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혼슈[本州] 효고현[兵庫縣] 남동부에 있는 다카라즈카 시. 오사카에서 전철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도시가 유명한 이유는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다카라즈카 가극(宝塚歌劇, 이하 ‘다카라즈카’)의 본산이기 때문이다.
다카라즈카를 처음 접한 건 한국에서도 공연된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통해서였다. 스틸 컷 몇 장과 짧은 영상클립이 전부였지만, 한국의 여성국극처럼 ‘여성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점과 1980년대 순정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특유의 화려한 분장과 의상이 단번에 눈길을 잡아 끌었다. 실제로 보는 다카라즈카 공연은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오사카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염두에 두었던 생각이다. 따뜻했던 2007년 5월의 어느 날, 오사카 교통의 중심지 우메다 역에서 <한큐 다카라즈카선(線)>에 몸을 실었다. 아름답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한큐 다카라즈카 역에 내려서 다카라즈카 대극장(宝塚大劇場)을 향해 이어진 ‘꽃길’(花道, 하나미치)로 들어섰다. 육교조차도 아름다운 꽃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다카라즈카의 도시에 왔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다카라즈카는 ‘맑고, 바르고, 아름답게’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다카라즈카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은 ‘아름답게’에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름다움은 화려함에 더 가깝다. 다카라즈카는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지만 웅장한 무대, 화려한 의상과 분장은 공통적인 요소다. 보통 본 공연과 함께 50분 정도의 ‘레뷰’가 이어져 중간 휴식시간을 포함해 세시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레뷰’란 줄거리를 가진 공연이 아닌 쇼 타임이다. 본 공연만 두 시간이 넘는 대작들의 경우 레뷰 대신 앵콜 공연이 포함된다. 내가 본 공연은 <엘리자벳-사랑과 죽음의 론도>라는 작품으로, 헝가리-오스트리아 제국의 왕비 엘리자벳과 사후 세계의 왕 토토의 사랑을 그린 번안 뮤지컬이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더불어 다카라즈카의 3대 작품으로 꼽힌다. 본 공연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공연이 끝나고 이어진 앵콜에서는 휘둥그래진 눈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무대를 쳐다보기만 했다. 정교하게 이어지는 라인댄스와 보석들을 흩뿌려대는 것 같은 의상의 향연이 이어졌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는 화려함의 극치. 아, 이게 다카라즈카구나. “설마 다카라즈카 티켓을 예매해달라고 할 줄은 몰랐어”라고 핀잔을 준 일본친구도, 그 순간만큼은 옆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망원경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남성보다 더 이상적인 ‘남성’, 오토코야쿠(男役)
다카라즈카의 단원이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로만 제한되어 있어서 남성들의 로리타 콤플렉스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 아니냐라는 비판을 사기도 했지만, 정작 공연에 열광하는 관객들은 절대 다수가 여성들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이상형의 남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카라즈카의 여성 팬들의 관심은 거의 절대적으로 오토코야쿠를 향해 있었다. 다카라즈카는 배우들 사이에 철저하게 위계화된 서열로도 유명한데, 선후배 사이뿐 아니라 동기들 사이에서도 인지도 등에 따라 서열이 나뉜다고 한다. 그 정점에 ‘탑’이라고 불리는 주연 남역(男役, 오토코야쿠)이 있다. 오토코야쿠는 상대역인 여성 탑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진다. 마치 신데렐라를 선택하는 왕자님처럼. 때문에 이 남성 탑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길은 길고도 혹독한 과정을 거친다. 그 전에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이미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다카라즈카의 단원이 되려면 2년제의 다카라즈카 음악학교를 나와야 하는데, 입학경쟁률이 평균 40~50대 1에 이른다고 한다. 무대에 서기까지는 또다시 5년간의 수련과정을 거친다. 때문에 극단에 속한 다섯 개의 그룹별로 ‘탑’(가장 서열이 높은 주연배우)이 된 배우들은 대부분 30~40대 여성들이었다. 그만큼 공연 중 탑의 무대 장악력은 엄청났다. 현실은 환상을 부른다
평일 공연이 오전 11시, 오후 3시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카라즈카 가극의 모든 것은 주부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극장은 산뜻하게 차려 입은 중년 이상의 여성들로 가득했다. 한류가 한참 화제가 되었을 때 일본 중장년 여성들의 무료한 삶, 로맨스에 대한 그리움이 욘사마 열풍을 낳았다는 분석을 내리는 의견들이 많았다. 다카라즈카-오토코야쿠에 대한 중년여성들의 열광도 일정부분 이와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중년여성들이 주된 관객인 이유는, 그들이 어릴 때 보고 자란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순정만화의 미의식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들었다. 완벽한 환상을 제공하기 위해서 일까. 극단 측은 단원들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도 철저히 통제한다. 배우들은 결혼과 동시에 탈퇴를 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열정에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것만일까? 초창기의 다카라즈카가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로 제한되었던 것은 ‘소녀들’의 매력을 내세웠고, 한편으로는 결혼한 여성의 사회참여가 제한되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관객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지금은 ‘결혼’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카라즈카의 핵심은 ‘오토코야쿠’다. ‘결혼한 오토코야쿠’는 다카라즈카가 제공하는 환상의 기저를 흔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일단 다카라즈카는 고달픈 훈련을 참아낸 배우들의 탄탄한 실력이 빚어내는 일품의 무대였다. 완벽한 환상을 빚어내기 위해 현실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마음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꿈의 공장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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