 안전을 위협하는 유해한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우회 은수 활동가는 이러한 낙인이 “(가부장제 사회가 고안한) ‘창녀혐오 서사’를 경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여성 BJ 중에서도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비자발적으로 일을 시작했음을 증명해 내는 ‘진짜 피해자’만이 인권의 영역에서 다뤄질 자격을 얻는” 현실을 꼬집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 BJ가 자발적으로 ‘벗방’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피해가 발생하는지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나? 오히려 진짜와 가짜를 나누며 진정성을 따져 묻는 말들은, (여성 BJ가) 방송 중에 겪은 불쾌하고 불편하고 부당한 상황을 ‘폭력’이나 ‘피해’로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다. 내가 방송을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성적 대상화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일종의 거래행위에 ‘합의’했기 때문에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피해자다움’과 끊임없이 충돌하게 된다. 이들에게 사회적 통념에 부합하게 말할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가려지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현상은 반성폭력 운동이 오랫동안 맞서 싸워온 ‘강간 신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산 활동가는 “보호받아 마땅한 ‘완전무결한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여성을 구분하는 통념은 성폭력 발생의 구조적 배경을 은폐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특정 범주 외의 여성을 몰아내면 정상 여성들의 사회가 안전해질 것이라는 분리주의적 믿음, 배제의 감각을 깨기 위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포장지에 가려진 여성들의 노동 경험을 들여다봐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의 나나 활동가는 “법적으로 허용된 시장인 벗방 산업의 생태계에 대해 우리가 여전히 무지하다”고 말했다. 특히 “플랫폼 기업들이 화면에 ‘불법 유출 금지’ 문구를 띄우고 신고센터를 운영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불법 성착취물 유포 사이트에 대한 강력한 제재나 근본적 대응은 회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선 많은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는 점을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이득을 보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플랫폼 자본의 전략은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거대한 산업 네트워크 속에서 “구조와 자본은 추상적인 존재로 숨어버리고, 대중의 분노와 처벌의 대상은 오직 화면 전면에 나선 여성 당사자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기에 신상연이 활동가는 섣부른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여성 BJ들이 처한 사회구조적 맥락과 감정 노동의 현실을 진지하게 탐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이 산업에 진입하게 되었고, 시청자와 플랫폼의 압박 속에서 어떻게 타협하고 있는지 등 다양한 얼굴과 구체적인 경험을 들여다보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차이를 지우지 않는 연대가 필요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담회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입모아 특정 여성 개인을 ‘음지’로 영구 추방하는 방식으로는 이 거대한 폭력의 고리를 결코 끊어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신지영 활동가는 “오랫동안 여성운동이 ‘성매매하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해 왔다면, 이제는 여기에 더해 ‘소비되지 않을 권리’, 나아가 ‘성적 도구화되지 않을 권리’를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여성이 끊임없이 잘 팔리는 상품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요하는 사회, 그리고 그렇게 소비된 여성을 다시 ‘정상성’의 기준에 미달한다며 추방하는 이 기만적인 구조 자체”를 직면하고, 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엇보다 “여성들 간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차이와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은수 활동가는 “페미니즘은 공정과 불공정의 감각으로 파이를 다투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취약한 이들과 어떻게 더 촘촘히 연결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83612735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23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성명]-‘양지’와 ‘음지’라는 구분을 거부한다. - 인터넷 방송 BJ 여성의 광고 모델 기용 취소 및 사이버몹에 부쳐-를 공개했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다음은 지난 4월 23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발표한 성명서 “‘양지’와 ‘음지’라는 구분을 거부한다” 내용 중의 일부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혐오다. 존재하는 자를 없는 셈 치는 것, 존재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 사회에 끼워 주지 않고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은 혐오다. ‘음지’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정상성 복귀를 강요받는 한편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양지’에서 계속 배제된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그런 ‘양지’는 해방이 아니다. 정상 여성만의 ‘양지’는 해방일 수 없다. 스스로 성적 대상화되는 여성을 ‘행위자’로서 비난하고 사회에 있을 자리를 박탈하는 것은 유구한 폭력일 뿐이다. 문란하고 난잡하다고, 유해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낙인을 해체하자. 우리는 손가락질 끝에 놓인 존재의 손을 잡고 볕으로 나갈 것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28 18:3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매매]]></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성매매]]></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838331184.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838331184.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입양이 남긴 시간의 공백을 읽는 법]]></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6월 16일, 마야 리 랑그바드(Maja Lee Langvad)의 신간 『나의 통역사(TOLK)』(손화수 번역, 2026, 푸른숲)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서울에서 열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71959918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의 통역사(TOLK)』출간기념회에서 저자 리 랑그바드의 모습 (푸른숲 출판사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리 랑그바드는 한국계 덴마크 작가로 생후 2개월에 덴마크로 입양되었던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시와 수필, 소설 등의 글쓰기를 넘나들며 영화, 미술, 연극 등 다양한 장르와 협업하는 예술가이다. 한국에 번역된 첫 번째 책이었던 『그 여자는 화가 난다-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고백』(손화수 번역, 2022, 난다)에서 책 속에 ‘화가 난다’라는 글자를 천 번도 넘게 반복해서 쓰며 국가 간 입양이 산업이 된 현실을 향해 비판적 목소리를 던진 바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시이자 에세이였던 전작이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저자가 서울에 거주하며 원가족과 만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이번에 출간된 소설 『나의 통역사』는 한국과 덴마크를 오가며 원가족과 12년간 교류한 긴 시간의 축적에서부터 출발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자의 전작과 이번 작품 모두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재료로 하지만 일부는 분명 변형되어 있기에 독자는 책 속에서 입양과 가족에 관한 진실과 허구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작품 속에서 ‘나의 통역사’는 ‘나’에게 종종 자신과의 대화를 소설에 쓸 것인지 묻고, 사적인 일화는 소설에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나’ 역시 가족과 만남을 이어갈수록 자신이 쓰는 소설이 가족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지, 혹은 자신의 비밀을 가족이 알게 되어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듯 입양인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는 불안과 긴장, 화와 슬픔, 상실감과 답답함이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렇기에 책에 적힌 글이 작가의 실제 경험인지 아닌지 헤아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책 속의 ‘나’가 원가족을 만나는 경험이 끝나지 않을 치열한 여정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감각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저자가 직접 덴마크어로 낭독한 문장들, 잃어버린 것을 드러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리 랑그바드가 직접 덴마크어로 책의 한 부분을 낭독하는 순서였다. 저자는 낭독을 통해 이 책이 지닌 독특한 형식을 단번에 보여주었다.</span></p><p> </p><p><span class="italic"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내 통역사는 국을 한 숟갈 맛본다.</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내 통역사가 말한다                                                                   .</span></p><p><span class="italic"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어머니가 미소 짓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나는 말한다</span> 방금 어머니께 뭐라고 한 거야?</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내 통역사가 말한다</span> 그냥 어머니가 끓인 미역국이 맛있다고 했어.(68-69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낭독하며 저자는 ‘내 통역사가 말한다’를 읽고 그 후 마침표가 등장하기까지 얼마간의 시간 동안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페이지를 응시한 뒤 다시 다음 문장을 읽어 나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가 수행한 잠깐의 응시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지만 지면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마 그곳에는 번역되기 전까지는 들리지 않는 언어가,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낯선 언어가, 어머니의 언어가 있었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의 통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통역사가 말한다’, ‘나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큰 언니는 말한다’, ‘여자 조카가 말한다’와 같이 희곡에서 사용하는 행동 지문과 함께 대사가 이어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2018년에서 2023년까지의 시간 선을 축으로 ‘서울의 한 삼계탕 집에서’, ‘부모님 댁에서’, ‘부모님 댁 근처의 벤치에서’를 소제목으로 하는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와 원가족 그리고 통역사와의 대화 장소가 전환되며 장면이 시작되고 끝나길 반복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소는 계속해서 바뀌고 대화의 참여자도 조금씩 바뀌지만 ‘나’가 말하는 모든 곳에는 늘 통역사가 존재하여, 독자에게 끊임없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상기시킨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72025503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나의 통역사』의 한 부분을 낭독하는 저자 리 랑그바드의 모습 (푸른숲 출판사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저자는 책에서 해외 입양인으로서 두 개의 가족,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역사를 안고 있음에도 자신이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11쪽) ‘나’는 덴마크어와 한국어를 통역할 수 있는 통역사가 아니라, 영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통역사에게 대화를 의지하고 있다.(저자는 덴마크어와 한국어를 모두 할 수 있는 통역사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덴마크어와 한국어 사이에 놓인 영어라는 매체는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불가피하게 의미가 조금씩 변화하거나 상실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건 문화권과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맥락의 변화이자,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함께 한 시간과 경험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오는 어떤 상실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책에는 삼계탕, 미역국, 김치찌개, 피자, 커피 등 음식을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 먹는다는 행위는 한국, 가족, 고향과 새롭게 접속되는 계기로서 의미화된다. 리 랑그바드가 낭독했던 부분 또한 ‘나’가 통역사와 함께 한국 부모님 댁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었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나’와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어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의 장벽을 이어주는 것이 통역사의 역할이지만, 통역사와 어머니가 단둘이 나누는 한국어 대화에서 ‘나’는 어떤 의미의 공백뿐만 아니라 시간의 공백 또한 함께 경험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 통역사가 말한다’라는 문장 뒤에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찍힌 마침표의 위치와 그 사이에 남겨진 여백의 자리에는 분명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향한 상실감의 흔적이 자리 잡고 있다. 의미를 알 수 없기에 표정으로조차 응답할 수 없는 그 시간의 공백은 다름 아닌 관계의 공백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언어, 번역되지 않는 맥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통역사』는 그 공백이야말로 하나의 언어라고 말하며 그것을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나’와 ‘통역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희곡의 형식을 차용하여 대사와 지문으로 본문이 이루어져 있다는 점, 원가족 및 통역사와 만나는 장소를 제목으로 삼고 있다는 점, 공백을 통해 상실한 것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 외에도 이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어떤 ‘긴장감’과 관련이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책은 2018년 서울의 어느 삼계탕집에서 시작된다. 통역사와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덴마크로 입양된 ‘나’는 이미 12년 전에 한국의 원가족을 찾았고 그간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삼계탕집에 미리 도착해 통역사와 함께 원가족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나’는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족들과 잘 대화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긴장된 모습을 보인다. 이때 ‘나’의 긴장은 여전히 어색한 원가족과의 만남이 언어 차이로 인해 쉽게 풀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자리에 동석한 통역사가 바로 ‘나’의 애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여전히 원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긴장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가족과 만날 때마다 어머니 혹은 언니로부터 매번 자신이 왜 화장을 안 하는지, 결혼은 안 하는지, 애인이 있는지에 관하여 질문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자신이 레즈비언인 것을 말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말하지 못한다. 때로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냐고 물어보기도 하며 넌지시 원가족의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 이때 ‘나’가 커밍아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함께 동석하는 통역사/애인의 긴장감도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내 통역사가 말한다</span> 서양에는 머리가 짧은 여자가 많다는 걸 알아서 그 이유로 네가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대.</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나는 말한다</span> 그런데 만약 내가 레즈비언이라면?</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내 통역사가 말한다</span> 그 말은 내가 통역하지 않을게.</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나는 말한다</span> 왜?</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내 통역사가 말한다</span> 언니의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나는 말한다</span> 내가 우리 관계를 가족에게 말하길 바라지 않았어?</span></p><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class="bold">내 통역사가 말한다</span> 그랬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 가족이 나한테 화를 낼까 봐 무서워. 결국 그 말을 해야 하는 건 나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와 ‘나의 통역사’는 소통할 수 있는 공통된 언어뿐만 아니라 비밀 또한 공유하고 있다. 이 비밀은 결국 ‘나의 통역사’의 입을 통해 외부 세계로 전달되기에, 전달하는 자의 부담과 긴장은 둘 사이에 작은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통역사는 가끔 어떤 말은 굳이 옮기지 않기도 하고, ‘나’가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히려는 순간에는 통역을 거부하기도 한다. 결국 ‘나’는 자신이 출간한 책을 통해서 통역사가 연인이었음을 알린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7204982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한국계 덴마크 작가 리 랑그바드의 신간 『나의 통역사(TOLK)』(손화수 번역, 2026, 푸른숲)</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나의 통역사』가 흥미로운 지점은 나와 통역사 단둘이 있는 장면에서도 두 사람의 사적 관계를 직접 명시하지 않고 항상 ‘나는 말한다’와 ‘내 통역사가 말한다’ 라는 건조한 지문을 유지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허구라는 장치를 통해 도리어 현실의 비밀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소설의 본질을 생각할 때, 이 책에서 가려지고 말하지 못한 것들은 결코 침묵이 아니다. 오히려 ‘내 연인이 말한다’라는 진실이 ‘내 통역사가 말한다’라는 문장 뒤에 겹치며, 독자가 소설을 끝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읽게 만드는 힘을 만들어낸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족을 찾고 난 후 ‘이후의 시간’,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책은 입양인이자 성소수자로 두 번의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정체성에서 발생하는 긴장감과 상실감을 주된 감정으로 끌고 가고 있다. 통역사를 동석하는 가족과의 만남 속에서 갈등하는 장면들은 분명 커밍아웃의 경험이 입양가족과 만나는 경험과 중첩될 때 가중되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입양인이자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은 어떤 경험들이 겹칠 때, 그간 감춰져 있던 비밀을 보게 해주는 중요한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책에는 한 번도 목소리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반복해서 언급된 ‘막내 언니’라는 존재가 있다. ‘나’는 막내 언니의 삶을 궁금해하고 그가 자신과 같은 성소수자일지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가 실존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가 ‘막내 언니’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처럼 한국 바깥으로 입양되었을지도 몰랐을 무수히 많은 딸, 언니들을 호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여전히 이야기되지 않은 것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자는 입양인이 원가족을 찾는 이야기 혹은 원가족과 극적인 상봉을 하는 장면은 매체에 자주 등장하지만, 가족을 찾고 난 ‘이후의 시간’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고 강조한다. 극적 만남 이후의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집필된 『나의 통역사』는 입양인들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들이 원가족과 어떻게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가는지, 그 안에 어떤 어려움과 노력이 존재하는지 기록하고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가족을 찾고 커밍아웃을 하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퍼즐이 제자리에 맞춰질 것 같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이다. 현실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나 새드앤딩처럼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다고, 이야기는 늘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내며 살아남는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a2cd2;">[필자 소개] 전솔비 :</span>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27 11:16: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책/문학]]></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전솔비)]]></author>
	   <category><![CDATA[책/문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722064347.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722064347.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대기업 가지 않아도 육아휴직을 쓸 수 있으려면]]></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돋움;">[연구 소개] 양은선의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734" target="_blank">작동하지 않는 권리들: 소기업의 일·가정양립 지원제도 사용의 젠더 편중</a>」은 소규모 사업장에서 육아휴직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이용이 어떻게 조건화되고 제한되는지 밝힌 연구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55612886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육아휴직 기간, 아이와 함께 공원 산책에 나선 양은선 연구자의 모습. 석사 논문으로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734" target="_blank">작동하지 않는 권리들: 소기업의 일·가정양립 지원제도 사용의 젠더 편중</a>」(성공회대 시민평화대학원 실천여성학전공, 2026)을 썼다. (양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29518e; font-family: 돋움; font-weight: bold;"><br />육아휴직 이용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구조의 문제</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29518e; font-family: 돋움;">왜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일·가정 양립 지원 제도를 잘 쓸 수 없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먼저, 해당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노무법인에서 일한 지 15년 됐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2020년에 아이가 태어났어요. 대표님도 여성학을 전공하시고 육아휴직 관련해서 이해가 높은 노동환경 안에서 저는 육아휴직과 육아기 단축 근로를 할 수 있었어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지금도 회사에서 제도와 별개로 자체적으로 아이 돌봄의 시간을 더 보장해주셔서 일부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요.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데리러 오려면 짝꿍과 제가 서로 쓸 수 있는 제도를 모두 이용해도 부족한데, 그래도 제가 이런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죠. 심지어 대표님이 아이 돌봄에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며 먼저 제안해 주셨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근데 저의 경험과 달리, 제가 노무법인에서 일하면서 마주한 사업장, 특히 소규모 사업장들의 현실은 너무 다른 거예요. 어느 사업장의 관리자는 직원이 임신을 계획하고 있고 육아휴직을 쓸 것 같아서 미리 해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묻기도 하고요. 남자도 육아휴직을 보내야 하나 이런 질문들이 계속 들어오더라구요. 성별에 따라 육아휴직, 근로시간 단축 제도에 대한 반응이 다른 것을 보면서, 그리고 소규모 사업장 관리자들의 인식 수준을 접하면서 이 문제를 논문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그러면 육아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를 보장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불이익을 주려는 사업주나 관리자들에게 어떻게 안내를 하시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법에서 지켜야 할 것은 제대로 지키도록 안내하죠. 대신 부담스러워하는 사업장에 지원금 같은 것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요. 유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의 공백을 이용하거나 우회하려는 시도도 당연히 있겠지만, 그래서 제도가 촘촘해야 하는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를 들면 최근에 육아휴직 쓴 직원의 업무를 분담하는 동료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제도(업무분담자 지정에 대한 고용안정장려금)가 생겼잖아요. 취지도 좋고 방향성도 좋다고 봐요. 다만, 육아휴직 대체인력을 뽑지 않는 이상, 동료들이 해야 하는 업무에 비해 지원금이 너무 미미하죠. 한 사람의 업무를 오롯이 대체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업무의 양도 양이지만 업무를 맡는다는 건 그 일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오는 것인데 그게 과연 10만 원 이런 정도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에서 “제도에 접근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근로자의 개인적 의지나 선택 이전에 사업장 규모에 의해 구조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부분도 사업장 규모에 따라 대체인력 충원 등의 조건이 다르기도 할 것 같네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소규모 사업장은 규모가 큰 곳과 달리 업무분장이 촘촘히 되어있지 않거나, 한 사람이 이것저것 다 해야 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런데 많은 걸 담당하던 사람이 부재할 때, 대체인력이 잘 구해지지도 않지만 대체인력이 그 공백을 메꾸는 데에도 한계가 있죠. 그래서 육아휴직을 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눈치 같은 것들이 작용하는 거죠. 소규모 사업장의 제도 이용은 결국 구조 문제인 거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5570229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기업규모별 육아휴직 사용률. 기업의 규모에 따라서, 성별에 따라서 눈에 띄게 차이를 보인다. (자료: 국가데이터처 「육아휴직 통계」 2015~2023. 2015년부터 2023년까지 기업체 규모별 출생아 부모의 육아휴직 사용률 변화를 선형회귀 기울기로 정리하였다. 선형회귀 기울기란 일정기간 동안의 변화 추세를 수치화한 지표로, 값이 클수록 사용률이 빠르게 증가했음을 의미한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대기업 가지 그랬냐는 말이 미래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데요</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두 다 대기업에 갈 수도 없고 갈 필요도 없죠. 사회가 대기업만으로 이루어져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소기업도 있고 소상공인도 있고 자영업자도 있어야죠. 다 각자의 자리에서 누구나 제도가 보장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요. 왜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일·가정 양립 지원 제도를 잘 쓸 수 없는지 질문이 필요한 것이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소규모 사업장에서 왜 일·가정 양립 지원 제도가 잘 쓰이지 못하는가를 추적하면, 거꾸로 소규모 사업장에 뭐가 필요한지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장 큰 규모 사업장과 같은 시스템이나 자본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쉽지 않은데요. 결국엔 경영진, 관리자의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부담스럽겠지만 일단 법에서 노동자에게 보장하고 있는 것을 지켜야 하겠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를 잘 인지할 수 있도록 직원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죠. 말 한마디라도 ‘육아휴직 갈 수 있다’, ‘쓰면 된다’ 이야기할 수도 있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부의 지원금의 경우에도 소규모 사업장에서 육아휴직 제도 이용을 촉진할 수 있도록 처음 육아휴직 사용에 대한 인센티브를 더 고안하거나, 동료들에게 분배되는 지원도 더 커져서 회사도 동료도 좀더 으쌰으쌰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든지,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29518e; font-family: 돋움;">“직원이 육아휴직 해도 사업주가 질 부담이 너무 크지 않아야”</span></p><p><span class="bold" style="color: #29518e; font-family: 돋움;">소규모 사업장 갖출 수 없는 인프라를 정부·지자체가 적극 지원해줬으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요즘엔 비혼이나 1인 가구가 많고,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퀴어 커플이나 다양한 가족형태도 있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육아휴직 같은 제도 이용에 따른 업무 부담을 왜 내가 져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 동료가 나를 위해 부담을 나눠 가질 것이라는 기대나 신뢰가 낮거나, 전반적으로 돌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돌봄에 필요한 부담을 모두가 나눠 가지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의 경우, 저의 대체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동료들이 일을 분담했어요. 소기업이다 보니 휴직 중이었지만 일은 했어요. 소기업일수록, 연차가 오래될수록 휴직이어도 나만 알고 있고 오래 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애 재우고 밤에 일하고. 뭐 근데 그게 되게 불편하거나 휴직 기간인데 내가 왜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기보단 내가 휴직을 함으로써 동료들이 일을 분담하게 됐고, 근데 그 안에서 처리하지 못한 것들은 내가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냥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휴직이라고 업무를 무 자르듯 딱 그만할 수도 없고요. 그런 측면에서 구성원 간의 신뢰나 협조 같은 것도 필요하지만, 육아휴직과 단축 근로 사이에 어느 지점의 근무 형태를 상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휴직이라는 말이 뭔가 쉬고 온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있고요. 재택근무를 유연하게 할 수 있게 하거나, 꼭 양육뿐 아니라 누구든 타인이든 자신이든 돌봄이 필요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쓸 수 있게 한다면 좋을 것 같아요. 돌봄의 시간은 삶에서 갑자기 튀어나오잖아요. 우리는 예상치 못하게 서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기도 하고 미안해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그러게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겐 아프거나 누구를 돌보거나, 살면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죠. 논문에도 나오지만 그런 것들을 고려해서 좀더 유연한 근무환경을 만들어가는 데에는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대표, 관리자들의 의사가 크게 좌우하긴 하죠</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업장 대표, 관리자들을 교육시킨다거나 외부 기관을 활용해서 제도에 대해 알려주고, 인사팀, 행정 인력이 부족한 사업장은 그런 업무나 역할을 해주는 인력을 지원해준다거나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소규모 사업장에서 다 갖출 수 없는 인프라를 정부나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면 좀 나을 것 같아요. 처벌보단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요. 직원이 육아휴직 제도를 이용함으로 인해서 사업주가 지게 될 부담이 너무 크지 않도록 해야 사업주도 육아휴직을 못 가게 한다거나 육아휴직 쓰기 전에 해고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55737752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대학원에서 여성노동연구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분이 논문 지도 교수(김경희)이기도 하다. (양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29518e; font-family: 돋움; font-weight: bold;"><br />돌봄은 여자가? 성별화된 구조에 균열을 내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에서 육아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이용이 성별화되어 있고, 소규모 사업장에서 남성의 제도 이용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요인이 있음을 보여주는데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운동적 측면에서 남성들도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일·가정 양립 지원 제도 이용의 성별화나 제도 이용의 제약이 되는 구조들에 균열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성 육아휴직 사용 증가가 곧 성평등이 이루어진 것처럼 여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논문(정수빈 2021)도 있는데요. 거기서 지적한 대로 단순히 수치의 증가가 구조의 불평등을 없애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남성들의 육아휴직이 늘어나야 성별화된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은 맞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육아휴직을 쓸 당시에 거래처 분(남성)이 처음에는 바로바로 소통이 안 되니까 불편해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니 적응하시더라구요. 처음에는 어렵지만 어디든 첫 사람이 있을 거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늘어날 것이고, 늘어나다 보면 당연해질 것이라고 봐요. 사람들 간의 일이라 초반에는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도, 주변인들도 서로 양해해주고 유대가 쌓여야 하겠고요. 개인 한 사람이 투사가 되어 뭔가를 해야 한다고 하긴 어렵지만, 누군가 행동하고 움직임이 있다면 변화는 분명히 생긴다고 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육아휴직이 성별화되어 나타나는 기저에는 육아, 돌봄, 가사노동 같은 것이 여자가 하는 일로, 그래서 돈을 안 줘도 되는 일로 굉장히 오랫동안 굳어져 온 배경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제도가 만들어지고 보완되는 것만으로 돌봄, 재생산 노동의 저평가나 일·가정 양립 지원 제도 이용의 성별화를 막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어떻게 보시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별 분리, 성역할 고정관념,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살림하고 애 키우고, 여성이 하는 일은 부수적이고 보조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죠.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은 반찬값 버는 정도라며 스스로도 내면화하는 여성들이 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아직도 ‘이모님 삼대장’(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건조기)이라며 가사노동에 필요한 가전제품에도 성별을 붙이잖아요. 가사노동에는 최저임금을 주지 말자거나, 최저임금 안줘도 되게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자고 하질 않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연히 사회의 인식이 한순간에 바뀌지 않겠지만, 계속 조금씩이라도 그걸 거스르려는, 균열을 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돌봄에 대한 가치를 자꾸 평가 절하하는 것부터 바뀌어야 하겠고요. 우리는 누구나 다 아프고 늙고 병들기 때문에 돌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요새는 유명한 셰프들 요리도 비싼 돈 주고 먹는 시대잖아요. 내 몸,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 주변의 이웃들 돌보는 일이 그 정도, 아니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수 있잖아요. 결국 인식 변화와 제도는 함께 가야 하는 것 같아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21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558013453.jpg" alt="" width="721"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태어난 지 50여일 된 아이를 재우는 모습. 양은선 씨는 이 시간이 육아휴직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또, 힘들 때마다 아이에게서 힘을 받고 포기하지 말라는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양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제도가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이끈다는 말도 있고, 육아휴직 제도도 아직 과도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도가 마련돼도 현실에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니까요</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도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작동할 수 있도록 홍보하고 교육도 시키고 점검도 하고 필요하면 처벌도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법이나 정책을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니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일도 하고 양육도 하며 공부하고 논문까지 쓰게 만든 힘이 어디서 나셨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힘들 때마다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준 아이가 큰 힘이 되었어요. 그리고 소규모 사업장이든, 자영업자든 누구나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잖아요. 논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지금의 어려운 상황이 자기 선택의 문제라거나 노력의 문제라거나, 자기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길 바래요.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서 작은 선택들을 하고 그 선택들이 결국에는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b31cd;">[필자 소개]</span> <span style="color: #bb31cd;">비화</span>는 ‘비건 화이팅’을 줄여서 만든 별칭. 페미니스트이고 비건 실천을 하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25 14:52: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비화)]]></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559543342.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559543342.jpg]]></image>
     </item>

     <item>
       <title><![CDATA[가정 내 폭력, 이주민의 곁에서 본 현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5</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경찰이 아기들을 데려가려고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갓난아기를 재우고 막 ‘육퇴(육아 퇴근)’의 해방감을 누리려던 참이었다. 휴대폰을 집어든 순간, 화면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떴다. 육아휴직 중이라 아는 사람 외에는 연락할 일이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그 전화는 꼭 받아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도와주세요! 경찰이 아기들을 데려가려고 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절박했다. 몇 년 전 나와 가정폭력 상담을 하며 내 번호를 저장해 두었다고 했다. 한국인 남편과 살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막내는 아직 젖먹이라고 했다. 요점은 한밤중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아이들을 강제로 분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동학대 사건에서 ‘즉시 분리’는 대개 이런 식으로 불시에 찾아온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학대 의심 정황을 발견하면 아동을 즉시 안전한 곳으로 분리 조치하는 제도다. 하지만 때로는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던 가정에 공권력이 갑자기 들이닥쳐, 영문도 모른 채 울부짖는 아이들을 강제로 떼어놓는 ‘지옥도’가 펼쳐지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가 신고했나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편이 했어요. 같이 집에 있다가 갑자기 혼자 화를 내며 나가버렸어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편이 왜 신고했을까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니요, 없었어요…. 전에도 자꾸 이랬어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황한 여성의 말을 추려보니 상황이 그려졌다. 남편은 상습적으로 아내를 협박해 왔다. 아내가 아이를 학대 사실이 없음에도 아동학대로 허위 신고를 하거나, 이혼을 요구하거나, 집에서 나가라고 강요하는 식이었다. 아내가 버티면 본인이 집을 나가 며칠씩 연락을 끊었다. 몇 년 전 그녀가 센터를 찾았던 이유도 가정폭력으로 이혼이 가능한지, 이혼 후 혼자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지 막막해서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찰관 분 좀 바꿔주세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여성의 상황을 최대한 조리 있게 대변하는 한편, 벌써 한 시간째 실랑이를 벌이느라 잔뜩 짜증이 난 경찰을 달래며 설득해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자꾸 집 안 상태가 걱정되었다. 과거의 쓰라린 사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거 ‘아이가 보호자 없이 위험한 차도를 걸어 등교한다’는 신고로 아동보호전문기관의 관리를 받던 한부모 가정이 있었다. 특별한 상처나 학대 흔적이 없었음에도, 결정적으로 집이 지저분하고 위생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방임’ 판정을 받아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엄마는 아이들과 분리되었다. 그 아이들은 결국 1년이 넘도록 시설에서 생활해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찰은 현행법상 신고자의 말을 먼저 신뢰해야 한다. 학대 정황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정서적 학대가 존재할 수 있고, 초기 대처가 미흡하면 아동학대 사망 사건 같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사건의 의심 행위자로 몰린 이는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 이주여성이다. 심야 시간이라 통역인의 동행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일단 여성의 편에 서기로 했다. 물리적 학대 흔적이 없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아동이 스스로 엄마와 분리를 원치 않는다면, 갑작스러운 ‘즉시 분리’는 아이들에게 되레 거대한 트라우마를 남기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행히 여성은 자신이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이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대신, 한국어가 서툴렀지만 아이들을 잘 보호하고 있으며 학대는 결코 없었다고 침착하게 되풀이했다. 이것은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남편의 거짓 신고라는 말과 함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화를 끊고 20여 분이 흐른 뒤, 걱정스러운 마음에 메시지를 보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괜찮으세요? 경찰들은 돌아갔나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곧바로 답장이 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이들은 남아 있다. 경찰들은 돌아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까스로 한숨은 돌렸지만 마음은 납덩이를 얹은 듯 무거웠다. 앞으로 이 집에서 그녀가 아이들과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남편과의 뿌리 깊은 갈등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혼 과정은 또 얼마나 길고 괴로울지, 이혼하더라도 당장 살 집을 구하기는 얼마나 힘들지, 양육비는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꼬리를 무는 걱정들이 밀려왔다. 어쩌면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동질감에 그녀에게 감정이 이입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의 달콤한 ‘육퇴’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휴대폰 화면만 만지작거리다 그렇게 끝이 났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 가정에서의 폭력과 공권력의 개입-</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범죄자 처벌만으로는 풀 수 없는 복잡한 고차방정식</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프리즘(Prism)이라는 도구가 있다. 빛이 이 투명한 다면체를 통과할 때, 파장에 따라 굴절되는 정도가 달라지면서 무색투명했던 빛은 무지개색 스펙트럼으로 선명하게 갈라진다. 우리는 프리즘 덕분에 햇빛을 분류하고 각 파장에 적색, 청색 등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세상의 복잡한 사건들을 이처럼 명확하게 정의해 주는 프리즘 같은 도구가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아직 사회적 평가를 거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은 햇빛처럼 뒤죽박죽 섞여 있으며, 겉보기엔 그저 무색투명하게 존재할 뿐이다. 이를 프리즘에 투과해 보면 누군가는 빨갛게, 누군가는 파랗게 살고 있는 것처럼 나뉜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완전히 선명한 빨강이나 파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펙트럼’, 즉 연속선 상의 어딘가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개개인의 인격과 관계망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에 너무나 애매하고 복잡하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45251383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1년 이주민센터친구에서 진행한 ‘폭력피해 이주여성, 학대피해 이주아동 법률지원 사례연구’ 발표회 자료집 목차. <a href="https://chingune.or.kr/bbs/board.php?bo_table=B34&amp;wr_id=72&amp;page=20" target="_blank">이주민센터친구 홈페이지 자료실</a>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5년 전,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폭력피해 이주여성·학대피해 이주아동 법률지원사업’을 진행하였다. 바로 이러한 복잡한 사례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또 다른 사건의 해결 초석을 다지기 위한 작업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여성은 배우자의 국적을 불문하고 가정폭력 위험에 노출되는 비율이 높다. 이주아동 역시 학대를 당해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커뮤니티가 좁고, 공공이 개입할 자원이 턱없이 부족해 심각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6개월의 사업 기간 동안 총 14건의 사례를 지원했고, 담당 변호사들이 각 케이스의 진행 과정과 시사점을 꼼꼼히 정리해 나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업 담당자로서 사건을 접수하고 변호사를 배정하며 결과를 취합할 때마다 매번 뼈저리게 느낀 점이 있다. 여느 사건이 다 그렇듯, 현실에는 칼로 자른 듯 명쾌하게 떨어지는 ‘순결한 피해자’도, ‘완전한 가해자’도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가정 내 폭력과 방임은 법적으로 보면 명백한 ‘가정폭력처벌법’ 및 ‘아동학대처벌법’ 위반으로 분류되지만, 그 이면에 자리 잡은 거대한 구조적 한계 앞에서는 늘 답답함이 밀려왔다. 가정폭력 가해자가 외벌이로 생계를 독점하고 있다거나, 아동학대 행위자로 지목된 이주여성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는 구조. 이는 국가가 누군가를 단지 ‘범죄자’로 특정해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고차방정식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입법자들 역시 이러한 한계를 인식했기에, 처벌이 아닌 처분을 내리는 ‘가정보호사건’, ‘아동보호사건’ 같은 법적 절차를 마련했을 것이다. 사건의 이면을 조사해 가정에 환경 변화와 상담 등의 처분을 내림으로써 원가정의 회복을 도모하는 절차다. 그러나 이 또한 ‘원가정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다 보니, 폭력 피해자들을 가부장제의 구렁텅이에서 근본적으로 탈출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비판이 상존한다. 가부장적이고 불평등한 가정 구조 자체를 개혁하지 않는 한, 피해는 외면만 바꾼 채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공권력의 개입이 도리어 파괴적으로 작용해, 구성원들이 가정을 유지하고 싶어 함에도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 때도 있다. 아동학대 피해 아동들은 부모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 용서하고 함께 살기를 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아이들의 의사나 목소리는 표현할 기회조차 적고, 표현하더라도 제도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거꾸로 피해자가 분리 독립을 간절히 원함에도, 경제적 궁핍이나 체류자격 연장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해자를 용서한 척 연기해야 하는 비극도 발생한다. 형사처벌을 넘어선 공공의 개입이란, 결국 피해자가 상처를 회복하고 관계를 대등하게 재정립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중재하고 감독하는 역할이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당연히 이러한 역할에는 막대한 예산과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 국적이 없는 이주아동과 이주여성을 고려한 제도적 지원과 예산은 늘 턱없이 부족하다. 공공 개입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가정보호·아동보호 처분이 고작 ‘물리적 분리’와 ‘접근 금지’라는 기계적 조치에 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45844655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1년 서울시 외국인주민.난민 인권보호 및 쉼터지원사업으로 이주민센터친구가 수행한 ‘폭력피해 이주여성, 학대피해 이주아동 법률지원 사례연구’ <a href="https://chingune.or.kr/bbs/board.php?bo_table=B34&amp;wr_id=72&amp;page=20" target="_blank">자료집</a> 표지 일러스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한국 국적 없는 여성·아동을 보호해주지 않는 국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국적이 없는 이주아동은 학대를 당해도 일반 위탁가정에 갈 수 없다. 학대피해아동 전담 보호시설로 가야 하는데, 이마저도 자리가 없으면 일반 아동양육시설을 전전하며 부모와 격리된다. 단체 생활이 이루어지는 시설에는 엄격한 규칙과 제한이 따른다.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시설의 아이들은 감염 예방과 전파 방지라는 명목 하에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호자 면회조차 금지당했다. 일반 가정의 아이들이라면 감염 시 2주 격리로 끝났을 일이다. 시설에 살던 이주아동들은 1년 동안 외출도 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방 안에 갇혀 지내야 했다. ‘시설 거주자’라는 이유로 이들의 권리는 너무나 쉽게 유예되고 제한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게다가 외국 국적 아동의 시설 생활비는 지방자치단체 예산으로 충당하게 되어 있으나, 재정이 태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용 자체를 거절하는 지자체가 많다. 보호종료아동의 나이가 되면 자립 지원금은커녕, 아동 시기에 유지되던 체류자격 연장조차 불가능해진다.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이 나라를 떠나라는 비정한 통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여성의 처지도 매한가지다. 한국인과 결혼해 결혼이민(F-6) 체류자격을 얻은 경우가 아니라면, 이들의 체류 연장 권한은 전적으로 외국인 배우자의 손에 쥐여 있다. 폭력 피해자라 할지라도 법적 구제 절차가 종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치열하게 싸워 양육권을 가져오지 못하면 애써 키운 아이마저 한국에 두고 가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설령 한부모 가정이 되어 자립하려 해도, 아동이 한국 국적이 아니라면 기초생활보장 등 어떠한 공공부조도 받지 못한다.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폭력피해 이주여성 쉼터가 유일하며, 공공임대주택 같은 정부의 주거지원 정책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정 내 폭력 피해자의 ‘최선의 이익’을 함께 고민하는 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이든 선주민이든, 베일에 싸인 가정 내 폭력 피해자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이 스스로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외부의 개입은 어렵다. 하지만 공권력이 개입하는 그 순간, 어떤 이에게는 생명줄이 될 조치가, 어떤 스펙트럼에 놓인 피해자에게는 도리어 내 손을 떠나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다가와 내 삶의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무력감을 안기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 피해자들은 여기에 더해 체류자격 박탈이라는 실존적 공포와, 자신의 보증인이자 초청인인 폭력 가해자와 어떻게든 화해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족쇄 같은 압박감에 시달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현장에서 다양한 상황에 놓인 이주민들을 만나며, 아직 ‘적색경보’까지는 켜지지 않은 수많은 가정을 마주한다. 우리는 그들의 개별적인 욕구와 경제적 형편,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여, 피해자의 곁에서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결정을 돕는다. 공공의 개입이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 감시하고, 언어와 문화의 장벽 뒤에 숨은 피해자의 명확한 의사를 대변하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때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오랜 시간 뒤엉켜 싸우다 보면 맞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는 복잡한 균열이 수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의 역할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거울을 비추어주고, 경찰이나 법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설명하며, 앞으로의 대처 방안을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긴 위기를 헤쳐 나와 평온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옆자리’를 지키는 활동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믿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62ed0;">[필자 소개] 이진혜 :</span> 이주민의 든든한 벗 ‘이주민센터 친구’ 법률인권센터장. 공식 홈페이지 <a href="https://chingune.or.kr" target="_blank">chingune.or.kr</a> 인스타그램 <a href="https://www.instagram.com/friend79law" target="_blank">@friend79law</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24 09:47: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진혜)]]></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456478378.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456478378.jpg]]></image>
     </item>

     <item>
