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여성 문화예술인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설 것을 촉구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지난 2월 8일 정춘숙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의 협력으로 문화체육관광부 담당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폭로하는 SNS상의 해시태그 운동 이후, 대부분 각 분야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9개 조직들의 연대체다. #문단_내_성폭력에 반대하는 작가 행동 <페미라이터>,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 시각예술 여성주의 행사 “인사이드아웃”을 만드는 팀 <푸시텔>, 사진계 성폭력 감시자 연대, 여성예술인연대 AWA, 여성 전시기획자들의 모임 Gathering A, #부산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그리고 언론노조 출판지부가 속해 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문체부와의 면담에 앞서, 현장 의견 수렴을 위해 SNS 상에서 정책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결과를 토대로 총 11개 항목의 정책을 제안했다.
정부는 ‘차별 없는 예술활동’ 보장할 의무 있어
작년 10월부터 SNS상에서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운동이 벌어지면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폭로했지만, 그 이후 전개되는 상황은 녹록치 않다. 피해자가 형사고소를 한 경우에 한해 가해자에게 법적 처분이 따를 뿐 문화예술계에서 아무 제재도 받지 않으며, 그에 반해 열악한 지위에 있는 피해자는 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무고죄로 피해자들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희주 여성문화예술연합 공동대표(영화감독, <찍는 페미> 소속)는 “각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화예술계 성폭력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개인이나 시민단체가 개별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며,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인복지법 제 4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고 예술인의 복지 증진에 관한 시책을 수립하여 시행하여야 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예술인이 지역, 성별, 연령, 인종, 장애, 소득 등에 따른 차별 없이 예술활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시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예술인신문고 제도는 ‘성폭력 피해’ 구제 못해
여성문화예술연합은 문체부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독립적인 기구를 신설’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산하에는 ‘예술인신문고’가 있는데, 예술 활동과 관련된 ‘불공정 행위’로 피해를 입은 예술인은 이 제도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인복지법 제 6조의 2는 ‘불공정 행위’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예술인에게 불공정한 계약 조건을 강요하는 행위’, ‘부당하게 예술인의 예술창작활동을 방해하거나 지시, 간섭하는 행위’ 등만 규정하고 있을 뿐, 성폭력 관련 내용이 없다. 따라서 “성폭력 피해자가 예술인신문고에 사건을 신고하기 어렵다”는 것이 여성문화예술연합의 설명이다.
김린 여성문화예술연합 홍보팀장(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은 “문화예술계 성폭력은 그 특수성이 있는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성폭력 제보 창구가 따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문화예술계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권력 구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장내 성희롱 사건과 달리 고용구조 안에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은 철저한 권력 구조에 의해서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패턴이 유사합니다. (일과 관련된) 다른 성폭력들이 회사 안이나 노동구조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데 비해, 문화예술계는 이러한 고용구조가 아닌 주로 일대일 관계에서 성폭력이 발생하죠. 이러한 특수성을 이해하는 전문 상담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기에 문화예술계 각 분야의 특성을 파악하고 있는 전문 기구를 신설해, 이 기구에서 성폭력 피해 신고를 접수하고 상담하는 한편 피해자 지원과 정책 연구 등의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가해자에 기금 지원, 심사위원, 교육직 중단시켜야
신희주 여성문화예술연합 공동대표는 “여성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수차례 논의한 끝에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은 ‘가해자가 (문화예술계 내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렵사리 피해를 털어놓은 피해자가 오히려 고립되어 자신의 일을 포기하게 되고, 가해자는 자신의 지분을 조금도 잃지 않는 상황에서는 문화예술계 성폭력이 근절되기 어렵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신설되는 기구 산하에 독립적인 문화예술성평등위원회(가칭)를 두고, 이 위원회가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를 징계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징계의 내용으로는 국가기금 및 정부 지원사업 참여 제한, 국가 지원금 수혜 제재, 문화예술기금 및 사업에 대한 심의위원이나 심사위원 자격 박탈, 교육청 인가를 받은 모든 사설과 공립 교육기관에서 교육직 해임, 성평등 교육 이수 등을 제안했다.
이와 더불어 문화예술계 안에서 비대칭적인 권력 구조를 만들어내는 ‘권력집단 내 성비 불균형’ 문제를 지적하며, 교수 및 강사 여성쿼터제도 제안했다. 김린 홍보팀장은 “문화예술계는 조직이나 기업의 고용구조 안에서 고용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맥에 의해 인사가 이뤄지고 일용직 고용, 각종 기금 수령, 수상, 심사 등이 개인적 관계 안에서 이뤄지기 쉽다”고 말한다. 이렇게 “권력 구조가 개인의 성취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만큼, 권력집단 내 여성할당제를 하루 빨리 시행해야 한다”는 요구다.
‘등록된 예술인’ 외 피해자도 지원 대상으로
여성문화예술연합은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정책 또한 강조했다. 특히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 조사나 지원 대상 범위를 ‘등록된 예술인’만으로 한정하는 것을 반대했다.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정부에서 주는 각종 기금을 신청하려면 예술인으로 등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전을 몇 번 열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각종 요건에 부합해야 한다.
김린 홍보팀장은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의 가해자들은 권위 있는 사람들인 반면, 대다수 피해자들은 학생이나 신진 예술가 등으로 ‘등록된 예술인’에 들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따라서 정부에서 문화예술계 성폭력 실태조사를 하거나 피해자를 지원할 때 단순히 ‘등록된 예술인’으로 그 범위를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이외에도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2017년 상반기 내에 특별 실태조사를 시행할 것, 정책연구와 상설 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TF팀을 꾸릴 것, 예술인복지법에 성폭력 관련 조항을 넣을 것 등을 촉구했다.
이번 간담회 자리에서 여성문화예술연합 이성미 공동대표(작가, <페미라이터> 소속)는 “현장과 정부 부처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TF팀 구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최대한 빨리 2차 간담회를 개최”하자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여성가족부 및 교육부 등 타 부처와 협력해 정책 마련에 힘쓸 것’이며, ‘정책 제안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이를 문화체육관광부가 실현할 수 있는지 여부와 향후 계획에 대해 얘기하는 2차 간담회를 1~2달 내에 열겠다’고 약속했다고, 여성문화예술연합 측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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