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피해, 의학적으로 검토돼야

직장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보기 위한 조건-2

최이윤정 | 기사입력 2004/06/07 [01:16]

성희롱 피해, 의학적으로 검토돼야

직장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보기 위한 조건-2

최이윤정 | 입력 : 2004/06/07 [01:16]
직장내 성희롱은 “타인에게 재정적, 정신적, 사회적 안정과 정신건강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문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업무상 사유에 의해 재해를 입은 산업재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산재보상제도의 적용을 받은 경우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여성관련 산업재해에 관심부족

일반적으로 산재보상 여부를 판단할 때 상병과의 인과관계는 의사의 소견, 자문 등 의료진에 의한 ‘의학적인 공증’을 통해 입증한다. 의학적으로 인정된 질병이나 증상에 한해 산재보상이 되는 현실에서 이 기준에 미치지 않으면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직장내 성희롱에 의한 산재보상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유도 바로 ‘의학적 공증’이 안 돼서 객관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피해를 입증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외국에선 성폭력 피해의 심리적 후유증에 관한 연구결과가 축적된 토대 위에서 성희롱 피해를 섭식장애(Eating Disorder Symptoms),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등 의학, 심리학과 연결하여 객관화하려는 시도가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산업재해 분야의 조사와 연구에서는 여성 관련 산업재해에 대한 관심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여성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에 대한 자료도 부족하며, 이는 여성노동자가 겪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제조, 건설업 등 남성이 주로 종사하는 직종에서의 위험은 중요하게 고려되는 반면, 여성이 종사하는 대다수의 직종에서 여성이 겪는 산업재해의 위험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성의 일은 안전하다’라는 가정이 지배적인 것이다.


산업재해 판단, 실질적인 피해 인정해야

얼마 전 서강대 K교수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가려움증 같은 피부질환을 비롯해 소화불량, 위경련 등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신체화 장애’를 겪었다. 이러한 신체화 고통은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과 매우 유사한 패턴이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를 산재보상법으로는 보상받기 어렵다. 그 이유는 산재보상법에서 다루는 산업재해가 ‘확실성(certainty)’과 과학적 ‘엄격성(rigor)’이라는 방법론에 입각하기 때문이다. 병리학 원칙에 기반한 의학적 증언과 과학적 연구는 대개 가시적, 양적 발병과 위험도 측정에 의지한다.

이러한 ‘확실성'과 과학적 ‘엄격성’에 의한 방법론은 인종, 성별, 계급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증상들 간 차이를 쉽게 간과한다. 여성에게 나타나는 성희롱 피해 증상과 같은 소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증상을 근거로 하여 산업재해를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즉, 직장 내 성희롱은 신체화 장애나 후유증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가벼운(light)’ 증상으로 간주되기 쉬워 제대로 피해 구제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산재인정이 협소하게 적용되는 현실은 여성이 실질적인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희롱과 같은 ‘비물리적인’, ‘비가시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피해를 남성중심적 언어 체계 속에서 언어를 통해 설명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이러한 피해는 대부분 비가시화 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되어 왔다.

직장내 성희롱 피해 여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져서는 안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행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 제도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실제 나타나는 피해를 위주로 문제 해결이 이뤄져야 한다. 산재보상과 예방의 취지를 살리고 성희롱 피해의 특수성(후유증 등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피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객관적인 의학적 피해’라는 기준을 완화하고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산업안전’ 개념, 여성의 경험 반영하라

산업재해로 인해 노동자 개인의 건강과 노동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노동자의 안전은 산업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산재로 인한 막대한 손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산업안전’의 중요성과 실질적 예방조치가 강조돼왔다.

그러나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에서의 산업안전 개념은 남성중심의 제조업을 기준으로 한 개념이다. 산업안전보건법(제4장 유해 위험 예방조치)에서 사업주가 예방해야 할 작업환경의 유해와 위험은 기계, 기구, 폭발 물질이나 전기, 에너지 또는 화학약품과 같은 물질의 관리, 물건의 취급과 운반 시 사고 예방을 위한 조치와 화학약품 및 소음에 의한 조치, 적정한 환기와 청결 유지 등으로 명시돼 있다.