       <title><![CDATA[Mayan Ceremonies, Memories Koreans Have Forgotten]]></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other world, and a language not Spanish</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had come to Xela to study Spanish, but as time passed, I ended up learning not Spanish but a different language. That meant that I entered a world in another dimens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met Lupe at a café. Lupe was a woman in her 30s who painted and did massage therapy. Compared to the other people I met in Guatemala, she was very open-minded and easy to talk to. She was a talented and brave person who hadn’t majored in art and had started painting at a relatively late age, yet had already had several exhibitions. Through her, I met many people who made music, painted, or studied humanities, and started to participate in their big and small event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313187873.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rtist Lupe. She utilized the Maya ceremony mindset as a resistance and an alternative to Western material civilization.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Lupe lived in a relatively quiet part of Xela’s downtown. If you opened her main gate and stepped in, you would see a wide hillside tract similar to a [traditional Korean] mountain village. Within it, there was a large house where Lupe’s family lived, and her relatives in similar houses. It was a kind of family village, and had no trace of the colonial sty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s my uncle’s house, the one next to it is my aunt’s, the one next to that is my cousin’s. Let’s go say hell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thought Lupe’s artwork might have been inspired by this communal environment. Paintings of Xela’s alleys and traditional houses, some representational and many abstract. It occurred to me that her unique love of art and spirituality must have been birthed by this environment. And that it had also developed out of a rebellion to this same environm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is the land that has been designated for me. I have to build my own small house, but I don’t have enough money yet. I could cook and eat what I wanted without having to worry about my mother’s feelings, fill it with my own furniture, make an altar... I hope that many of my paintings sell at the next exhibi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it didn’t seem like she was saving up the money from her sold artwork to build a house. One day she invited me to a really special activ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Luna, do you want to go to a Mayan ceremon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I had participated in an Apache ceremony in Mexico a few months before and had had my eyes opened to Native American ceremonies, I happily accepted the offer.</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you ask me what the Mayan ceremony i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night, we took a bus for about an hour along a bumpy mountain road and arrived at a village called Momostenango. A group of natives, carrying large bundles on their backs and wearing thick clothing, got into a delivery van without speaking. Without introducing ourselves, we followed these strangers, silently climbing the dark mountain road with only the moonlight and lanterns to guide us. Far from wearing hiking clothes and backpacks, they were wearing Momostenango’s traditional clothes and were shifting the boxes they carried from shoulder to shoulder as they walked. A few women even climbed the mountain in traditional skirts and sandal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313435534.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Mayan ceremony, which began at the mountaintop altar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Finally, after 3-4 hours, we reached an altar at the top of the mountain. People got down on their knees and began to pray in a language that I didn’t understan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the K’iche language. It’s what our Mayan ancestors spoke and the everyday language of the people in this are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ountless white candles, yellow candles, red candles, blue candles, black candles, solid objects emitting unknown scents, plants like rosemary and pine needles, candy, chocolate, sugar, rum, and so on were thrown into the fire on the altar, and the people continued to pray in a mix of Spanish and K’iche. Not only could I hardly understand a word they were saying, I couldn’t understand their behavior. Throwing so many things into a fire in such a poor country, and also secretly building such a large fire at the top of a mountai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what I really wouldn’t have guessed was the fact that when Lupe invited me to a Mayan ceremony again a few months later, I followed along agai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priest that held the second ceremony was a woman of about my age who wasn’t fluent in K’iche. It was in a neighborhood in Xela and all of the participants were Lupe’s fellow artists, whom I knew. This meant I had a chance to understand the ceremony in more comfort and a friendlier atmosphere: the order in which the ceremony progresses, the meaning of each offering and the part of the natural world with which its energy is in harmony, the configuration of the Mayan gods and calendar, the prayers made by the participants, and why they spend time and money to participate secretly in this ev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lease show me my life’s mission more clearly. I want to continue making music. Help me.”</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lease help my mother forget her sadness and recover her health.”</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ake my cousin pay me back the 50 quetzal soon. I really need the money.”</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came here after arguing with my partner, who couldn’t understand why I am participating in this ceremony. Please sweep away my negative energy. I apologize to everyone for coming to this place with angry energ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lease rid my departed grandmother of the worries for her children that she must have held onto until the en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I participated in more ceremonies, this mentality also seeped into me. I realized that if saving up what you have, using it for “practical” purposes, and then repeating the process is called capitalist economic activity, the ceremony’s wastefulness should be labeled a step in the other direction, and its lavish squandering is a donation and a sacrifi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someone were to ask me what the Mayan ceremony is, I would answer, simply, that it’s the idea that we must respect the natural energy that surrounds us and live each day in peace with it in order to be safe and happy.</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314096098.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Listening to Mayan priest Virginia describing Mayan customs while we look at a photo album of her early years.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Let’s pray for the Koreans who died in the wa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day Angel, one of the Mayan priests, asked about my family. I told him that my father was born in North Korea, that when he was 13 years old and the war broke out, he went south with his father and brothers, and they settled in Seoul after many difficulties, and that they never found out what happened to the mother and sisters they had left behin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explained that this story was not unique to our family but a history that all Koreans had suffered, and that our relatively recent experiences of colonization and civil war made modern Korean history into such a disaster that everyone found it too difficult to try to decide who had done right and who had done wrong, and there were many people who didn’t pay attention to whether war would break out again or if reunification would happe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 finished by saying that in order not to pass on their poverty and hunger to their children, my parents’ generation had brought prosperity to South Korea by working incredibly long hours, but even now they were desperately worried about their children falling into poverty, Angel seemed shock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una, write down the names of your father, mother, paternal grandparents, and maternal grandparents here. We have to pray for your family members. And let’s pray for the Koreans who died in the wa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gel taught me an important lesson about making a relationship with the dead: remember them. What makes them sad is being forgotten. He said that by burning the things that they like, here and in this way, we remember them and make them happy. The more sadness their lives contained, the more we have to remember them.</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314289960.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dawn that comes at the end of a dark night of ceremony always seems to have something mysterious about it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People seeking the Mayan spirit of the pre-colonial er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rom that time I began to think about my family history and Koreans’ roots, which I had hardly ever given serious thought to before. And many things began to happen. I started to listen to Korean folk music in my room, and Lupe said approvingly that it was similar to Spanish flamenco music. Out of a wish to wake up every part of myself that had asleep, from my head to my toes, I started going to a yoga academy Xel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I became connected with yet more communities. These communities were groups with no ties to Guatemala’s traditions; for example, an Indian guru-led meditation groups or a group for what could be called “esotericism.” Some people that I met in that place were not welcoming towards other groups, though others were friendly and aspired towards harmon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order to become a seed for other people, I first have to know what light i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is what my teacher, who advocated harmony, taught me. He wanted to learn about Asian spirituality, especially Buddhism and Confucianism, from me. He pointed out that there is similarity between Mayan spirituality and Asian spiritual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ompared with the leaders of other religions, Mayan priests are very down-to-earth and don’t care much about religious precepts. I’ve seen numerous priests who love alcohol or young women. Some accept money to perform rites to pray for harm to others, and others earn a huge sum of money in return for their ceremonies. Of course, there are also many renowned priests who are terribly poo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me priests are kind of social activists, claiming that their people should regain the harmony with nature and happiness of the pre-colonial period, reflecting the spirit of Maya, just like the community that I entered had done. Lupe and her friends in their 20s and 30s tend to take the spirit behind Mayan ceremonies as an alternative to Western materialism. One young priest wrote a rap in K’iche against the Western culture that neglects life’s essence, and covered all walls in the city with graffiti about Mayan ancestors and the Mayan spirit every night.</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314506102.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pleasant meal with Momostenango’s Mayan priests. Mayan priests are very simple and ordinary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Indigenous people are losing their tribal languages as a result of discrimin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the meantime, most Guatemalans know less about Maya’s ceremonies and calendar than I do. Some are even hostile towards these things. They once mockingly asked if I [as someone who had studied these things] could show them some magic. It was an entirely new experience for me as someone who had lived in a society where ethnocentrism is considered interchangeable with the conservative right w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alf of the entire Guatemalan population are native peoples; this group consists of 20 to 30 tribes that each have their own language. K’iche people, to look at one example, use their language only when they are with their family, and when meeting people from outside their area or when in the workplace, the y speak in Spanish. This means that they are bilingua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oday, a number of K’iche people don’t teach their children their language, and have them speak only in Spanish even at home. To them, being bilingual means that you’re a native K’iche person and are thus subject to extreme discrimination in any kind of formal situation. Indeed, many K’iche people I know don’t know how to speak K’iche. Angel doesn’t. His parents know the language but Angel only knows a few words. He has always regretted that he had no chance to learn it and has studied it little by little through ceremony prayers.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any of my friends from Western countries as well as Guatemala want to know about Asia’s religions and spirituality. To my knowledge, Asia’s spirituality was exported to Western society and incorporated with other cultural elements and became a sort of New Age thing that was then imported back by us. Given that it has been thus filtered through the West, it’s no wonder that it is so capitalism-friendly. And once it comes into ultra-competitive Korea, needless to say, its commercialism doubl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I’m not sure how meaningful it would be at this time to seek our own essential nature and roots that have not been tainted. I feel both proud of and sad about Koreans’ nurtured talent of transforming [at the cost of losing our roots] at an incredibly fast rate. <span style="color: #3366ff;">[Translated by Marilyn Hook] </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265" target="_blank">http://ildaro.com/7265</a> Published: Published: October 20, 201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23 19:11: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una)]]></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9'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317113627.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317113627.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참교육〉 판타지는 왜 위험한가]]></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드라마 〈참교육〉이 연일 화제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참교육〉은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넷플릭스 순위 1위를 차지했고, “무너진 공교육의 실태”와 ”교권침해와 학교폭력 등 학교의 현실을 조망했다”고 평가받으며 일명 ‘사이다 드라마’로 불린다. 특히 드라마의 일부 장면들은 유튜브나 SNS 등 숏폼으로 제작되고 공유되며 짧은 장면으로 그 통쾌함을 극대화시킨다. 관련 영상의 댓글들은 “속이 시원하다”, “이게 진짜 참교육이다”, “진짜 이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며 교육 현장에 대한 갑갑함을 드라마로 일면 해소하는 듯 보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20725510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참교육〉 이미지</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드라마는 교육부 산하 가상의 ‘교권보호국’이 창설되어 교권이 침해되는 학교 현장을 제보받고, 찾아다니며 학교 현장의 다양한 폭력과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을 담았다. 옴니버스식으로 에피소드마다 외고, 여고, 하이텍고, 초중등까지 다양한 공교육 현장이 등장하고, 학교폭력이나 “교권침해”, 마약과 입시비리 등 드라마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호출한다. 교권보호국을 창설한 교육부 장관 최강석을 필두로 교권보호관 나화진, 임한림, 봉대식은 학교들을 차례로 방문하며 문제를 해결해낸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착한 학생’과 ‘괴물’이라는 이분법, 체벌 정당화하는 고루한 논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드라마는 차례로 ‘문제학교’들을 조명한다. 1화는 학생 중 ‘전따’(전교생이 따돌리는 학생)를 지정해 혹독히 괴롭히는 학교폭력의 현장을, 2화의 하이텍 고등학교에서는 자동차과와 전기과로 나누어지는 일진 무리들이 패싸움 등으로 학교 일과를 완전히 마비시킨 모습을 보여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출동한 교권보호관 나화진의 문제 해결은 무척 단순하다. “자신이 한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음으로써,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교육부 장관 최강석의 대사처럼, 폭력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다. 말이야 거창해도 결국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체벌의 고루한 논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권보호관인 동시에 특전사 출신인 나화진은 드라마 내내 지겹게도 학생들을 때린다. 학교폭력을 일삼고도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빽을 믿고 의기양양한 류준형과 “MZ 조폭”에 합류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박성환과 조인범은 맞아도 싼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에 대한 “참교육”으로 체벌을 가하는 나화진은 다른 학생들의 구원자이자 통쾌한 활극의 히어로로 묘사된다. 심지어 그 체벌은 류준형을 비롯한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긴급체포 및 신상공개로 이어지고, 박성환과 조인범은 자신들이 인간샌드백 취급했던 피해 학생에게 사과하는, 그야말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식 해피엔딩을 이루어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드라마는 위와 같은 전개에 당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내내 누구 하나랄 것 없는 이분법적 재현에 힘쓴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1화), 불량학생과 모범생(2화), 선량하고 교육열이 높은 교사와 돈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는 교사 (4화) 등.</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권보호국을 창설한 장본인인 최강석은 “교권국은 학생과 싸우려는 게 아닙니다, 괴물들과 싸우려는 겁니다.”라며 괴물과 학생을 구분한다. 교권보호관 나화진은 자동차정비사라는 꿈을 이루고자 하이텍 고등학교에 입학한, 다시 말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모범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문제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이들의 선배가 조직폭력배와 함께 학교에 쳐들어오자 학생이 아니고 조폭이니 봐줄 필요가 없다며 역시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심지어 교권보호관에게 체벌을 포함한 모든 조치가 가능하다는 권한을 부여한 최강석은 “체벌이 아니라 체벌 할아비를 동원해서라도 학습권을 지킬 것”이라며 이러한 폭력에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재현은 진짜 문제를 가리고, 기존 학교에 체벌과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교권 침해가 심각해졌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폭력과 통제는 더 나은 학교를 만드는 것이 아닌 반교육적 체제를 강화할 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에 걸친 사회적 논의 끝에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2020년 법무부가 민법 제915조 징계권 조항 삭제를 추진한 것 역시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체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드라마가 그리는 것처럼 “학습권을 지키는” 게 아니라 강자에 대한 두려움을 내재화하여 폭력을 재생산할 뿐이다. 드라마 〈참교육〉 속 학생들은 체벌을 통해 그야말로 “두려움을 내재화하고 폭력에 굴종”하는 방식으로 교화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생을 괴물과 모범생으로 구분하고, 폭력으로서 괴물을 박멸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인가? 드라마의 모든 전개는 교사와 학생을 넘어 피해자만을 구제하겠다는 교권보호국의 판단으로부터 이루어진다. 학생들이 나화진의 체벌을 통해 무엇을 지켰으며 또 배웠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통쾌함으로 표상되는 단절적 응징의 순간만을 비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서 이분되는 ‘가해자’는 꼭 폭력과 범죄를 저질렀는가만을 기준으로 하지도 않는다. 어른들을 비롯한 기존 질서에 감히 도전하거나, 말대꾸를 하고, ‘착한 학생’의 규범에서 탈락하는 모든 청소년을 곧장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어 통제와 퇴출을 명령하는 구조가 작동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생의 돌발행동을 통제 또는 퇴출할 대상으로만 삼고, 교육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는 ‘참교육’식 해법으로는 비슷한 비극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 필요한 일은 어른들이 상정한 범주에서 벗어난 학생을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는 일이 아니라, 학생들의 돌발행동을 위기 신호로 포착하고 교육적 해법을 찾는 일이다. 교사 개인이 학생의 돌발행동을 감당하도록 두지 않고, 학생의 위기를 교육공동체 모두가 함께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범생과 ‘문제 학생’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모든 학생의 저마다의 속도를 인정하고 학생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평등하고 인권친화적인 학교를 만드는 일이다. 위기 지원에 대한 매뉴얼과 제도의 부재 속에서, ‘독박 교실’을 경험하는 교사의 인력 부족을 비롯한 어려움에 대한 논의 역시 함께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20834641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참교육〉 포스터 이미지</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스쿨미투 8년, ‘꽃뱀’ 담론으로 반복되는 2차 가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처럼 드라마 〈참교육〉은 잠시의 통쾌함을 위해 학생의 현실을 묵인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은닉한다. 교권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체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학생은 교권을 침해하는 해악적 존재이거나, 폭력으로 계몽되어 체벌의 효과성을 증명하는 존재로서만 등장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권침해의 심각성에 당위를 부여하기 위해 3화의 한예리를 재현하는 방식은 특히 악의적이다. 유명 인플루언서 여고생이 자신에게 조언한 교사를 성추행범으로 몰아가 끝내 죽게 만든다는 내용은 2018년 스쿨미투 운동 당시 고발자였던 학생들을 ‘꽃뱀’으로 몰아갔던 학교와 언론의 2차 가해를 떠올리게 만든다. 3화에서 여학생의 성폭력 고발은 ‘나중에 문제가 돼도 장난 아니면 오해였다고 발뺌하면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여성이 이득을 얻기 위해 성폭력 고발을 한다는 ‘꽃뱀’ 담론이나, 청소년이 소수자의 위치를 악용한다는 청소년 혐오를 반영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실제 현실은 드라마와 사뭇 다르다. 한국의 성폭력 무고죄 비율은 매우 낮고, 성범죄에 대한 처벌 형량은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청소년은 여성/청소년에 친화적이지 못한 성폭력 처리 과정에서 보호자의 동의 및 동행을 요구받거나 학교와 가정, 지역 사회로부터 절차를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는 등 입증에 추가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교사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교육적 목적’이나 ‘친밀감 형성’으로 포장되어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실제로 스쿨미투 사례에서도 교육 시스템과 교사-학생 간 위계 속에서 학생들의 문제 제기는 학교공동체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다. 이들의 비판은 교사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교권침해’로 해석되고, 학생들에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거짓말을 하는 ‘영악한’ 학생이라는 이미지를 남긴다. 특히 스쿨미투 운동이 확산된 지 8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연 100건 이상의 교사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며, 이 중 학생 대상의 성폭력은 40%를 넘는다는 현실은 이러한 재현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꽃뱀’ 담론이 힘을 얻는 이유는, 학내 성폭력을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 또는 가십으로만 치부하는 통념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스쿨미투는 학내 성폭력 문화 전반에 대한 고발이었음에도, 이를 피해자 개인의 경험으로 치부하고 심지어는 ‘거짓 고발’로 음해하는 2차 가해가 8년 내내 반복되어 왔다. 이 기나긴 반복을 끊기 위해서라도, 학내 성폭력을 개인의 경험을 넘어 구조적 문제로 사유하고 일상적으로 성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할 수 있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론장은 교사와 학생 모두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고,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존중이 담보되는 인권친화적인 학교에서만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교권보호국이라는 판타지, 진짜로 교권보호관 서넛이 출동하면 해결될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혹자는 〈참교육〉이 어디까지나 현실이 아닌 판타지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탈피하는 ‘사이다 드라마’로 즐겁게 봐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과연 〈참교육〉의 등장과 시민들의 열광은 현실과는 분리되어있는 것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12일 안민석 경기도교육감 당선인은 〈참교육〉을 언급하며 교육활동보호국 설치에 대한 기대를 밝혔고, 뒤이어 출연한 라디오에선 교권보호에 대한 시민들의 열의를 확인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체벌을 부활하자는 의미는 아니”며 교권침해를 막자는 취지라고 부연했다. 교육 현장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할 교육감 당선인이,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의 효과가 강력한 수준의 체벌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누락하고 있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권보호국이라는 판타지가 어떤 사회적 욕망 위에서 건설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교권보호국에 대한 시민들의 열광은 결국, 학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이 드라마처럼 누군가가 짠하고 나타나 단번에 해결되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시사한다. 하지만 교권보호관 서넛이 출동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긴 역사 동안 왜 학교의 문제는 동일한 방식으로 이어져왔을까? 실제 교육 현장의 주체들이 무능하거나, 학교의 변화를 꿈꾸지 않았거나, 교권보호국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참교육〉 속 ‘참교육’은 교권보호관이 어떤 법령에도 제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드라마의 구조가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설계되어 있기에 가능한 판타지다. 적은 인원의 교사가 많은 업무와 학생들을 배분받고 관리해야 하는 과중함 속에서 권리보다는 효율을 추구해야 하는 현재 학교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선 묵인하고, 청소년 범죄가 일어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선 다루지 않으면서, 촉법소년을 ‘법을 이용해 처벌을 면하는 영악한 범죄자’로만 재현하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20년간을 견디고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성공신화가 아닌, 아이의 목숨보다 의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양육자 개인의 욕심만을 처벌하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학교의 문제는 학생 개인의 일탈과 악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입시경쟁,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교사, 위계적인 학교 문화, 불평등한 교육환경, 학생의 목소리가 배제된 의사결정 구조가 모두 유기적으로 학교 현장을 구성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일부 학생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재생산하는 학교 구조에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기존의 학교를 지배하던 통제와 폭력 대신 학교의 새로운, 민주적 질서를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 향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금은 응징의 통쾌함을 넘어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말해야 할 때다.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은 학교를 비롯한 교육 현장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혼란이기도, 신자유주의와 대학 신화 속에서 학교가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참교육 운동은 전교조의 결성 전후로 시작된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였고, 교육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반발이었다. 2026년의 교육은 또 어떤 경합과 긴장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좋은 학생과 나쁜 학생의 이분된 세계관을 전복하며 평등한 교육 현장을 만들어갈 참교육은 무엇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e3ac4;">[필자 소개] 최유경 :</span> 반사이버성폭력운동 활동가, 청소년 시민들과 함께 말하고 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22 19:05: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매체비평]]></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최유경)]]></author>
	   <category><![CDATA[매체비평]]></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21050412.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21050412.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보호출산제, ‘생명 우선’ 논리가 지우는 존엄]]></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0000ff;">[기획 의도]</span>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위기 임산부의 익명 출산을 지원하는 ‘보호출산제’가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행되었다. 2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보호출산제의 문제를 환기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를 통해 “위기 임산부”를 단순한 정책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사회가 구성한 범주로 파악하고, 보호출산제 역시 중립적 제도가 아니라 특정한 가족 규범과 젠더 질서를 전제하고 작동하는 장치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로써 여성의 재생산권과 아동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보호출산제가 전환되는데 기여하길 바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보호출산제, ‘보호’인가 아동유기 조장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3년 10월 7일, 「위기 임신 및 보호출산 지원과 아동 보호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230명 출석 의원 중 133명 찬성, 반대 33명, 기권 64명으로 위기 임산부의 익명 출산이 합법화되었다. 여기서 위기 임산부란 “경제적</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심리적</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신체적 사유로 출산 및 양육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명 보호출산제로 불리는 이 법은 2024년 7월 19일부터 시행되었다. 정부는 긴급 주거 지원과 의료비 지원 등을 통해 위기 임산부가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하고, 태어난 아동의 생명을 보호하여 국가의 돌봄체계 안에서 안전하게 양육한다는 취지를 내세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국가는 익명 출산과 친권 포기, 즉 보호출산을 선택한 위기 임산부를 위한 예산을 마련했을 뿐, 정작 임산부가 겪는 경제적·심리적·신체적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완화할 수 있는 별도의 지원체계는 마련하지 않았다. 만약 위기 임산부가 친권을 포기하지 않고 양육하기로 선택한다면, 기존 복지체계 안에서 지원을 찾아야 한다. 출산 지원 시설 입소 또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신청, 그리고 모든 임산부에게 지급되는 임신 1회당 100만 원 정도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미 임신으로 인해 취약한 몸이 된 여성들은 경제적·심리적·신체적 위기까지 떠안으면, 결국 보호출산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보여주듯 보호출산을 선택한 위기 임산부는 제도 시행 첫 달 15명에서 16개월 만에 145명으로 늘어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위기 임산부가 충분한 정보와 지원을 바탕으로 안전한 임신중단이나 양육을 선택할 수 있는 실질적 정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보호출산을 선택하는 여성과 합법적으로 유기되는 아동의 수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는 한, 보호출산제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침해하고 아동의 원가족 분리를 제도적으로 조장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10611433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고아권익연대는 보호출산제가 인간의 출생정보 접근권을 빼앗고 부모를 찾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도입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사진은 2024년 7월 16일,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트럭 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 ⓒ프레시안(박상혁 기자)</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보호출산 도입 뒤의 세력: ‘낙태죄 존치’ 연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호출산제로 태어난 아동은 “국가 돌봄 체계” 또는 “공적 돌봄 체계” 안에서 보호받는다고 하지만, 이는 아동이 평생 부모에 의해 버려졌다는 서사를 짊어지고 아동보호시설이나 입양가정에서 성장함을 의미한다. “위험한” 어머니와 아기를 영구적으로 분리하고, 장차 재회의 가능성마저 충분히 보장하지 못하는 보호출산제는 과연 누구에 의해, 어떤 배경 속에서 도입된 것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때는 2023년, 이른바 ‘수원 영아 시신 냉장고 유기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대 친모가 영아 2명을 출산 직후 살해한 뒤 자택 냉장고에 은닉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미등록 아동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2,123명의 미등록 아동 중 다수가 사망했음을 확인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를 계기로, 같은 해 6월 국회는 ‘출생통보제’를 통과시켰다. 출생신고를 부모의 의무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의료기관이 출생 사실을 국가에 통보하도록 하는 제도다. 오랫동안 미등록 아동 문제 해결을 요구해 온 시민사회는 이를 환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출생통보제 논의가 시작될 무렵부터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은 ‘출생통보제와 함께 보호출산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을 했다. 2022년 7월 4일 「생명을 존중하고 지키는 보호출산제 도입」을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며, 제도 도입 필요성을 적극 제기했다. 이어 출생통보제 도입이 국회에서 확정된 직후인 2023년 7월 3일, 국민의힘 여성의원 19명은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을 열어 보호출산제의 조속한 도입을 촉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비슷한 시기에 전국입양가족연대, 반낙태운동을 주도하는 K프로라이프, 라이프투게더, 성산생명윤리연구소 등 프로라이프(Pro-life, 낙태 반대 진영) 단체들과 일부 기독교 단체들 역시 보호출산제 도입을 촉구하며 힘을 실었다. 이들은 위기 임산부의 익명 출산을 허용함으로써 영아 유기와 살해를 막고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미혼모, 입양인, 보호시설 퇴소인…당사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성</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재생산권과 아동권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과 미혼모, 입양인, 보호시설 퇴소인 등 당사자들로 조직된 단체들은 보호출산제 도입에 반대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 정책토론회를 통해 보호출산제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아동의 출생정보 접근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국가가 위기 임산부 지원 책임을 회피한 채 아동 유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아동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찬성 논리 앞에서 반대 진영의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했다. 고아권익연대는 김미애 의원실에 “보호아동의 생명권과 알 권리를 모두 보장하고, 부모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더라도 서로 소통할 기회를 보장하는 면접교섭권 도입” 등을 요구하는 수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윤석열 정부가 설치한 약자와의동행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미애 의원은 “다른 의원을 찾아가 보라며 번번히 거절했다”.(프레시안 2024년 7월 18일자 “윤석열은 무지, 김미애는 무시” 기사 인용)</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호출산제 도입에 반대했던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당시 상황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무리 법 조항의 문제점과 인권침해 가능성을 지적하며 반대 의견을 피력해도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논리를 이길 수가 없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국 2024년 7월 보호출산제가 시행되었다. 정부는 보호출산은 모든 조치가 이루어진 뒤에 선택되는 ‘최후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행 이후 보호출산을 선택한 위기 임산부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2024년 윤석열 정부는 보호출산제를 대표 발의한 김미애 의원에게 “신생아의 생명권 및 산모의 자기결정권을 조화롭게 보호했다”는 평가와 함께 올해의 입법상 대상을 수여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21020026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국내 번역 출간된 책 『입양으로 아기를 잃은 50만 명의 여성들』(데이비드 하우, 필리다 소브리지, 다이애나 히닝스 공저. 안토니아스) 북토크 현장. 2025년 12월 5일. 왼쪽부터 책의 공동번역‧감수자인 이태인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전세희 ‘더나은 입양을 실천하는 입양부모 네트워크’ 대표, 노혜련 숭실대학교 명예교수, 조소연 사회복지연구소 마실 대표, 권희정 미혼모 아카이빙과 권익옹호 연구소장의 모습. (사진: 미혼모 아카이빙과 권익옹호 연구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위기 임산부와 그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처럼 보호출산제 도입 배경에는 생명을 단지 ‘살아있음’으로 이해하는 정치</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종교 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일부 입양부모들로 구성된 친입양 운동 집단이 자리하고 있다. 법과 제도를 만들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며 입양을 통해 아동의 삶에 개입하는 주체들로, 우리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들은 자신을 보호자이자 구원자의 위치에 세우지만, 정작 ‘보호’와 ‘구원’의 대상이 된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에 내어주고, ‘구원된’ 아동은 출생의 정보와 서사를 삭제당한 채 ‘단지 생명’으로 축소된다. 이들이 바로 아감벤이 말한 ‘벌거벗은 생명’들이다. 삶의 서사와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인간의 생명을 ‘단지 살아있는 상태’로 축소시키는 보호출산제는 빈곤한 여성과 아동에게 가해지는 또 다른 방식의 배제이자 폭력이 될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셸 푸코는 과거 군주는 백성을 죽이거나 살릴 권리를 가졌다면, 근대 이후 국가는 국민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생명권력을 행사한다고 보았다. 푸코의 통찰을 21세기에 보호출산제가 작동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도 목격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위기 임산부와 그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와 익명, 그리고 구원의 서사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다시 말해 아감벤이 구분한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조에 zoē)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삶으로서의 생명(비오스, bios)이다. 이를 위해서는 안전한 임신중단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와 상담, 안전한 출산과 안정적인 양육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지원, 그리고 누구도 임신과 출산 때문에 배제되지 않도록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이 우선 구축되어야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62bd3;">[필자 소개] 권희정</span> : ‘미혼모 아카이빙과 권익옹호 연구소’와 도서출판 안토니아스를 꾸리며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다. 인류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는 『미혼모의 탄생: 추방된 어머니들의 역사』, 『이것은 사라진 아이들의 기록이다』, 역서로는 『아기 퍼가기 시대: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 『입양으로 아기를 잃은 50만 명의 여성들』(공역)과 다수의 칼럼이 있다. 존엄한 삶과 죽음이 가능한 사회를 희망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21 09:57: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권희정)]]></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10454348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210454348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65세에 같이 놀 예비 할머니 찾기]]></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 크면 같이 살자”</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취향과 취미를 공유하며 하우스메이트를 약속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선택하며 떠나간다. 가치관이 비슷한 친구들과 만나 “나이 들면 같은 동네에 살며 안부도 묻고,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하며 살자” 말하지만 본격적인 작당모의를 하기엔 쉽지 않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막연하게 노후를 걱정만 하다가 예비할머니 프로젝트를 만났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는 주거, 돌봄, 생활공동체에 대해 공부하고, 결혼과 혈연 외에도 서로를 돌보며 살아갈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프로젝트 회차가 늘어날수록 어쩌면 이곳에서 노후를 함께 준비할 생활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들었다. 한편으론 함께 살아갈 미래를 상상하기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94655172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노후 준비와 생활공동체 만들기가 단지 ‘생존’을 고려하는 것만은 아니다. 서로 취향과 취미를 알고 이해하고 공유하면 삶을 더 풍요롭고 즐거울 것이다. 예비할머니모임에서 자기만의 취향·취미 진(Zine)을 만들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노후 준비와 생활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생존과 직결된 것들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주거와 돌봄의 불안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아플 때 서로를 돌볼 수 있을지 같은 문제들 말이다. 하지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생존을 위해 주거와 비용을 나누는 일만은 아니다. 함께 밥을 먹고 생활하는 ‘식구’가 어떤 하루를 보내고, 무엇을 좋아하고 즐기는지 알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 이 사소해 보이는 일이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지속하는 바탕이 된다. 삶을 이루는 기본 토대가 돌봄이라면, 이를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드는 것은 취향과 취미 아닐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취향과 취미를 공유하는 관계는 공동체를 조금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윤활제 같은 역할을 한다. 실제로 올해부터 근황을 나누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면서, 서로에 대한 허들이 낮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근황을 나눌 때 새롭게 도전하게 된 취미나 요즘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되도록이면 일 외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다양한 관심사가 나오면서, 이를 계기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과 취미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의견이 나왔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취미·취향 진(Zine) 만들기를 통해 가까워지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진(Zine)은 개인(작가)이나 소규모 그룹이 형식과 규격에 구애 받지 않고 사진, 글,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담아내는 독립 출판물이다. 공공기관, 독립서점 등 다양한 곳에서 (원데이) 클래스 등을 진행하는 활동으로 인터넷 검색 시 다양한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작가의 기획과 디자인에 따라 천차만별의 진이 있지만, 우리는 가장 쉽고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방식의 진으로 각자의 취미와 관심사, 취향을 한 권의 작은 책으로 만들고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94721356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진(Zine) 만들기 모임을 위한 세팅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1. A4 용지를 8등분으로 접었다 펼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 중앙의 2칸 크기로 가로선에 칼집을 내고, 반으로 접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 종이가 입체가 되도록 가운데로 모아 책 모양으로 포개어 접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4. 각자 소개하고 싶은 본인의 취미와 취향을 그리고, 오리고, 붙인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누군가는 하나의 주제로 진을 가득 채웠고, 누군가는 여러 취미와 활동을 한 권에 담았다. 취미도 일처럼 열심히 하는 한국인들답게 다들 시도하고 지속해 온 취미 활동이 다양했는데,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 쓰셔도 돼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꾸(다이어리 꾸미기)가 취미인 A는 모임이 시작하자마자 집에서 가져온 갖가지 종류의 스티커와 엽서를 책상에 펼치고, 후한 인심으로 모두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글쓰기가 취미인 그는 블로그, 뉴스레터 등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훗날 할머니 밴드를 꿈꾸는 B는 일주일 만에 피아노를 때려치운 대신 기타를 배우는 중이다. 아직 코드 2개를 반복하며 연습 중이지만 손끝의 알싸한 느낌과 굳은살이 생기는 감각이 좋다고 한다. 배드민턴 4년 차, 격투기 6개월 차. 운동에도 진심인 그의 또 다른 취미는 매년 새로운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이드 프로젝트(작은 시도)를 취미 생활로 하면서 새로운 우정을 나눠보면 좋겠다는 B는 지금 진행 중인 2개의 프로젝트 외에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그란 시간표 안에 오전, 오후, 자기 전 마시기 좋은 차를 그려 넣은 C는 요즘 차 마시기에 푹 빠져 있다. 템플스테이와 불교박람회에 다녀온 계기로 조금씩 차에 스며들어 다구를 종류별로 사기 시작한 그는 다구와 어울리는 패브릭 제품을 만들어 차(tea) 플리마켓 셀러로 참여한 이력까지 생겼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야외에서 벚꽃 다회를 해보고 싶다고 말한 그의 SNS에 야외 찻자리 영상이 올라왔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9474622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각자 만든 취향·취미 진(Zine)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9번 찔려도, 한 번 찌르면..! 그 맛이 기가 막혀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펜싱에 큰 재미와 희열을 느꼈던 D는 펜싱을 그만 둔 이후 흥미를 돋우며 몸에 딱 맞는 운동을 찾는 중이다. 그가 찍먹한 운동으로는 등산, 수영, 풋살, 필라테스 등이 있다. 운동 외에도 통기타, 일렉 기타, 텅 드럼, 트럼펫 등 여러 악기와 취미 생활을 거친 D에게 언제나 가장 재미있고 질리지 않는 취미는 반려고양이와 노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모임 이후 본인이 만든 진(zine)을 여기저기 보여주며 자랑한 E는 2022년에 훌라에 입문했다. 기후정의행진 오픈 마이크를 통해 데뷔 무대에 선 이후, 직접 지원사업에 공모해 주차장 등 서울 골목골목에서 훌라 공연을 펼친 E. 할머니가 되어서도 훌라를 하는 삶을 살고 싶어 올해 4월, 훌라 전문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고 훌라 강사 자격을 얻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외에도 클라이밍, 마라톤, 수영, 기구 필라테스를 꾸준히 하고 있지만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를 평생 느끼고 싶어 65세까지 종목을 바꿔가며 취미 생활을 하고 싶다는 F, 속해 있는 축구단의 5060 언니들을 보며 훗날 할머니 조기 축구단을 만들고 싶다는 G, 템플스테이에 다녀와서 5일간 매일 집에서 108배를 했다는 H까지. 다양한 취미·취향 일대기를 공유하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취향은 한 사람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설명하고, 취미는 현재 어떤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설명한다. 각자의 진을 살펴보며 서로의 하루와 일주일, 1년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자신을 돌보는 방식과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을 짐작해 볼 수도 있었다.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게 많아진 만큼 우리는 이전과는 또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바쁘다 바빠, 현대 할머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혼 안 하고) 나이 들어서 혼자면 외롭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평소에도 큰 타격 없었던 누군가의 걱정 섞인 핀잔이 우려스럽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하나의 취미를 파고들어 강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부터 안 해본 취미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취미를 찍먹 해본 사람까지. 이토록 많은 취미 부자 할머니들이 나와 가까운 곳에 산다고 생각하면 외롭기는커녕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흐를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운동부터 악기, 글쓰기와 사이드 프로젝트까지. 서로가 서로의 취미 선배이자 선생님이 되어준다면, 아마도 내 노년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span></p><p> </p><p style="margin-left: 30px;"><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침에 일어나 C가 추천한 보이차를 우려 마시며 차분히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7시, 동네 요가원에 가서 몸을 풀고, 집으로 돌아와 시원하게 몸을 씻어낸다. 은퇴 없이 가능한 오래 일 하고 싶은 (예비) 할머니로서 이른 오후까지 일을 하고, 초저녁엔 동네 할머니들을 만나 악기 연습을 한다. 어느 날엔 요가 대신 수영을 가고, 또 어느 날엔 악기 연습 대신 삼삼오오 모여 동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갈 수도 있겠다. 또 일주일에 한두 번은 할머니 조기 축구단에 나가서 축구를 하고, 어느 주말엔 완주를 목표로 F가 나가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수도 있다</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p><p style="margin-left: 30px;">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9485353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작년에 함께 모여 만든 65세 생활 시간표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쩌면 지금보다 더 부지런을 떨어야 소화할 수 있는 스케줄. 이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상상하면 노년의 삶이 기대되고 설레기까지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서울 은평구 ‘살림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이 들고 싶은 동네』(유여원, 추혜인 공저, 2025)에는 7080 여성 주축의 근력운동 모임 ‘흰머리 휘날리며’, 등산 속도가 가장 느린 사람에 맞춰 산을 타는 건강 소모임 ‘오투’,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로 이루어진 풋살팀 ‘살림FC’ 등 살림의 다양한 모임이 소개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주 비혼여성공동체 비비협동조합에서도 생활요가부터 쿠킹 클래스, 뜨개방 등 다양한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모두 공동체 구성원이 직접 만들고 운영하는 모임이다. 주축이 되는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을 이끌거나 선생이 되어 가르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며 구성원들의 역량과 관심사에 따라 모임을 하나씩 만들어갔다면, 아직 생활공동체를 공부하고 시도해 보는 과정의 우리는 역으로 취미 모임을 주축으로 생활공동체를 만들어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20명의 인원 중 취향과 취미로 모인 4~5명이 각각의 소모임을 만들고 교류하다가 어느 날 다 같이 모이는 날 또 다른 교류를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이라면 아직 낯설고, 막연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생활공동체 만들기’가 조금은 가깝게 느껴지고, 쉽게 접근해 볼 수 있을 것 같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모임 이후, 취미 생활에 진심인 예비 할머니들이 모인다면 지금 당장 대단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 함께 모여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꼭 생활공동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목격한 적이 있다. 수영장에서, 산책로에서, 카페에서. 함께 걷고, 먹고, 마시며 서로를 챙기는 할머니들을. 우리가 목격한, 너도 나도 한 번씩은 떠올렸을 주변 할머니들의 취미생활을. 다 같이 둘러앉아 화투를 치는 할머니들, 식당과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떠는 할머니들, 같이 절도 다니고 등산도 다니는 할머니들. 한 모임원은 우정여행으로 바다에 놀러 가 서핑 수업을 듣는 60대 할머니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미 어디에든 존재하는 그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리는 미래의 취미 생활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95012596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각자가 만든 취향·취미 진(Zine)을 소개하는 모습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취미를 함께 하는 게 돌봄이 될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취미를 함께하며 한 가지 더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돌봄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책 『여기는 무지개집입니다』(김현경, 2022)에서 돌봄은 특별한 사람이나 특정한 순간에 필요한 게 아닌, 존엄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말한다. 서로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일상생활을 움직이는 중요한 축이며, 같이 밥을 먹는 ‘밥 돌봄’이 일상에서 갖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렇게 서로의 상태를 살피고 안부를 묻고 끼니를 확인하는 것이 돌봄의 한 영역이라면 함께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또한 보살핌을 주고받는 일이 될 수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비할머니 모임 중 누군가 “서로를 잘 아는 관계에서 더 나은 돌봄이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취향과 생활리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혼자 있고 싶은 순간과 함께 있고 싶은 순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절대 사소한 부분이 아닐 것이다. 결국 공동체에서 돌봄을 주고받는 행위는 갑자기 발생하는 역할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 위에서 가능한 일 아닐까. 우리는 취향과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가 지속되고 발전해 65세에도 함께 모여 재미있는 취미 활동을 하고, 밥을 먹고, 근황을 나누며 요즘 아픈 곳은 없는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살피는 관계가 되길 기대하며 이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 달에 한 번, 서울과 경기 곳곳에서 모인 예비 할머니들이 두터운 우정과 신뢰를 쌓아 함께 생활 공동체를 만들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우리도 알 수 없다. 그저 지난 1년 동안 만난 선례에 힌트를 얻어 느슨하고 지속 가능한 관계를 오래오래 천천히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이제 막 만들어진 모임인 만큼 함께 살 동네도, 구체적인 계획도 부족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번뜩 또 다른 추진력이 생길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매월 만나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더 잘 살필 수 있는 건강한 몸과 체력일 터. 예비 할머니들과 진짜 할머니가 되어서도 함께 건강하고 다채로운 취미 활동을 하기 위해 오늘부터 근력 운동을 시작해 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2b64d3;">[필자 소개] 파랑.</span> 우연히 예비 할머니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후 노후를 함께 할 생활 공동체를 꿈꾸게 되었다. 비슷한 친구들과 같은 동네에 모여 살며 나이 드는 미래를 상상하며 꾸준히 활동 중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19 10:44: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가족/관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파랑)]]></author>
