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왜 이렇게 온건해졌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월례포럼 ‘여성운동의 제도화’

문이정민 | 기사입력 2004/08/08 [23:26]

“여성단체, 왜 이렇게 온건해졌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월례포럼 ‘여성운동의 제도화’

문이정민 | 입력 : 2004/08/08 [23:26]
“호주의 강간위기센터는 독립적인 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채 이제 국가의 성폭력 업무를 저렴하게 담당하는 하나의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1970년대 중반, 친여성주의적인 휘트람 정부가 들어서면서 호주의 급진적 여성단체 ‘강간위기센터’는 급속도로 제도화됐다. 8월 3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월례포럼 ‘여성운동의 제도화’에서 발제를 맡은 정경자 박사(호주 New South Wales 대학)는 이같이 진단했다. 정 박사는 앞서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도 호주의 사례를 통해 ‘여성운동의 제도화’라는 민감한 이슈를 던진 바 있다. 이번 토론은 여성단체가 주최한 자리인 만큼 단체 실무자들의 고민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 자리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여성주의 관료’, 서비스 제공밖에 못해

정경자 박사는 “호주에서 본격적인 제도화가 시작됐던 1970년대는 한국의 1990년대와 비슷하다”면서 한국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제도화의 위험성을 경고,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박사는 “이제 ‘국가페미니즘’과 ‘페모크라트’(femocrat, 여성주의 관료)가 호주 여성운동의 아이콘이 됐다”면서, “단체들은 비판기능을 잃었고 대중적인 기반이 없어 정부와의 협상력을 상실했다. 또 현재 대학의 여성학과, 여성연구소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여성정책 전담기구도 폐지되거나 재정삭감에 직면해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 호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모크라트’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덧붙였다. “남성에 의해 선택된 여성이 여성들을 대변할 수 없다”, “큰 떡 조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떡의 재료가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관료주의가 아닌 민주적인 조직공간에 있어야 한다”, “페모크라트는 여성의 이해를 국가에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해를 여성에게 이해시키고 있다” 는 등의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

호주의 한 페미니스트는 잡지 기고를 통해 “페모크라트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상사와 갈등이 심하다고 변명하고, 형편상 이제는 기층 여성들과 함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며, 강도 높게 힐난했다고 한다. 여성운동의 제도화 속에서 많은 이들이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해 관료직에 진출했지만, 결국 “여성주의 관료들은 자신들이 여성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자각 없이 변화해갔고, 여성에 대한 기본적 서비스 제공 이상을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여성운동, ‘방식의 변화’ 꾀해야

이에 대해 한국여성민우회 윤정숙 대표는 “젠더(gender, 성)의 제도화와 여성운동의 제도화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문을 열면서, “여성운동은 젠더의 제도화를 이뤄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직면한 것이다. 지금 한국의 여성운동은 제도화됐다기 보다 경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서 ‘젠더의 제도화’란 가정폭력, 성폭력 등 다양한 여성의제를 의미한다.

윤정숙 대표는 “제도는 중요한 여성운동의 전략적 공간이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제도는 중요하고 앞으로 제도화해야 할 의제가 많다”면서 단, “젠더의 제도화가 여성운동의 제도화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고민과 논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즉 “진보적 여성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지역화와 대중화에 대한 고민, 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면서, “제도 밖과 제도 안의 긴장감의 균형을 잡으면서 이중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

윤 대표는 또 “DJ 정권 때부터 ‘정부와 민간 파트너십’ 개념이 출현했고 여성단체는 그것이 기회라고 판단했지만, 실질적으로 잃은 것도 많았다. 최근 2-3년 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알아서 조율하네, 왜 이렇게 온건해졌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털어놓으면서 여성단체의 현실과 운동방식을 검토했다. 지금껏 여성단체는 정부의 안에 논평을 내거나 제안을 하는 식의 제도대응적 운동을 많이 해왔다는데, 지금은 제도조차 못 따라가는 실정이라는 것. 윤정숙 대표는 여성운동 방식의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익숙했던 운동방식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반성폭력 운동의 제도화 고민

한편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성과인권팀 김김보연 간사는 ‘반성폭력 운동’의 특성을 기반으로 고민을 풀어놓았다. 김김보연 간사는 “반성폭력 운동의 제도화 고민에 있어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면서 “전략적 목표로 추진된 성과로서의 ‘제도화’, 그리고 한국운동이 갖는 비제도적 속성의 변질을 의미하는 ‘제도화’가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김보연 간사는 “반성폭력 운동은 사회변혁적 성격을 띠면서도, 동시에 내담자에게 구체적인 상담을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이중목표가 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지원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 제도와의 관련성을 띠게 된다”고 설명하면서, “여전히 비제도적인 속성과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적합한가. 제도적인 활동방식이 문제인가. 다른 기준 틀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또한 “1990년대 후반 ‘제도화’라는 개념이 등장했을 때 당시에는 ‘국가재정지원은 권리’라는 인식이 있었고, 운동의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비판, 견제, 모니터링 해야 한다’는 답이 존재했다”면서, “제도화가 그 당시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현재 의도하지 않은 효과로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애초 관계설정 자체가 문제였는지, 아니면 국가와의 관계설정을 잘 해내면 되는 문제인지”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운동이 제도화되면 대중의 힘 못 받아

포럼에 참석한 늘푸른여성지원센터의 한 실무자는 “뾰족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 이상의 적극적 대안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앞에 던져진 대안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민간단체의 성찰과 비판만큼 정부기관의 성찰과 비판도 필요하다. 또 정부와 여성단체뿐 아니라 일반시민, 대중과의 관계로까지 확대해 운동의 제도화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제언했다.

이에 대해 정경자 박사는 “호주의 사례를 통해 본 가장 큰 문제는 운동이 ‘관성’의 법칙처럼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25년이 흐르니 환경의 변화가 왔지만,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성찰’이라는 대답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정부가 아니라 운동단체의 성찰이 중요하다”며, “시민참여에 대한 고민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도화된 운동에는 새롭고 젊은 대중들이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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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바다 2004/08/10 [20:54] 수정 | 삭제
  • 단체에서 일할 사람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게
    앞으로 여성단체들이 헤쳐나가야 할 가장 큰 난관이 아닐까 합니다.
    재정이 어려워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구요.
    돈 더 못 받고도 젊은 사람들 중에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기존의 여성단체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죠.
    제도화가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화, 관료화 되면 좋은 인력이 수급이 잘 안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직 안에서 스스로의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죠.
  • 음,, 2004/08/09 [21:59] 수정 | 삭제
  • 문제인듯,,
    페미니즘이 과연 다른 소수 운동과 차별화 되는 가에 대한 성찰도 함께,,
  • Christin 2004/08/09 [14:39] 수정 | 삭제
  • 우리가 외국의 사례를 통해서 무언가 배울 게 있다고 한다면, 호주 여성운동의 경우가 그에 적절한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훨씬 유리하잖아요. 여성운동 제도화 얘기 나오면 암울하다고 말씀하는 분도 봤는데,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어요.
  • 거북이 2004/08/09 [10:27] 수정 | 삭제
  • 행사가 연기가 되는 바람에 참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관성화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게 필요하겠지요. 모두들.
  • ... 2004/08/09 [02:04] 수정 | 삭제
  • 어떤 여자애가 저에게 "넌 남자애가 뭐 그리 속이 좁냐?" 라고 했는데 이거 성폭행인가요? 기분 나쁘더라구요.
    기사랑 상관없는 내용이라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