이 내용은 안전한 작업환경의 범주를 주로 물리적 수단을 관리, 규제하는 것에 국한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해야 할 위험요인(risk) 역시 여기에 맞는 물리적 사고 위험과 화학물질, 소음, 공해에 의한 위험과 같은 물질적이고 도구적인 수단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산업안전의 개념을 살펴볼 때, 여성노동자는 성폭력, 성희롱의 위험에 노출되어 산업재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인이 간과됨으로써 ‘산업안전'의 테두리에서 제외되고 있다(한국산업안전공단). 제조업 중심의 작업환경을 기준으로 한 산업안전 개념으로는 대다수 서비스업 여성노동자의 비가시적인 불이익이나 위험에 대한 예방 또는 조치를 포함하지 못한다.

이는 사실상 여성노동자가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산업재해와 산업안전에 대한 관심이 특정 산업(제조업)에 국한됨으로써 현행 산업재해가 많이 드러나지 않은(산재통계화 되어 있지 않은) 직종은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또한 산재통계는 성별로 세분화되어있지 않다. 이는 산업안전 정책이 남성 편향적으로 이루어져, 여성노동자의 재해를 방치함으로써 차별을 야기시켜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이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는 산업안전의 개념이 여성의 경험에 기반하여 확장, 재구성되어야 한다. 기존의 내용이 여성의 노동현실과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음으로 인해 실질적인 차별 효과를 낳았다면, 이러한 결과는 충분히 수정돼야 한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 체계에서 이러한 내용을 포함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제5조 ‘사업주의 의무’ 조항에 사업주가 근로조건 개선을 통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해 ‘성’, ‘연령’ 등 근로자 개인의 특성에 맞는 내용이 들어갈 수 있으며, 산업보건기준에관한규칙에서 직무스트레스의 예방 조치(제14장 259조) 안에 작업계획, 근로시간단축 등의 개선책 외에 인간관계와 성희롱 등을 명시하여 실질적인 예방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산업안전 개념에 여성의 경험을 반영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고착된 차별 효과를 낳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정함으로써 실질적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 조치로 볼 수 있다. 산업안전에서의 적극적 조치는 직장 내 성희롱과 같이 그 동안 여성노동자에게 감추어진 문제를 드러내고 숨어있는 원인을 찾을 때까지 안전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경험이 반영된 산업안전 정책에 있어서의 적극적 조치가 이루어진다면 산업재해로서 직장내 성희롱의 실질적인 예방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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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ol 2004/06/11 [12:41] 수정 | 삭제
  • 상사의 언어폭력과
    심한압박은
    많은 직장인을 자살로까지 몰아넣기도 한다.
    혹은 건강을 해치고, 돌연사로 몰아넣기도 한다.
    극한 상황까지 몰리기까지 신체적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있을것이다.

    직장은 매우 안전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학교도 전혀 안전하지 않다.

    학교다니면서, 선생이나 급우들로부터의 폭력 등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상처는 엄청나다.

    학교에서 받는 상처에 대해서도 어떤식으로든 보상을 받아야하지 않을까한다.
  • 여직원 2004/06/07 [11:43] 수정 | 삭제
  • 여자들에게 성희롱 때문에 사업장은 항상 "안전"하지 않죠.
  • orin 2004/06/07 [10:59] 수정 | 삭제
  • 꼭 성희롱만은 아니겠지만 직장내 성희롱이 피해자에게 남기는 후유증은 정말로 클 수 있다. 정서적인 질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경우, 물리적인 상흔이 남지는 않았다해도 정서적인 장애가 더 오래가고, 고치기도 더 어렵다.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면 돈도 더 많이 든다.
    그런데도 피해보상은 받지 못한다면 잘못된 거 아닌가?
    직장내 성희롱은 직장 측의 책임도 있다. 그래서 예방교육도 의무화된 것이다. 당연히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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