	   <category><![CDATA[가족/관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951484025.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951484025.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더 이상 피해자에게 “얼마나 저항했는가” 묻지 말라]]></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8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75차례나 성적 행위를 거부한 피해자의 음성 녹음파일이 증거로 제출됐음에도 1·2심에서 모두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 된 <a href="https://ildaro.com/10467" target="_blank">‘동의 없는 성폭력’ 사건의 재판소원 청구</a>에 대해, 6월 9일 헌법재판소가 본안 심사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강간죄의 폭행·협박 요건, 그리고 그 폭행·협박의 기준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라고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다.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는 헌법재판소에 “강간 통념에 기초한 최협의설이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을 가로막는 법리임을 적시”하고 “강간죄의 폭행·협박 구성요건의 폐기를 재판소원 결정으로 반드시 확립”하라고 요구하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이지 ‘저항할 의무’가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에 앞서 5월 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는 낡은 성폭력 형사법 체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공론의 장이 열렸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주관하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공동 주최한 국회토론회에서 참여자들은 &lt;‘동의’ 기준의 성폭력 형사법 체계,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나&gt;를 주제로 논의하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71538613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5월 27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국회토론회 &lt;‘동의’ 기준의 성폭력 형사법 체계,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나&gt;가 열렸다. (주관: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 공동주최: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전진숙·서미화·이주희, 조국혁신당 정춘생, 진보당 손솔,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 샘포드대학교 컴벌랜드 로스쿨 라모나 알빈(Ramona C. Albin) 교수가 “‘동의’ 기반의 미국 성폭력 관련 법률”에 관해 설명하였고,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소장이 “동의 없는 성폭력, 한국의 상황과 형법에 대한 과제”를 짚었다. 이창환 서울가정법원 판사, 소은영 헌법재판연구원 책임연구관, 전다운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신지영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활동가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가해자의 물리적 폭력이나 피해자의 저항 여부가 아닌, 자유롭고 명백한 ‘동의’ 여부가 성폭력 판단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토론회에서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형법 297조 강간죄의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과, 이 요건마저도 가장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통계를 통해 현행법이 현실의 성폭력 피해자를 얼마나 배제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혜정 소장에 따르면, 2019년 1월~3월 강간 및 유사강간 상담통계(66개 상담소 1,030사례) 분석 결과,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 없이 발생한 강간이 71.4%였다. 또 2022년 한 해의 강간, 유사강간, 준강간 상담통계(119개 상담소 4,765사례) 분석 결과에선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강간 상담이 62.5%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2022년 여성가족부 ‘성폭력 안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성추행 피해를 겪은 상황을 복수응답으로 물었을 때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2.7%, 7.1%에 그쳤고, ‘가해자의 속임수’가 34.9%로 가장 높았다. ‘갑자기’ 26.6%, 강요에 의해 18.7%, 가해자가 자신의 지위(권한·위력)를 이용해서가 16.2%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 소장은 “2024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강간 상담 218건 중, 폭행이나 협박이 전혀 없었던 경우가 70.2%에 달했다. 반면, 현재 법원 판례상 강간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은 ‘최협의의 폭행·협박’ 사례는 단 7.3%에 불과했다.”며 법과 현실의 극심한 괴리를 밝혔다. 즉, “현행법 체계 아래서는 약 90% 이상의 성폭력 피해자가 국가로부터 ‘그것은 성폭력이 아니다’라며 법적 구제를 거부당하는 부작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다운 변호사(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위원장)는 1995년 형법 개정으로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이 ‘정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피해자의 물리적 저항을 묻는 법원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피해자의 ‘저항할 의무’가 아니라 행사하지 않는 순간에도 보장받아야 할 본연의 ‘권리’라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다운 변호사는 “최협의설은 범죄의 초점을 가해자의 행위가 아닌 피해자의 태도로 옮겨놓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피해자에게 극한의 저항을 증명하도록 강요하고, 이렇게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은 성범죄에 대한 전형적인 피해자다움, 강간 통념을 강화하는 원천이 되어 왔다. 더불어 억울한 죄책감과 2차 가해를 제도화하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동의 없으면 강간” 글로벌 스탠다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라모나 알빈 법학교수는 “과거 미국 역시 영국의 법을 기초로 피해자의 ‘극한의 저항’을 요구하는 유형력(물리적 힘) 중심의 모델을 따랐으나, 이는 현실에서 네 가지의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째, “피해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오류”다. 이는 “범죄의 쟁점을 피고인(가해자)의 행위가 아닌, 피해자가 얼마나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저항했는지 여부로 옮겨놓는 결과”를 가져왔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둘째, “부적절한 기준”이다. “현저한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대다수의 강간 사건을 법의 보호망에서 배제하며, 제대로 된 적용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셋째, “피해자의 얼어붙는 반응의 외면”이다. “강간 및 성폭행을 당할 때 극도의 두려움으로 몸이 굳어 저항할 수 없는 ‘긴장성 부동화’ 반응을 보이는 대다수의 피해자들을 보호하지 못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넷째, “수면 및 약물 상태의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피해자가 수면 중이거나 알코올, 약물의 영향으로 저항할 수 없었던 사건에 대해 유형력 법률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라모나 알빈 교수는 이러한 결함이 드러남과 더불어 “성폭력의 본질은 성적 자율성에 대한 침해”라는 인식이 부각됨에 따라, 성폭력의 핵심 요소가 “동의(적극적 합의)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71613537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미국 샘포드대학교 컴벌랜드 로스쿨 라모나 알빈(Ramona C. Albin) 교수가 “‘동의’ 기반의 미국 성폭력 관련 법률”에 관한 발제를 하고 있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 알빈 교수는 미국 강간죄 법률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했다. 미국은 주마다 각기 다른 법을 가지고 있으나, 1970년대부터 위스콘신주, 버몬트주 등을 시작으로 다수의 주가 피해자의 ‘적극적 합의’(Affirmative Consent)가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법을 개정해 왔다. 특히 2024년 메릴랜드주는 2급강간 요건에서 유형력 기준을 완전히 폐지하고, 당사자의 명확하고 자발적인 합의를 ‘동의’로 규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각에서는 강간죄를 ‘동의’ 기준으로 개정하면 어느 행위까지가 범죄인지 예측하기 어렵고, 합의한 성행위에 대해 이후 말을 바꿔 고소를 하는 등 무고가 늘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지만, 알빈 교수는 50년의 판례가 축적된 실증적 결과를 바탕으로 반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먼저 “범죄의 기준이 불분명해지는 게 아니라, ‘동의 없는 성관계가 강간’이라는 명확한 기준이 생기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동의에 대한 기준이 명시되므로, 평범한 성관계가 부당하게 처벌받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수면이나 음주 등 모호한 ‘회색지대(Grey-Zone)’ 사건도 법원이 원칙에 따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만이 아니다. 김혜정 소장은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반대하는 측에서 주로 인용하던 일본과 프랑스조차 최근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형법을 개정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2023년 형법 개정을 통해 기존의 ‘강제성교 등 죄’를 ‘부동의성교 등 죄’로 바꾸었다. 또한 동의하지 않는 의사를 형성하고 표명하고 완수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8가지 구체적 사유(폭행·협박, 알코올·약물 섭취, 지위 이용 등)도 명시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프랑스 역시 아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수십 명의 남성을 불러들여 성폭행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2025년 피해자의 자유롭고 명확한 동의가 부재한 성적 행위를 강간으로 처벌하도록 형법을 개정했다. 김혜정 소장은 “프랑스 의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동의한 것’으로 치부하는 기존의 ‘강간 문화’에 맞서, 자유롭고 명확한 정보에 기반한 동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고 전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7165795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9년 9월 18일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고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무죄 추정의 원칙이 흔들릴 것…우려는 ‘사실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의 모델을 도입하면 입증이 어려워지고 재판 실무에 엄청난 혼란이 생길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에 대해서도, 법조계 전문가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창환 서울가정법원 판사는 “법원이 알지 못했던 낯선 기준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성범죄 재판에서는 이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동의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창환 판사는 “카메라등이용촬영죄나 스토킹범죄 등 다른 법률에서도 이미 ‘의사에 반하여’라는 구성 요건을 무리 없이 적용하고 있으므로, 강간죄 요건이 동의로 전환되더라도 입증 책임의 원칙(무죄 추정의 원칙)은 그대로 유지되어 법원의 심리에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알빈 교수 역시 “입증 책임이 피고인에게 전가된다는 우려”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동의 기준으로 법을 바꾸더라도 입증 책임은 피고인이 아닌 국가(검찰)”에게 있으며,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검사가 ‘동의 부재’를 포함한 모든 구성 요건을 입증해야 하므로, 입증 책임이 피고인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성적 착취에 ‘동의’한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신지영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활동가는 ‘동의’ 기준 논의를 성매매 산업과 구조적 불평등의 영역으로 확장했다. 돈이 지불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동의’에 의한 거래로 간주해 성적 접근권을 무한정 허용하는 사회적 시선을 강하게 비판하며, 이를 ‘페이 강간(paid rape)’이라는 단어로 꼬집었다. “성매매나 포르노산업 현장의 여성들은 심각한 폭력과 억압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단지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들의 권리 침해는 가볍게 취급 당한다”는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신지영 활동가는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태에서 “지인의 평범한 얼굴이 합성된 것은 ‘지인 능욕 피해’로 분노하면서도, 그 합성의 토대가 된 포르노그래피 속 여성의 몸이 어떻게 착취되었는지는 질문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 또한 지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여성이 ‘거부’하기 어려운 빈곤과 경제적 압박, 위력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체념적 순응까지도 ‘동의’로 해석하는 사회는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동의를 정의해왔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비동의 강간죄 논의는 “개인의 좁은 선택 여부를 넘어, 어떤 조건 속에서 개인이 평등한 주체로 설 수 있는지를 묻는 사회적 전환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71718486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국회토론회 &lt;‘동의’ 기준의 성폭력 형사법 체계,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나&gt; 진행자, 발제자, 토론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였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또 소은영 헌법재판연구원 책임연구관은 “헌법적 관점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가 더 폭넓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현재 헌법재판소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성행위 여부 및 그 상대방을 결정할 권리”라는 협소한 성행위 국면에만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은영 연구관은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권리는 사적 영역에서의 내밀성을 보장해달라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성적 자율성과 자유라는 측면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비동의 강간죄’로 개정된 우리 사회의 미래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토론회에서 자신을 “생존자”라 밝힌 한 참여자는 “성폭력이 발생한 현장이 과연 동의를 구할 만큼 여유로운가, 사실 얼마나 급박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명시적 동의가 없는 행위는 철저한 폭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참여자들은 이러한 폭력과 침해에 단호하게 대응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최후의 보루인 국가 형법이 과거의 ‘강간 문화’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며, 22대 국회와 정부의 결단을 촉구했다. 또한 비동의 강간죄(동의 모델) 도입은 감옥에 보내는 가해자의 숫자를 늘리려는 형벌권 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상호 동의가 없는 성관계는 폭력’이라는 상식을 법과 사회의 기준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형법이 개정된다면 우리 삶에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며, 김혜정 소장은 다음과 같은 변화에 대해 전망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적 행동 전에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고, 모든 사람을 자기 의사를 가진 동등하고 평등한 성적 존재로 존중하는 문화가 일상 곳곳에 교육되고 자리잡게 된다. 피해자에게 ‘왜 더 세게 밀쳐내지 않았느냐’, ‘왜 끝까지 소리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던 2차 가해의 법정은 사라질 것이며, 사법절차는 피해자에게 억울한 죄책감이 아닌 진정한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17 14:1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71830562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71830562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남태령이 우리에게 남긴 한 마디, “그렇구나! 알아두겠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6.3 지방선거가 막 끝났다. 대통령을 탄핵했던 겨울의 광장이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닌데, 그곳에서 우리가 꿈꾼 변화된 미래가 지금 이곳이었나 싶어서 씁쓸해졌다. 그러던 중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남태령〉을 만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12월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후의 탄핵 집회는 더이상 ‘촛불 집회’로 불리지 않았다. 민주 시민의 상징이었던 촛불은 ‘응원봉’으로 바뀌었고, 민중가요와 투쟁가는 K팝 플레이리스트로 채워졌다. 집회 문화의 이 상징적인 변화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광장을 채웠던 2030세대, 여성, 성소수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숨김없이 드러낸 많은 이들의 등장에 기성 세대들은 신기해했고, 기특해했다. 하지만 변화의 의미가 고작 ‘기특하다’라는 말로 축약될 때, 응원봉과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집회를 꾸미는 장식에 불과한가 싶어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태령〉은 응원봉으로 상징되었던 광장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는 영화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6145958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12월 21일 남태령 집회 현장의 모습. 영화 〈남태령〉 스틸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연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남 MBC에서 제작한 〈남태령〉은 〈어른 김장하〉를 만든 김현지 PD가 제작한 두번째 극장 다큐멘터리이다. 〈어른 김장하〉는 윤석열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 재판관 문형배 판사가 출연했다고 알려지며 탄핵 이후 큰 인기를 얻었고, ‘좋은 어른’이라는 이 시대에는 보기 드문 존재를 담담하게 담아내며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김현지 PD는 영화의 인기를 지켜보며 ‘시청자들이 한 명의 위대한 인물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취재를 위해서 남태령 대첩의 밤을 함께 경험하게 되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특별한 연대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영화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유머를 놓치지 않는 ‘요즘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서 세대, 계급, 젠더 등 다양한 정체성을 횡단하는 교차로로서의 광장에 주목한다. 실제로 광장을 채웠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영화 곳곳에서 느껴진다. 익명으로 계정을 운영하는 것에 익숙한 트위터(엑스)의 방식을 존중하는 인터뷰 스타일과, 여론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금방 휘발되어 버린 140자의 트윗들, 그리고 집회 현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자유발언 영상 등 흩어져버린 반짝이는 순간들을 그러모아서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식적인 기록으로 엮어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61424343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다큐멘터리 〈남태령〉 (2026, 김현지) 포스터</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br />동짓날, 가장 긴 밤의 남태령</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잊지 못할 밤은 트위터에서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시작되었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이 한창일 때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은 트랙터 대행진을 계획했다. 12월 16일에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트랙터들은 12월 21일 토요일에 서울로 진입해 예정되어 있던 윤석열 퇴진 비상행동 집회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트랙터 대오는 서울로 들어가는 초입 남태령에서 경찰 병력에 의해 가로막혔다. 농민활동가 전주환 씨는 농민들이 식량주권과 농정 대개혁을 요구하는 트랙터 상경 투쟁을 할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또 잡혀가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전농의 스피커 역할을 해온 트위터 계정 “향연”은 경찰이 트랙터 유리를 부수고 전농 활동가들을 폭력 진압하는 상황을 공유했다. 그 트윗 하나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스노우볼처럼 커지면서, 트랙터들을 지키러 남태령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에 열렸던 윤석열 퇴진 비상행동 집회가 명동에서 끝난 후, 사람들은 집으로 가는 대신 남태령으로 향했다. 이 사람들은 전농의 의제를 평소 거의 접해본 적도 없었던 2030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트위터 계정 “향연”의 주인인 김후주 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농민활동가들은 이 낯선 연대자들이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모여드는지 영문을 몰라 했다고 말했다. 어떤 20대 여성 한 명이 농민 전주환 씨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말을 떠올리는 전주환 씨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떨리고 있었다. 그날 밤 트랙터 안에서 많은 농민들이 엉엉엉 울었다고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6152878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농민 활동가 전주환 씨와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 황승유 씨가 악수를 하고 있다. 〈남태령〉스틸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교차로에서 마주친 서로 다른 존재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태령의 기적, 그리고 탄핵 집회의 새로운 주체를 설명할 때 ‘2030 여성들의 등장’이라는 말은 이제 식상하다. 2030 여성들은 그 때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었고, 그 집회에는 여성만 있었던 것도, 2030 세대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광장을 세대론이나 성별 갈등이 전제된 납작하고 상투적인 틀로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고자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계급, 지역, 성별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교차해서 들려주며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트랙터를 끌고 거리로 나온 농민, 트위터를 보고 남태령으로 달려간 사람들. 남태령의 소식을 트위터로 밤새도록 리트윗(공유) 하는 사람들. 지역에서 활동하는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 일상에서는 만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남태령에서 함께 하루 밤을 보냈다. 인터뷰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자 메세지, 트위터에 올라온 글, 스마트폰으로 기록한 영상 등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그날 밤 춥지만 뜨거웠던 남태령에서의 28시간을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남태령으로 가지 못해서 대신 따뜻한 음식부터 난방버스까지 수많은 물품을 후원한 시민들이 있었다. 새벽 늦은 시간에 고립된 남태령까지 그 물건을 배달해준 수많은 배달 노동자들도 그 광장의 일원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밤새 자유 발언을 했던 수십 명의 발언자들은 광장을 공론장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발언을 이어갔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지면서 그날 밤의 광장은 서로를 ‘케어’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셰어’하는 진짜 민주주의의 공간이 되었다. 이 민주적인 공간에서 다양한 차이를 가진 존재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함께하는 진짜 연대의 경험을 나눈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 연대가 가진 힘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61607619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내향인' 깃발의 기수가 트위터(X)를 들여다 보고 있다. 〈남태령〉 스틸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남태령 코어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밤새 남태령의 소식을 트위터로 지켜보다가 첫 차가 뜨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간 ‘용주’(트위터 계정) 씨는 그날 아침 남태령에서 들었던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떤 아저씨가 “딸들 수고했어!”하시길래 “감사합니다! 근데 저희는 논바이너리(non-binary,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별 정체성)에요. 딸들이 아니에요!”라고 외쳤더니 아저씨가 바로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라고 답해주었다는 것이다. 용주 씨가 겪은 일은 트위터에서 1만회가 넘게 공유되면서 남태령을 설명하는 중요한 에피소드가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름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정치에 익숙해져 그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사회에서, 이 단순한 인정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농민 전주환 씨는 발음조차 어렵고 뜻도 잘 몰랐던 페미니스트, 퀴어 등의 정체성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솔직히 안 좋은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남태령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말과 모습을 보며 ‘새로운 세상은 저분들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자’라고 마음먹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마음의 변화야말로 진정한 사회 대개혁의 시작점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61635216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고공 농성중인 현장. 〈남태령〉 스틸컷.</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이 연대가 하룻밤의 잊지 못할 추억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날 밤이 우리에게 아직도 큰 감동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연대의 경험, 누군가에게 인정 받아본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마음을 모아서 만들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가 끝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면 공허함이 몰려오기도 한다. 연대의 고리는 너무 약하고, 실천을 나의 일상으로 끌어오는 것은 너무 멀게 느껴지고, 이건 그저 남태령에서 일어난 우연한 기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다 2011년 ‘희망버스’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그때 중학생이라서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그 역사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큰 울림을 받았었다.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서 1만명의 시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185대의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 일. 그때도 트위터를 통해서 소식을 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씨를 지키기 위해서 부산으로 달려갔다. 그 버스 중에는 성소수자들을 태운 무지개 퀴어 버스가 있었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노동 집회에서 보기 드물게 “성소수자 동지 여러분”이라고 호명해 주었다. 다양한 정체성과 다양한 몸을 갖고 크레인 아래 모인 사람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환대의 태도는  “웃으며 끝까지 투쟁!”할 수 있는 희망이 되었다. (관련 워커스 기사: <a href="https://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amp;nid=102413" target="_blank">성소수자와 노동, 한층 더 진한 우리의 ‘프라이드’를 위하여</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1년의 희망버스 이후로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사회는 많이 바뀌었고 집회 현장에서 무지개 깃발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차이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렇기에 남태령에서 경험한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는 연대의 태도는 더욱 소중하다. 우리가 윤석열 퇴진 이후 꿈꿔왔던 사회 대개혁은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당락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서 경험한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일상 속에 스며든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남태령을 기억하는 한, “당장 세상이 바뀌지 않았지만 우리가 바뀌었다”는 믿음을 놓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d32cd;">[필자 소개] 권오연</span>: 2024년부터 ‘연분홍치마’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를 담은 단편 다큐멘터리 〈X에 대하여〉와 한국과 일본에 사는 네 명의 페미니스트의 우정을 그린 〈순간이동〉을 공동연출했다. 10.29 이태원 참사 미디어팀으로 활동하며 다큐멘터리 〈별은 알고 있다〉를 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1e4de0;">[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소개]</span> 2004년 설립된 연분홍치마는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다큐멘터리·극영화·웹 콘텐츠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a href="https://pinks.or.kr" target="_blank">pinks.or.kr</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16 10:12: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영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권오연)]]></author>
	   <category><![CDATA[영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619128289.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619128289.jpg]]></image>
     </item>

     <item>
       <title><![CDATA[Happy People Even Without New Things]]></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aving Tortillas Everyday with Chati’s Fami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bout a month later, I made a Guatemalan boyfriend. He was an alcoholic who was involved with a lot of women, and who had anorexia. Perhaps feeling sorry for me living with their problematic son, his family invited me for lunch every three days and asked about their son who did not visit them often, not even once a week.</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527047664.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Chati’s dining table. The main plate with Tortilla or Tamale, made of corn powder, is a typical Guatemalan meal.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Because my Spanish was not very good, I always preferred to help them in kitchen. It was more difficult for me to just sit and smile without talking especially as I wanted to let his mother know that I felt a very deep empathy toward her and her worries. Since his mother, Chati, was a Guatemalan woman who prepared a fine and delicious meal even with little money, I was lucky enough to not only have Guatemalan homemade food every day, but also learn how to cook and participate in their food cult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uatemalan meal consists of Tortilla or Tamale, which are made of corn power, and a main plate. Tortilla or Tamale, compared to a Korean meal, are the same as rice. They are served without any sauce but with meat, vegetable, beans, rice, etc. with the main plat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ost families in Xela do not make Tortilla or Tamale by themselves but buy them from a local store right before their meal, thus serving them warm covered by a garment in order to prevent the dish to get cold. Due to the fact that they are made only of corn powder not flour, they are easy to digest. Guatemalans find energy and a feeling of being fully satiated from Tortilla just like Koreans do from ri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aving Tortilla with Chati’s family gradually colored the part of my soul with Guatemalan spirit and consciousness. Tortilla became more and more delicious to me and I never tired of having Tortill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phia—the Goddess of Luck whom I met in Xela—was Chati’s eldest daughter’s three year old child. She was the family’s mood maker who shook up the melancholic atmosphere of the house, like a shark in the sea, invigorating and making everybody happy. That pretty girl constantly followed me everywhere and imitated my every gestures including when I was doing the kitchen chores so that all the family members took notice. It seemed that I suddenly appeared as a cast member in their family soap opera during this girl’s important stage of psychological development. Since Sophia always shouted calling out my name “Luna, Lu-Na-!” the other family members gradually showed their hearts to me and opened the hidden parts of their family history.</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527431811.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Sophia. I grew up with you there at that time.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One day, while having tea after a meal, Chati talked to me in a quiet tone and told me, without shedding a single tear, about her unhappy childhood in her hometown: her sexual molestation by relative, the severe poverty during her early marriage, her husband and son’s lies throughout her life, etc. I felt that her natural grace as a human being, who had experienced such turbulences, difficulties and poverty in her life, was as sad as it was beautiful. </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rowth, the Experience of Becoming a Family in a Faraway Pla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osa, whose house is the Spanish institute where I used to study, was a single woman, who also used to often feed me Tortilla for lunch in her kitchen after class. Isabel, her close to seventy-year old mother who had complete authority over the kitchen, once called me and taught me how to make Tortilla in that kitchen. Since that day, I started to call Isabel “mom”, Rosa “sister” and Rosa’s daughter Daniella “nie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nks to the fact that I had Rosa as my sister who was very social and generous, probably because of her small family, I started to get invited to a number of various familial occasions such as birthday parties, weddings, and even community festivals. At any event, I was not only good at eating but also in helping out in the kitchen. I diligently washed dishes (as “a neat Korean”) and prepared very well many fruits and vegetables necessary for large parties. Unable to communicate through my mother tongue, these kinds of duties seemed to make me think less and feel less stressed ou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una, Are you busy? We are going to make traditional beverages for next week’s religious festival and we need people to help us prepare, so would you please come and work from ten o’clock this Friday morning. You can have lunch with u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 Isabel put me in the kitchen with a pile of a hundred mangos, I felt like I became a Cinderella in a fairy tale. After peeling all of the mangos, the skin on my right fingers became paralyzed for one month. However, I liked to be needed, and in this way I was proud of myself becoming part of their family.</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528066248.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Rosa’s family. Her mother, Isabel, passed away on the morning of January 1, 2012, at the age of seventy.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Of course, becoming part of their family also brought on responsibilities and the experience of heartbreaking moments, and even at a one time, during a psychological crisis, I needed to cry in secret with my guilty feelings. Living through a lot of experiences with this family, it was impossible for me to compare this to my life in South Korea. How was it able for me, who used to criticize paternalism, to learn about family again on this faraway soil? It’s probably because my language skills were so rudimentary that I was accepted in their family and also because I did not possess any things. And it would have been possible for me because I was physically apart from my biological famil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cooking in a number of kitchens in Guatemala, I became good at grocery shopping. After augustly shopping throughout an entire market place, even bargaining like a native person did, the vitality of various fruits and vegetables seemed to vigorously overtake my entire be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began to volunteer for a native woman’s association creating Guatemalan traditional handmade crafts. I also started a small business providing sandwiches which I made early in the morning to a local café, participated in many different meetings, and created strong relationships with people by inviting a number of them and treating them to my homemade food. My identity and potentiality began to draw a new growth curve as if standing at point zero.</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ople’s Passion during Festivals and Parad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 Koreans, the importance of big ceremonial holidays such as Chu-seok (Korean Thanksgiving Holiday) or Seol-nal (Korean New Year’s Day) is to rest; for Guatemalan people, Semana Santa is literally a holy period of festival. In order to see the religious parade from a good viewing point, people wait in a spot for three or four hours by stationing a chair, on which family members can sit taking turns to keep that particular spot.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parade takes place every year and it is always the exact same type and in the exact same order. Nevertheless, the people are passionate in seeing this same parade on a yearly basis. Nothing can truly explain this except that it is something more than religious fervor.</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528318493.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Semana Santa festival parade.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nother large scale street parade takes place on Independence Day. It also follows the exact same order every year. Kindergarten kids march on the exact same day each year and the elementary school, middle school, and high school students all march in the exact same place each year, and all the people can see the same students as the previous year. And the same thing will happen next year. There is no doubt that every parade watcher is able to memorize the entire schedule of the parade. All people, from children to the middle-aged and the elderly, feel honored for participating in their parade, and talk about the heroic moments of the parades even many decades lat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a few years of living in Xela, I felt that the Guatemalan people’s passion for their festivals and parades was like a tree devotedly repeating the process in which buds appear, produce leaves, blossom into flowers, and bear fruits in due time every yea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ring another Guatemalan people’s holiday, “The Day of the Dead,” people exchange bread and chocolate as presents, make a food called “Fiambre” by paying with their own money and happily so, and enjoy it together. People also place bouquets of colorful flowers on every grave, and children have fun flying kites. On Christmas, they make “Paches,” which is made of rice powder, and present this to one another as a gift. If a person gets many “Paches,” he or she is very happy because they can share them with their neighbors—as I di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ople are not reluctant in their repetition of labor and devotion, and in no way feel bored about these yearly activities which never have anything new. Rather, they seem to be even happier in repeating the same thing again. This code of peaceful happiness has rippled through my heart that comes from the nation called South Korea, living and working everyday at the fastest speed in the world, being competitive in always creating a new item. <span style="color: #b530ce;">[Translated by Jieun Lee] </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265" target="_blank">http://ildaro.com/7265</a> Published: October 20, 201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15 17:22: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una)]]></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9'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530431000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530431000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급식 노동자, ‘아줌마’가 아닌 전문 노동자입니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매일 수백 명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맞이하는 따뜻한 밥 한 끼. 그 뒤에는 뜨거운 수증기와 무거운 조리도구 사이에서 치열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들을 ‘밥 하는 아줌마’로 부르곤 하지만, 이들의 일터는 결코 가정 내 주방의 연장선이 아니다. 그들의 노동 또한 마찬가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43024607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학교 급식실 안, 커다란 솥이 자리하고 있다. (출처: 정다정)</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12년 차 급식 노동자인 어머니를 둔 딸이자, 연구자로서 급식 노동에 관심을 갖게 된 정다정 작가는 대학원 논문에 급식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 『밥 짓는 여자들』을 쓰게 됐다.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급식 노동은 무엇이었을까? 정다정 작가를 만나 우리 사회가 외면했던 급식 노동의 진짜 얼굴에 대해 들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인터뷰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급식 노동의 세계-</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작가가 조리실 안으로 직접 들어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다정 작가가 급식 노동에 주목하게 된 것은 대학원 진학 후 논문 주제를 정해야 했던 시기였다. 원래 여성 노동과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작가 주변에, 급식 노동자로 일하는 어머니와 이모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노동이 그동안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했다. 특히 조명하고 싶었던 건 ‘노동자로서의 모습’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급식 노동 이야기하면 ‘힘들다’는 말이 주로 나오잖아요. 최근 몇 년 간은 ‘폐암 발병’ 문제도 있고요. 물론 그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전 급식 노동의 전문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 사람들이 어떤 노동자인지에 대해서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기엔 인터뷰만으로 연구를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사용하는 도구와 노동 과정, 그들만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에 정 작가는 두 달 동안 직접 급식실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한 달은 배식을 돕는 급식 보조원으로, 나머지 한 달은 양해를 구하고 직접 조리실 안으로 들어가 노동의 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급식 보조원은 사실 급식 조리사랑 일하는 게 달라요. 조리사는 출근도 일찍 하고 조리 과정에 참여하지만, 보조원은 배식을 돕는 거라 하루에 3시간 정도 일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조리사들의 노동을 직접 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양해를 구했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42314999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책 『밥 짓는 여자들』을 쓴 정다정 작가 (출처: 정다정)</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수백 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고도의 전문성과 리더십</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 작가가 현장에서 목격한 것은 집에서 서너 명의 밥을 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대량 조리의 고도화된 숙련도’였다. 사람들은 흔히 ‘집에서 요리 좀 할 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치부하지만, 실상은 달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징어국을 끓인 적이 있어요. 보통 집에선 오징어를 넣고 끓여서 끝내잖아요. 근데 급식실에선 오징어를 넣어서 끓이다가 다시 건져내더라고요. ‘왜 그렇게 하시는 거냐’고 물었더니, 500~600인분의 오징어국을 끓일 때 재료를 한 번에 다 넣고 끓이면 장시간 조리로 인해 오징어가 질겨진다는 거에요. 그래서 급식 조리사들은 오징어를 먼저 데쳐 맛을 내고 건져낸 뒤, 국을 다 끓인 후 배식 직전에 오징어를 다시 넣는 방식으로 조리하시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수백 명분의 면을 삶을 때도 끓는 물 대신 오븐 역할을 하는 ‘스팀기’를 이용했고, 대량의 시금치를 데쳐서 씻을 때도 뜰채로 모두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특수 제작된 수조 밑의 배수구를 열어 물을 빼면서 효율적으로 채소를 건져냈다. 거대한 무침기에 밥과 재료를 넣고 뭉치지 않게 일일이 손으로 섞는 볶음밥 조리 과정 역시 대규모 식재료에 대한 이해와 요령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뿐만이 아니다. 숙련된 조리사들은 정해진 짧은 시간 내에 안전하게 음식을 내기 위해 단순한 요리사를 넘어 “전체 조리실의 흐름을 지휘하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했다. 오븐에 생선과 빵을 함께 구울 때 냄새가 섞이지 않도록 순서를 조율하거나, 각 노동자들의 동선과 비는 시간을 파악해 즉각적으로 업무를 재배치하는 등 전체 공정을 통솔하는 능력을 보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하시는 분들이 농담으로 경력이 많은 분을 두고 ‘저 사람은 뒷통수에도 눈이 달렸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누가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아는 거에요. 마감이 정확한 시간 내에 음식을 완료해야 하니까, 지금 누가 어떤 작업을 맡아야 하는지 파악하고 있는 거죠.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능력인 거죠. 그리고 학교 급식은 학생들의 건강을 염두해야 하기 때문에 염도도 체크하거든요. 그걸 체크하는 기계가 있는데, 오래 일하신 분들은 그것도 정확히 맞춰요. ‘지금 이거 염도 몇 정도 나오겠네’하고 기계로 확인해 보면 그 숫자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토록 중요한 숙련도와 몸에 축적된 경험은 공식적인 매뉴얼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 10년 차와 1년 차의 경력 수당 차이가 고작 1~2만 원에 불과할 정도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42354988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책 『밥 짓는 여자들-학교 급식 노동자들의 일과 삶』(정다정 기록, 산지니)</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값싼 노동력으로 치부된 역사, 그에 반하는 노동 강도와 산재</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이유에 대해 정다정 작가는 “노동의 저평가 이면에는 뿌리 깊은 성차별적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90년대 학교 급식이 확대되던 시기, 급식 노동은 일하는 기혼 여성들의 도시락 싸는 가사노동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정 작가는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의 전문성에 대한 심도 있는 사회적 논의 없이, 단순히 다른 계층의 여성을 값싼 노동력으로 채워 넣는 방식을 택했다”고 지적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국 이들의 노동은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우리 사회는 급식 노동자들을 전문 노동자가 아닌 ‘아줌마’, ‘이모’로 퉁쳐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의 급식 노동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여파는 오늘날 고위험, 고강도의 노동 환경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 작가는 급식 노동자들의 위험한 노동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학교 급식실은 인력이 너무 적어요. 다른 공공기관이나 군대의 경우, 조리 인력 1명당 70명 정도의 식사를 감당하는 반면, 학교 급식실은 1명당 학생 120~150명을 감당하고 있죠. 이런 상황은 당연히 노동자에게 업무가 가중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연쇄적으로 많은 문제를 발생시켜요. 일을 빨리 해야 하니까 바쁘고, 그렇게 움직이다 보면 사고가 나는 거죠. 급식실 자체가 사실 위험한 공간이잖아요. 항상 물이 바닥에 있고, 뜨거운 물을 쓰고, 칼질도 계속 하고요. 그런 환경 속에서 마음이 급하다 보면 사고가 나는 거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급식실에선 화상이나 근골격계 질환 같은 산업재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더불어 더 큰 문제는 노동자들이 회복할 시간, 쉴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치거나 아프면 회복을 해야 하잖아요. 근데 쉬질 못해요. 왜냐면 일할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요. 내가 쉬면 동료가 힘들다는 인식이 있으니까 쉬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력 확충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겁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4323243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급식실 내 소독고에 앞치마와 고무 장갑 등이 걸려있다. (출처: 정다정)</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밥 짓는 아줌마’에서 연대하는 ‘노동자’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립된 공간에서 침묵하던 이들에게 변화를 가져온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노동조합’이었다. 과거 급식 노동자들은 휴가를 쓰지 못해도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에 무조건 서명하거나, 행정실 직원의 하대에도 묵묵히 참아야만 했다. 또한 뜨거운 물로 소독을 하다가 화상을 입는 등 불필요한 관행 속에서 산재를 당하면서도 자비로 치료하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노조에 가입한 후, 이들은 부당한 사측의 요구가 불법임을 깨닫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끔 뜨거운 물로 소독을 하라는 학교가 있대요. 