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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서는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4년여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은 힘겨운 기지이전 반대운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평택과 가까운 곳에서 10년 동안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전개되어온 지역이 있다. 오키나와의 헤노코다. 한반도인권.민주화.통일.화해센터 활동가 김은강씨는 지난 9월 이곳을 방문해 헤노코 앞바다를 지켜낸 주민들의 비폭력 반기지 운동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 알려왔다. -편집자 주>
변화와 연대를 부르는 오키나와 평화운동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니라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지만 일본주둔 미군기지의 70%이상이 이 섬의 20%나 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는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서 바라본 청명한 하늘과, 그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는 미군전투기의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 미 해병대의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가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평화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15세기 초 독립적인 류큐왕국으로 성립, 일본 본토에 의해 수탈 당하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에 편입해, 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과 미국의 직접적인 전투가 행해졌던 곳이며, 전후 미국에 의해 장악되었다가 1969년에 와서야 일본으로 반환된 ‘기구한’ 역사를 가진 땅, 오키나와. 10월을 며칠 남겨둔 수요일 저녁, 평화시민연락회의 대표로 후텐마 비행기지 확장 이전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타이라 나쓰메 목사를 만났다. 그는 지난 9월 25일, 새로운 미군기지 확장 이전 안인 ‘캠프 슈와브 연안안’을 수행하기 위해 문화재 조사차 출동한 기동대와 전문가들의 차량 진입을 막다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일단 그렇게 체포되면 56일 정도의 구류를 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세계 곳곳에서 저를 석방하라는 전화와 팩스가 경찰서로 쇄도하는 바람에 이틀도 넘기지 않고 석방되었습니다.” 국제적인 평화운동,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연대가 이루어낸 작은 성과였다. 금요일 아침, 한국 평화기행단 일행과 함께 타이라 목사와 지난 10년여 기간 동안 오키나와 반기지 평화운동을 이끌어온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1995년 미군에 의한 소녀 성폭행 사건 이후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확산되자,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후텐마 비행장 전면 반환 조치가 발표됐고, 이어 1997년에는 헤노코 앞바다를 매립하여 대규모 최신식 비행장과 기지를 건설하는 ‘헤노코안’이 제시됐다. 이후 딘조 유지씨를 중심으로 소수의 주민들은 ‘생명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고 ‘연좌농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매일같이 외롭게 헤노코 앞바다를 지켜왔다. 비폭력저항 “바다에서 가장 약한 자가 되자” 헤노코 투쟁은 2004년 봄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정부는 헤노코 해상 기지 건설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해저 지질조사를 시작했고, 이 때부터 평화운동가들과 환경운동가, 나중에는 지역 어민들까지 가세해 본격적인 투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철저한 ‘비폭력’운동을 유지했다.오키나와의 비폭력투쟁은 이에지마섬에서 미군에게 토지를 빼앗겼던 고 아하곤 쇼우코씨가 토지상환을 위해 실천했던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 아하곤씨는 죽기 전에 비폭력 평화운동을 위해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첫째, 손을 자신의 귀 위로 올려서 움직이며 이야기하지 말라. 상대방이 폭력에 대한 위협을 느낀다. 둘째, 대화할 때는 반드시 앉아서 하라. 폭력적인 상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셋째, 설명할 때는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 쉬운 말로 부드럽게 하라. ‘생명을 지키는 모임’의 헤노코 투쟁은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지지자들과 연대를 이끌어냈지만, 폭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공권력과 대치하며 비폭력투쟁을 유지하는 과정은 힘겨웠다. “도로에서는 다치거나 아파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운전자가 지나쳐 간다고 해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지 않고 배가 지나쳐 간다면 처벌을 받게 되죠. 우리는 이 바다의 원칙에서 중요한 운동원칙을 배웠습니다. ‘바다에서 가장 약한 자가 되자.’” 그들은 바다에 뛰어 들어 온몸으로 지질조사를 막았다. 목적한 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해상에서 이것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게다가 처음 이 투쟁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일본에는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수영뿐 아니라 5미터 깊이 잠수까지 거뜬히 해낼 수 있다. 정부의 하청을 받은 건설업자들은 작업을 막는 이들 활동가들을 물리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폭력을 가한 사람들을 찾아가 도리어 위로를 해주었다. ‘당신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 우린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건설업체 사람들이 그들의 친구가 되고 더 이상 그들을 저지할 수 없게 되면 정부는 하청업체를 바꿨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작업을 강행하려는 사람들과 충돌이 잦아지면서 부상자들도 속출했다. “내게 가하는 폭력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지만, 옆에서 동료들이 다치는 것을 볼 때 내 안에서 올라오는 폭력성과 싸우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단 두 척의 보트로 수십 척의 작업선을 저지해 오던 사람들이 지쳐갈 무렵, 건설업체에게 작업선을 빌려주던 주변 어민들이 자신들의 바다를 지키겠다고 이들과 합류해 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정부는 마침내 2005년 9월 ‘헤노코안’을 포기하고 작업선을 철수했다. 일본정부, 육지로 기지이전 계획 밝혀 그러나 정부는 불과 한 달이 지나서 헤노코 근처의 육지로 기지를 이전하는 ‘캠프슈와브 연안안’을 발표했다. 새로운 안이 발표되던 날 아침, 타이라 목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며 반응을 취재하던 마이니찌 신문 기자는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고 했다. 타이라씨는 그 사실을 헤노코에 남아있던 ‘생명을 지키는 모임’ 사람들에게 알렸고 허망해진 그들은 한 시간 가량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었다.“하지만 우리는 곧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비폭력투쟁이 전쟁을 원하는 폭력적인 공권력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후에 우리가 슬퍼하는 모습을 취재하러 헤노코에 왔던 TV 방송사들은 기운이 넘치는 우리들을 보고 그냥 되돌아 가버렸어요.” 이제 ‘생명을 지키는 모임’은 육지에 헬리포트와 대규모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지질검사와 문화재 조사를 실시하려는 정부와 싸우고 있다. 한편으로, 형식적인 조사만으로 넘어가려는 정부에 이의를 제기하며 정상급의 조사단을 동원해 꼼꼼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 오키나와에는 미국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들어왔다. 일본 정부는 ‘이제 오키나와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 오키나와 현민들은 미군기지 확장을 반기고 있다’는 식의 언론플레이를 본격화했다고 한다. 지난 9월부터는 엄청난 수의 기동대를 파견하기 시작했고 이전에 없던 물리력까지 동원하고 있다. “여자들과 노인들이 앞자리에 주저앉아 길목을 막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수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근육을 단련해야 할 때인가 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간바데구다사이’(힘내세요!)라고 외쳐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할 사람들을 원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넓은 미소를 띠는 타이라 목사를 보며 깊은 염려가 마음을 짓누른다. 그 엄청난 물리력의 차이를, 해상이 아닌 육지에서도 극복할 수 있을까. 공권력은 점점 더 거친 폭력을 행사할 텐데, 그 앞에서 비폭력투쟁은 과연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십중팔구 우리의 평택에서 보았던 상황이 이곳에서도 재현되지 않을까. 한국에서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비폭력투쟁으로 폭력적이고 강대한 공권력을 막아보겠다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원’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우리가 폭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평화를 희망하듯, 저들의 비폭력투쟁이 오키나와에서 미군 기지를 밀어내고 동북아와 세계에 평화에 성큼 다가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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