근데 약품을 써서 청소하는 거기 때문에 뜨거운 물로 안 해도 되거든요. 뜨거운 물로 청소를 하려고 하면 화상 등의 사고가 더 일어나기도 하고요. 그런 요구가 있을 때 ‘그렇게 안 해도 된다’는 걸 노조에서 알려주는 거죠. 또 급식실은 학교 건물과 분리된, 좀 고립된 공간일 때가 많아요. 다른 학교 직원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으니까 ‘외딴 섬’처럼 존재하기도 하는 거에요. 그리고 학교에서 보내는 공문은 영양사만 볼 수 있고요. 그러니까 여러 행정 정보에서 차단되는 거에요. 근데 노조에 가입하니까 노조에서 바로 바로 정보를 알려주더라는 거에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조 활동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을 ‘돈 벌러 나온 아줌마’가 아닌 ‘당당한 급식 노동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것. 정 작가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무척 인상적이라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급식 노동에 포함된 아이들을 향한 ‘돌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책에선 급식 노동자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와 행위를 ‘돌봄’으로 해석한다. 정 작가는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이 힘든 노동을 이겨내는 가장 큰 방식으로 ‘아이들을 향한 돌봄과 애정’을 꼽았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일했던 곳은 남자 중학교였는데, 정말 배식 시간이 전쟁터 수준이거든요. 거의 500명의 남중생들 몰려오는데 배식이 10~20분 사이에 다 끝나요. 그 정도로 짧은 시간 내에 폭풍처럼 몰려오기 때문에 보조원도 조리사들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심지어 장난치는 학생들도 있고, 그럼 더 정신이 없죠. 근데 그 와중에도 조리사들은 학생들의 기호를 파악해 돈가스 소스를 찍먹/부먹으로 나눠주더라고요. 또 다친 아이에게 안부를 묻기도 하고, 반찬을 뺏어 먹는 아이를 훈육하기도 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는 단순한 서비스 정신이나 모성애로 퉁쳐서 설명할 수 없는, 매일 밥을 먹이며 쌓아 올린 고도의 ‘돌봄의 기술’이자 자부심이다. 정 작가는 “이들이 학생들에게 단순히 밥만 먹여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급식실을 ‘배움과 돌봄의 장’으로 재구성하며 고된 노동을 긍정적인 의미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보이지 않는 노동에 새로운 이름 부여하기</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근 학교급식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인력 배치 기준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지만, 정 작가는 “법 제정이 끝이 아니라 실효성 있는 인력 확충 수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책이 제도를 만드는 정치인과 교육 행정가들, 그리고 같은 학교 건물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진짜 노동을 잘 모르는 영양사와 교직원들에게 닿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서로의 전문성을 인정할 때 불필요한 갈등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줌마가 아니라 전문 노동자입니다.” 정다정 작가가 뜨거운 조리실에서 길어 올린 이 선언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가사 노동’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값을 매기고 지워버렸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빼앗긴 이름을 되찾아주는 첫걸음일 것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14 09:28: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43551548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43551548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일본인 우선’, 배외주의적 정책 확산하는 일본]]></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는 다카이치 정권하에 ‘외국인 정책’이라는 이름의 배외주의적 정책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추진되고 있다. 그에 맞서, 이주민과 연대하는 시민들이 “혐오에 NO! 캠페인”을 벌이는 중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배외주의적 정책에서 대표적으로, 출입국관리법안의 내각 결의안에 ‘체류심사 수수료 인상’이 포함되었다. 이는 외국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 저널리스트 시미즈 사츠키 씨가 이 법안에 반대하며 중의원회관에서 열린 집회를 보고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이바라키현에서는 ‘불법취로자’ 신고제도가 만들어졌다. 이 제도의 문제점에 관해 요코타 요시히로 ‘이바라키 비영리센터 커몬즈’ 대표가 기고한다. [편집자 주]</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바탕;">①시미즈 사츠키(清水さつき) -‘체류심사 수수료’ 10배 인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 3월 10일, 체류심사 수수료 인상 등이 담긴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이 내각에서 결의되었습니다. 현행법에서는 수수료 상한액이 1만엔(약 9만4천원)이지만, 개정안에서는 체류자격 변경이나 체류기간 갱신 시 10만엔(약 94만원), 영주허가 신청은 무려 30만엔(약 283만원)으로 대폭 인상되었습니다.(내년 3월 31일까지 시행예고 기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내각 결정에 대해 반대하는 집회가 4월 1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는데, ‘이주민과 연대하는 전국네트워크’가 주최하고, ‘혐오에 NO! 전국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자리입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20105220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1일, ‘체류심사 수수료’를 열 배 이상 대폭 인상한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국회의원회관 내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날 발언한 외국인 당사자 루(陸) 씨는 중국 출신의 대학생으로, ‘체류자격 갱신 절차는 일본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데, 이렇게까지 부담을 줄 수 있냐’고 호소하였다. (페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스즈키 에리코 ‘이주민과 연대하는 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정부는 작년 11월에 외국인 수용, 질서 있는 공생사회 실현에 관한 유관 각료회의를 설치, 올해 1월에 종합대책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영주자격과 ‘귀화’ 심사의 엄격화, 체류심사 수수료 인상, 생활보호의 ‘적정화’라고 표현된 생활보호 재검토 등이 담겨, 외국인의 권리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었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변호사인 스즈키 마사코 씨도 “수수료 인상 폭이 지나치게 크고 급작스러운 데다가, ‘외국인 수용환경 정비 등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모호하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의 다수가 노동 제한에 걸려 소득이 적기 때문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은 자명하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사코 씨는 또한 “의사 표명을 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겨냥한 시책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하며 “이제 배외주의적 시책의 대상이 미등록 체류자에서 등록 체류자로까지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덧붙였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바탕;">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싱글맘 등 당사자들 불안 호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두 명의 외국인 당사자도 발언하였습니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9년째 살고 있는 대학생 루(陸) 씨는 “많은 유학생과 ‘가족체류’ 자격의 학생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라며, “이번 체류자격 갱신 수수료 인상은 학업뿐 아니라 건강의 측면, 장래 커리어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루 씨는 또한 “체류자격 갱신 절차는 일본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현재 일본은 많은 분야에서 인력 부족 문제가 있고, 외국인 인재의 존재는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외국인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것은 사회의 큰 손실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종을 울렸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20129491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일본에서 산 지 26년차인 라오스 출신의 마오 씨도 아이 다섯을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1인당 수백만 원에 달하는 체류심사 수수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페민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일본에서 산 지 26년차가 된 라오스 출신의 마오 씨도 집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다섯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인 마오 씨는 “아이 셋은 영주 허가를 받았지만, 나머지 둘은 올가을에 영주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두 명이 신청하려면 60만엔(약 565만원).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오 씨는 이어 “정주 자격을 가지면 희망하는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높아지니, 영주 자격은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같은 가족이 있다는 것을 (일본 사회가) 알기를 바란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민과 연대하는 전국네트워크’는 내각 결의 직후에 법안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성명에서는 ‘공생사회’ 실현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은 외국 국적자뿐 아니라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점, 체류자격 수수료 인상에 따라 증가하는 수입 상당액이 외국인 수용과 관련되지 않은 시책에 이용된다는 보도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글-시미즈 사츠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 font-family: 바탕;">➁요코타 요시히로(横田能洋) -이바라키현이 시작하는 ‘불법취업 신고제’</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 이바라키현은 2025년도 사업으로 ‘불법취업’ 근절에 관한 조례를 만들고, ‘비공식 취업’에 대해 시민의 ‘신고’를 독려하고, 이것이 검거로 이어질 경우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신고 대상은 고용주라고 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외국 국적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권단체들의 비판도 쇄도하고 있습니다. 우려의 대부분은 외국 국적자의 배척와 편견의 확산, ‘감시사회화’에 관한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이바라키 비영리센터 커몬즈’를 통해 이바라키현에서 외국 국적 주민의 교육과 복지에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동향의 배경을 소개하고자 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008000; font-family: 바탕;">미등록 취업 왜 생기나? 필요한 건 단속이 아니라 상담과 지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바라키는 전국 유수의 농업지대로, 농업 분야에 많은 기능실습생(한국의 산업연수생과 유사)이 일하고 있으며, ‘불법취업’ 검거 건수도 전국에서 가장 높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현이 단속 강화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농업 기능실습생이 많다는 것이 왜 ‘미등록 노동자의 비공식 취업’으로 이어지는가.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진짜 문제는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① 기능실습제도 자체가 전직(작업장 이동)이 불가능하고, 직장의 문제에 대한 상담체계도 약하기 때문에 실습생의 실종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② 일본 사회에서 ‘실종자’가 상담할 수 있는 안전한 창구가 적고, 체류기한이 지난 사람이 ‘미등록 체류’가 되기 쉬운 점.</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③ 수확 시기 등 농가는 인력이 절실히 필요하고 미등록인 사람이라도 고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로 이러한 상황의 개선 없이 단속만을 강화한다 한들, 지자체가 기대했던 효과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기능실습생으로서 일본에 온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도, 인력 부족 상태의 일본의 농가에게도 곤란할 뿐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려움에 처한 농가 실습생이 상담을 받을 곳이 별로 없는 상황을 고려해, 우리 모임에서는 안심상담창구를 개설하도록 현에 제안했습니다. 실습생의 노동 문제가 해소되면, 실종자를 줄일 수 있습니다. 실종자를 상담하고, 체류기한이 끝나기 전에 이직 등의 고용 절차를 지원하면 ‘미등록 체류’도 ‘불법취업’도 줄일 수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 정부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외국인에 대한 단속 강화”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외국 국적의 모든 주민들에 대해 출입국제도가 급격하게 엄격해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자영업자로서 가게를 경영하고 있는데, 자본금을 3년 이내에 6배로 늘리지 못하면 국외로 나가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체류자격이 ‘가족체류’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아이만 수업료가 무상이 아니라든지, 장학금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인 우선’이라는 풍조에 떠밀린 정책을 국가가 추진하는 가운데, 현까지 외국인 단속 강화 조례를 내놓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외국 국적자 전체의 불안을 초래하고 있으며,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불안을 줄이면서, 눈으로 보기에도 명백하게 ‘배척’이라고 보이는 문제와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배외주의적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시민들이 함께 인식하고 개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요코타 요시히로)</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혐오에 NO! 전국 캠페인] 다카이치 수상부터 혐오표현에 반대 표하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혐오에 NO! 전국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일본 정부와 국회를 향해, ‘이주민과 연대하는 전국네트워크’를 비롯해 11개 단체들이 주요하게 네 가지 사항을 요구하며 서명운동에 들어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수상 본인부터 혐오표현에 대한 반대를 표명할 것”,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 것”, “일본이 체결한 국제인권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에 사는 외국인의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제도를 만들 것”, “외국인 노동자에게 차별 없이 노동법을 적용할 것” 등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혐오에 NO! 전국 캠페인’ 측은 6월 18일 유엔 ‘국제 혐오표현 반대의 날’에 정부와 국회에 서명과 요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각 지역에서 공동행동과 집회, 가두서명 활동 등을 진행하고 6월 21일에 정리 집회를 예정하고 있다.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12 15:59: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시미즈 사츠키, 요코타 요시히로)]]></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20404188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20404188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예술의 이름으로 가려진 참상…‘아트워싱’을 거부한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6월 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앞 신축 별관에서 ‘퐁피두센터 한화’가 공식 개관했다. 프랑스 국립미술관 퐁피두센터의 서울 분관으로, 서울의 새로운 문화예술 랜드마크를 표방하며 화려한 막을 올렸지만, 그 앞은 거센 규탄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14845246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6월 4일 개관한 서울 ‘퐁피두센터 한화’ 앞에서 미술관 개관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문화예술 종사자들과 평화활동가들이 펼치는 국제행동주간 〈철회하라, 한화!(Abandon Hanwha)〉의 서울행동이다. (공동 주최: 팔레스타인문화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 긴급행동, 모자이크, QK48,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우주군사화와 로켓발사를 반대하는 사람들, 우프 W/OF., 검열에 반대하는 예술인연대, 동네방네 기후정의, 데이미언 허스트에게 살해당한 동물들을 생각하는 모임) ⓒ홍지영(우프 W/O F.)</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날 오전 10시, 퐁피두센터 한화 출입구 앞에 100여 명의 문화예술 종사자들과 평화활동가들이 모여 미술관 개관을 반대하는 기자회견 및 보이콧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들은 한화 기업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무기 생산과 수출에 공조하고 있음을 고발하며, 거대 기업이 예술의 뒤에 숨어 자사의 비윤리적 행보를 세탁하는 ‘아트워싱’(Artwashing)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피 묻은 자본과 ‘아트워싱’(Artwash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자회견에 참여한 이들이 가장 문제 삼는 지점은 “퐁피두센터 한화를 건립하고 운영하는 자본의 출처”이다. 한화문화재단은 미술관 공사 착공 첫해인 2024년에만 한화 계열사들로부터 45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지원받았고, 재단의 주요 후원사는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그룹 계열의 항공우주 및 방산기업)와 한화시스템(한화그룹 계열의 방산 및 ICT기업)로 알려져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는 이 기업들이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군수기업인 엘빗 시스템즈(Elbit Systems), 엘타 시스템즈(ELTA Systems), 이스라엘항공우주산업(IAI) 등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집회 참석자들은 “이들 기업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민간인 집단학살에 사용되는 드론, 포, 군수 장비, 전자전 시스템 등을 이스라엘군에 제공하며 반인도적 범죄에 공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자지구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 중인 팔레스타인 예술가 칼레드 자라다(Khaled Jarada)는 발언문(대독)을 통해 “인간을 숫자와 통계로 환원하고 70년이 넘게 지속된 인종청소와 집단학살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했다”고 밝히며, “문화예술은 범죄를 가리는 베일이 아니며, 죽음과 파괴에 동조하는 기관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도구가 아니다”라고 강력히 규탄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14947503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퐁피두센터 한화 앞에 놓인 팔레스타인 국기 모습 ⓒ홍지영(우프 W/O F.)</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아트워싱과 예술 검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보이콧은 특정 기업에 대한 비판을 넘어, 동시대 예술과 자본권력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은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정치적, 경제적 현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환상’이 기업의 아트워싱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검열에 반대하는 예술인 연대’ 정은영 작가(2018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는 “문화예술을 앞세워 부정부패의 역사를 세탁하는 행위인 ‘아트워싱’ 또한 ‘예술검열’처럼 누군가의 정치적, 자본적 이득을 위해 폭력의 실상을 가리는 파렴치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한 민족이, 한 문명이 무차별적인 공격과 살상, 파괴와 절멸에 무참히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예술계 종사자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결코 눈 감을 만한 일이 아니리라 믿는다”고 목소리 높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은영 작가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이스라엘의 학살을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가 자국 정부의 검열을 받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가브리엘 골리아스 작가의 사례도 언급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남아프리카공화국관 작가로 낙점된 가브리엘 골리아스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학살된 이들을 애도하는 작업을 포함했다는 이유로 자국 정부로부터 전시를 금지당했다. 골리아스는 예술검열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한 예술 후원단체의 도움으로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는 장소 인근의 성당에서 결국엔 계획한 작업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이 검열과 통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예술가 가브리엘 골리아스와 그의 작품이 결코 삭제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이 사례는 집단학살 공모자임에 더해 문화학살의 가해자임을 스스로 자백한 꼴이 된 한 국가의 정치적, 문화적, 윤리적 파탄을 더욱 선명하게 비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해외 문화예술인들도 강력한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 개막일에 이스라엘 국가관 보이콧과 대규모 문화 파업을 조직했던 ‘대량학살반대예술연맹’(Art Not Genocide Alliance, ANGA)은 연대 발언을 통해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노동의 조건 위를 고상하게 떠다니는 존재’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문화예술 노동자’로 정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캐나다 최고 권위의 길러상(Giller Prize)을 후원하던 스코샤뱅크(이스라엘 엘빗 시스템의 최대 해외 투자자)를 압박해, 결국 은행 측이 엘빗 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게 만든 성공적인 투쟁 사례”를 공유하며, 예술가들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감시와 압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노동자 희생과 생태계 파괴도 도마 위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화의 방산 및 우주 산업 확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환경파괴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퐁피두센터 한화 개관일 사흘 전인 6월 1일, 대전시 유성구에 위치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전사업장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해 5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김은실 ‘동네방네 기후정의’ 활동가는 2018년과 2019년에도 동일 사업장에서 폭발사고로 총 8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김은실 활동가는 “기업이 안전보다 생산과 이윤을 우선시해 온 것은 아닌지 묻게 만든다”며, “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방산공장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문제가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제주도 중산간 지하수자원특별관리구역에 한화시스템의 우주센터가 건설되면서 제주의 해양생태계와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는 점도 고발되었다. 최성희 ‘우주군사화와 로켓발사를 반대하는 사람들’ 활동가는 “한화의 우주산업 본질이 군대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전쟁 산업’”이라고 꼬집으며, “군산복합체의 생명수 고갈 및 오염 문제”를 규탄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대 간 기후범죄 재판소’(CICC) 공동설립자인 라다 드수자와 요나스 스탈 또한 대독을 통해 “한화의 사업은 대규모 군수산업과 중공업 분야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막대한 탄소배출과 생태계 파괴와도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단학살과 생태학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이는 우리의 프로젝트 〈세대 간 기후범죄 재판소: 멸종 전쟁〉(Court for Intergenerational Climate Crimes: Extinction Wars)의 핵심 주제이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들이 저지른 기후범죄에 관한 일련의 공개 청문회와 대규모 전시로 구성되었으며, 2023년 광주비엔날레 네덜란드관의 출품 작으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발표된 바 있다. 우리는 한국 전역의 평화·기후정의 활동가들과 협력해 이 프로젝트와 공개 청문회를 기획했고, 한화그룹은 그 청문회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피고들 중 하나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115012543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기자회견 참여자들이 미술관 개관에 대항하는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홍지영(우프 W/O F.)</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프랑스 파리에서도 보이콧 집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퐁피두센터 한화 개관 반대 운동은 국제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6월 4일 오후 4시 발표된 〈집단학살 아트워싱에 반대한다〉 공동 성명에는 1,400여 명이 서명했다. 역대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들과 여러 중견 작가들은 물론, 해외 유수 예술 플랫폼들이 이름을 올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술관 본관이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도 비판의 불길이 거세다. 프랑스 현지 시각 6월 4일 오후 6시 30분, 파리 퐁피두센터 인근 스트라빈스키 광장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프랑스 예술단체들과 퐁피두센터 노동조합이 함께 퐁피두센터와 한화문화재단의 파트너십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 배우 아델 에넬,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 작가 알리 체리 등 세계적인 석학과 예술가들 역시 퐁피두센터 측에 한화와의 협력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에 동참했다. 프랑스 주요 언론 리베라시옹(Liberation) 등도 이 사태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기자회견은 ‘죽음과 착취 위에서 세워진 화이트큐브를 거부하겠다’는 예술가들의 뼈아픈 자성이자, 자본권력에 대한 저항의 선언이었다. 계원예술대학교 학생 모이 씨는 “집단학살로 벌어들인 더러운 자본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하며, 예술대학생들에게 이런 미술관이 교육의 장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은 다이인(Die-in) 퍼포먼스와 함께 “이스라엘 무기산업과의 학살 협력을 즉각 철회할 것", “전쟁 이익으로 세운 ‘퐁피두센터 한화’를 철회할 것", “집단학살과 자원 약탈, 환경 파괴를 은폐하는 아트워싱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퐁피두센터 한화는 개관과 동시에 “예술은 과연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받게 되었다. 서명에 참여한 글로벌 문화예술계 종사자들, 그리고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은 한화가 이스라엘과의 거래 계약을 해제할 때까지 보이콧 캠페인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11 09:47: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평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평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154229868.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1154229868.jpg]]></image>
     </item>

     <item>
       <title><![CDATA[“낯선 사람 조심해”]]></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낯선 사람 조심해.”</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공익광고에서도 어린이와 여성에게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안전 교육은 늘 비슷했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 것, 친절을 쉽게 믿지 말 것, 위험해 보이면 피할 것. 위험은 바깥에 있고, 안전은 스스로를 잘 방어하는 데 있다는 메시지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나는 점점 궁금해졌다. 정말 그렇게 경계하는 것이 성폭력의 피해를 막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우리를 안전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이길래, 왜 안전을 개인의 경계 능력에 맡기게 되었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사회의 성폭력 통계를 보면, 많은 경우 가해자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다. 친구, 선배, 연인, 가족, 직장 동료처럼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가까운 관계 안에서 발생한 성범죄에서 피해자는 더 오래 침묵하고, 더 많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신고를 망설인다. 그럼에도 사회는 여전히 어린이와 여성에게 “조심했어야지”라는 메시지를 반복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92814233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최근 일본 여행 중에 성희롱, 성추행을 겪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도 그 충격의 여파가 남아 있다. 이 사진은 비 오는 날 먹구름 끼어 어두운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걸 보고 찍은 장면이다.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최근 일본 여행 중 성희롱과 성추행을 겪었다. 언어교환과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플랫폼을 통해 사람을 만났고, 나는 그것이 비교적 안전한 방식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주변 친구들 중에는 그런 플랫폼을 통해 오래 이어지는 우정을 만든 경우도 있었다. 나 역시 SNS를 통해 관심사를 나누며 관계를 이어온 사람들이 많은데,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처음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관심사와 한일의 문화에 대해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대는 나에게 성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통로가 언어교환 플랫폼이었기 때문에 나는 더 당황했다. 이후에는 상대가 그런 상황에서 불편해하고 당황하는 내 반응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성폭력을 겪고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공포와 모욕감만이 아니었다. “내가 낯선 사람을 믿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건가?”라는 자책이었다. 왜 그런 자리에 나갔는지, 왜 친절을 경계하지 못했는지, 왜 조금 더 의심하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계속 검열하게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이켜보면 나는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여행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비슷한 경험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었을 때 처음 그런 일을 겪었다. 그래서 더 쉽게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나’라는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가해자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심문하게 된다. “왜 만났어?”, “왜 그때 바로 도망가지 못했어?” 사회는 가해자의 행동보다 피해자의 선택을 더 세세하게 들여다본다. 그렇게 안전은 어느새 개인의 책임이 된다. 피해를 막지 못한 사람은 충분히 조심하지 못한 사람처럼 여겨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1366(여성긴급전화) 상담을 받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타인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상대의 가해 행위였다. 누군가를 신뢰하고 대화를 나누고 문화를 교류하고 새로운 관계를 기대하는 일은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쉽게 피해자의 선택과 판단을 검열한다. 결국 피해자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가게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92845161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늘 타인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위험을 예측하며 살아남고자 하면, 개인은 점점 더 고립된다. 사진은 이번 일본 여행 중에 한 비건 식당에서 만난 독일인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다이어리를 교환해서 적은 내용이다.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물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경계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안전’ 담론이 지나치게 개인의 방어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는 약자에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타인을 경계하고, 위험을 예측하며 살아남으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아가는 삶은 사람을 고립시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살아오며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경험도 많이 있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잃었을 때 친절하게 안내해준 사람, 비건 식당에서 만난 옆자리 여행자와 각자의 이야기를 나눈 경험, 우울에 대한 글쓰기를 함께하며 서로의 마음을 들어주던 사람들, 처음 만난 어린이와 함께 스티커를 붙이며 웃었던 순간들. 우리는 낯선 존재들의 친절과 환대 속에서 살아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만약 “낯선 사람은 위험하다”는 말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환대도, 기회도, 모험도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고, 새로운 관계를 시도하지 못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는 사회. 그것이 안전한 사회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애인 이동권 운동에서 종종 말하듯,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장애인 개인의 몸/장애가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설계다. 안전 역시 마찬가지다. 안전은 개인이 얼마나 완벽하게 경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문화와 구조,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분위기, 신고 이후에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9291656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일본 여행 중에 찍은 사진. “연결이 있는 사회로”라고 적혀 있다. [사진-이은선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나는 아직도 이번 여행의 기억 때문에 몸이 갑자기 얼어붙는 순간이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이전처럼 편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신뢰하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잃고 싶지는 않다. 서로에게 안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 낯선 사람의 친절을 두려움으로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 역시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환대와 다정함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글은 “낯선 사람도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는 성폭력 피해 경험 이후 자기 자신을 먼저 의심하게 되는지, 왜 안전의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타인과 연결되려는 마음마저 죄책감이 되어버리는지, 안전한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 생각해보길 바라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935ba;">[필자 소개] 이은선</span>. 고등학생 시기 학칙 개정과 학생인권조례 제정 활동을 하며 청소년 인권 운동을 만났다. 청소년이 학교와 사회에서 그저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순간에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시민이 될 수 있기를 고민하며 활동해 왔다. 현재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노키즈존 한국 사회』 등을 공저했고 청소년의 경험과 권리, 젠더화된 규범에 대해 글을 써왔다. 주변 존재들에 물들고, 물들이는 것을 좋아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9 10:26: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은선)]]></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93149135.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93149135.jpg]]></image>
     </item>

     <item>
       <title><![CDATA[Missing Some Things in the Place that I Left]]></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366ff; 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membering the Country of Forever Spr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 one year trip around the world. That was my plan when I left South Korea in the spring of 2008. However, when I actually returned in 2014, in those six years I had visited less than six countr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efore leaving South Korea, I used to work as an editor at a publishing company, and now that I have returned, I also work as an editor. In this past entire year in South Korea, I have not only been struggling to catch up on everything that has changed in the last six years when I was not here, but I’m also struggling to accept everything that is still the same, even though six years have passed.</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5084494.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On the way back home from the Café La Luna when I was living in Xela, Guatemala.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As I look back, when I was outside of this country, I realize that I very badly missed some things in South Korea. But now I do miss some things from the place that I left. Recently, someone told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worst thing is to miss somewhere else while living he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is person, now in her late forties, was born in South Korea, spent her teens and twenties in Argentina, and came back to South Korea in her thirties. She said that it took her five years to re-adapt herself to South Korea. At the early stages of when she had returned to South Korea, she wanted to go back to Argentina. She tried to find a way to do so but unfortunately it was not possible, so she eventually decided to settle down in South Korea. This was five years after from when she had come back.</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yway, South Korea was a good place to live,” she finally stated.</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ondered when I would be able to say those word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Xela Greeted Me with a Story Prepared Especially for My Fut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e year after I left, I stayed at a village bordering a huge lake, in Atitlan, Guatemala. One fellow traveler, from Belgium, looked like a typical hippie who seemed to simply be on a short excursion with just a light backpack. Nevertheless, when opened, his backpack exploded like magic with a number of items like portable pots, a burner, a bag of flour, a rolled mat, etc. Every day, he ate Indian Chapati bread that he made by himself, and each time he made the bread he joyously shouted “Chapati! Chapati!” I was surprised to find out that he had been traveling for eight years and I asked him how could that be possi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easy to travel for eight years. It’s simp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some time passed, I ended up fully understanding that statement, which I had not understood at that moment. A few weeks after my stay at Atitlan, I arrived in Xela, the city that was waiting for me with a story prepared especially for my future. Later, that place became a space that I called home for more than four year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y trip, which started from San Francisco, USA—and felt like a split second—took over one year until I was about to leave North America. It took such a long time not only because of the huge size of the U.S. and Canadian territory but also because of an important factor which I had not counted on when scheduling: the people whom I would meet on the road.</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5335980.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y Neighbors,” foreign friends I met in Xela.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Xela is the second largest city in Guatemala, Central America, but for South Koreans it looks like a very small city. Even though the city’s official name is Quetzaltenango, almost everyone call it Xela, which is the Mayan name of the city before Spanish colonization. As the city is located 2,330 meters above the sea level, its weather is cool, however, one should not expect a Himalayan landscape. The city has a McDonald’s and a Wal-Mart; people in this city enjoy TV dramas just like the people in Mexico or other Spanish language countries; and the majority of the younger generation listens to Techno and hip-hop music via smart phon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n the other side, Guatemala continues its traditional culture which can be seen in two distinctive parts: Mayan culture before and after the Spanish colonization and catholic culture became implanted through the Spanish colonizers. Like other Central and South American countries, Guatemala was a Spanish colony for three hundred years until 1821, so the colonial culture which came across the ocean, implanted itself, and wiped out the Mayan culture which had strongly influenced not only the indigenous people’s collective unconsciousness but also their affective roots for a long ti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any visitors are fascinated by the layouts of the streets in this city where the colonial style of the division of the city copied the configurations of old cities in Europe. So was I. There are dark, winding, and narrow paths like a maze; lights from small shops located at the corners; and a stoned ground not made for cars or humans but for horses passing b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main reason why I ended up staying in Xela for over one month was to take a Spanish language class. That was not only because most of the countries I travelled to were Spanish language countries in Central and South America, but also because I needed to learn Spanish to travel better. As Xela is a place where people use an appropriate speaking pace and have clear pronunciation, there are many foreigners who stay there in order to take Spanish language cours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are many cases in which travelers stayed there for at least two or three weeks, some staying for one more months because they are fascinated by the upbeat atmosphere, and then others even ending up staying for over one year. A number of communities, created by foreigners who left their homes and temporarily stayed there, unofficially and publicly became part of the culture in Xela.</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Community House where Foreigners Live Toge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hina! Chinita!”</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ople in Xela called all Asians Chino or China which means Chinese. Even though I lived there for over four years, this name calling in streets still made me uncomfortable. However, it could considered as acceptable since, in South Korea, people used to shout “American!” unconditionally whenever they saw foreigners who did not look Asian, even nowadays there are still a number of times when people look furtively and point a finger at foreigner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6104160.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One windy morning at the window of where “I used to live”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 atmosphere of the place where I lived in Xela was different from the one outside in the street. It was a sort of humble and rural community house where foreigners lived together, that had eight individual rooms, a spacious front yard, bathroom, etc, that people shar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are various reasons for young people in their twenties or thirties, mostly from North America and Europe, to come to Xela: people come in order to have a long vacation, learn Spanish, or do volunteering work for different kinds of associations; some people come to work or settle down after wandering to many places; others become fascinated by Xela and feel that they can live longer there; and others, still, come to Xela because they could not find jobs in their own countries and settle here because of the low-cost of liv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spent enough time in Xela and Guatemala that I can generalize what I experienced there. However, the time that I spent there is the reason why I feel it difficult to generalize my experiences. That is why I do not want to compare a genuine story that one has to another genuine story such as that of Richard’s, an American in his sixties, who stayed in the house with me for a fairly long time, who had needed to leave his own country, and what he really wanted to attain from Guatemala, because I was deeply part of other people’s stories to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 after coming back from there with a certain outlook and a number of incomparable stories, I still sometimes feel so touched and moved to tears that I cannot answer the questions whenever I am asked about stories from Guatemala.</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ooking Became a Way of Expressing My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is a common expression to call the weather in Guatemala a forever spring. Although the daytime sunshine is strong enough to dry laundry hung out in early morning then folded right after lunch, one does not sweat, unless one runs. Even though at dawn or at night the weather is chilly enough that one should wear a layer of sweaters, there is also no desperate need for heating appliances and no snow. The annual temperature range has no severe gaps and the climate has only two separate seasons in one year: six months of rainy season and six months of dry season. The all-year round cool weather was the other reason that made me stay in Xela longer.</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806458514.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Xela skateboard park with a graffiti of Quetzal, a Mayan bird. ©Luna</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e Native people in Xela were pretty kind to me as a single Asian woman. Because foreigners from English speaking countries or Europe had an easier time communicating with each other, this made me feel comparatively much closer to the Native peop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ue to the fact that it was rare to see Asian people, especially Korean people, whenever I joined a group of foreigners they were unconditionally delighted stating that “our atmosphere is really international!” Interestingly, when I cooked to eat in the communal kitchen, all of my neighbors wanted to taste the food—even if just a fried vegetable—and were eager to find out what kind of healthy food diet an Asian person follow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ther [their expectation] made me feel uncomfortable in the kitchen or not, I didn’t show it because cooking gave me such energy. By handling various types of vegetables bought from the market, I felt like the energy of these items transmitted to my entire body via my hands. In the course of washing, cutting, frying, and mixing them, I was able to not only disperse unnecessary thoughts and meditate silently, but also to gain newly found courage and even come up with new ideas or solutions to problem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enever I cooked something copiously seasoned without measure—gauging only with my senses—then it turned out to be delicious, and I was extremely proud of myself as if I had succeeded a laboratory experiment. Cooking was kind of a way of expressing myself as if I could communicate fully under the condition of language. I told the people in my house that if I mentioned to my family and friends in South Korea that I had cooked here, they wouldn’t believe me. The people laughed at me and said they did not believe what I just told them. <span style="color: #932ed0;">[Translated by Jieun Lee]</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265" target="_blank">http://ildaro.com/7265</a> Published: October 20, 201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8 16:03: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una)]]></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9'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81009345.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81009345.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여성의 섹슈얼리티 착취한 국가폭력의 장소에 가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기도 동두천 소요산 초입에는 낡은 2층짜리 건물이 울타리에 둘러싸인 채 방치되어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이 건물은, 1973년부터 1996년까지 기지촌의 성병관리소로 사용된 장소다.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병 검진 의무를 부과하고, 검진증이 없거나 성병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을 강제로 수용해 치료 명목으로 감금했던 국가폭력의 현장.</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82523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동두천 소요산 초입에 위치한 옛 성병관리소(몽키하우스)의 현재 모습. 2026년 5월 23일 두레방, 역사문제연구소,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공동 주최한 〈동두천 성병관리소×기지촌 빼뻘 답사〉 중에서.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동두천시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단체와 학계, 그리고 국제사회는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한 역사적 장소를 철거해선 안 된다며 반대한다. 비극적인 기억이 망각되지 않도록 하고, 역사를 왜곡하거나 과거의 사실을 부인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도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4년 8월 12일에 발족한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과거 미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유린 현장인 ‘낙검자 수용소’(성병관리소) 건물을 없애버리지 말고 ‘국제인권평화기념관’ 등으로 활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옛 성병관리소의 흔적을 보존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일까? 그 의미를 시민들과 함께 찾아가는 뜻 깊은 답사 프로그램이 지난 5월 23일에 개최됐다. 두레방, 역사문제연구소,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공동 주최한 〈동두천 성병관리소×기지촌 빼뻘 답사〉 현장을 따라가보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기지촌 답사는 “한국사회의 성매매 산업 해체를 지향함”과 동시에 “군사정책, 관광정책, 도시재개발에 의해 성매매 집결지가 없어져 버리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성매매 집결지 ‘소거’ 문법에 페미니즘 언어로 문제의식을 던져보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의 몸’을 외화 획득 수단으로 삼은 ‘국가폭력’의 장소</span></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철거하면 안 될 근대 유산…평화와 인권의 기억공간으로 거듭나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소요산 자락의 옛 성병관리소부터 보산동 일대, 상패동 공동묘지, 턱거리 마을, 빼뻘 마을을 방문했고, 이후 의정부역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간담회를 가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73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된 성병관리소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성병 의무검진, 강제수용, 치료 명목의 감금 등 인권침해가 자행된 공간으로 이른바 ‘낙검자 수용소’ 또는 ‘몽키하우스’로 불렸다. (관련 기사: “국가가 미군 상대 성매매 조장했다” <a href="https://ildaro.com/7136" target="_blank">https://ildaro.com/7136</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지완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는 “이곳은 여성의 몸을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삼았던 국가폭력의 적나라한 증거”라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69년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 감축이 추진되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은 미군 주둔을 유지하기 위해 ‘기지촌 정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며 “‘미군 위안시설’로 지정된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은 주 2회 정기적인 검진을 강요”당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들은 가슴에 명찰이나 보건증을 달고 다녀야 했고, 강제 수용된 여성들은 과다한 페니실린 투여로 인한 약물 쇼크로 사망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이 어디서 성병에 걸렸는지 지목만 하면, 여성들은 경찰의 토벌을 통해 정당한 검사 절차 없이 이곳으로 끌려와야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지완 활동가는 “성병관리소 건물은 한국 정부가 단순히 ‘성매매를 묵인해왔다’는 차원을 넘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수단으로서 동원, 관리하고 착취해왔다는 걸 보여주는 건물”이라는 점도 짚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851808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천막 농성이 634일째 진행되고 있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 건물 뒤편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탐방 날은 농성 634일째였다. 답사단은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의 설명을 들으며 건물을 둘러보았다. 최 위원장에 따르면, 성병관리소의 부지는 약 2,300평으로 건물 자체의 바닥 평수는 약 100평인 2층 건물이다. 내부는 현재 들어갈 수 없지만, 1층에 진료실과 식당, 2층에는 창문에 도주를 막기 위한 쇠창살이 설치된 7개 수용 입원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 방엔 20명씩, 총 140명 수용 가능한 시설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두천시는 소요산 관광지 확대 개발을 이유로 부지를 매입하고 철거를 추진 중이다. 최희신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이 건물을 단순히 헐어버릴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평화/여성 인권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으로 남겨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윤금이 피살 사건: ‘민족주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 인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사단은 동두천시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였던 캠프 케이시 정문 앞, 보산동 일대로 향했다. 기지촌 전성기였던 1960~1980년대, 동두천시 세수의 80%가 보산동 기지촌에서 나왔다고 할만큼 달러와 군사권력이 교차하는 지대였다. 미군을 대상으로 기지촌 경제가 성장하면서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국가는 이들을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 부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지촌 여자’로 낙인찍어 통제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이곳 보산동은 1992년 10월 28일 세상을 경악케 한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 성폭력 살인 사건’(윤금이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된 채 발견된 이 사건은 미군 범죄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주한미군 범죄를 처리하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권회복 운동으로 이어졌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914181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보산동 일대에서 최우영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가 ‘케네스 이병의 윤금이 씨 살해 사건’ (1992)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최우영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는 “시민사회에서 ‘주한미군의 윤금이 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공대위는 재판 때마다 거의 수백에서 천명 가까이 되는 방청객을 조직했고, 매주 수요일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18개월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고, 덕분에 케네스 마클은 구속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이 사건의 공론화 과정은 큰 한계를 지적 받는다. 최 활동가는 “사건이 ‘한국인에 대한 미국의 범죄’나 ‘민족적 자존심’의 문제로만 환원되면서, 정작 기지촌 안에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여성 인권 유린과 성폭력의 현실은 제대로 포착되지 못했다”는 점을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지촌 여성들은 미국인 뿐만 아니라 클럽 주인이라던가 지역 남성으로부터 일상적으로 착취와 폭력을 겪어왔는데, 그런 점에 대해서는 사실 논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살아서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비로소 ‘민족 주권’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최우영 활동가는 ‘윤금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미군 주둔 아래 형성된 기지촌의 구조와 그 속에서 오랫동안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던 여성들의 존재를 어떤 시선으로 복원할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1936315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상패동 공동묘지 장소는 현재 무덤들을 모두 파묘하여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파묘되고 지워진 죽음: 상패동 무연고 묘지와 광암동 턱거리마을</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두천 상패동에 위치했던 공동묘지에는 1960~1970년대에 이곳으로 유입되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기지촌 여성들의 무덤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름 대신 숫자가 적힌 나무토막만이 꽂혀 있던 무덤들은 2020년대 들어 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면서 모두 파묘되어 300km나 떨어진 경주의 추모공원으로 옮겨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유골들은 10년간 보존된 후 완전히 소멸될 예정인데, 지자체에는 무연고 기지촌 여성 묘지에 대한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다. 자본과 개발 논리에 의해 이들의 존재 자체가 완벽히 ‘소거’되고 있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 방문한 광암동 턱거리마을(캠프 호비 앞)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묘비가 하나 있었다. 1971년에 사망한 ‘순자 레이놀즈(Soon Ja Reynolds)’의 묘다. 묘비엔 “순자 레이놀즈. 내 사랑 평화롭게 쉬기를. 당신을 영원히 생각하고 있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있다오”라고 쓰여 있었다 한다. 탐방단은 미군 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박순자의 묘’ 옆에 꽃을 헌화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2009123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턱거리마을에 위치한 ‘박순자의 묘’는 미군 부대를 바라보고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br />의정부 빼뻘마을과 ‘언니들’의 쉼터 두레방</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사의 마지막 현장은 의정부 고산동의 ‘빼뻘마을’이었다. 캠프 스탠리 주변에 형성된 이곳은 배나무가 많아 ‘빼뻘’이기도 했지만,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 번 발을 들이면 빼도 박도 못한다”는 자조 섞인 이름으로 불렸다. (참고 기사: ‘기지촌엔 도깨비가 산다’ 어떤 죽음들의 이야기 <a href="https://ildaro.com/9277" target="_blank">https://ildaro.com/9277</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과거 외부와 단절되다시피 했던 이 마을의 여성들을 위해 1986년 문혜림이 설립한 공동체가 바로 ‘두레방’(My Sister's Place)이다. 2022년 세상을 떠나 지금은 고인이 된 문혜림 활동가는 헤리엇 페이 핀치벡이라는 본명을 가진 미국인으로, ‘나라도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생각으로 기지촌 여성들이 쉴 수 있는 피난처, 두레방을 만들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빼뻘마을 답사는 전 두레방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과거 성병 검진이 이루어지던 보건소 건물을 임대해 평화와 치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사용했었다. 이 건물은 전국에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기지촌 성병 보건소다. 하지만 최근 의정부시는 ‘새뜰마을사업’이라는 도시재생 명목 하에 두레방 측에 퇴거를 통보했고, 두레방은 공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202970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 ‘두레방’이 상담소 및 쉼터 공간으로 사용했던, 의정부의 옛 기지촌 성병 보건소 건물은 ‘노후건축물의 안전성 검토를 위한 정밀안전진단 진행 중’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채 방치되어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정강실 두레방 활동가는 기지촌 여성들과 함께 해 온 활동경험을 공유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레방은 1980년대 당시 유기농 당근과 우리밀로 빵을 만들어 판매하는 자활 사업을 운영했고, 방치된 혼혈아동들을 위한 놀이방과 공부방을 열어 아이들을 돌보았다. 또한 약물 중독과 폭력에 시달리다 하루 한 끼조차 챙겨 먹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매일 안부를 묻고 공동 식사를 제공했다. 식사를 통해 매일 안부를 챙기는 방식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게 기지촌 여성과 연대자들의 역사적 장소 또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두레방 언니들’은 “이 공간이 후대가 알아야 하는 역사이자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하는 역사”라며 공간의 보존을 원하고 있다고, 두레방 활동가들은 전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역사와 증거와 책임이 사라지는 ‘소거’에 맞선 기억운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사를 마친 후 진행된 간담회에서는 이룸, 두레방, 역사문제연구소 활동가들과 참가자들이 모여 지워지는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개입할 것인지 논의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기용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는 청량리와 이태원 등 도시 중심부의 성매매 집결지에서 벌어지는 재개발과 ‘소거’의 과정을 공유했다. 거대한 자본과 재개발 앞에서 팻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려나야 했던 무력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특히 이태원의 경우, 과거 미군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던 기지촌의 역사에서 현재는 트랜스젠더와 소규모 업소 여성들만이 남아있는 상태로, 재개발로 인해 이들마저 계속해서 쫓겨나고 있는 현실이라고 밝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활동가들은 또한 “공간을 여성주의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고 소거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72048323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빼뻘 마을 곳곳은 이미 거의 폐허 상태였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김은진 두레방 원장은 “기지촌 성매매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이주 여성들을 통해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착취의 구조”임을 강조했다. 또한, 2022년 대법원이 기지촌 성매매가 국가 폭력임을 인정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해자를 위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답사단 참여자 한 명은 철거 위기에 놓인 공간들을 보며 “혈연적 유족이 없는 이 여성들을 위해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그들의 유족이 되어 기억운동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은진 원장은 “오늘날 우리는 성매매 산업의 해체를 이야기한다. 이는 분명 중요한 과제이며, 많은 여성주의 운동이 오랫동안 싸워온 영역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해체의 방식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기억”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남겼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재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 집결지와 기지촌은 종종 재개발을 통해 사라진다. 이 과정은 환경개선, 도시발전, 안전한 사회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워지는 것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역사, 국가와 사회가 가한 폭력, 그리고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함께 사라진다. 깨끗하게 정비된 도시 속에서,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7 16:1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평화]]></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평화]]></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722272439.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722272439.jpg]]></image>
     </item>

     <item>
       <title><![CDATA[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을 떠난 성소수자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3년 캐나다에서 결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냥 부부로 살고 싶었다. 우리가 원한 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907136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트 할리우드 프라이드 기간, 퍼레이드에 참여해 거리를 걷고 있는 아콘네 부부.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우리는 그냥 부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막연하게 캐나다 이민을 생각했다.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했고, 우리를 부부로 인정해준 나라이기도 했다. 토론토에는 외가 친척들도 많이 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결혼 사실은 숨겼지만,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낯선 땅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커밍아웃이 두려워 이민 대행사도 쓰지 않고 둘이 직접 이민 신청 서류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해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이민 선발 정원(cap)이 이미 찼다며 서류를 검토도 하지 않은 채 돌려보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미국 이민은 한동안 생각도 못 했었다. 동성혼이 연방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합법화된 게 2015년이었고, 이민 심사가 더 까다롭기로 유명한 나라니까. 그런데 미국 고용주 없이도, 한국에 살면서 부부가 함께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NIW(National Interest Waiver, 국가이익 면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 이민 전문 대행사를 찾아 수속을 밟았다. 처음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해외에서 혼인했지만 한국에서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라고만 말을 돌렸다. 그러다 막판에야 캐나다에서 결혼한 동성 부부라며 혼인증명서를 제출했다. 대행사 측 반응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증빙 서류를 받아줬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낯설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601360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성소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건넸던 교황 프란치스코를 추모하며 조기를 게양한 웨스트 할리우드.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18년 여름,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 인터뷰 날. 깐깐하기로 소문난 한국계 미국인 영사가 우리를 호출했다. 유리판 너머로 학력, 경력, 추천서를 하나씩 확인하던 영사가 서류 사이에서 혼인증명서를 발견했다. 동성 부부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물었다. “Do you have children?”(아이가 있나요?)</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답했다. “No, not yet, but I hope so.”(아직은 없어요. 바라건대 언젠가는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를 부부로 봤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아이 교육을 위해 아내와 아이만 미국에 보내고 자신은 기러기로 남으려는 남편들은 심사에서 보류되기도 한다. 우리는 동성 부부였지만, 함께 이민하는 가족이었다. 30분 넘게 경직돼 있던 몸이 조금 풀렸다. 마지막에 영사가 무언가를 말했는데 긴장한 탓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Congratulations!”(축하합니다!)라고 했을 때야 믿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 국적의 여성 부부로서 동시에 발급받은 미국 영주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의 관계가 제도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국 정부는 캐나다 혼인증명서를 근거로 우리를 부부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고, 결혼한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부부입니다’라는 말이 가벼워지는 곳</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서 미국 영주권을 받은 후, 우리 부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천천히 뿌리내릴 곳을 찾았다. 미국 학교나 회사에 소속되는 조건 없이 영주권을 받았기에, 우리 스스로 정착할 동네를 고를 수 있었다. 그 자유는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었다. 그래서 내가 유학했던 실리콘밸리 근처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사이에서 한 달 살아 보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도시로 손꼽히는 샌디에고도 둘러본 끝에 결국 로스앤젤레스(LA) 카운티에 속하는 웨스트 할리우드에 정착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62511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화사한 꽃들 너머로 무지개 플래그가 채색된 웨스트 할리우드 슈퍼마켓의 일상 풍경.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미국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부부로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공동명의 은행 계좌를 열었다. 집도, 자동차도 함께 소유했다. 매년 부부 합산으로 세금 보고를 하고, 세금 공제도 부부로 받는다. 한국에서 사람들은 우리 관계를 모녀로 보기도 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간다. 미국에 살면서 “우리는 부부입니다”라는 한마디 말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거주지로 선택한 건물에는 입주민 절반 이상이 성소수자다. 아래층과 위층, 옆집에도 퀴어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저 반갑고 편한 이웃이다. 나는 영어도 잘 못하는 한국인이지만, 입주민 투표로 입주자대표회의 이사에 당선됐다. 이사 5명 중 4명이 여성 퀴어이고, 나머지 한 명은 발코니에 프라이드 깃발을 단 앨라이(지지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웨스트 할리우드는 굳이 6월(Pride Month)이 아니어도, 성소수자의 존재가 일상 속에 스며 있는 동네다. 무지개색 횡단보도와 상점 창가의 작은 표식들이 서로의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웨스트 할리우드 전체가 하나의 축제장으로 변한다. 멀리 이동할 필요도 없다. 집 앞 길목에서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는 Ari의 손을 잡고 그저 걷는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Lady Gaga의 〈Born This Way〉(“나는 잘 나가고 있어. 원래 이렇게 태어났으니까”라는 가사가 담긴 이 곡은 퀴어 공동체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가 우리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64430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웨스트 할리우드 도서관의 LGBTQ+ 섹션. 성소수자 관련 도서와 DVD가 공공의 공간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사는 성소수자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에서는 퀴어문화축제 날이면 동성애 혐오 세력이 주변을 둘러싸고 맞불 집회를 열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를 지키는 거룩한 방파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방파제가 없어도, 웨스트 할리우드의 일상은 아무 문제 없이 흘러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직장은 LA 북쪽의 미디어 도시, 버뱅크(Burbank)에 있었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지는 그곳에서, Ari와 나는 한국어 음성과 관련된 인공지능(AI)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면서도, 우리의 작업은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일상의 언어라기보다, 기계가 학습해야 할 언어에 가까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행히 우리의 일상은 미국에서 이어졌다. 동료 중에도 퀴어가 여럿 있었다. 터키나 이란처럼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나라를 떠나 미국에 정착해 결혼했다는 게이 커플도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해 사는 성소수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다. 우리 역시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부부로서 살아가기 위해 모국을 떠나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51704296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퀴어 프라이드 기간을 맞아 성소수자 관련 어린이 동화책들이 진열된 버뱅크(LA 북쪽의 미디어 도시)의 한 서점 풍경. [사진 제공-크리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우리 부부는 웨스트 할리우드의 성소수자 친화적인 성당에 다니지만, 설날에 LA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인 성당에 간 적이 있다. 떡국을 준다는 얘기에 혹해서. 우리 부부가 성당 옆 회합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작은 한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외동포 사회는 생각보다 폐쇄적이었다. 보수적인 종교관을 가진 부모 아래서 자란 성소수자 아이들이 한국만큼이나 힘든 가정생활을 하기도 한다. 한국 천주교회가 말하는 완고한 성가정—남자와 여자,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의 언어는 미국 한인 성당에서도 그대로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국에서 만난 가톨릭 여성 퀴어 모임 ‘알파오메가’ 회원은 LA 남쪽 토런스(Torrance) 지역 한인 성당 청년 모임에서 캘리포니아주의 성소수자 차별 금지 정책을 비난하는 분위기에 실망했다고 했다. 재외동포 사회에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쉬이 들리지 않는다. 한국의 보수 우익 청년들 못지않게, 미국 한인 청년들 중에도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이들이 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고통받는 퀴어 청소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많은 한인 가톨릭 인구 중에 우리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쉽게 멀어지지 않았다. 나이 들어 가시는 부모도, 수십 년이 쌓인 관계들도 거기 있으니까.</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5 19:13: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퀴어]]></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크리스)]]></author>
	   <category><![CDATA[퀴어]]></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518086297.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518086297.jpg]]></image>
     </item>

     <item>
       <title><![CDATA[탄핵 광장 이후 변화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에게]]></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7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3a5bc5; font-family: 바탕;">[연구 소개] 박지하의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706" target="_blank"><span style="color: #3a5bc5;">윤석열 퇴진 광장 참여자 경험 연구-‘취약한’ 정체성들을 드러낸 발언자를 중심으로</span></a>」는 광장의 경험이 다양한 존재들의 정치적 주체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퀴어-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먼저, 탄핵 광장에서 자신의 ‘취약한’ 정체성을 가시화하는 발언자들을 주의 깊게 볼 수 있었던 건, 연구자 자신이 광장에서 긴 시간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집회에서 사회자로, 자원봉사자로 때로는 그냥 참여자로 함께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 사람들 앞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을 연구했지만, 제가 단상에 올라가 발언을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더 발언자들의 용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5546354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남태령 집회에서 사회 보는 박지하 씨의 모습. 탄핵 광장 경험을 토대로 박지하 씨는 논문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706" target="_blank">윤석열 퇴진 광장 참여자 경험 연구-‘취약한’ 정체성들을 드러낸 발언자를 중심으로</a>」를 썼다.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24년 12월 6일, 국회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가장 먼저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히면서 발언한 분이 계셨는데요. 그때 제가 사전마당을 진행하고 있었고, 무대 옆에 있었거든요. 누군가가 여러 사람 앞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을 내가 이렇게 보는구나, 저 사람은 어떻게 이 자리에서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놀라웠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날 이후, 발언자분들이 주어진 짧은 시간에 굉장히 정돈된 말씀들을 구구절절 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 이야기는 발언자들이 가슴 속에 아주 오랫동안 품고 살아왔던 이야기였구나. 언제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만 있다면, 그런 공간만 있다면 터져 나올 이야기였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오랜 시간 고르고 다듬은 말 같았고요. 이 이야기들을 광장 안팎의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억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할까 고민 했던 게 이 논문의 시작이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color: #3a5bc5; 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두 번의 탄핵 광장, 무엇이 달랐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10년도 안 되어 대통령 둘이 탄핵되는 흥미로운 나라에 살고 있는데요. 과거 박근혜 퇴진 집회(2016~2017)를 윤석열 탄핵 광장과 비교했을 때, 촛불의 단일함 대신 이번엔 응원봉의 알록달록 다양한 색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보이기도 하고, 이전보다 무지개 깃발이 많이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박근혜 퇴진 집회에서 여성혐오, 장애비하 발언이 반복되었고요. 두 집회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차이와 변화를 어떻게 느끼셨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논문 인터뷰를 하면서 지난 박근혜 퇴진 집회 때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한 사람이 단 두 명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또 박근혜 퇴진 집회를 주관했던 단체가 투쟁 과정을 기록한 벽돌 두께의 백서 책에 ‘페미존’(Femi Zone, 여성·성소수자·장애인 등 소수자들이 혐오와 성추행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발언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집회 참여자들이 만든 공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누구를 중심으로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지워지고 무시되었던 목소리들을 명확히 남기고 싶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민주주의가 이야기하는 평등한 사회는 정말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광장이라는 시공간에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취약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평등 수칙’(평등한 집회를 위한 규칙)은 박근혜 퇴진 촛불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혐오와 장애비하 발언을 막지 못했죠. 그런데 평등 수칙이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는 기능할 수 있었던 건,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정말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 그야말로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단순히 집회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의지만으로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문제되는 발언이 있다고 해서, 사회자가 마이크를 뺏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그 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그래 저 말은 옳지 않아’라고 생각하고 그런 발언에 호응하지 않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변과 온오프라인 상에서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번 광장에서 느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마 지난 박근혜 퇴진 집회에서의 경험 덕분이겠죠. 우리가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큰 변화를 만들었지만, 대통령 한 사람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엇이 새로워져야 정말로 일상의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냐’를 붙잡고 고민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이번 집회의 특징으로 2030 여성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많이들 이야기하고 저도 매우 공감하는데요. 동시에 과거 중년남성 중심의 문화라고 여겨지는 운동권에 대한 거부― 이를테면 “깃발 내려라”, “조끼 벗어라” 이런 식으로 ‘이 자리에는 다른 정치적인 구호는 함께할 수 없다’는 식의 배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한 시국에서 구분과 배제보다는 힘을 더 크게 모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남태령의 밤을 상징하는 문구인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당시 한 농민이 ‘우리 딸들 수고했다’ 응원하자, 한 퀴어 시민이 자신은 ‘딸이 아니다’라며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설명했고, 이에 농민이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고 경청의 태도를 보인 것이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4929594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윤석열 퇴진 대구집회가 열린 동성로에서, 연구참여자 분이 찍어준 사진. 그이는 지역 언론 뉴스민에 〈결혼일기〉를 연재 중이다.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인터뷰를 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신 걸로 아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가 성격이 엄청 급한데, 사실 약속이 다 잡히고 내려간 게 아니었어요. 무작정 출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산 집회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자신을 밝히고 무대에 섰던 분이 계신데요.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생각하고, 엑스(X)에서 이 분의 입장을 리트윗하신 분께 SNS로 DM을 보내면서 그냥 부산으로 출발했어요. 감사하게도 기다리다 보니 연락이 닿았고 당일 저녁에 바로 약속이 잡혔죠.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연결시켜주신 분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이 인터뷰를 통해 드리고 싶네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지역 집회에서 발언을 해주신 분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데, 일종의 애향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집회가 이루어지는 대구 동성로 일대를 쭉 같이 걸으며 투어를 시켜주신 분도 계시고, 전라도까지 왔으니 무얼 먹어야 한다며 제 식사를 같이 고민해주신 분도 계셨어요. 지역의 발언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 지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여기서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을 만난 것이 좋았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취약성’이라는 것을 보통은 감추거나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광장 참여자들의 발언을 통해 공적 공간에 출현해 자신의 취약성을 나타내는 것이 곧 그들의 취약성을 만드는 구조에 저항하는 일임을 보여주는 논문이었는데요. 논문을 쓰면서 본인도 자신의 어떠한 ‘취약성’을 떠올리거나 그들을 통해 용기를 얻은 부분이 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제의 원인을 약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세상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과도한 요구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데도 ‘법대로 해’부터 ‘불편을 만들지 마라’, ‘방해하지 마라’ 또 ‘세련되게 해라’, ‘친절하게 해라. 그래야 들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렇게 해서 바뀔 일이었으면 이미 세상이 바뀌었겠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이번 광장에서 마치 가슴 속 삼천원(‘누구나 가슴속에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살잖아요’라는 드라마 대사에서 파생된 인터넷 밈. 인생의 씁쓸한 상처 대신, 겨울철 길거리에서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현금 3천원의 소소한 위로를 표현한 말)처럼 항상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말들을 만들고, 부정당한 자신이 여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를 품고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가진 어떤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살려고 또 세상을 바꾸려고 뭔가를 주장하는 일들에 대해서 남들이 모욕한다고 해도, 그것이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그럼에도 당당해지는 것 역시 투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그래야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color: #3a5bc5; font-family: 바탕;">들어줄 사람이 있을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환대는 발언자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을 우리의 몫으로 전환한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는 문장도요. 광장에서 참여자들의 상호작용도 있었지만, 발언자들의 발언 내용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람들을 응집시키는 사회자와의 상호작용도 중요했을 것 같아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 덕분에 가능했다? 하하. 비상계엄이라는 것이 사회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그 시기가 저 개인에게도 굉장히 위기였거든요. 사회에 대한 회의감도 컸고, 그러다 보니 먹고 사는 어려움이 더 크게 느껴졌고, 동시에 활동가로서는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고민이 있었는데요. 그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여성학 대학원에 진학한 상태였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나의 어떤 취약함 같은 것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힘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그 시간을 잘 못 넘어섰을 것 같아요. 눈앞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몰라 혼란스러웠을 것 같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즘을 배우고 익히며, 상황마다 배제되는 사람들이 누군지 살피는 감각도 조금이나마 키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나의 어려움이 제일 큰 어려움이다’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사사로운 일에 상처받기보다 큰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데에도 도움이 많이 됐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탄핵 광장에서 사회를 본 덕분에 발언자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도 영광이고, 광장 참여자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은 기억이고요.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회의감도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변화가 딱 하나의 방법으로 온다고 주장할 수는 없고, ‘내가 맞네, 니가 틀리네’ 싸우는 것보다는 이 바위를 깨기 위해 뭐라도 하는 사람들끼리 때로는 비판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서로 많이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5003639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윤석열 파면 선고가 된 날, 기쁜 마음으로 행진하는 모습.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소수자, 약자들은 그들을 보이지 않도록 억압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운동이잖아요. 그들이 어렵게 자신을 드러내면 곧바로 ‘눈에 띄지 말라’는 얘기를 듣곤 하죠. 논문에서 플래그라든지 뱃지, 굿즈 같은 것들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식이 저항의 증거으로 타인과 연결되게 한다고 했는데, 혹시 평소에 착용하거나 달고 다니는 게 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세월호 추모 리본과 이태원 참사 추모 리본을 받으면 바로 가방에 달고, 굿즈나 스티커 같은 거를 받으면 그냥 바로 붙여버리거든요. 근데 어느새 다 떨어져 있어요. 그래서 밖에 나올 때 트랜스 플래그를 비롯해 그날의 착장을 세심하게 준비하고 나온다는 연구 참여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했는데요. 저의 실명을 드러내며 이렇게 인터뷰를 하며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며 사는 것도 일종의 실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포털에서 〈일다〉 인터뷰 기사에도 악플이 상당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당당한 거. 그게 나를 후퇴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아요. 모두가 그렇게 살라는 얘긴 전혀 아니지만, 저한테는 그게 저를 끌고 가는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윤석열을 끌어내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탄핵 다음을 상상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광장에서 취약한 존재들이 서로의 ‘정치적 자원’이 되어 주고 탄핵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 에너지가 모이기도 했죠. 논문에 나오는 것처럼 일종의 ‘헤테로토피아적’ 시공간이었던 광장이 늘 열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서로가 계속 연결될 수 있을까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저는 지역이 진짜 중요하구나, 내가 손 내밀고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뭔가를 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결심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연결될 수 있는 시도가 필요하겠다 생각했고요. 좀 느리거나 부족한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성찰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이미 있는 사회운동 조직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광장이 끝나고 정권 교체가 되고 나서 정치 효능감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광장이 막 떠들썩하게 있었던 거에 비해서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네 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거든요. 그 중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중간에서 그들을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쩌면 구질구질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해야겠죠.”</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45037839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누가 집회 무대에서 노래방처럼 노래를 하냐며 지인이 온라인 중계를 보다가 캡쳐해서 보내준 사진. (사진 제공-박지하)</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인데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이전 비화 님 인터뷰(관련 기사: 부족해도 실천해보는 거야, “나쁜 비건 페미니스트” <a href="https://ildaro.com/10436" target="_blank">https://ildaro.com/10436</a>)에서 들은 ‘완벽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 아무 시도도 안 하는 것보다 시도를 하는 게 좋다’라는 이야기가 지금의 광장 이후에도 이 변화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라고 봤거든요. 우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게 운동 아닌가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연구참여자 분께서 광장에서의 발언, 내가 한 ‘말’을 통해 더 이상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해주시기도 했어요. 나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낸다는 것은 내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넘은 것이고요. 그 선은 사람마다 다르게 쳐 있겠죠.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높은 선을 넘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각자의 앞에서는 다 엄청 큰 선이잖아요. 그 선을 넘는 사람들을 많이 응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다 보면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생길 거고, 난 여기서 해야겠다 라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는 걸 인터뷰하면서 느꼈고 굉장히 용기가 됐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234cb;">[필자 소개] 비화</span>는 ‘비건 화이팅’을 줄여서 만든 별칭. 페미니스트이고 비건 실천을 하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4 10:4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비화)]]></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454378067.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454378067.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지방선거가 성차별과 ‘남성정치’를 강화할 때]]></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9</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하철역에서 색색깔 옷을 입고 피켓 든 사람들이 외치기 바쁘다. 지방선거다. 정책을 알리기보다 “O번, OOO입니다” 멘트가 반복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정치하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놀랍다.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지방선거에 선거구는 2,335개라 한다. 뽑는 사람 정수는 시·도지사 16명, 구·시·군의 장 227명, 시·도의회의원 804명, 광역의원 비례대표 129명, 구·시·군의회의원 2,650명, 기초의원 비례대표 385명이다. 교육감 16명까지 하면 당선되는 이만 전국에 4,227명이고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14명을 뽑는다. 후보자가 총 7,723명이다.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골목길에서, 공보물에서 포스터를 골똘히 본다. 이들은 어떤 철학, 자원, 욕망을 안고 ‘주민의 대표자’라는 길에 나서고 있을까?</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선거가 성차별을 재생산할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여성단체연합은 5월 18일, 정당공천에서의 성별 불균형 문제를 짚었다. 중앙선관위 후보자 등록자 7,723명 중 여성은 34% 가량이었다. 교호순번제(성별 교대 배치)를 거친 비례대표 후보에서 여성 숫자를 제외하면 처참한 수준에 이른다. 광역의원 지역구 23.7%, 기초의원 지역구 26.3%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광역단체장 후보 중에서는 9.3%, 기초단체장 후보 중에서는 7.2%만 여성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광역단체장 후보 중 여성은 단 한 명씩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치의 남초화, 광역정치의 초남초화, 피라미드 성별 구조는 지방자치의 풀뿌리성을 무색하게 한다. 시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뛰어다니는 전국 수천 명의 사람들, 그들의 움직임을 조직하는 지방자치라는 공공성의 영역이 큰 규모로 성차별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성별 분석은 후보자 성별 퍼센트, 사람의 숫자만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가, 지방자치가 뚜렷하게 남성중심적임을 알 수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420334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2월 13일,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박정현 부여군수 출판기념회 참석을 규탄하는 긴급 집회가 불꽃페미액션 주관으로 열렸다.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번 선거에서 ‘최대격전지’라 불리며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의전화 등 55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5월 18일, 평택을 국회의원 재선거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김용남 후보의 변호사 시절 30여건 성폭력 가해자 변호 이력 가운데 ‘내용상 문제’를 규탄하며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세 전후 남성 6명이 공모하여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을 만취시키고 차례로 성폭력을 저지른 집단 성폭력”, “훈육하는 차원에서 피고인의 성기에 접촉하라고 피해자에게 한 적이 있으나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한 친족 성폭력”, “가출 청소년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성매매를 하도록 성매수남을 모집해 알선하고 수입원으로 삼은 자에 대해서 ‘업으로’ 행한 것은 아니라며 변론한 사건” 모두 경기남부에 소재한 지방법원에서 다툰 사건이거나 그에 대한 항소심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12년 정치를 시작하던 때 법무법인도 문을 열었고, 2024년까지 새누리당, 국민의힘, 개혁신당을 오가며 같은 기간 지역 성폭력, 성매수 사건에 대한 가해자 변론을 ‘심각하게 문제적인 내용’으로 계속했던 사람이 더불어민주당 ‘전략공천’ 주인공이라니. 경기 남부 지역의 10년간 성폭력 피해자, 피해자를 지지하는 시민, 조력자는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남성 정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편, 평택을 조국혁신당 조국 후보는 성폭력 피해자를 온라인상에서 조리돌림했던 가해 남성 시인을 편들었던 이력이 있다. 그에 대해 지난 4월 17일 피해자가 사망한 후, 고인에게 사과와 조의를 표하라는 요구가 무수히 많았는데도 어떤 존중 어린 입장표명도 없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국혁신당은 조국이 당선되면 조국혁신당 소속 국회의원 12명이 평택을 지역 읍·면·동 민생 현안을 나눠 담당하겠다는 초유의 약속을 제시했다. 당대표라는 위계로 지역을 특권화하면서 동시에 대상화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방에서 시작하는 선거와 민주주의에서 성차별이 되려 재생산되지 않으려면, 어떤 기준과 제도, 권력 구조의 전환이 필요할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448765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14일, 서울시청 앞에서 55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2026 지방선거 서울시민행동’이 기자회견을 통해 출범을 알리고, 서울시정 전환을 위한 8개 분야 공약을 제안하였다. (사진 출처-정보공개센터)</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인권’이라는 민생을 ‘선거’가 가로막을 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하철역에 늘어선 지방선거 운동원들을 보면서 드는 두 번째 생각은 이번 지방선거가 무척 분절적이라는 느낌이다. 나는 우리 지역 의제를 주로 모니터링하고 다루는 활동가는 아니고, 주말에 협동조합 활동에 참여하는 평범한 주민이다. 그래도 세월호 집회가 우리 지역 작은 번화가에서 열리고, 탄핵 집회에 지역주민 깃발을 들고 온 사람들이 있고, 터널을 뚫자는 공약에 갑론을박 반대 토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지방선거는 어떤 가교가 되고 있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윤석열 탄핵, 사회 대개혁을 위한 겨울 광장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의 승리, 시민의 승리로 나라 안팎에서 상찬됐다. 그 후 정치는 클로즈업되는 대통령의 입과 말로 정리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은 온라인 생중계 회의에서 공무원의 무능을 호쾌하게 잡도리하고, 시장에 나와서 털털하게 호떡을 먹고, 오래 살던 집을 팔아 집값을 낮추고 주식시장을 견인하고,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가를 탄압한 이스라엘을 규탄하며 사자후를 날린다.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원하는 사회운동가들은 지금 대통령의 동선을 찾아가 만나고, 대통령을 언급하며 SNS에서 코멘트와 DM를 보내고 있다. 민주주의 효능감이 어느새 스펙터클 대통령 쇼츠가 되어버린 것 같을 때, 이번 지방선거에서 어떤 정책이 의미있게 평가되고 논의되는지 더욱 더 보이지 않는 듯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대통령과 정부, 중앙의회,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연결되어 있는 민주주의 체계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는 중앙 정부, 입법부, 지방정부, 지방의회를 연결 짓고 흐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장벽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체되어 있는 여성폭력 제도개선, 입법 변화를 위해 정부를 찾아가면 “입법부가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고, 국회를 찾아가면 “선거가 끝나야 한다”고 나중에로 지연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힘을 모으고 확인하는 선거는 항상 말하는 ‘사회적 합의’의 장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적 합의는 시도된 적 없이, 선거는 의제와 이슈를 숨기고 배제하는 구조로 뒤바뀌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526775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4년 12월 6일,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여성계 시국선언’ 자리에서. “페미니스트가 요구한다. 윤석열 퇴진하라.” 피켓은 ‘민주주의 구하는 페미-퀴어-네트워크’에서 디자인한 것이다. (촬영-이충열)</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내란척결 세력이 바로 저이고, 우리 당입니다!”라고 반복하는 유세차 연설을 본다. 내력세력 척결은 선거운동 조끼에도 써 있다. 그러나 파란당 남성 후보가 중년 여성 선거운동원들에게 줄 잘 맞추고 피켓 똑바로 들라고 훈계하고 있는 반면, 빨간당 청년 남성 후보가 혼자서 허리 굽혀 성실히 명함을 나눠줄 때, 내란만이 문제인가 싶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래서, 내란청산을 외쳤던 광장의 요구는 사회 대개혁을 함께 외쳤다. 차별금지법과 성평등이 필요하다고 수백 명이 발언하였다. 성소수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으로서 깃발을 휘날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랬던 광장으로부터 대선을 지나 이번 지방선거까지, 성평등과 차별금지법이 어디에서 입막음되었는지 기막힐 노릇이다. 6월 3일 18시가 되면 개표방송이 시작된다. 전국 곳곳이 무슨 색이 되는지, 몇 퍼센트인지 숫자와 점유가 밤새 스펙터클을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선거가 끝나면’ 사회 대개혁이 2,335개 지역 주민들의 힘과 뜻 모아 시작되는 것일까. 광장 시민들은 여전히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남태령의 시민들은 지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얼마 전 개봉한 다큐멘터리 〈남태령〉(김현지 연출)을 보았다. 추운 겨울에 시시각각으로 얼굴이 불긋불긋하다 못해 파래진 2024년 12월 21일 밤과 22일 새벽의 사람들, 이들을 생중계로 보면서 피자와 핫팩을 배달시키는 전국의 사람들, 해외의 시민들이 생생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2255180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BC경남 김현지 PD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남태령〉(The Longest Night: Namtaeryeong 2026) 중에서</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남태령에서는 “O번, OOO입니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저는 OOO인데”로 시작해서, “그래서 OOO를 생각하지 못했다가 OOO를 오늘 배웁니다”로 향해가는 발언만이 가득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기가 누구니 나를 선택하라는 2026년 지방선거 사이에서 나는 누구였지만, 타인과 만나 새로운 인식을 열게 되었다는 ‘경청’과 ‘연대’와 ‘배움’의 남태령이 소환된다. 남태령의 시민들은 혐오 발언을 공약으로 서슴지 않은 무려 서울시 교육감 후보 현수막에 일일이 무지개빛 연대의 현수막을 달고야 만 사람들일 것이다. 넘쳐나는 후보들 사이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성평등 공약을 정리해서 알리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남태령의 시민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선거가 끝나면, 선거가 끝나고, 아니 선거와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을 계속 해나가고 있지 않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9434ca;">[필자 소개] 김혜정</span>. 2004년부터 반성폭력 운동판에서 사람을 배우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성폭력을 알게 된 사람들이 사려깊고 해방된 세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고, 상근활동가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2 11:21: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혜정)]]></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22650630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22650630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From Observer to Neighbor]]></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Vacation, business travel, migrant labor, language study, study abroad, international marriage, immigration—many of us have such experiences of crossing national borders, and there are many immigrants living in our country. Ilda examines the emigrant sensibility we will need in order to live equally and peacefully in the age of globalization. This series is supported by the Korea Press Foundation’s Press Promotion Fund.</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alf of the year in Laos, half of the year in South Korea</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et me think about it—it started in 2007, so now it has been nine years. First, I spent two years volunteering in Laos with the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 From that time until this year, when I am the director of the Energy and Climate Policy Institute’s Laos Renewable Energy Support Center, I’ve been spending half of the year in Lao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3143401.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The author (the woman on the left) in the middle of a renewable energy education project in Laos’ Sainyabuli Province in 2014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Oh, my! You are peeling that mak muang (mango) with the knife facing you!”</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 was 2007, about 2 months after I had been sent to a middle school in the town of Sainyabuli, Laos, as a volunteer worker. That is what the ajhan (Laotian for “professor”; can also be used to address a teacher), who were by then often coming to my house to hang out, make Laotian food, and drink together, exclaimed with surprise and amusement when they first saw me peel a mang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was very surprised too—or rather, I was very surprised, full stop. It wasn’t just because, as the ajhan said, Koreans peel fruit with the knife facing towards their body while Laotians do it with the knife facing away.</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ifferences between South Korea and Lao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ainyabuli, an average Laotian provincial city, was an area little visited by international aid organizations, let alone tourists. In its residents’ eyes, the Korean aid workers who came there to live for two-year periods were terribly interesting and amusing guests. Our appearance—despite also being Asian—and every other aspect of us, from speech to the number of spoons in our house, became a topic of convers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 the ajhan that we were close to, especially those who visited our houses and got a peek at our private lives, talked about us to the other ajhan, students, and neighborhood residents—more often than we talked about ourselves. That made us the target of even more attention. The main topic addressed by these popular, storytelling ajhan were the differences between Korea and Laos, and between Korean people and Laotian people.</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3359838.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Elephants are nearly the only tourist attraction of the Sainyabuli area. This is an elephant’s evening bath, at the Elephant Conservation Center in 2011.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That unlike Laos, which according to various researchers has between 60 and 100 different ethnic groups despite a total population of less than 7 million people, Korea is a single-race [dan-il min-jok] nation (please don’t misunderstand: I’m not using this term in its ethnocentric meaning to emphasize racial purity, but as the best translation of the term Laotians use) despite a population of over 70 million people. That in contrast to Laos, where people of various ethnicities live as neighbors with little problem despite their different languages and religions, Korea is split into two countries, and even had a war, despite being composed of a single ethnicity that speaks a single languag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in 2007, the starting salary for a South Korean civil servant was 30 times higher than that of a Laotian civil servant. That a kilogram of beef in Laos cost 30,000-40,000 kip (3,000-4,000 won [about 3-4 USD], at the exchange rate of that time) while 100 grams of beef in South Korea cost over 10,000 won. That the tuition fees of any of South Korea’s numerous universities were approximately 100 times higher than that of Laos’s only univers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while working hours in Laos are from 8 a.m. to 4 p.m. and include a two-hour lunch, working hours in South Korea are from 9 a.m. to 6 p.m. and allow only one hour for lunch, and also most Korean employees work past 6 p.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at Korean women marry in their mid-20s at the earliest and are often still unmarried in their mid-30s, while Laotian women marry sometime between their mid-teens and mid-20s. That unlike Laotians, who nearly all build and live in a house on their own property (rural people even have fields and paddies, farms and streams, and use rivers and mountains freely as common-pool resources), Koreans don’t (can’t) build their own houses and have to buy or rent them instea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ile talking about these kinds of things with Laotian people, it was common for me to wonder if South Korea was really an advanced, “well-to-do” country, and the provincial Laotians were really people of a “poor” country who needed my help.</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ifferences between Korean and Laotian peop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ut our conversations didn’t start out on such a big-picture level. Having learned and taught others to associate Gga-ol-li (Korea) with North Korea, until the arrival of the South Korean foreign volunteer corps, these teachers in a socialist country were simply curious about how and why North and South Korea were differ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ile looking at the nice things we had brought with us from Korea, they asked us how much each cost, and what our monthly salaries were that we could afford such nice things. Except me, all of the volunteers were unmarried, and so as similarly-single men and women, they were curious about our ages. And they were very interested in how Koreans “form a family” (how Laotians describe marriage) and live their lives.</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401989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Left] Our school’s vice principal and her mother. Older ajhan are especially inspiring, sympathetic, and helpful. [Right] Ketlakhone, the ajhan who, as an English lecturer, taught Laotian language and culture to Korean volunteer workers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I have sometimes used these conversations to explain why Laos must not follow the development path that today’s advanced countries—and especially Korea—have, show that our attitude as aid providers from an advanced country is not one of superiority, and demonstrate the ideal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that we must show as equal partners in development aid. (I still do.)</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However, repeating these clichéd comparisons did become tiring. That’s when I started to look at Laotian people’s lives not from the aid worker perspective that I had been taught but as if I were an anthropologis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observed the Buddhist priests asking for alms every day at dawn, the landlord’s second son reciting Buddhist scriptures every night before bed, how without exception every calendar in Laos included not just the lunar calendar but also Buddhist calendar, and that the Buddhist temple is still a major space for big community events and even has some of the functions of the modern school. I learned how Buddhism plays a central role in Laotian life, at least for its majority ethnicit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learned from experience that because of the semitropical climate, evening and early morning are the best times for activity and one must rest in the shade during midday. The climate is also why, as I learned, “Have you washed?” was a greeting similar to our asking “Have you eaten?”, and saying, “Let’s sleep together” around lunchtime was the same as “Let’s rest togethe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most regions, there is no need to worry about cold weather, and there is no fear of starving to death because wild produce is plentiful 12 months out of the year. In addition,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and their relatives and neighbors are so close that the amount of care, emotion stability, and material support and aid they share with each other makes them similar to a big immediate family in our terms. This culture is contagious and spreads to observers; I think that this feeling Laotian people give is the biggest reason why people who have visited Laos once always come back.</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6/2026060104255231.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A student and teacher of electrical engineering at a vocational/technical school, Ministry of Education employees, and the author (right) look at a broken solar panel installed by the Sainyabuli Province Bureau of Energy and Mining, and consider what to do about it. ©Lee Yeong-ra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Volunteer worker, observer, immigrant wom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same time, as people accustomed to competing to survive, this Laotian culture functions to make the people seem lazy and dependent, and thus incompetent, to us. Also, though it’s nothing like the level of ethnic or religious strife that is a frequent topic for international news, I noticed subtly-expressed discrimination between the ajhan based on ethnicity, hometown, and ra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Like this, I had grown past being a Korean volunteer worker to become someone trying to observe them in a more delicate but still neutral way. But because of the way I held a knife while peeling, I became just an “immigrant wom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t the time, in an effort to defend this Korean habit as a representative of my people, I asked if it wasn’t better to hold it that way so that if something went wrong, it would be me who got hurt and no one else. The ajhan pointed out that there would be no problem if I just faced it away from everyone, laughing at my poor logic and completely dismissing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laughed along like I was ashamed of my poor logic. But actually, I was agitated by the many thoughts flashing through my head. And I was laughing in order to keep from frowni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number of female marriage immigrants to Korea started increasing sharply in the early 2000s. Their way of holding a knife has been widely discussed as a seed of conflict, one of the reasons the women face discrimination from their husbands’ families and wider Korean society.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ar from sympathizing with them, I had barely even understood the countless articles, petitions, and academic papers about immigrant women’s plight—but now I felt it in my bones. Fear of a hidden sense of superiority, about which I had deceived even myself, ran down my spine. So this is who I am!</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that, the volunteer worker who stood back a bit and smilingly pretended to accept everything made few appearances. Though I was a mere “immigrant woman” in the eyes of the Laotians that I had come to help, I started asking questions when something didn’t make sense, and resisted and even fought back when I thought something was wrong.</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d what I’ve worked hardest on is to learn from people in Laos and be like them, as a person who lives here. There has been more touching moments than fights in this process, so I’m happy. This process is still ongoing. <span style="color: #ce30c2;">[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 <a href="http://ildaro.com/7299" target="_blank">http://ildaro.com/7299</a> Published: November 28, 2015</span></p>]]></description>
       <pubDate>2026-06-01 12:01: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Lee Yeong-ran)]]></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571'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106518094.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6/2026060106518094.jpg]]></image>
     </item>

     <item>
       <title><![CDATA[75번의 거부도 소용없다? ‘최협의설’에 갇힌 성적 자기결정권]]></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약 1시간 동안 75차례 넘게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피해자의 음성이 녹음 파일에 고스란히 담겼다. 가해자가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계속 성행위를 시도하자, 피해자는 가해자의 머리채를 잡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1심과 2심 법원은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사실이지만,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최협의설’에 근거한 판결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심 무죄 판결 이후 피해자는 검사에게 대법원 상고를 요청했지만,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며 무죄가 그대로 확정되었다. 우리 형사소송법상 범죄 피해자에게 독립된 상소권이 없기 때문에, 피해자는 결국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법원의 판결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했기에 헌재의 판단을 구하는 절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시민사회는 이번 재판소원이 단순한 판결 뒤집기를 넘어, 대한민국 사법체계가 성폭력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잣대를 바꾸라는 시대적 요청이라고 강조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310730452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5월 13일,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쟁점 토론회〉 현장.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사회를 맡고, 이도경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와 안지희 법무법인 유한 변호사가 발제를, 장임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정인경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홍미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한선희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지난 5월 13일,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쟁점 토론회〉가 열렸다.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가 공동 주최한 자리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객관적 증거에도 유사강간죄 ‘무죄’…위헌적 판결 헌재가 바로잡아야</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도경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재판소원의 발단이 된 형사사건의 무죄 판결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피해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가해자로부터 기습적인 유사 강간 피해를 입었고, 처음 성적 접촉을 시도한 순간부터 가해자와의 대화를 녹음했다. 녹취록엔 약 1시간에 걸쳐 75회 이상 가해자에게 성적 행위를 거부하는 의사 표시가 담겨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이도경 변호사는 “가해자가 ‘(유사강간 전에) 합의된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한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정액 반응 음성)”가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두 사람 간의 공통 지인에게 전화를 해 위험한 상황임을 알린 통화 내역도 있었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1심과 2심 법원은 피해자가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강간죄의 폭행·협박 요건을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이 주된 근거였다. 이 변호사는 “(법원이) 피해자가 (사건) 이전에 거부하지 않은 스킨십이 있었으며, 가해자가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강간 통념’을 판결의 근거로 사용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도경 변호사는 “법원이 시대착오적인 최협의설을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피해자의 거부 의사가 담긴 명백한 증거를 배척함으로써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평등권, 인격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명백히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적 재판을 헌재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가해자의 ‘오인’은 믿고, 피해자의 ‘거부’는 의심한 재판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무죄 판결문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 것은,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한 채 가해자의 주장에 과도한 신뢰를 부여한 재판부의 편향적 태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해자는 사건 당일, 유사강간 전에 이미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국과수 감정 결과(정액 반응 음성)와, 범행 전 피해자가 지인에게 위험을 알린 통화 내용, 더불어 가해자 자신이 한 말의 녹음 음성(‘나 네 것에 들어간 적도 없어’)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그럼에도 법원은 “피고인은 이미 피해자와 성관계를 하였다”고 사실로 인정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한 법원은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가해자가 성행위를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이전에 (피해자가) 자의로 키스를 하였으므로,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을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김홍미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번 재판은 전형적인 “현대적 강간 통념”이 작동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전적인 강간 통념”이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성폭력을 정당화했다면(‘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성폭력 대상이 된다’), “현대적 강간 통념”은 보다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예를 들면 ‘그 상황에서는 남성이 오해할 수 있다’거나 ‘여성이 분명하게 신호를 주지 않았다’는 식이라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러한 강간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의 말과 경험이 무시되는 “증언 부정의”(testimonial injustice)에 대해 김홍 부연구위원은 강력하게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재판부는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반복된 거부 의사를 묵살하는 가해자에 대해 피해자가 느꼈을 분노와 당혹감, 자신의 몸이 침탈당하는 상황의 치 떨리는 모욕감과 치욕스러움에는 단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는다.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몸에서 인격이 분리되어 파열되는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지 못한다. 반면에, 왜 피해자의 반복된 거부가 피고인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수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수월하게 설명하며, 간단하게 판시한다. 피고인의 오인은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되었고, 피해자의 고통과 파열 은 법적 판단의 언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한 채 지워지고 말았다. 이것은 과연 정의롭다 할 수 있는가.”</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310806684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23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피해자가 수십 번 거부했는데도 ‘폭행·협박 최협의설’을 이유로 무죄 판단된 ‘동의없는 성폭력’ 판결에 대한 재판소원 진행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시대착오적 ‘최협의설’, 국제사회는 이미 폐기 중</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강간죄와 유사강간죄를 판단할 때,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 ‘최협의설’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임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이 법리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여성의 ‘정조권’으로 보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정조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했는지를 심판대에 올리는 과거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1995년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변경되었음에도, 여전히 법원이 과거의 낡은 잣대로 피해자의 저항 수준을 평가하며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임다혜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2023년 전원합의체 판결(2018도13877)을 통해, 정조권이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형법 제32장의 보호법익이 변경된 점에 비추어 ‘강제추행죄’의 경우 최협의설이 폐기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의 신체에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해악을 고지하는 것만으로도 강제추행죄를 적용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아, ‘항거 곤란’을 요구하던 기존 판례를 바꾼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여러 하급심 법원에서는 강간죄와 유사강간죄에 대해서도 최협의설을 폐기한 법리를 적용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다른 법원들은 피해자의 ‘거부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를 범죄로 인정하고 있는데, 유독 이 사건 재판부가 과거의 최협의설을 고집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이도경 변호사는 “명백한 ‘평등권 침해’”라고 지적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국제적 흐름 역시 ‘동의’ 여부를 강간죄/유사강간죄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삼고 있다. 안지희 법무법인 유한 변호사는 해외 사례를 소개했다. 독일은 2011년 이스탄불 협약에 따라 ‘다른 사람의 분명한 의지에 반하여’ 이루어진 성적 침해를 처벌하도록 강간죄 규정을 개정했고, 최협의설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일본조차 2023년 동의하지 않는 의사를 표명하기 곤란한 상태까지 포함하는 ‘부(不)동의 성교죄’로 법을 개정했다.(관련 기사: 한국보다 앞서 강간죄 개정한 일본…‘비동의 성교죄’ 들여다보기 <a href="https://ildaro.com/9727" target="_blank">https://ildaro.com/9727</a>)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또한 한국 정부에 폭행·협박 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다고, 안지희 변호사는 강조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성적 자기결정권 보호하라…재판소원이 중대한 분기점 될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75번의 거부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지인이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은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다. 한선희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사법부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때 피해자는 극심한 자기 검열과 고립을 겪게 되며,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 감수성을 퇴보시키는 위험한 사회적 신호가 된다”고 경고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피해자가 제기한 재판소원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이 건을 본안 심사로 회부할지 각하할지 결정하는 사전심사 중이다. 사전심사는 헌법소원 청구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뤄지기 때문에 5월 18일까지 결정이 났어야 하지만, 헌재가 보정명령을 내렸고 사전심사가 30일 더 연장되었다. 공대위는 우리 사회를 ‘강간문화’가 아닌 ‘평등문화’로 이끄는 길에 시민들의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며, <a href="https://forms.gle/aF9FoaAZX9XpSYrdA" target="_blank">재판소원 본안 회부를 촉구하는 2차 서명운동</a>을 진행 중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31 17:05: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성폭력]]></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성폭력]]></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310956933.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310956933.jpg]]></image>
     </item>

     <item>
       <title><![CDATA[혼자 살고 혼자 죽기 — 고독사와 수치심]]></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6</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년 넘게 혼자 살아왔다. 나름 경력자다. 이 경력은 날마다 갱신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혼자 산다는 게 곧바로 혼자 죽는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도 있음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건 혼자 살기의 각주 같은 거다. 때론 각주가 본문보다 더 예리한 질문이나 성찰을 품기도 한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도착할 사건으로서 삶의 배치 속에 들어온다. ‘아프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에게 연락할 것인가, 어디까지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인가.’ 혼자 산다는 건 이런 질문을 미리 오늘의 삶 안에 들여놓는 생활의 기술 혹은 역량에 가깝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3025443848.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혼자 산다는 건 관계가 없는 삶이 아니라, 고독을 기초 값으로 두고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죽음에 관한 질문을 미리 오늘의 삶 안에 들여놓는 생활의 기술 혹은 역량에 가깝다. Image by Sabine van Erp from Pixabay</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왜 혼자 죽는 게 ‘실패한 삶’의 표지가 되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인 가구의 삶을 살피는 책 『필연적 혼자의 시대』을 읽으며 오래 곱씹은 장도 죽음을 다루는 마지막 장이었다. 개인화된 사회의 위험을 가장 최전선에서 맞닥뜨리는 게 1인 가구라면, 이 위험은 죽음의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죽음은 보편적인 자연의 일이니까, 때가 되면 죽는 거니까. 오히려 관심은 임종 전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로 쏠린다. ‘안 아프고 깔끔하게 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건 설령 아프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깔끔하게’ 죽을 거라고 결의를 다지는 노년들의 말과 일치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차이는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에서 나타난다. 늦게 발견된 죽음, 냄새, 남겨진 물건, 그리고 수치심. 고독사 이야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추한 모습으로 보이기보다는 편안하게 죽은 모습 있잖아요. 그런 모습이 조금 덜 부끄러울 것 같아요. 헤벌레 입을 벌리고 옷도 덜 걸치고 실오라기 하나 없이 죽은 모습을 남에게 보였다. 만약 이러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아요.” —고정민(정신건강 사회복지사, 30세)</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죽은 후가 너무 무서워요. 그런 얘기 듣잖아요. 시체가 한 달 이상 썩어서 하도 냄새가 나서 들어가 보니까 어떻더라, 이런 거.“ —신지영(기간제 교사, 42세)</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ebook, 85쪽)</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돌봄의 배웅 없이 고립된 채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고독사에 대한 ‘수치심’이 1인 가구 죽음 생각의 핵심이라니. 늦게 발견된 시신의 ‘부패한’ 모습이 그동안 살아온 삶에 켜켜로 쌓인 이야기와 의미 또한 ‘부패시킬’ 거라는 공포, 결국 빨리 잊히는 게 가장 축복일 만큼 추하고 비참한 삶으로 추락할 거라는 두려움이 압도적이라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죽은 자의 집 청소』 같은 문화 미디어가 고독사에 관해 퍼뜨린 부정적인 이미지의 위력을 새삼 확인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뒤늦게나마 고독한 죽음을 마무리하는 손길을 엿볼 수도 있고, 어떤 죽음도 비참에서 멈출 수는 없다는 전언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들이 보여주듯, 유포된 고독사의 ‘장면’은 사회적 각성이나 실존적 고민으로 전환되지 않은 채, 희화화된 상태로 사람들의 머릿속을 떠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 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해석</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인 가구는 결혼 출산 양육이라는 생애 단계를 살아내느라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다인 가구보다 훨씬 일찍부터 자기 죽음을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한 사유가 과연 얼마나 덜 표피적인, 덜 상투적인, 덜 자본주의적인 생각일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독사는 혼자 맞이한 죽음, 늦게 발견될 수도 있는 죽음이다. 여기에 인간의 죽음 중 가장 처참한 죽음이라는 사회적 해석이 들러붙는 건, 혼자 살며 혼자 죽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드러나지 않은 협박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사람도, 사물도, 나라도, 도시도 태어나서 피고 지고 썩는다.”(『느리게 마이너노트로』, 우에노 지즈코, 64쪽) 페미니스트 선배 독거노인 우에노 지즈코 선생의 이 말을 해독제로 인용하고 싶다. 고독사 이전에 고립된 삶이 있다. 고독사에 비참함이 있다면, 그건 삶을 고립에서 보호하지 못한 사회와 국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왜 혼자 죽는 게 실패한 삶의 표지가 되는 걸까.</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죽음을 대하는 인간/사회의 감각이 역사 속에서 변화해 왔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죽음은 자연 속 야생의 폭력이었고, 공동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길들이기 위한 의례를 발전시켰다. 이후 인간이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뿐 아니라 특별한 자아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죽음은 ‘사건’이 되기 시작한다. 고유한 존재인 ‘나’의 죽음이나, 내게 특별한 타자인 ‘너’의 상실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죽음은 수치스럽고 불편한 것이 되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데로 추방된다. 아리에스가 ‘역전된 죽음’이라고 부른 죽음의 추락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이 병원이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조력 존엄사나 (특히 가정) 호스피스에 관한 관심, 더 일반적으로는 ‘집에서, 살던 곳에서 죽고 싶다’라는 소망이 커지는 건, 역전된 죽음을 다시 역전시키려는 움직임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이 노출되는 방식이 수치(羞恥)의 대상이 된 상태. 오늘날 1인 가구가 고독사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두려움은 이러한 역사 위에 놓여 있다. 고독사는 혼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 죽음이 제대로 관리‧통제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남긴다는 점에서 더 큰 불안을 낳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시 한번 질문하자. 왜 혼자 죽은, 그리고 늦게 발견된 죽음이 그/녀의 삶의 총체적 실패가 되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영화 〈럭키 아파트〉(강유가람 감독, 2024)는 고독사한 노년 여성의 생애 전체를, 아름답고 따스했던 두 여성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새롭게 엮는다. 그의 죽음은 아래층까지 뚫고 내려온 어떤 냄새에 의해 발견되지만, 그의 삶은 그 불편한 장면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 고독사를 낳은 건 고립된 삶이었고, 그 고립된 삶에 대한 책임은 동성 간 친밀성을 인정하지 않은 사회와 국가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수치심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혼자 산다는 건 관계가 없는 삶이 아니라, 고독을 기초 값으로 두고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혼자 먹고 자고 아프고 사람을 만나고 일하는 동안 꾸준히 생활의 기술을 익힌다. 실패하고 다시 배우고 새롭게 조정한다. 고독하지 않으려 할 때, 외로움의 통증이 커진다. 필요한 건 고독의 회피가 아니라, 고독하게 일상을 지키는 기술의 연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푸코는 이를 ‘자기의 배려’(epimeleia heautou)라고 불렀다. 이것은 무엇보다 자기와 관계 맺는 법을 익히는 것, 그렇게 삶을 하나의 형식으로 빚어내는 기술이다. 자기 자신에 잘 머물며,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고, 자기 자신에게서 즐거움을 발견하고 존중하기. 그에 따르면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원래 ‘너 자신을 돌보라’는 요청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자기 배려의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이 곧 ‘혼자 죽는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를 호출한다. 홀로의 죽음에는, 호출되었으나 응답하지 않는 타자의 부재가 있다. 죽음 이전의 돌봄, 죽음 이후의 마무리, 애도와 행정, 이 모든 과정을 동행하는 공공의 손길이 필요하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도 강조하듯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공공복지의 책임이 무덤 앞에서 멈춰 서면 안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고독사가 발생한다면? 그때 남겨지는 수치심은 누구의 것인가. 무엇인가. 고독사를 ‘대면한’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단지 냄새와 부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장면 안에서 자신의 취약성을 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르조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생존을 분투하는 존재(조에, zoe)인 동시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언어 주체(비오스, bios)다. 인간의 삶은 둘 중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 모두의 경계에 있다. 사람의 인정 고픔이나 의미 마름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궁극적으로 이기지 못하며, 탁월한 견해나 치열한 정의감은 먹고 싸고 냄새 피우는 몸의 순환과 분리될 수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독사의 장면이 우리를 흔드는 것은 단지 ‘조에’(생물학적 몸)가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비오스’(사회적 주체)라고 믿어온 삶이 사실은 ‘조에’ 위에, 아니 그 안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치심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수치심은 취약성을 개인의 실패로 돌려온 사회의 것이고, 그 장면 앞에서 자신의 취약성을 직면하게 된 우리 모두의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독사의 장면이 지니는 이 노출과 폭로의 이중 구조를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홀로 죽는 죽음에 윤리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사회문화적으로 예를 갖출 수 있다. 우리는 목숨 걸고 둘째 오빠의 시신에 모래 한 줌이라도 덮어주려 한 안티고네의 후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할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더 이상 ‘그냥 자연의 일’일 수 없게 된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자연-문화라는 보다 포괄적인 생태에 귀속시킬 수 있는가. 혼자 죽더라도 그것이 피상적인 수치가 되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892bd3;">[필자 소개] 김영옥</span>.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30 11:23: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김영옥)]]></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3030326255.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3030326255.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5</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변에 추천하려다가도 금세 머뭇거리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 미국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은 내 최애 드라마 중 하나지만,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기엔 조금 주저되는 작품이다. 보고 난 후에는 분명 드라마 속 우울이 전염되는 후유증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우울은 인간의 유한한 삶, 행복의 가치, 고독, 무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실존적 불안에서 기인한다. 작품의 표면적인 블랙코미디 아래에는 삶의 진실을 마주하는 데서 생기는 깊은 우울이 흐르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46394936.jpe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미국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깊은 우울 속에서 발견한 것</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주인공 보잭의 경우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짜증을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잭은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일을 미루고, 남 탓을 하는, 책임감이 없는 인물이다. 그건 현실이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다. 보잭은 시즌이 거듭할수록 현실도피가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달아가고, 점차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기 시작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보잭의 친구이자 작가인 다이앤 응우옌은 보잭과는 달리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도덕적 나침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종종 자신만의 도덕적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며,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인물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나와 다르지만, 또 아주 다르지도 않다. 모든 일을 미루고 싶고 모든 것에 화내고 싶지만, 가까스로 일상을 유지하다가 연말이 되면 이때다 싶어 모든 걸 놓아버리고 방에 칩거하곤 하는 나는, 보잭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볼 때마다 ‘계속 그렇게 마음대로 살아달라’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과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책임감 좀 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모두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 속에는 분명 나의 아주 깊은 욕망이 감춰져 있는 게 분명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에피소드마다 어떤 문제가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결말에서 해결되긴커녕 더 심각해진 채 끝나기를 반복한다는 점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보잭 홀스맨〉은 타인의 불행을 통해 상대적으로 괜찮은 나의 삶을 재확인하는 그런 종류의 드라마가 아니다. 시트콤의 문법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에 모든 게 연기였던 것처럼 말끔하게 지워지는 가벼운 드라마도 아니다. 인물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 속에 갇혀있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며 주변에 피해를 끼치는 일들을 반복하지만,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도 어떤 것은 조금 달라져 있다. 이 미묘한 변화, 즉 제자리걸음 같아 보지만 아주 조금씩은 달라져 있는 세계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재미가 여기 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수인 보잭 홀스맨과 인간 다이앤 응우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보잭 홀스맨〉을 볼 준비가 되었다면, 먼저 이 드라마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의 모습으로 의인화된 수인(獸人)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관이다. 수인에는 각 동물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어 개의 얼굴을 한 영화배우 미스터 피넛버터는 산만하고 해맑고 초인종 소리에 흥분하며, 고양이의 얼굴을 한 매니저 캐롤린은 예민하고 그루밍을 자주 하며 테이블에는 쥐 인형이 달려있다. 수인과 인간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함께 자식을 낳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인간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가 혼합되어 있어서 종종 당황스러운 설정을 마주하는데, 이를테면 인간이 동물을 먹는 문화는 그대로라는 점이다. 레스토랑의 한 테이블에서는 인간 커플이 돼지머리를 먹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테이블의 돼지 인간이 슬픈 표정으로 샐러드를 먹는 풍경이 공존한다. 드라마는 동물을 먹는 인간을 바라보는 혐오스러운 시선에 더 지배적인 감정을 투여하는 식으로 곳곳에 윤리적,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인공 보잭은 말과 인간의 모습을 함께 지닌 수인이다. 그는 인간 아이 3명을 입양해서 키우는 1990년대 인기 시트콤 〈말 장난〉(horsin Around)의 주연이었으나, 20년 후인 현재는 한물간 배우가 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시트콤이 녹화된 비디오를 무한 돌려보며 영광스러운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할리우드의 중년 배우다. 보잭은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한 정서적 학대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도피를 위해 술과 약물, 섹스 중독으로 허우적대는 철없는 어른이기도 하다. 그는 갱생의 여지가 안 보이는 문제적 인물로 표현되는데 그가 뭔가를 해결하려는 과정은 깊이 생각한 결과가 아니기에 줄곧 더 엉망이 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4731638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 중에서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는 보잭과 응우옌의 뒷모습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시즌1에서는 자서전을 쓰기로 해놓고 과거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현실도피(술을 끝도 없이 마시거나 편집자의 전화를 받지 않는)하다가 우연히 파티에서 처음 만난 다이앤 응우옌에게 대필 작가를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응우옌은 금세 보잭이 회피하는 현실을 직시하게끔 조력하고 때로는 그의 거짓말을 간파하며 서로의 고민과 상처를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이 드라마에서 보잭과 특별한 정서적 유대감을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응우옌이 써서 출간한 보잭의 자서전은 그가 회피하고자 했던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보여주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책을 통해 보잭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응우옌은 이 드라마 속에서 누군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자신의 글을 다른 이의 이름으로 발표한 유령 작가로, 파티 주최자 피넛버터의 애인으로, ‘응우옌’보다는 발음하기 쉬운 ‘다이앤’으로 불리며 존재한다. 하지만 응우옌에게도 당연히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시즌 5의 2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잭이 아닌 응우옌의 시선만으로 채워져 있기에 특별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응우옌은 누구인가? 그녀는 보스턴에서 태어난 베트남 이민자 2세로 설정되어 있다. 영어 실력은 유창하지만 베트남의 언어나 문화적 유산은 전혀 접한 게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베트남 사학과 종신교수이지만, 딸이 자신은 왜 다른 아이들과 다르냐고 물어볼 때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고 대답하곤 한다. 심지어 베트남에 대한 지식이라도 알려달라고 하면, 집에서 쉬는 날엔 일 얘기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그런 사람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녀는 똑똑하며 매사에 침착하고 감정보다는 이성이 먼저 작동하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성차별, 인종차별 등에 예민하고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를 잘 내며 글 솜씨가 있기에 작가로서의 욕망도 지니고 있다. 한편, 누군가에게 의지하길 원하고 그런 안정감을 욕망하기도 한다. 매사에 똑 부러진 모습이다가도 한번 무너지면 술과 약물에 빠져 누구보다(심지어 보잭보다도 더) 폐인처럼 지내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슬픔을 ‘표현’할 때면 나는 정말 그녀의 뼛속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에피소드는 응우옌이 자신과는 너무 다른 피넛버터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합의 이혼을 결심한 뒤,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응우옌은 자신이 ‘베트남에 가야 하는 이유 10가지’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 자신의 뿌리를 재발견하기 위해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 여기선 여행자가 될 수 있기 때문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3. 이제 싱글이니까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4.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5. 천연 서식지(집)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6. 일을 휴가처럼 즐길 수 있기 때문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7. 심리 상담사가 가라고 했으니까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8.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어서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9. 일상에서 벗어나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0. 집으로 돌아오려면 떠나야 하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열 가지 이유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녀의 상상적 고향이자 여행지인 베트남에서의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베트남의 거리풍경은 간판에도 응우옌, 쇼핑백에도 응우옌이라고 적혀있다. 미국에서는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해서 대부분 ‘다이앤’이라고 불렀지만, 베트남에서는 ‘응우옌’이 너무나 흔한 이름이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얼굴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하지만, 길에서 베트남 여성과 부딪혔을 때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49043280.jpe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베트남 전통 의상이 마치 무대의상 같다고 생각하는 응우옌. 애니메이션 드라마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 중에서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호텔 로비에서는 미국에서 온 영화 촬영팀의 현장을 목격하는데, 그들이 찍고 있는 건 공교롭게도 ‘최근에 이혼한 여자가 자신을 찾아 베트남에 온 얘기’이다. 응우옌의 여정은 어딘가 익숙한 클리셰의 결말을 불안하게 암시하고 있다. 베트남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베트남 전통 의상을 입은 채 거울을 봐도 어색하기만 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베트남에서 만난 외국인들의 눈에 그녀는 완전한 베트남 사람으로 비친다. 길에서 미국인 관광객 가족이 그녀에게 손짓발짓을 써가며 아주 느린 영어로 ‘당신 영어 할 줄 아냐’고 묻는다. 응우옌이 나도 미국인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대답하자 놀란 것도 잠시, 다시 아주 느린 영어로 ‘나는 미국, 너는 베트남’ 이렇게 말한다. 또박또박 느릿느릿 영어로 말하는 태도는 베트남 얼굴을 한 여성이 결코 영어를 잘할 리 없다는 편견을 드러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마찬가지로 호텔의 바에서 만난 미국 촬영팀의 한 남성(그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모습의 수인이다)이 응우옌에게 손짓발짓을 써가며 맥주 주문하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응우옌은 아무 말 없이 그새 익힌 베트남어로 맥주를 대신 주문해 준다. 그리고 자신이 영어를 쓸 줄 아는 미국인이라는 걸 굳이 말하지 않는다. 영어로 말해도 소용없으니 베트남 사람으로 패싱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 남성은 ‘나 좋은 미국 남자’라고 말하며 데이트를 제안한다. 응우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받아준다. 응우옌은 이 남성이 원하는 여성이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응우옌은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는 걸 남성에게 들키게 되고, 그녀가 연기했다는 걸 알게 되자 남성은 치졸하게 분노한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응우옌은 뿌리를 찾는 편안함도 느낄 수 없었고, 집을 떠나 완전한 자유로움을 느끼는 여행자도 될 수 없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개의 날들이 끝났다’…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그럴듯한 자아 찾기, 고향 찾기의 여정은 실은 이혼으로 인한 공허함을 마주보기 힘들었던 응우옌의 도피 여행이기도 했다.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는 도덕적 나침반의 역할을 하곤 했지만 막상 이혼하니 나침반도 지도도 없이 표류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응우옌은 떠나기 전보다 더 깊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드디어 자신의 고통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당연한 사실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이건 자주적인 여자의 멋진 자아 찾기, 뿌리 찾기, 정체성 찾기의 여정이 아니다. 뿌리는 고향에 간다고 저절로 발견되는 것도 아니며, 떠난 연인의 빈자리는 누구에게나 공허함을 남긴다. 응우옌은 평범한 여자의 클리셰를 마주한다. 피넛버터가 새 애인과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마스카라가 눈물에 번질 정도로 서럽게 울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응우옌은 이제 솔직해진다. 베트남에 간 건 자신의 뿌리를 재발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집으로 돌아오려면 일단 떠나야 하기 때문이었다. 떠나기 전과 떠난 이후의 응우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글을 잘 쓰는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면서도 독립적이길 바라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생각보다 멋지지 않고 초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또 부정하며 그녀는 조금 더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유령 작가로 사는 자신의 삶을 정말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자신을 무시하는 가족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지, 감정을 계속 억누르면서 살 수 있는지 그녀는 조금씩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할 것이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24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50188270.jpg" alt="" width="724"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보잭 홀스맨〉(BoJack Horseman)에서 내가 좋아하는 응우옌의 얼굴. 행복을 찾는데 무관심해 보이는 응우옌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출처: 넷플릭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시즌 5의 2화 제목은 “그와 함께한 날들”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제목은 “The Dog Days Are Over”이다. 직역하면 ‘개의 날들이 끝났다’라는 의미로, 응우옌이 피넛버터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한 극 중 서사를 반영한다. 하지만 ‘The Dog Days’는 너무 더운 날, 혹은 정체기를 의미하는 표현이기에 ‘이제 힘든 시기는 끝났다’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응우옌이 자신에게 존재하는 우울을 조금씩 응시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다른 날들이 시작될 거라는 걸 암시하는 에피소드인 것이다. 타인의 우울과 고독, 고통이 반드시 의미 있는 기록이자 책, 혹은 예술이 되길 바라는 대필 작가 응우옌의 열망은 자신의 고통 또한 꼭 가치 있고 특별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점차 내려놓고 시즌6에서는 가벼운 하이틴 추리 소설을 출간하며 자신과 화해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에피소드에서 끝날 때 나오는 엔딩곡은 이 드라마의 테마곡 〈Back in the 90’s〉를 밴드 ‘Thao &amp; The Get Down Stay Down’의 리더 타오 응우옌(Thao Nguyen)이 변주해서 부른 것이다. 〈보잭 홀스맨〉은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는 테마곡 〈Back in the 90’s〉가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어 엔딩에서 등장하곤 하기 때문에 엔딩 타이틀도 꼭 끝까지 봐야 한다. 덕분에 나는 Thao &amp; The Get Down Stay Down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의 음악들을 다 찾아 들어봤다. 그러다가 2020년에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lt;Temple&gt;이 응우옌의 어머니에 대한 노래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span></p><p><br style="font-family: 바탕;" /><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 노래는 타오 응우옌의 어머니가 베트남 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이주한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 가사에는 “나는 이제 나를 드러내고, 집으로 돌아간다(I’m coming out, I’m coming home)”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전쟁의 생존자로서 살아남았음을 축하하며, 동시에 응우옌 자신이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며 안식처를 찾았음을 중의적으로 드러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951043669.jpe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밴드 ‘Thao &amp; The Get Down Stay Down’의 노래 〈Temple〉 (Official Music Video) <a href="https://www.youtube.com/watch?v=bRzQ6QY8d4U" target="_blank">https://www.youtube.com/watch?v=bRzQ6QY8d4U</a> (출처: 유튜브)</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뮤직비디오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등장인물들이 손짓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가사의 내용이다. 이건 타인에게 자신의 언어를 전달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표현했던 관광객의 손짓과는 완전히 다르다. 손가락을 꽃송이처럼 모으고, 공중에서 무언가를 움켜쥐고, 소중하게 숨기고, 비밀스럽게 어딘가에 다시 넣는 손짓이 보인다. 타오 응우옌은 베트남의 민속 무용에서 영감을 받아서 이 동작을 연출했다. 이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가두었던 어머니의 기억을 형상화하며, 동시에 퀴어 문화에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보깅(voguing: 흑인·라틴계 퀴어 공동체의 볼룸 문화에서 발전한 춤 양식) 동작을 형상화하여 타오 응우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든 이들의 여정을 응원하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꼭 보길 바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ab36c8;">[필자 소개] 전솔비</span>.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9 09:44:00</pubDate>
	   <section>sc7</section>
	   <section_k><![CDATA[문화]]></section_k>
	   <section2><![CDATA[만화/애니]]></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전솔비)]]></author>
	   <category><![CDATA[만화/애니]]></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95535835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95535835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아동들은 불법체류하지 않는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4</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얼마 전 SNS에서 짧은 TV 토론 프로그램 영상을 봤다. 주제는 ‘불법체류자 자녀에 대한 교육지원을 제한해야 하는가?’였다. 영상 속의 두 토론자는 자극적이고 빠른 속도로 자신의 주장을 주고받았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교육지원을 제한해야 한다는 측의 패널은 “불법체류자 자녀에게 교육지원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불법체류를 해도 된다’는 공공의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이주민이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지적하며,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이주민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통해 이주민이 늘어나 사회적 혼란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짧은 영상 속의 그 말들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불법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말, 정부가 불법체류자에게 혜택을 주면 안 된다는 말, 선진국의 실패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말. SNS에서는 그런 말들이 특히 더 “현실적인 이야기”처럼 소비되고 있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런데, 영상을 다 보고 나서도 계속 마음에 남는 게 있었다. 그 토론에는 정작 당사자인 아동은 없었다. 미등록 체류 아동에게는 생존과 정체성과 관련된 삶의 절박한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논리 게임으로 취급되는 상황이 씁쓸하게 느껴졌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불법체류자 자녀’라는 말</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법체류자 자녀”라는 단어는 이상하다. 그 말은 아동을 아동의 존재가 아닌 부모의 체류자격으로 설명하고 정의 내린다. 그 단어에는 아동의 이름도, 나이도, 학교도, 친구도 사라지고 부모가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한 사실만 강조되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71511334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4년, 이주민센터 친구에서는 ‘미등록 이주 아동 구제 대책’을 통한 체류자격 신청을 위해 당사자 아동과 동행하였다. 해당 아동은 미등록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10년 이상을 한국에서 성장한 아동이었다. [사진 제공-이주민센터 친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주변의 사람들은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일하는 나에게 ‘그래도 사람들이 아동에 관해서는 연민을 느끼고, 인도적인 처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물어본다. 그러나 생각보다 놀랍게도 그 앞에 ‘불법체류’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반대로 뒤집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안타깝지만, 한국 사회에 있으면 안 되는 존재’, ‘한국 국적의 아동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는 존재’, ‘기본적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존재’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아동이 왜 여기 오게 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등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그냥 ‘불법 상태의 사람’처럼 취급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아동은 자신의 미등록 체류 상태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없다. 아동은 그저 이 사회에 그냥 살게 된 존재들일 뿐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아동에게 이곳은 삶의 자리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동들은 자기 체류자격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어느 나라에서 살지, 부모의 체류자격이 언제 만료될지, 가족이 어떤 사정을 겪게 될지 아동이 스스로 결정한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아동은 어느 순간 자기 삶 전체를 “불법”이라는 말로 설명 받게 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아동은 학교에 가고 친구를 사귀고 급식을 먹는다. 친구들과 한국어로 웃고 싸우고 화해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국가와 사회가 아동에게 너는 원래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물론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도 있다. 미등록 체류 상태라고 해서 초·중등학교에 다닐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경우에도 전·입학을 받아주거나, 미등록 이주아동에 관한 학적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뉴얼이 배포되기도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과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또한, 아직도 미등록 체류 아동은 학교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노골적으로 배제하는 학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동들은 불안과 위험 속에서 산다. 부모가 단속될까 봐 걱정하고, 병원비 때문에 아픈 걸 참기도 하고, 어떤 서류를 냈다가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지 겁낸다.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몰라서 학교에서도 조심한다. 친구들에게 자기 상황을 숨기는 아이들도 많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생활의 측면을 넘어 실제 행정·법적 영역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외국인등록번호가 없거나 유효하지 않아서 사회 복지서비스, 의료서비스, 각종 보험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거나, 대학교 진학 시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범죄나 법률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때도 선뜻 경찰서, 노동청, 법원의 도움을 받기 힘들다. 왜냐하면 ‘불법체류’ 아동에게 그런 곳들은 오히려 피해야 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한국의 현재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 대책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다. 일정 요건을 충족해야 하고, 부모의 체류 문제나 벌금 문제도 얽혀 있다. 아동의 권리를 말하지만, 실제 절차에서는 아동이 해결할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이 계속 따라붙는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71209171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5년,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보장’을 촉구하며 이주아동 당사자,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진행한 기자회견. [사진 제공-이주배경 아동·청소년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교육은 ‘혜택’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미등록 이주 아동에 대한 논의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주장이 따라온다. 불법체류를 한 부모에게 국가가 혜택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동의 교육은 부모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다. 아동이 학교에 다니거나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국가가 부모의 체류 위반을 눈감아주는 행위가 아니다. 그냥 아동이 아동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모에게 책임을 묻는 문제와, 아동을 학교 밖으로 밀어내는 문제는 같은 것이 아님에도, 우리 사회는 이 두 가지를 항상 섞어서 이야기한다. </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더 그렇다. “세금”, “역차별”, “국가 부담”, “사회 혼란” 같은 말들이 아동의 본질적인 삶보다 먼저 나온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물론 사회적 논의는 필요하다. 이주 정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아동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아동을 하나의 정책 변수처럼만 다루지는 말아야 한다. 아동은 국가의 인구정책이나 출입국정책을 계산하면서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아동들은 그냥 살아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현장에서 만나는 아동들은 거창한 걸 요구하지 않는다.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말한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플 때 병원에 가고 싶고, 졸업하면 뭔가 준비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자꾸 이 아동들을 예외적인 존재처럼 취급한다. 임시대책의 대상, 한시적 구제의 대상, 특별 허가의 대상으로 부른다. 하지만 아동의 삶은 임시적인 것도 아니고, 예외적인 것도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동은 오늘도 학교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시간을 보내며 자란다. 행정은 몇 년 단위로 대책을 연장할 수 있지만, 아동은 그 사이에도 계속 성장한다. 열 살의 불안은 열다섯 살의 침묵이 되고, 스무 살의 막막함으로 이어진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주배경 아동ㆍ청소년 기본권 향상을 위한 네트워크’는 2025년 국내 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 보장과 구제 대책의 상설화를 요구하며 “Let Us Dream” 캠페인(<a href="https://letusdream.campaignus.me" target="_blank">letusdream.campaignus.me</a>)을 시작했다. 여기 참여한 한 청년은 체류자격을 얻고 나서야 “처음으로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전까지는 내일 학교에 갈 수 있을지, 한국에 계속 머물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에게 체류자격은 단순한 행정상의 지위가 아니다. 비로소 자기 삶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최소한의 조건에 가깝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세상의 모든 아동에게는 그런 자리가 필요하다. 자기 존재를 의심받지 않는 사회. 내일도 학교에 갈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회. 아동은 불법체류하지 않는다. 아동은 그냥 살아간다. 다만 어른들이 만든 제도가 어떤 아동들의 삶을 “불법”이라는 말 아래 밀어넣고 있을 뿐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973ec1;">[필자 소개] 이제호</span>. ‘이주민센터 친구’에서 상근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동·청소년 인권, 교육기본권, 이주인권 분야에 관심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주배경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7 10:04: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이주]]></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이제호)]]></author>
	   <category><![CDATA[이주]]></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71406685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71406685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스쿠버 다이빙도 하는데 왜 비행기에서는 혼자 못 내려오는가”]]></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3</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5월 15일자 〈비마이너〉에 보도된, “티웨이항공, 6개월도 안 돼 또다시 장애인 차별” 기사는 Moon의 이야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쿠버 다이빙을 하기 위해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비행기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와야 했다. Moon의 배우자는 밑에서 Moon을 받치고, 나는 옆에서 Moon의 바지 뒤춤을 잡고 내려왔다. 열몇 개의 계단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칫 잘못하면 셋이 함께 굴러떨어질 상황이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쿠버 다이빙도 하시는데 비행기에서는 혼자 못 내려오시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탄성이 나왔다. 역설적으로 핵심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정말이지, Moon은 스쿠버 다이빙도 하는데, 왜 비행기에서는 혼자 내려오지 못할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일반적으로 가능과 불가능을 가르는 것은 능력, 기능, 체력, 장애 유무… 등이라고 여긴다. 그렇다면 능력도, 체력도, 뇌병변으로 몸의 기능도 제한적인 Moon이 어떻게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비행기 계단을 내려오지는 못하는 것일까?</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5325417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항공사 측이 리프트를 제공하지 않아 Moon이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다. Moon이 제어가 가능한 왼손으로 난간을 잡기 위해 뒤로 돌아있고, Moon의 배우자와 활동지원사인 호미가 부축하고 있다. (사진: 방준식 감독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몸에 맞는 장비들을 구하고, 맞추고, 바꾸고, 닦고, 말리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 섶섬에서 다이빙을 마치고 씻고 나왔을 때였다. 장애인 스쿠버 다이빙을 6년째 하고 있는 감태 활동가(제주해녀문화연구원 원장, 참고 기사 <a href="https://ildaro.com/10381" target="_blank">https://ildaro.com/10381</a>)가 잠수복과 장비들을 닦고,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감태 씨는 지난 2월부터 서울과 용인 잠수풀 연습 때마다 이 장비들을 가지고 올라왔는데, 매번 이런 뒷설거지를 홀로 해왔을 거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돕겠다 나서니 호흡기 같은 장비는 건조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본인이 한다고 그만두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뒷일이 이렇게 많을 거라 생각 못했어요. 용인까지 오시고, 강습해주시는 것만 해도 큰일이었을 텐데….”</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감태 씨가 크게 웃었다.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사람에 맞는 장비 궁리하는 거에 비하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에서 강습을 위해 용인으로 올라오는 감태 씨는 매번 아주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왔다. 다른 사람 장비는 잠수풀장에서 대여했지만, Moon의 몸에 맞는 장비는 대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호흡기의 마우스 피스가 Moon의 입에 맞지 않아 아동용으로 바꿔 끼웠다. 호흡기가 벗겨질 때 찾아 다시 끼우기가 힘드니, 호흡기에 고무줄을 매어 목에 걸었다. Moon의 다리가 물 속에서 벌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감태 씨는 두 다리를 잇는 벨트도 찾아 왔다. 그리고 다리가 아래로 내려가도록 벨트에 맬 천 웨이트(무게추)도 구해왔다. 보통 웨이트는 납이라 Moon의 발목 부상이 우려되기 때문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렇게 구해온 장비들도 바뀌기 일쑤였다. 호흡기 호스는 보통 오른쪽에 달려 있는데, Moon은 왼손만 쓸 수 있으니 왼쪽에 호스가 달린 것으로 바꿔 왔다. 하지만, Moon이 여전히 불편해하자, 좌우 양쪽에 호스가 달려 있는 호흡기를 가져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체온 조절이었다. Moon은 체온 조절이 힘들다. 온도가 떨어지면 호흡이 힘들어진다. 호흡은 스쿠버 다이빙의 생명. 일반적으로 입는 3mm 잠수복으로는 체온 유지가 어려웠다. 그래서 감태 씨는 5mm 잠수복을 가지고 다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5월 제주 바다 다이빙을 앞두었을 때였다. 미리 답사를 다녀온 감태 씨가 긴급 상황을 알려왔다. 바다 온도가 17도. 5mm 잠수복으로도 해결이 힘든 상황이었다. 감태 씨는 수중 발열조끼를 준비하고, 잠수복 제조업을 하는 지인이 7mm 잠수복을 기부하기로 했다. 덕분에 공항 앞 공터에서 잠수복을 맞추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물론 7mm 잠수복은 엄청난 고가이다. 민간단체인 제주해녀문화연구원에 이런 큰돈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기부를 감태 씨는 ‘일종의 품앗이’라고 말한다. 이 잠수복은 Moon이 입고 제주해녀문화연구원에 기증된다. 덕분에 누구라도 몸에 맞는 사람은 입을 수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5331865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oon이 손으로 이퀄라이징(압력 평형 맞추기)을 하며 입수하고 있다. 물속에서 빠질 때를 대비해 줄로 묶은 호흡기, Moon의 입에 맞는 마우스피스, 다리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벨트, 무게를 잡아주는 천 웨이트, BCD(부력조절장치) 양방향 호스, 7mm 두께의 잠수복 등은 Moon의 몸에 맞춰 바꾸고, 맞춰온 것들이다. 사진에 나오지 않지만 Moon 바로 앞에서 함께 다이빙하고 있는 감태 씨까지. 이들 덕분에 Moon의 다이빙은 가능해졌다. (사진–호미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승객에게 맞는 장비 구하는 대신, 양해를 구하는 이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감태 씨는 끝없이 궁리하며 Moon의 몸에 장비들을 맞추어 갔다. 반면, 티웨이항공은 감태 씨와 전혀 다른 경로를 걷는다. 티웨이항공은 Moon에게 반복해서 ‘양해’를 구했다. 더할 수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직원은 Moon에게 걸을 수 있는지 물었다. (걸을 수 있다면 왜 휠체어를 타겠는가?) 걸을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편이 탑승교가 배치되지 않는 편이라서요. 양해를 구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양해 요청은 겉으로는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행기를 소유하고, 비행기 운항 일정과 리프트 설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항공사가 탑승이 절실한 개인에게 거듭 구하는 ‘양해’는 거절 가능성이 없는 허위 선택지다. 우리는 이를 ‘차별’ 혹은 ‘갑질’이라고 부른다. 항공사는 ‘양해’를 해주는 장애인의 ‘선의’를 이용해 차별을 지속하기를 선택하고, 비용을 절감하고, 수익을 유지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예약한 장애인이 있어도 탑승교를 설치하지 않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매뉴얼이 되고 규정이 된다. 매뉴얼이 되고 규정이 되면, 그 자리에 어떤 직원이 와도 반복된다. 6개월 후에도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도 다시 같은 잘못을 한 이유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뿐 아니다. 먼저 계단을 내려온 비장애인 승객들은 공항버스에 타서 Moon과 우리가 벌벌 떨며 내려오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들에게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몸만 보였고, 탑승교가 설치되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불가능’이라는 허구는 이렇게 수행된다. 계단을 내려온 후 2주 째, Moon의 발목 통증이 여전히 심하다. 평소 하던 동작이 안돼서 아찔한 순간이 자꾸 발생한다. 이 ‘허구’ 수행의 비용은 온전히 장애 몸이 치른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양해를 거부하자, 놀랍게도 리프트가 나왔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이빙을 끝내고 돌아가는 비행기 타기 두 시간 전, 항공사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다시 걸을 수 있는지를 묻고, 못 걷는다고 하자, 이번에는 4시간 후 비행기편을 이용하면 안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제주 가는 비행기에서 다이빙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내려왔던 Moon은 이번에는 양해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리프트가 마련될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그러자, 시간에 맞춰 리프트가 나왔다.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순조롭게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제 Moon의 비행기 탑승은 ‘가능한 일’이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불가능과 가능을 가르는 것이 능력, 기능, 체력, 장애 유무가 아니라, 시스템과 환경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올해 4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장애인권리보장법의 핵심이다. 40년 전에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를 “개인의 손상”으로 본 데 반해, 장애인권리보장법은 장애를 “사회의 문화적·물리적·제도적 장벽 등 환경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일상생활 및 사회참여 제약이 발생하는 상태”로 명시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53400787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oon(가운데)이 35m 아래로 다이빙해 자세를 잡았다. 35m는 아파트 12층 높이 아래다. Moon의 가슴에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 몸자보가 보인다. 사진 왼쪽이 감태 씨, 오른쪽이 Moon을 이어 강습을 받기 시작한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의 활동지원사이다. 이규식 대표는 스쿠버 다이빙을 하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았지만 못 찾고, 활동지원사가 다이빙 자격증을 따도록 하였다. 그러다 Moon을 통해 감태 씨를 소개받고, 직접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사진 제공-호미)</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며칠 전 잠수풀에서 Moon은 35m까지 내려갔다. 물론 감태 씨와 함께. 다음 날 제주로 돌아간 감태 씨가 텔방에 올린 글.</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스스로 이퀄라이징 하고, 마스크 조절하고, 두 다리도 자연스럽게 뻗어지고 있어요. 물에 많이 적응한 거죠. 다이빙의 궁극적 목적은 물속에서 안전하게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데, Moon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선까지 상당히 도달했어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덧붙임: 댓글 쓰신 분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좋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비행기 탑승구에서 지면까지 2.7m. 비행기에서 아무 장비 없이 혼자 힘으로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도로 훈련받은 소방관이나 암벽 등반 선수도 장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탑승교, 계단, 리프트가 있는 것입니다. Moon은 이 중 탑승교와 리프트로, 그리고 비장애인은 계단의 도움으로 내려오는 겁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53ab4;">[필자 소개] 호미</span>. 장애활동지원사이며 동화 집필 노동자. 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통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활동서비스 이용인’ Moon을 돌보고 Moon으로부터 돌봄을 받으며 하루하루 연명합니다. 일하고 사랑하며, 투쟁하고 놀며 새로운 몸으로 되어갑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5 10:29:00</pubDate>
	   <section>sc5</section>
	   <section_k><![CDATA[소수자 시선]]></section_k>
	   <section2><![CDATA[장애]]></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호미)]]></author>
	   <category><![CDATA[장애]]></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53727390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53727390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What I Discovered While Making a ‘Sexuality Map’]]></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2</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Editor’s note: The “Let’s Talk about Sexuality” series explores the diverse values and experiences that women in their twenties have with regards to sex, bodies, and relationships. Through it, Ilda hopes to create a new, feminist sexual discourse. The series is funded by the Korea Foundation for Women’s Gender Equal Social Development Project.</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Girls’ secret masturbation and guil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en’s sexual desire is everywhere in society. Adolescent boys’ masturbating and watching porn is treated as completely natural. In fact, boys who don’t do those things are picked on. That’s the degree to which male sexual desire is seen as not just natural but something that must be express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t’s easy to find information on male masturbation methods, and the information is imparted kindly. Advice like ‘use gel so that you don’t take off any skin’, ‘make sure to wash your hands afterward’, and ‘don’t grip your penis too hard or you may not be able to feel much when you have penetrative sex later’ is even shows concern for the recipient’s future pleasu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contrast, female sexual desire can’t exist. It’s not that it doesn’t exist, it’s that it can’t. Society won’t allow it to. Is there a place for adolescent girls to learn ways to masturbate? Not only are they not given that kind of information, but it’s common for girls to begin masturbating without even knowing what masturbating is. And they feel guilty without knowing why.</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Male sexual desire is permitted to exist anywhere, but women’s nowhere. Women even fake orgasms when having sex with men in order to fulfill that male desir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f course, some women do let it be known that they have sexual desires. But those who freely talk about sex and their sexual tastes and preferences in front of men are then treated by those men as “bodies I can have sex with”. The women are called “easy”, “cheap”, and “slutty” and have to endure come-ons from men who want to have sex with them. If they reject those advances, they are resented and, in the worst cases, subjected to violenc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y won’t you sleep with me?’ seems to have become a widespread attitude among Korean men toward women.  If a rumor spreads that a woman has slept with one man, it’s like she becomes the public property of all men. Women who express their sexual desire and live sexually liberated lives face this risk. </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hat do I really wa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ve been very interested in sexual matters since I was young, and I still am today. I first remember masturbating when I was four years old. If I put my blanket between my legs and put pressure on it, I felt good. I didn’t understand what was happening or why I felt good, but I knew that I didn’t want anybody to see me doing tha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I realized that this was masturbation, I often felt a crushing sense of guilt about my dirty, impure thoughts. Even after I found feminism and learned that female desire is natural, this guilt didn’t go away. This deep-seated feeling could only be defeated by gathering with other women and talking about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March, I was part of the planning committee for Fireworks Femi-Action’s latest feminists’ sex ed event. The theme was “Sex That’s For Me”, and I was in charge of an activity called “Making my Sexuality Map”. It was a chance for participants to get to know their sexuality and sexual tastes and think about their right to sexual self-determinati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Women don’t have many chances in their everyday lives to think or talk about their own sexuality, and the social environment doesn’t condone it. So during the program, we talked to each other about our sexual tastes and spoke freely about what kind of mood, acts, and so on turned us 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Personally, I hoped that by thinking about their fundamental desires, participants would even be able to think about their sexual orientation and whether it wasn’t aromantic or asexual. This was because while trying out the program myself, I had become certain that I was aromantic.</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456019107.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My Sexuality Map. This map includes Castle, Forest, Harbor, Inland, Boat, Sea, and Another’s island. ©Fireworks Femi-Action</p></td></tr></tbody></table><p><span style="color: #2269dd; font-family: georgia, palatino;"><br />[(Name)’s Sexuality Map</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astle: I really like that, come in (a space for writing down the acts that you like the mos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Forest: I want to do that secretly </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Harbor: Shall I try tha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land: I like tha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oat: Not yet, but maybe later</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ea: I probably won’t ever do that</span></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nother’s island: Meh, I’d rather eat cake (asexuals’ territory, a space for writing down things that aren't for m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explained the activity to the sex ed participants, and they wrote their desires and dislikes down on post-its. These could be sexual or romantic. Then I collected all of the post-its and read them out loud.  The participants listened to each desire, thought about what it meant to them, and wrote it in the appropriate space in their ma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Desires have to first be brought forward in order for us to know whether we really hold them or not. I wrote the common TV drama situation of ‘wrap a scarf around my partner and give them a peck’ in the harbor box, but ‘visit a rooftop bar to listen to music and hold hands’ went into the sea box.</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ally, on my map, a lot of things that weren’t pretty directly connected to sex went into the sea box. But some things that the media tells us are romantic went into the harbor or forest boxes. However, I realized that this was because I was confusing society’s ideas of desires for my own. When I think hard about it, I realize that since I was little I’ve never imagined or dreamed about romantic situations. But I’ve longed for them. I was brainwashed into believing that women naturally long for love and romance, just like I used to think that actions like men trapping women against a wall, forcibly kissing them, etc. were romantic.</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ur sexual fantasies are all differen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By leading this program, I not only learned about the true nature of my own sexual desires, I also learned that other women have sexual desires and that these are every bit as explicit as men’s. Each post-it described one desire and participants were asked to make three post-its, but some of them made 10 or more. It was even more amazing to find, when I read the post-its, that every desire was different. This was true even if they seemed similar on the surface. For example, ‘holding hands’ showed up several times, but each time it was in a different situation – while lying naked in bed, to draw on each other’s palms as a joke, while watching a movie, and so o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particular, “Meow”, a post-it I made, was wildly popular. In my imagination, it was something to say while engaging in “cat-play” (acting like a cat during sex), but I was surprised and pleased to find that others had other interpretations and imagined uses of it, such as as a prelude to sex or as a way to act cute. The wide variety of other sexual fantasies mentioned included having sex in an outdoor place like a swimming pool, mutual masturbation facing one’s partner in a brightly-lit place, and sex in a cramped car.</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ll that time, I had thought that my thoughts were dirty, but as I listened to the other women, I realized that those thoughts were completely natural. When, as a little girl, I had masturbated while thinking about animated characters kissing each other, I hadn’t been strange, perverted, or impure for a girl. This was natural behavior for a human born with sexual desires. When I learned that the desires I had thought to be excessive weren’t and, what’s more, that everyone was harboring all these different sexual desires, my guilt disappeared.</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fter filling out my map, I learned a new fact about my sexual tastes. I hadn’t thought that I was an S&amp;Mer (someone who enjoys sadomasochism), but it turned out that I tend towards sadism. I like catheters and anal plugs, and dream of various types of S&amp;M play. I like imagining my partner saying, “I’ve been bad,” and, “Forgive me,” with their eyes full of tears. (Though, of course, this kind of play can only be engaged in with consent.) I had to fully express my fantasies before I could really come to know myself.</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60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456589635.jpg" alt="" width="60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From Fireworks Femi-Action’s “Feminist Sex Ed” program in March. ©Ilda (Park Ju-yeon)</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font-weight: bold;"><br />A society filled with men’s rape fantas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As a 21-year-old, I’m a legal adult who can have sex freely if she wants. These days, most youth start watching porn as adolescents. But both porn and mutually consensual sex are still not very friendly to women. Porn is heterocentric and clearly aimed towards men. A majority of its scenes feature violence against women, and I feel sick when I watch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first porno that I watched featured the rape of a woman. I felt uncomfortable for a few days after seeing it. Instead of turning me on, it had made me worry that I would be raped. I wondered how I should deal with being raped if it happened, and even – though this is the extreme choice – if I should kill myself.</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video was one that my older brother had downloaded and hadn’t gotten around to deleting. It made me queasy to think of him using something like that to masturbate. After that, as I saw more of that type of media, I got used to the idea that some people used it to turn themselves on. But getting used to the idea didn’t mean that I liked it.</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 still struggle to find videos to masturbate to that are racy, don’t make me feel scared, have a story that I can understand, and feature handsome actors. I look here and there for porn made from women’s point of view, not this crap drenched in men’s fantasi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 world around me only talks about sex that is for men and led by men. In that world, there’s no opportunity for me to consider whether I’d like S&amp;M and no place for women to discuss our sexual fantasies. In a situation where it’s difficult to even find content that stimulates my sexual imagination, it’s not surprising that I didn’t discover my real sexual tastes until I was 21 years old. Maybe it’s lucky I discovered them at all.</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There are still few places where women can safely reveal the existence of their sexual desire. In fact, I think you could say there are none. We can’t even reveal it to our partners, out of fear that we’ll look “too experienced”, seem easy, or that our partner will go around telling other people about it after we break up.</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n contrast, male sexual desire is projected even into objects – like women’s stockings, girls’ school uniforms, socks, etc. And that desire transfers over onto the people wearing them. When I was a high school student, an adult man asked me to sell him my used stockings for 50,000 won [45 USD]. In this way, women’s very existence is sexually objectified by men. Meanwhile, women’s sexual desire is always being obstructed and poses a threat to its owner if it erupts.</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Crying out my sexual desir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Really, it’s not just women’s sexual desires but any type of female desire that society does not tolerate. Working women who desire promotions are criticized as overbearing, and women who desire material possessions are called snobs. Society is scared of the idea of women having desires, because its continued existence relies on their oppression. The desires to enter the workforce, to be free of having to care for children, or to at least choose a better husband (a desire that used to be necessary for survival) are treated as personal, narrow-minded, and unaccepta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 In the stories I’ve heard since I was young, men risking their lives and fighting to get a pretty bride have been depicted as brave, but women fighting for a good husband have been treated as greedy and awful. In fairy tales like “Kongjwi and Patjwi” and Cinderella, it is the “pure” woman with no desires who gets a good husband. In past society, wives were seen as men’s accessories, while husbands were needed for women’s survival. This situation meant that of course women had to choose the best possible men for their husbands. But men couldn’t accept the thought of needing to be chosen and so kept the power of choice all for themselve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ciety is still scared of female desire and doesn’t want to listen to women’s voices. Men enjoy women talking about their sexual desires as long as they keep within the limits set by men. Think about it – whose sexual desires are reflected in the pop idols dancing suggestively on TV while wearing school uniforms, in the child models wearing adult-style makeup, or in the very existence of tight-fitting school uniforms?</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So it was even more meaningful that women gathered to talk about their sexual desires and fantasies and make sexuality maps. By candidly revealing their desires and talking about how others’ desires sound and what they mean to them, the women were able to rethink their sexuality. They realized what they liked and what made them uncomfortable.</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If women want to, they can have this kind of talk anytime and anywhere, and until the day that doing so becomes normal and not fodder for men to consume, I’m going to keeping crying out my desires to the world. <span style="color: #2269dd;">[Translated by Marilyn Hook]</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georgia, palatino;">*Original article:</span> <a href="http://ildaro.com/8214" target="_blank">http://ildaro.com/8214</a> Published May 29, 2017</p>]]></description>
       <pubDate>2026-05-24 13:49:00</pubDate>
	   <section>sc100</section>
	   <section_k><![CDATA[English Article]]></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Gift)]]></author>
	   <category><![CDATA[English Article]]></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601'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40140924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40140924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여성들의 커먼즈 생태계, 초록상상의 ‘메티스’ 연대기]]></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1</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color: #266ad8; font-family: 바탕;">[연구소개] 이지아는 석사학위논문으로 「<a href="https://skhu.dcollection.net/srch/srchDetail/200000964977" target="_blank"><span style="color: #266ad8;">지역여성들의 실천적 지식으로 만드는 커먼즈 생태계 – 중랑구 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span></a>」를 썼다. 동북여성환경연대 초록상상의 18년 활동사를 정리한 작업으로, 지역여성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하며 사적 영역에 머물던 여성들의 일상 경험과 실천이 어떻게 공적 실천으로 확장되며 ‘호혜적 돌봄 커먼즈 생태계’를 구축해 왔는지 분석하였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453930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초록상상’에서 만난 이지아 연구자. 석사 논문으로 「지역여성들의 실천적 지식으로 만드는 커먼즈 생태계 – 중랑구 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를 썼다. (조영주 촬영)</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은 서울 중랑구 지역의 유일한 여성환경단체로 소개되고 있는데요. 어떤 곳인지 소개해주세요. 이지아 씨(활동명: 다달)는 초록상상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은 2007년 설립되었고, 중랑구 지역 여성들이 함께 건강하고 생태적이며 성평등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풀뿌리단체입니다. 도서관에 갔다가 초록상상의 ‘생태 안내자 양성과정’ 홍보 포스터를 보고 초록상상을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생태 안내자라는 말이 낯설기도 했지만 신선했어요. 우리 지역을 생태라는 관점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이런 시선의 강좌가 있다는 게 신기했고, 강좌에 누가 올까 궁금했어요. 여성만 모집한 것도 아니었는데, 참여자 모두 여성이었어요. 여성들이 공동체를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발휘하는 장이 열린 것 같았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사는 공간 혹은 내가 항상 오고 갔던 공간을 새롭게 둘러보고, 거기에 있는 생태계 구성원들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봉화산과 각 아파트 화단에 있는 나무들도 생태계의 한 부분이죠. 텃밭의 작물도 단순히 우리가 먹을 식재료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흙부터 시작해서 흙을 뒤집을 때 나오는 곤충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농사를 도와주는 생태계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었어요. 텃밭에서 밥상까지, 먹거리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노동을 거쳐서 오는지 연결되는 감각, 생태적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현재는 초록상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07년 초록상상 창립 직후부터 생태팀, 성평등팀, 돌봄팀의 활동가로 참여하였고, 2021년까지 팀장과 사무국 활동가, 사무국장을 맡아 단체의 핵심 의제와 사업을 직접 기획·수행하였습니다. 현재는 ‘창립 20주년 단체사 기록 TF팀’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의 활동은 2007년부터 지속되고 있지만, 단체의 역사는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1~4명의 비상근 사무국 인력과 240여 명의 회원 회비로 운영하다 보니 현실적 제약이 있었어요. 초록상상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너무 진심이고 최선을 다해서, 이 활동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활동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활동의 내용, 그 의미와 가치가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디에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단체로서도 그렇고. 새로운 활동이 이어지다 보니 지난 활동에 대한 기록을 자꾸 미루게 되더라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의 활동은 지역을 변화시켜 왔고 그 중심에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역사를 어떤 언어로 기록하여 전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년 2027년이 초록상상 활동 20주년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기록해 두지 않으면 시간이 더 지난 뒤에는 기록이 남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문제의식과 절박함으로 연구를 시작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기록의 정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연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단체의 자기 역사 기록의 의미를 분석한 임경진(2018)에 의하면, 이러한 기록은 남성 중심적·가부장적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의 경험과 주체성을 복원하는 페미니즘적 실천이자 ‘기록의 정치’라고 말해요.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할 기회를 얻고 ‘기록의 정치’를 배우며, 초록상상의 역사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역운동의 기록 방식을 살펴보면, 사업보고서나 성과공유회 등이 있는데요. 보통 수치로 평가를 하는데,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여성들의 활동과 경험도 있잖아요. 또, 누구를 중심으로 기록하는지도 중요해요. 처음에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분이 이후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그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주체가 되기도 하죠. 이렇게 지역을 변화시켜 온 주체들을 호명하는 작업이 ‘기록의 정치’라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행정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 자원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보는 게 필요하죠. 지역 활동의 기록은 너무 열악한 편이라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기록의 정치’는 지역에 훨씬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역 민주주의 운동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지난 18년간 초록상상이 해 온 활동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를 부탁합니다.</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8년간 진짜 많은 활동이 있었더라고요. 하나하나 의미가 커서 핵심적인 것을 고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에요. 제가 기억하고 기록한 것 중심으로 몇 가지만 이야기해볼게요.</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53340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07년 봉화산에서 ‘초록지구탐험대’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참나무잎 퍼즐 맞추기를 하는 모습. (이지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생태 안내자 양성과정을 통해 모인 지역 여성들은 생태팀을 만들고 생태 공부를 계속하며 봉화산과 아파트, 학교 등에서 생태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어린이 생태놀이 프로그램인 ‘초록지구탐험대’는 2006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주말 프로그램과 여름캠프로 운영되었어요. 생태팀이 답사와 학습을 통해 기획하고 운영한 이 프로그램은 도시 어린이들이 동네 숲을 중심으로 사계절의 자연 변화를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자연을 만나고 놀며, 지역의 다양한 생명체들에 대한 감수성과 생태계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 시간이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자연 속에서 한껏 즐거운 경험을 한 어린이들이 지역과 환경에 애정을 갖고 돌보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초지탐(초록지구탐험대의 약칭) 여름캠프를 할 때, 초록상상의 거의 모든 활동가들이 따라가서 건강한 음식을 끼니마다 직접 해 먹이면서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생태적으로 놀고, 주도적이고 협력적으로 활동을 꾸려나가도록 도왔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이 최근 힘을 쏟고 있는 일 중 하나는 ‘돌봄’이에요. 지역과 시대의 필요와 단체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닿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역의 많은 공공과 민간의 자원들이 이미 돌봄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돌봄 요구를 주민 스스로 찾고, 돌봄을 받기도 주기도 하는 ‘공동체 돌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2년에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의 서로이음 사업으로, 중랑건강공동체와 함께 ‘중화2동 홀몸어르신 구술생애사’ 작업을 했어요. 건강리더들이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이들의 삶의 변화와 어려움과 일상의 세세한 돌봄 필요를 듣고 글로 정리해서 책 『중화동에 살고 있습니다』(중랑구술생애사기록팀, 2022)를 출간했습니다. 사적 돌봄과 시장화된 돌봄을 넘어선 지역공동체 돌봄을 만드는 실천을 통한 ‘지역 지식’이라는 의미를 가지죠. 이렇게 체화된 지식은 상호의존적이며 공존 가능한 커먼즈 생태계를 만드는 필수 돌봄 자원이 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621178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13년 ‘초록상상’의 활동가 양성과정을 통해 모인 자원활동가들이 거리에서 십대 청소년 거리상담 ‘달수다’를 진행하는 모습. (이지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2013년과 2014년 진행했던 십대여성 거리상담 ‘달수다’ 캠페인은 가정과 학교의 보호와 돌봄을 받지 못하고 위기 상황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여성청소년들을 만나는 자리였어요. 지역에서 믿을 만한 어른이 되어 청소년들을 직접 거리로 찾아가 만났고, 주먹밥과 담요를 나눠주는 일상 지원과 더불어, 주체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적자기결정권, 피임법 등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어요. 캠페인 진행자였던 한 활동가는 “청소년들이 ‘이런 데 와서 내가 좀 환대받는 느낌이 들고, 나를 비난하지 않고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이 있구나’ 하는 표정을 지은 게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어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달수다’ 캠페인을 통해 가출 청소년들과 만나며, 초록상상의 성평등 활동은 지역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적 인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나아가 청소년들의 권리가 존중받을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이었다고 생각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논문은 초록상상 운동사를 ‘지역 여성들의 실천적 지식(메티스)을 생산하는 과정’으로 분석하고 있는데요.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메티스에 대하 설명해주세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학 수업에서 ‘메티스’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고, 지역여성운동과 연결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메티스’는 책이나 공식 교육을 통해 쉽게 전수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반복으로 습득된 실천적·경험적 지식을 뜻합니다. 초록상상이 18년 동안 펼쳐온 활동과 지역에서 버티고 싸워온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메티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계속 수정되고, 바뀐 부분들이 축적되며 새로운 부분이 만들어지고 공유되며 배타적이지 않은 것이 ‘메티스’의 특징입니다. 제임스 스콧(약자의 저항을 분석한 미국의 인류학/정치학자)의 ‘메티스(Mētis)’ 개념을 반다나 시바(인도의 생태사상가이자 반세계화 운동가)의 에코페미니즘과 황희숙(생태 공동체를 연구한 철학자)의 여성주의 인식론으로 재해석하여, 지역 여성들이 축적한 실천적 지혜를 ‘여성주의적 메티스’로 재개념화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color: #266ad8; font-family: 바탕;">〈초록상상의 여성들이 스스로를 ‘풀뿌리 활동가’로 정체화하며 메티스를 축적하는 과정은 일상의 구체적인 필요와 결핍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초기에는 육아, 먹거리, 안전 등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사적인 영역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모임을 조직하고 학습하고 이웃을 만나는 과정에서 사회와 지역 환경의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span></p><p><span style="color: #266ad8; font-family: 바탕;">이 과정에서 습득되는 지식은 외부로부터 얻은 정형화된 이론이 아니라, 지역사회라는 구체적 현장에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부딪힘을 통해 얻어지는 ‘체화된 지식’이다. 이들은 현장의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실패를 통해 대안을 수정하며, 동료들과의 대화와 성찰을 통해 개별적인 경험을 공동의 전략으로 발전시킨다.〉 -논문 「지역여성들의 실천적 지식으로 만드는 커먼즈 생태계 – 중랑구 초록상상의 활동 사례 연구」 (성공회대학교 시민평화대학원 실천여성학전공 석사, 2026) 중</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30728838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2년 중화2동 홀몸어르신 구술생애사 작업을 정리한 책 『중화동에 살고 있습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어르신과 건강리더. (이지아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span><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지역 여성들의 실천적 지식(메티스)이 만들어지는 구체적 사례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첫 번째는 초록상상 생태팀 활동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산에 가서 곤충 또는 새, 바닥에 있는 풀을 보며 이를 지식화하는 과정이 독특했어요. 소개 글이나 책을 쓰는 게 아니었어요. 우선 활동가들이 곤충, 새, 풀 등 생태계 구성원들에 대한 인식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인 다음, ‘어린이들 또는 성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생태적 관점으로 다시 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실행했죠. 그 과정이 초록상상이 축적한 경험적 지식 ‘메티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지역을 생태 관점으로 바라보며 재해석하는 지식을 만들고 공유한다는 점이 특별해요. ‘메티스’는 지금도 꾸준히 쌓여가는 중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두 번째는 구의회에서 예산 삭감으로 초록상상이 위탁 운영하고 있는 중랑구성평등활동센터가 없어질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지켜낸 경험입니다. 성평등이 얼마나 확산되었는지 양적 평가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인데요. ‘성평등이 왜 필요한가? 중랑구성평등활동센터가 지역에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어요. 여성 의제로 활동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지역 내 다른 영역의 활동가들도 협력해주셨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 중랑구성평등활동센터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지켜내야 할 지역 자산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죠.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고, 지역의 이런 자원을 지켜내는 힘이 바로 실천적·경험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다른 공공 자원이 만들어질 때도 주민들이 달려가서 협력할 것이고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실천적 지식(메티스)이 순환하고 연결되며 ‘커먼즈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의의가 연구에서 중요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초록상상 활동을 ‘커먼즈 세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이유는 무엇인가요?</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활용되어 세계를 재구성하는가에 의의가 있습니다. 요즘은 지식을 누가 소유했는지, 그리고 그 가격이 얼마인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잖아요. 초록상상의 활동을 바탕으로 형성된 지식이 있다면, 이것은 지역에서 누구든지 쓸 수 있다는 게 우리의 원칙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역에서 텃밭을 해보겠다는 분들이 있어서 초록상상에서 텃밭 강사 양성과정을 열기도 했어요. 공동의 자산이며, 지역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원이기에 커먼즈(Commons: 공유지, 공유자원, 공유활동) 개념과 연결된다고 보았어요. 개별 존재들이 분리되지 않고 타자와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를 함께 구성한다는 것이 ‘커먼즈적 세계’인데요. 초록상상은 이러한 세계를 만들고 싶어하고, 만들어왔다고 평가해도 될 것 같아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722dd;">[필자 소개] 조영주</span>. 내 삶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풀어보고자 성공회대학교 시민평화대학원 실천여성학과에서 공부했다. 6년째 청소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이자, 청년 여성들이 분투하고 있는 노동현장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여성노동 연구자다. 논문 「공간을 다루는 청년 여성 자영업자들의 몸 노동 경험: 집수리·도배·청소 업종을 중심으로」를 썼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3 11:01:00</pubDate>
	   <section>sc3</section>
	   <section_k><![CDATA[녹색정치]]></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조영주)]]></author>
	   <category><![CDATA[녹색정치]]></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30950265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30950265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즐거웠어야 할 크루드 축제 ‘네우로즈’에 혐오 선동이…]]></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60</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3월, 일본 사이타마현에서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크루드인들의 봄맞이 축제 ‘네우로즈’(Newroz)가 열렸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화창한 날씨에 쾌적할 정도의 따뜻한 기온, 넓은 아키가세공원에 크루드인 약 1천5백 명이 모여들었다. 봄맞이 축제를 즐기러 온 참가자들은 색색의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서 원을 이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굉장히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도 이 축제는 20년 가까이 열렸다. 크루드인들 중에는 체류자격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난민신청 중에 있어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춤을 좋아하는 민족이어서 네우로즈 축제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고, 올해도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을 모두가 함께 기뻐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21348317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3월 일본 사이타마현 아키가세공원에서 열린 봄축제 ‘네우로즈’(Newroz)에서 춤추는 크루드인들. [사진-오다 아사히(織田朝日) 제공]</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집요한 혐오가 축제의 자리까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이들의 즐거움을 방해하러 온 일본인도 있었다. 전통 축제에 불과한데도, “테러리스트의 축제를 중단시켜라!”라며 네우로즈 중지를 주장하러 아키가세공원까지 찾아온 사람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는 3년 전부터 크루드인에 대한 온라인 상의 공격과 혐오가 시작된 후, 상황은 점점 격렬해져 개인정보까지 노출되는 데 이르고 있으며, 이 분위기는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크루드인들이 많이 사는 사이타마현 와라비역 앞에는 연일 크루드인을 비방하는 가두선전 활동을 하거나, 크루드인이 경영하는 가게에까지 찾아가 일부러 카메라를 들이대는 도발을 하는 유튜버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인종혐오에 장기간 노출된 크루드인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본에서 살아가는 크루드인들이 그나마 마음을 의지하는 축제인 네우로즈에까지 혐오 세력이 나타나 방해한 것은 최악의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영상을 찍어대고, 크루드인들을 모욕했다. 네우로즈에 참여한 크루드 여성은 “비자는 나오지 않고, 크루드인에 대한 괴롭힘이 계속 이어진다. 항상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가 가득하다.”고 탄식하였다. 아이들도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 방해꾼들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결국,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혐오는 괴롭힘이자, 폭력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경찰의 경호 하에 행사장에 들어온, 집요한 혐오를 계속하는 이웃 도다시(戸田市)의 시의원을 보고서 크루드인들이 크게 분노하였다. 소중한 네우로즈 행사를 방해받자 참가자들은 흥분해 고함을 쳤고, 그러다가 한 크루드인 남성이 시의원의 뺨을 친 것. 시의원은 과장되게 쓰러지더니 구급차가 올 때까지 20분 정도를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행사장은 소란해지고, 춤은 일시 중단되었다. 모든 것이 다 어그러졌다. 의원은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의 피해 상황을 소셜미디어 X에 호소했다. “크루드인은 역시 흉폭하다”, “일본에서 나가!”라는 목소리가 댓글로 달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하자면, 크루드인들이 받아온 괴롭힘은 폭력이 아닐까? 크루드인들은 3년이나 모욕과 신변의 위험을 견뎌왔다. 학교에서 호되게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반격을 하면, 과연 반격한 아이만이 문제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굳이 도발을 하기 위해 봄축제에 찾아와, 특히 이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입힌 의원들을 그 현장에 있던 일본인인 나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번역: 고주영]</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2 12:06:00</pubDate>
	   <section>sc4</section>
	   <section_k><![CDATA[국경너머]]></section_k>
	   <section2><![CDATA[아시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오다 아사히)]]></author>
	   <category><![CDATA[아시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212356411.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212356411.jpg]]></image>
     </item>

     <item>
       <title><![CDATA[탈시설장애인당과 조상지 후보의 등장이 말하는 것]]></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59</link>
       <description><![CDATA[<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3366ff;">질문:</span> 이제 곧 지방선거라 후보자들과 정당들을 살펴보게 되는데요. 탈시설장애인당이라는 이름이 보이더라고요?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02ed0;">장혜영</span>: 한국의 민주주의는 대의제에 기초한 정당 민주주의입니다. 헌법 제8조는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흔히 ‘양당’이라고 부르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은 물론이고, 제가 몸담은 정의당과 같은 다양한 정당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근 몇 번의 선거에 낯선 당의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름하여 ‘탈시설장애인당’입니다. 과연 탈시설장애인당이 어떤 당인지, 탈시설장애인당의 존재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짚어보려 합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이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2021년 1월 13일, 4.7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만든 ‘가짜정당’이자 ‘위성정당’, 그리고 ‘투쟁정당’입니다. 이는 제가 만든 수식어가 아니라 당시 전장연의 보도자료 표현 그대로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보궐선거의 본선거 시작 전에 산화할 ‘가짜정당’입니다. 2021년 보궐선거에서 장애인의 의제를 알려내고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위성정당’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장애인의 힘으로 만드는, 장애인차별 철폐에 공감한다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탈시설의 전선을 구축하고 장애해방을 앞당기는 ‘투쟁정당’을 목표합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11719683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탈시설장애인당 소개 (출처: 탈시설장애인당 홈페이지 <a href="https://drparty.or.kr" target="_blank">https://drparty.or.kr</a>)</p></td></tr></tbody></table><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다스릴 정(政) 무리 당(黨)자를 쓰는 정당(政黨)이 아니라, 바를 정(正) 마땅할 당(當)자를 쓰는 ‘정당(正當)’을 표방하는 탈시설장애인당은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에서 언제나 한쪽으로 밀려나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되거나 아예 ‘문제’ 취급을 받아온 장애인의 존재를 무대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야심 찬 프로젝트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2021년 4.7 재보궐 선거에서 장애인 이동권과 자립생활을 비롯한 11개의 장애인 권리 의제를 상징하는 11명의 서울시장 후보를 발표하고 약 3개월간 활발한 유세 활동을 펼친 뒤, 본선거운동 기간을 앞두고 활동을 중단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과정에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당법상 등록된 정당이 아닌데 ‘당’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공문을 발송한 것입니다. 창당 첫날부터 이 당이 ‘가짜정당’임을 만천하에 선포했음에도, 선관위 혼자 ‘아무나 ‘당’을 쓰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은 셈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의 대응은 어땠을까요? ‘그럼 성당도 당인가? 식당은 어떤가?’ ‘탈시설장애인숭구리당당은 괜찮나?’ ‘거대양당의 위성정당은 버젓이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소수자가 모여 정치에 참여하는 정당만 불법이라고 압박하는 서울시선관위를 규탄한다!’ 선관위의 황당한 공문은 힘 있는 기성정당의 반칙에는 아무 말도 못하지만, 바로 그 기성정당들이 외면한 소수자의 새로운 정치참여 활동은 법을 들먹이며 억압하는 선관위의 모순을 스스로 폭로하는 해프닝이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에도 탈시설장애인당은 2022년 대통령선거 및 지방선거, 2024년 국회의원 선거, 2025년 대통령선거에서도 후보를 세우고 정책을 발표하고 유세활동을 하며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를 대변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4일, 12.3 내란 극복 1주년을 맞이한 다음날에 2026년 6.3 지방선거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는데, 왜 누군가에게는 축제가 아닌 투쟁일까요?)</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조상지 서울시의원 지역구 출마’라는 정치적 사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번 지방선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탈시설장애인당의 활동은 단연 중증 뇌병변 장애 여성이자 탈시설 당사자인 조상지 활동가의 서울시의원 지역구 출마입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14146337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조상지 후보가 5월 15일 서울특별시의원 종로구제2선거구에 출마하고자 후보 등록을 마쳤다. (출처: 탈시설장애인당)</p></td></tr></tbody></table><p><br /><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애인차별 철폐의 날’인 4월 20일, 조 후보는 광화문에서 종로구 제2선거구에 지역구 시의원 출마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정치 1번지’이기 때문입니다. 종로가 정치1번지인 이유는 힘 있는 정치인들을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이 민주주의 안에서 살아남겠다고 투쟁한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종로구 제2선거구에는 전장연 출근길 지하철 투쟁의 거점인 혜화역이 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조상지 후보는 생후 8개월 무렵 고열로 뇌병변 장애를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15살 소녀 조상지를 가족들 몰래 시설에 입소시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같은 아이들은 너희 같은 아이들끼리 살아야 한다.” 그렇게 15년을 열악한 시설에서 버티다, 서른이 되던 해에 어머니의 도움으로 마침내 탈시설을 했습니다. 2008년의 일입니다. 이후 조 후보는 노들장애인야학에 다니며 장애인 권리보장을 위한 투쟁에 합류해 열성적으로 활동해왔습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어릴 때부터 정치를 꿈꿔온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먼저 꿈꿨던 것은 살아남는 일이었고, 시설 밖에서 내 삶을 꾸려가는 일이었고, 동료들과 함께 권리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투쟁의 현장에서 정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활동지원 시간 삭감, 장애인노동자 해고, 탈시설지원조례 폐지 같은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정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우리의 삶을 직접 흔드는 것이라는 걸 똑똑히 보게 됐습니다.” 조 후보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출마의 변입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뇌병변 장애여성, 탈시설 당사자인 후보의 ‘어린이날·어버이날’ 메시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언어장애가 심해 육성 대신 AAC(보완대체의사소통)를 통해 언어소통을 하는 조상지 후보의 언어는 거침이 없습니다.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을 맞이해 조 후보는 두 개의 논평을 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날 논평, 다른 하나는 어버이날 논평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아이들은 자라면서 더 멀리 나간다는데, 저는 자라면서 더 집 안에 머물렀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의 등에서 내려와 자기 발로 걷는다는데, 저는 엄마의 등에서 내려온 뒤 갈 수 있는 곳을 잃었습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세상과 가까워진다는데, 저는 자라면서 세상에서 멀어졌습니다. (중략) 어린이날은 아이들이 자라는 일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장애아동은 어디에서 자랍니까. 장애아동은 누구와 자랍니까. 장애아동은 어떤 길을 지나, 어떤 친구를 만나, 어떤 동네를 경험하며 자랍니까. 장애아동에게도 부모의 품과 가족의 등을 넘어, 자기 삶의 세계로 나아갈 권리가 보장되고 있습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진보적 장애운동 현장에서 활동가로 말하고, 탈시설장애인당 서울시당 대변인으로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략) 그런 어머니도 너무 힘들 때마다 제게 말했습니다. “상지야, 같이 죽자.” 이것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언니는 어릴 때 어머니가 농약병을 앞에 두고 같이 죽자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언니는 연탄불을 피워놓고 같이 죽자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오빠는 바닷물에 빠져 같이 죽자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장애아동이 태어났을 때, 부모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말이 “같이 죽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애아의 부모가 평생 들어야 하는 말이 “당신이 책임져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중증 장애인의 삶이 부모의 등, 부모의 허리, 부모의 눈물, 부모의 포기 위에 겨우 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의 장애아동들은 부모의 희생만으로 살아남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투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합니다. 그래서 저는 탈시설장애인당當으로, 장애인도 시민으로 살아가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말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저는 다른 정당에 소속된 사람이지만, 탈시설 당사자의 가족으로서 제게 이번 지방선거 최고의 메시지는 조상지 후보의 이 논평입니다. 계단을 내려와 집 앞 골목 끝의 슈퍼마켓에 가는 것이 어린이날 소원이었던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 가족의 등에 업히지 않아도 자기 삶의 세계로 나아갈 권리가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다음 세대의 장애아동들은 부모의 희생이 아닌 사회의 연대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치에 나섰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치란, 선거란 그저 또 한 명의 당선자와 다수의 낙선자가 나오는 경마와 같은 게임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의 관계를 규명하고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이 뜨거운 논평들은 일깨워줍니다.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지금껏 기성 정치가 제대로 대변하지 않았던 삶과 권리에 대해 조 후보는 온몸으로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21182154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4월 20일, 조상지 후보가 출마 선언을 했다. (출처: 탈시설장애인당)</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탈시설장애인당과 조상지 후보가 제기하는 정치적 이슈</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과 조상지 후보의 활동을 보며 느끼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사회도 마침내 이런 후보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증장애 당사자가 선거 시기에 자신의 경험을 제도 정치의 공간에서 이야기하며, 그것이 이 사회의 공적 의제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시민들에게 지지를 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 발 전진한 것이라고 평가할 만한 사건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세훈 서울시장처럼 그동안 대의정치권력을 쥐고 흔들며 장애시민들의 삶을 외면해온 기존 정치세력들을 단호히 비판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의 당사자로서 대안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직접 대안이 되겠다는 선언은, 장애인을 정치와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객체와 대상으로 간주해온 기존의 패러다임을 시원하게 뒤집어버리는 쾌거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상황은 동등한 시민으로서 장애인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 특히 그 중에서도 장애인의 ‘탈시설’이라는 의제가 기성 정치권에서 얼마나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장애인 권리를 외치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정치적 갈라치기와 공격의 도구로 활용했던 국민의힘 이준석-윤석열 콤비가 승리한 2022년 대선 이후, 전장연이 요구하는 장애인 권리 예산과 관련 정책은 진영을 막론하고 날 선 비난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시위의 내용과 취지는 주류 미디어를 통해 왜곡되기 일쑤였습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오세훈 시장은 보복이라도 하듯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 일자리 예산을 전액 삭감해 400여명의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했습니다. 전장연 시위와 탈시설 정책이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여론의 지탄을 받자, 몇몇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아예 이 의제에 관해 말을 꺼내는 것을 피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려면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하는 정치로는 더이상 충분치 않다는 것을, 탈시설장애인당의 당원들과 후보들은 절절히 느꼈을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끝으로 제가 절감하는 것은 양당에게는 한없이 낮고, 나머지 정당들에게는 한없이 높은 한국 정당정치의 벽입니다. 조상지 후보는 탈시설장애인당의 당원이지만 법적으로는 무소속 후보입니다. 탈시설장애인당이 정당법상 정당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법외정당이기 때문입니다. 현행 정당법은 5개 이상의 시ㆍ도당을 가져야 하고, 각각의 시ㆍ도당은 해당 지역에 1천명 이상의 법정 당원을 가져야 합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정당이 당원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이 많은 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전국에서 휠체어를 탄 채 이용할 수 있는 시외고속버스는 단 한 대도 없습니다. 2024년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국의 편의점 5만 7천여개중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게 편의시설을 설치한 곳은 약 2천2백곳으로, 4%도 되지 않았습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성된 정당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치활동의 제약 요소가 도처에 깔려있는 것입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렇게 불평등한 환경에서 1천명 이상의 당원으로 구성된 5개 시도당을 구성해야 한다는 정당법상 요건은 ‘정당 설립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과 대조적으로, 사실상의 봉쇄조항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탈시설장애인당當 서울시당은 정당법의 이 조항들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선거의 의미를 묻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이 투쟁하는 만큼 한국 사회가 변화합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탈시설장애인당은 공식 웹사이트(<a href="https://drparty.or.kr" target="_blank">drparty.or.kr</a>)의 소개란에서 발견한 문구입니다. 선거는 누가 1등인지를 가려내는 게임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 안에 소속된 사람들이 서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 연결을 느끼고,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숙고하는 총체적이고 변화무쌍한 경험이자 과정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탈시설장애인당이 투쟁하는 만큼 한국 사회가 변화한다는 말에 저는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c237c7;">[필자 소개] 장혜영.</span>  21대 국회 정의당 국회의원.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감독이자 동명의 책을 썼다. 현재 정의당 마포구위원회 지역위원장이자 비영리단체 ‘망원정x’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color: #0000ff; font-family: 바탕;">※[장혜영에게 정치를 묻다] 여러분이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습니다! <a hre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 target="_blank"><span style="color: #0000ff;">https://forms.gle/ChadDMccSzHkwR448</span></a></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21 09:12: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정치/정책]]></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장혜영)]]></author>
	   <category><![CDATA[정치/정책]]></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120508390.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2120508390.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우정으로 냉장고를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58</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가정의 달 5월, 여기서 ‘가정’은 무엇일까? 흔히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혼인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조건에 충족하지 못하면 가정을 이룰 수 없는 걸까? 혹은 생계나 주거를 함께하는 생활 단위가 아니어도, 서로를 돌보고 일상을 나누는 관계들 또한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을까? </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여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적인 돌봄이 국가를 거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해결되길 바란다면, ‘무엇으로 만들어진 가정’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 가정’인지, 즉 어떤 돌봄과 일상을 주고 받는 관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 설연휴에 ‘예비 할머니 모임’이 함께한 ‘만두 김장’을 통해 우리가 상상한 노후의 생활공동체 한 장면을 나누고자 한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19253356.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지난 설연휴에 아홉 명의 예비 할머니들이 어느 공동체주택 주방에 모여 ‘만두 김장’을 함께 했다. 만두소를 만드는 칼질 시간.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왜 하필 만두 김장이냐면</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2025년 단기 프로젝트로 시작된 ‘예비 할머니 모임’은 올해도 이어졌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노후를 고민하는 젊은 세대들의 관계 네트워크가 너무 아쉽고 소중했기 때문이다. 함께 생활공동체를 탐구하는 동안, 생활공동체라는 것이 대단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맺는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가족처럼. 시간과 공간, 관계가 이어질 때 생활공동체도 실체를 가진다. 관계는 시간을 들여 함께 일상을 나눠야 비로소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나는 종종 예비 할머니 모임이 ‘생활공동체 양성소’가 되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한다. 각자의 생활공동체를 꾸리고 이 모임에서 서로 연결되길 바란다. 현재 우리 모임에는 자신의 생활공동체를 구체적인 미래로 만들어내기 위한 기초체력을 쌓는 예비 할머니부터, 이미 생활공동체를 시작한 예비 할머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예비 할머니들이 있다. 올해 우리의 목표는 생활공동체를 공부하며 ‘장기적으로 관계 맺는 시간’ 갖기를 연습하는 것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생활공동체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한 동네에 산다면 어떤 일상을 살게 될까? 상상컨대, 자주 함께 밥을 차려 먹고, 종종 심야영화를 보러 가며, 별일 없이 만나 산책하는, 평범하면서도 어쩌면 비범한 삶을 꿈꾼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도시 노동자이자 세입자로 살며 필연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원대한 목표다. 우리는 이 상상력을 일부 실행에 옮기며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낙관하고 싶었다. 그러다 꺼낸 이야기가 친구들과 만두를 빚는 일이었고, 또 누군가는 대용량의 요리를 김장에 빗대어 말하며, 결국 ‘만두 김장’을 하게 됐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일종의 ‘가족극’</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설연휴 마지막 날, 우리는 서울 서부권에 위치한 어느 공동체주택의 공유 주방에 모였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6인용 식탁은 아홉 명의 예비 할머니들이 가져온 도마들로 가득 찼다. 여섯 명이 부추와 버섯을 칼질하면, 자리가 없는 두 명은 다 채워진 그릇을 비우고 쓰레기를 치우거나 두부의 물을 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키라라의 전자음악과 함께 끊이지 않는 칼질 리듬은 만두소를 산처럼 쌓았고, 그만큼의 이야기도 쌓였다. 각자의 집에서 듣는 명절 잔소리를 나누기도 하고, 나중에 우리가 생활공동체를 하게 되면 1년에 몇 번의 명절을 치루고 싶은지, 어떤 음식을 만들고 싶은지와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만들어진 2백여 개의 만두 중 일부는 그 자리에서 구워 먹고, 각자 가져온 용기에 야무지게 담기도 했다. 그러고도 만두소가 남아서 밥을 볶아 먹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19479080.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드디어 만두 빚기 시작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돌이켜보면 으레 명절 풍경이란, 온갖 애들이 들러붙어 밀가루 반죽 놀이를 하고 그래도 좀 머리 큰 애들이 만두 같은 걸 빚어 보려고 만지작대는 모습이었다. 그걸 보며 어떤 어른은 칭찬이랍시고 있지도 않은 미래의 딸래미 얼평(‘예쁜 딸 낳겠네!’ 등)을 하곤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반면, 이곳에서는 칼질의 침착함이나 썰린 재료의 단정함, 노동에의 몰입도 같은 것에 대한 칭찬만이 오갔다. 다양한 모양의 만두가 나오니 새로운 요리도 시도할 수 있었고, 서로의 만두 빚는 모양을 알려주고 배웠다. 여기에는 잘함과 못함이 아닌 다름만이 있었다. 30대 미‧비혼율 50% 시대, 그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만드는 명절은 다정함 뿐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부장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실 명절날 여성들이 부엌에 북적이는 것이 낯선 일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만두 김장을 함께 하며 가족의 진짜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정상가족’이라는 경계는 다양한 생활공동체의 존재와 가능성을 가린다. 중요한 건 혈연이나 결혼 여부가 아니라 ‘함께하는 일상’이다. 만두 김장은 일종의 가족극을 통한 역할의 재구성인 것이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예비 할머니 모임이 노후에 대한 불안을 다루는 방법</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많은 사람들이 저축이나 결혼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예비 할머니 모임에서 준비하는 노후는 결혼 외의 방식으로 가족을 일구며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재밌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꾀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현재의 불안을 다루고자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지난 번 모임에서 우리는 60대의 구체적인 하루를 상상해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어떤 일과를 보내며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지, 60대의 내 일상이 되었으면 하는 하루를 그려보고, 그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이야기 나눴다. 60대가 되어서도 계속 일하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은퇴하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양한 문화센터들을 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운동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도 했으며, 하루의 한 조각에는 꼭 친구들과의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관계와 여유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어진 ‘노후의 일과를 현실화하기 위한 지금의 실천’을 떠올리는 것은 다소 막막했으나, 상상한 일과 중에서도 ‘중요하다 여기는 부분을 지키기 위한 실천’으로 조금 더 구체화하니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사실 많은 부분 ‘돈을 많이 벌어둬야 한다’로 퉁쳐질 지 모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노후를 준비한다. 하지만, 퉁쳐서 생각한 대안이 현재의 나를 잡아먹고 있진 않을까? 한 참여자는 “적다 보니 꼭 나이를 먹고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네요.”라고 말했고, 이후 운동 레슨을 등록했단 소식을 전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2008311.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반달 모양부터 딤섬 모양까지 제각각 만두들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한강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건강한 노후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또 그런 현재의 구체적인 실천들이 모여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면 안심하고 현재를 즐기며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비슷한 생애주기적 역할을 요구받는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로 채찍질 당하며 헐레벌떡 사는 삶은 초조함을 불러오고, 시간에 쫓기는 선택은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 멈춰서서 고민해야 한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내 미래를 함께할 것인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것이 예비 할머니 모임에서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사회가 결혼을 통해 가족을 만들도록 유도하고 그 틀 안에서 미래를 설계토록 한다면, 그 밖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이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둬서 돌봄을 외주하는 문제를 넘어선 고민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는 생활공동체를 공부하며 가족을 고민한다. 식구라고 불리는 밥을 먹는 공동체, 두 사람의 로맨스에서 시작된 경제 공동체, 혈연이나 입양으로 연결된 법적 의미의 가족까지. 그 의미나 실체를 뜯어보고 파헤쳐가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가족의 상을 그린다. 우리는 피를 나누지도 않고 같이 살지 않더라도 근거리에서 서로를 돌보는 우정 공동체를 가족으로 부르고 싶었다. 그것을 왜 가족이라고 불러야 하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왜 그렇게 부르지 못하는지 되묻고 싶은 것이다. ‘정상가족’만 가족으로 고집하는 사회는 수많은 결핍을 낳고 있지 않은가.</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급할 건 없다: 미래를 작당모의하는 예비 할머니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정착하고 싶어하고, 그 중 가장 견고한 울타리를 가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예비 할머니 모임’ 안에서 가족의 확장을 고민하며 서로가 견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고, 팀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례들을 만나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네트워크를 재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모임원은 이 모임의 참여동기를 미래의 하우스메이트를 찾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 할머니 모임’은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곳에서 만나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어떤 가족을 만들었는지, 그 삶이 순탄하게 이어지고 있는지 같은 시행착오들이 듣고 싶어진다. 언제까지고 ‘정상성’에 밀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끼리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세상의 풍파같은 건 느낄 새도 없다고 얘기하게 될까? 그렇게 가끔 모여서 사는 이야기도 좀 하고, 생활공동체도 회사의 가족휴가를 쓸 순 없을지 궁리도 하며 꾸준히 작당모의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본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92030365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완성된 만두를 담아 인증샷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일찌감치 노후를 준비하며 배우는 것은,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운동은 평생 해야 하는 거니까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기까지 끊임없는 시도를 할 수도 있고, 가족 구성원이 성애적 관계로 맺는 한 명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을 탐색하며 가족으로 섭외해 볼 수도 있다. 생활공동체가 모여 살 마을을 찾아나선다는 명목으로 자유로이 여행 다니는 것도 빠질 수 없겠다. 타임어택 같았던 삶에서 튕겨져 나오니 세상엔 그렇게 급할 것도 없었다. 시간적 여유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온다. 여기, 시간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은 서로를 기다려줄 수 있다. 우리는 장기적 전망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집에 돌아와 함께 만든 만두를 서로 겹쳐지지 않도록 예쁘게 펼쳐 냉동실에 넣었다. 우리의 활동이 유형의 결과물로 나와 일용할 양식이 됐다. 김할머니가 만든 냉이반찬, 박할머니가 만든 봄동샐러드가 냉장고를 채우고,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함께 두쫀쿠 김장을 하는 미래가 상상됐다. 우정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style="color: #b937c7;">[필자 소개] 콩쥐야</span>: 알 수 없는 미래에 혼자 벌벌 떨다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헤쳐나가기로 함. 현재 생활공동체를 실험 및 공부하고 있으며 이후 ‘생활공동체 연대체’ 설립을 꿈꾸는 생활체육인.</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9 09:17:00</pubDate>
	   <section>sc1</section>
	   <section_k><![CDATA[사회]]></section_k>
	   <section2><![CDATA[가족/관계]]></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콩쥐야)]]></author>
	   <category><![CDATA[가족/관계]]></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921342386.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921342386.jpg]]></image>
     </item>

     <item>
       <title><![CDATA[여성 노동운동사가 살아 숨쉬는 인천으로 역사기행]]></title>
       <link>https://www.ildaro.com/10457</link>
       <description><![CDATA[<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72년,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로 민주노조 ‘여성’ 지부장이 선출된 곳은 어디일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바로 인천 만석동에 있던 동일방직이다. 당시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 1,283명 중 88%(1,214명)가 여성이었다. 하지만 노조의 지부장과 간부직은 소수의 남성들이 독점했고,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활동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 장벽을 깨고 1972년 5월, 주길자 씨가 한국 최초의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2943437.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2026년 5월 9일, 인천역에서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 탐방이 시작됐다. 페미로 깃발 모습.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인천은 한국 여성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쉽게 접하지 못했던 여성노동운동의 정보를 나누고 그 흔적을 찾아가는 탐방이 지난 5월 7일과 9일 진행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에서 주최한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는 인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배우는 온라인 강의와 현장 답사로 구성되었다. 역사 강의는 유경순 한국여성노동운동 연구자가, 현장 답사는 박명숙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이 길잡이를 맡았다. 답사의 마지막 여정으로는 동일방직 제3대 여성지부장이었던 이총각 선생님과의 차담회가 이어졌다. 치열했던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차별과 억압을 뚫고 피어난 여성노동 운동의 힘</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7일 저녁 진행된 강의에서 유경순 연구자는 “인천은 개항 이후 근대문물이 유입되고 대규모 공업지대가 형성된 산업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가혹한 노동환경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여성노동운동의 효시이자 성지”라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먼저, 일제강점기에 가혹한 장시간 노동과 폭력에 맞선 성냥공장 소녀 노동자들이 있었다. “하루 13시간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33전이라는 턱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했다. 소녀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총 다섯 차례 대규모 동맹파업을 감행”했다. 투쟁의 목표 또한 “임금인하 반대에서 점차 ‘임금인상’과 ‘8시간 노동제 실시’라는 노동권 쟁취로 발전”시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또, 전국 최대 미곡 집산지였던 인천의 정미소에는 수많은 ‘선미여공’들이 있었다. “하루 10~14시간 일하면서도 생존이 불가능한 수준의 임금을 받았고, 수시로 일본인 감독관의 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되었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은 1924년 ‘선미여공조합’을 결성했다. 여공조합은 “임금인상과 구타방지, 여성차별 금지 등을 요구하는 파업을 성공시키며, 1920년대 인천 노동운동의 핵심으로 성장”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0366303.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 붙어있는 인천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의 지도. “이곳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이어 유경순 연구자는 1970년대 인천 만석동의 동일방직을 “한국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곳”으로 소개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도시산업선교회의 교육을 통해 권리의식을 깨우친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의 여성 노동조합 지부장 주길자를 선출했기 때문”이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하지만 “사측은 남성 노동자들을 사주해 여성 (노조) 집행부를 짓밟으려 했고, 여성들은 1976년 (군부독재 하에) 강제 연행하려는 경찰에 맞서 작업복을 벗고 저항하는 ‘나체 시위’”를 벌였다. 또 “1978년 2월 노조 대의원 선거일에는 회사 측 구사대(회사에 고용되어 조합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가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리고 먹이기까지 한 ‘똥물 투척 사건’이 발생”하는 등 노조 탄압이 계속됐다. 124명의 여성 노동자가 부당해고 당했고, 중앙정보부와 섬유노조가 배포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다른 직장에 취업하는 것조차 봉쇄당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럼에도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부평공단의 반도상사에서 1974년 여성 지부장이 탄생했고, 당시 만연했던 ‘결혼 후 강제퇴사’ 관행을 폐지”시켰다.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은 코스모스전자, 진진양행 등 인천의 중소규모 여성 사업장으로 들불처럼 번졌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19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는 ‘임금 불평등 해소’와 모성보호, 그리고 관리자들의 성적 모욕과 욕설, 폭행을 중단하라는 ‘인격적 대우’”였다. 투쟁을 통해 “호주인 여성노동자의 가족수당 지급을 확보”하기도 했다. 유경순 연구자는 “그동안 남성만 가장으로 인정하던 관행을 깨고, 비록 ‘호주’라는 제한이 있지만 여성도 가장이라는 것을 인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부당해고와 블랙리스트로 현장에서 쫓겨난 여성 노동운동가들 또한 멈추지 않았다. 이총각 동일방직노조 전 지부장을 비롯한 이들은 지역사회로 눈을 돌렸다. 이총각 전 지부장은 전세김을 빼서 구월동 모래내시장 인근에 공부방을 마련했다. 이후 빈민 자활기관 ‘청솔의집’ 센터장을 지내며 가난한 주민들 곁을 지켰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1057345.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박명숙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의 인솔 하에 〈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 탐방이 진행되었다. 자유공원으로 가는 계단을 지나 만석동으로. 그리고 하늘색 철문이 있는 동일방직 앞에 도착했다. 동일방직 건너편엔 당시 노동자들이 이용했다는 가게가 그대로 간판을 달고 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 font-weight: bold;"><br />현장에서 목격한 여성 노동자들의 발자취</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9일 진행된 현장 탐방은 인천역에서 출발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의 ‘페미로’ 깃발 아래 모인 약 15명의 참여자들은 주말이라 활기찬 분위기의 차이나타운을 걸었다.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지나며 박명숙 회장은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놀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많이 모여 놀았다고 한다”고 설명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동일방직 인천공장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부지 7만5천817㎡에 조성된 방직공장으로, 1934년 일본의 5대 방적업체 중 하나인 동양방적이 조선에 진출해 조업을 시작한 곳이다. 해방 이후에는 서정익이 인수하여 1966년 동일방직으로 회사명을 개칭한 후 운영했다. 2017년 가동이 중단된 이후, 현재는 일부가 물류창고로 쓰이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박명숙 회장은 “동일방직공장 부지가 사유지이긴 하지만, 여성노동운동의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이기에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다.”며 “이 공간을 시민들을 위한 한국여성노동박물관으로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사회에선 동일방직의 문화적 활용 방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5266579.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화수시장으로 가는 길. 시장 내부는 이제 영업을 멈춘 곳들이 대부분이고, 방앗간만 불이 켜 있었다. 과거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에서, 탐방 참여자들은 ‘페미로’ 기획단이 사전주문한 화수 방앗간 떡을 먹으며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떠올렸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탐방은 화수시장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인 화수시장은 이제 운영되는 가게가 거의 없다. 방앗간 두 곳만이 영업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 이곳은 많은 노동자들이 찾아와 생필품을 마련하고, 떡을 사 먹던 공간이었다. 화수시장과 화수아파트 인근에 자리해있던 600석 규모의 인천극장 또한 노동자들이 많이 찾던 곳이었지만, 이제 그 자리엔 마트가 자리하고 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화도 고개를 걸어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이동했다. 화도 고개는 투쟁을 하던 여성노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애환이 서린 언덕길이라고 한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 기독교인들이 ‘산업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며 출발한 단체다. 가장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던 도시 노동자를 대상으로 “약한 자를 강하게” 정신을 바탕으로 사역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곳은 1970년대 인천 지역 여성노동운동이 태동하고 성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여성노동자들을 모으고 교양 교육, 소그룹 활동, 지도자 훈련 등을 제공하며 스스로 권리를 깨우치고 주체적인 노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6411292.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인천도시산업교회 곳곳에서 당시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당시 산업선교회 목회자들은 현장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공장에 들어가 노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과 소통을 위해 여성 목회자인 조화순 목사를 초청했다.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취업하여 6개월간 일했고, 노동자들과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그리고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적극적인 교육과 지원은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탐방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동일방직 제3대 여성지부장이었던 이총각 선생님을 만나 경험담을 듣고, 참여자들이 질문을 던지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더욱 깊이 접할 수 있었다.</span></p><p> </p><p><span class="bold" style="font-family: 바탕;">‘모범 여공’에서 투사로, 후회 없는 연대의 삶</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총각 선생님은 1966년, 18세 나이로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먼저 공장을 다니고 있던 언니의 소개로 공장에 입사할 당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입사 신체검사에서 남성 의사에게 성추행을 당해 잊지 못할 ‘수치심’을 느꼈다. 그럼에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죽어라 일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여성으로, 딸로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우리 사회에서도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되는 차별을 받았다. 그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단체나 모임에서 남자들이 주도하는 거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너무 가난하니까 그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가지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적당히 좋은 남자 만나 시집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당시 여성들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내가 살던 동네/지역이 너무 지겹고 지긋지긋한데, 거기서 탈출하는 건 결혼이라고 생각했으니까.”</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은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뉜 3교대였다. 밥 먹을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먼지와 소음이 가득한 “생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할당량을 초과 달성해 관리자들에게 칭찬받는 기계 같은 ‘모범생’”처럼 일했다.</span></p><p> </p><table class="body_img_table body_img_center" style="width: 750px;" border="0" cellspacing="0" align="center"><tbody><tr><td><div class="body_img_table2"><img id="img_pop_view"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ildaro.com/imgdata/ildaro_com/202605/2026051737113514.jpg" alt="" width="750" border="0" /></div><p class="body_img_caption">▲ ‘페미로’ 탐방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총각 동일방직노조 전 지부장과의 차담회는 약 한시간 진행되었다. 80세의 이총각 선생님은 참여자들이 궁금해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다</p></td></tr></tbody></table><p><span style="font-family: 바탕;"><br />변화가 찾아온 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선배들을 만나 소모임 활동에 참여하면서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언니들을 통해서, 몰랐던 이야기를 들으니까 새로운 게 자꾸 보이고 관심이 갔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의 교육을 통해, 노동조합의 존재와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는 ‘가난이 부모 탓’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뼈 빠지게 일해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깨달으면서 점차 부당한 현실에 맞서는 주체적인 노동자로 각성하게 됐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후 이총각 선생님은 ‘모범 여공’이 아니라 노조 대의원이 됐다. 그리고 지도부 내 총무가 됐고, 1977년에는 제3대 지부장으로 당선됐다. 사측과 정권은 여성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1976년, 이총각 선생님은 경찰의 강제연행에 맞서 여성 조합원들이 작업복을 벗고 저항한 ‘나체 시위’ 현장을 지켰고, 지부장이 된 후인 1978년 2월 21일에는 사측의 사주를 받은 남성 조합원들이 대의원 선거를 막기 위해 여성들에게 인분을 뿌린 끔찍한 ‘똥물 투척 사건’을 겪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그 사건 이후, 이총각 선생님을 비롯한 125명의 여성 노동자가 부당해고를 당했다. 사측의 ‘블랙리스트’로 인해 다른 공장에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 투쟁을 멈추지 않고 출근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었다. 이총각 선생님은 감옥 내에서도 ‘징벌방’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상상하기 힘든 고초와 동료의 배신, 사회로부터의 억압을 겪었지만, 이총각 선생님은 “노동운동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어떤 아픔에도,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온 자신이 자랑스럽다”고.</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span class="bold">"노동운동의 가치는 </span><span style="font-weight: bold;">나를 찾고, 이웃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span></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내가 지금까지 노동운동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생활의 일부라서다. 그리고 모진 협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 혼자의 힘이 아니다. 정말 많은 이웃들, 지인들, 동료들이 나와 함께하면서 힘을 줬고, 격려해줬으며, 용기를 줬다. 살아가면서 점점 느끼는 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연대의 삶을 강조한 이총각 선생님은 노동운동의 의미 또한 재차 짚었다.</span></p><p><span style="font-family: 바탕;">“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는가, 왜 사회운동을 하는가, 왜 공동체로 살아야 되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않나. 그러려면 누구 앞에서도 진솔해야 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어떤 경제적인 문제에만 몰입되지 않았음 좋겠다. 돈 몇 푼 더 받자고 우리가 노동운동을 하는 건 아니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페미니스트 역사기행 ‘페미로(路)_인천을 잇다’〉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총각 선생님의 한 마디는 역사의 산 증인이 전하는 강렬한 메시지이자, 이번 탐방이 남긴 숙제였다.</span></p><p> </p><p><span style="font-family: 바탕;">“노동운동의 참 가치는 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다.”</span></p>]]></description>
       <pubDate>2026-05-17 09:25:00</pubDate>
	   <section>sc2</section>
	   <section_k><![CDATA[노동]]></section_k>
	   <section2><![CDATA[]]></section2>
	   <author><![CDATA[ilda@ildaro.com (박주연)]]></author>
	   <category><![CDATA[노동]]></category>
	   <media:content width='850' height='472' url='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741011232.jpg' medium='image'></media:content>
<image><![CDATA[http://www.ildaro.com/data/ildaro_com/bigimg/202605/2026051741011232.jpg]]></imag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