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트랜스 여성 난민’으로 산다는 것<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이란 출신 난민운동가(하)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며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They cannot find me in their minds”라는 제목의 글 속 화자는 이란 출신의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독일에서 난민의 권리를 주장하며 급진적인 운동을 펼친 인물입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재구성하였으며,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트랜스 여성 자아가 묻다, 얼마큼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
나는 평생을 ‘두 가지’(two thingy)로 살았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오라니엔 광장이나 학교 점거 현장에서의 삶은 전자였다. 당시에는 트랜스 여성으로 커밍아웃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스스로를 설명할 언어가 그때는 명확하지 않았고 ‘트랜스’라는 이름표조차 낯설 때였다. 나는 누구이고, 왜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란에서 이 문제로 씨름하던 때와 베를린에서의 시간이 다르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다 보여주지 않고 조금은 숨기면서 사는 방법을 알았다. 예전에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퀴어들의 공간을 접했지만, 그들과 얘기해보면서 내가 학교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님이 확실해졌다. 안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내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의 안전을 위한 일, 개인적인 문제였으니까.
유럽에서 퀴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의가 오가는 것들을 나도 알아가고는 있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이 모든 ‘백인들의 퀴어씬’이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번째로 독일에 오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 대해 보다 명확한 답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예전과 다름없이 숨어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내가 선 위치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바깥으로 보여지는 내 모습에서 얼마큼을 인정받고 싶은 걸까? 나는 스스로를 얼마큼 나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은 걸까? 이 두 가지 질문 사이를 오가면서, 이 둘을 따로 떼어놓으려 애썼다.
이란에서 ‘자기 정체성 장애’ 진단을 받다
솔직히 이란에서 나는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과 이상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리치료사가 내게 해준 가장 나은 일은, 나를 게이로 여겼다는 것이다. 덕분에 군복무에서 면제되었고, 군 당국은 나를 ‘자기 정체성 장애’(personal character identity disorder)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여기 와서야 나는 이게 트랜스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용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리학 따위를 공부했다는 내 친구들도 “이봐, 너 아마 트랜스일지 몰라”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나는 내 상태를 그저 항상 어디가 좀 아픈 것으로 여겼다.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생각하길 강요하기도 했다. 독일에 두 번째로 올 무렵, 나는 하루에 20알씩 먹는 헤로인 중독이었다. 말하자면 문제가 너무 많은데 그걸 다 억누르고 또 억누르기만 하던 상태. 어디 가서 내 문제를 말하고 힘을 얻을 곳도 없었고, 감히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 전화는 남자 목소리로 받지 말자’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항상 나보고 말투 좀 신경 쓰라고 잔소리했다.
남자로 사회화되었다는 것은 내게 큰 시련이다. 누군가와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역시 이란에서 온 여성 S는 여성의 몸을 지니고 있어서 남자의 몸이었다면 겪지 않았을 더 많은 차별을 당했다. 이를 외면할 수는 없다. 이 몸을 가지고서, 내가 태어난 이란에서 내가 특권을 누렸음을 되돌아봐야 한다. 거기서 나는 남성으로 사회화되었다. 복잡한 문제다.
완벽하게 여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내가 듣는 모욕을 듣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은 다른 더 나쁜 말을 들을지 모른다. 게다가 사람들은 누군가가 트랜스 여성임을 알게 되면 완전히 배제해버린다. 아주 최악의 여성혐오가 거기 있다. 여자처럼 생겼냐와는 별개로, 여자처럼 행동해야 여자로 받아들여진다.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다. 남자로 사회화되었지만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한다는 것은 매 순간이 어려운 싸움이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물론 사회화는 나를 소외시킨 동시에 생존 기회를 줬다. 이란에서는 트랜스 여성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가 희생자이기만 했다는 말은 아니다. 커밍아웃하지 않고 산 것에 대해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그냥 그래야 안전했으니까. 대학에선 이 문제를 공론화 못했을 게 분명하다. 거기 상황은 아주 복잡했다. 트랜스라고 하면 몸을 개조하라고 강요했다. 트랜스는 수술을 해야만 하고, 하도록 강요했다. 한 달 전부터는 더 이상 강제는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전에는 정말로 신체적인 전환을 강요했다.
난민 운동 조직 안에서 퀴어 운동하기
오라니엔 광장과 학교에서의 투쟁이 일단락되고, 강변(베를린에 있는 Spree강 근처 대안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임)으로 이사 온 뒤, 내게는 자신을 좀 더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생활의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전에 친구 관계를 유지했던 많은 사람들과 멀어졌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지금 사는 공동체에서 트랜스와 같은 퀴어들은 이 문제에 있어 서로를 아주 잘 이해하고 지지해준다. 인간관계의 변화가 중요한 문제라는 걸 공감해준다. 덕분에 나도 (유럽에서 쓰는 표현으로) ‘커밍아웃에는 그 결과가 뒤따른다’(coming out has its consequences)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랜 친구들은 아마도 다 잃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다. 그 무엇도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퀴어운동 판을 보면 거기도 역시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지배가 뒤섞여 있다.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든 것이 완벽한 그런 곳은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운동 조직에는 퀴어 이슈에 대한 더 많은 워크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언급한 친구 N를 기억하는지? N과 J가 퀴어 워크숍을 열려고 오라니엔 광장을 여러 번 찾아갔었다. 내가 또렷이 기억하기로는, 아무도 그 워크숍에 오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지 의논하다가 한 텐트를 직접 찾아가서 거기 있던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다.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그저 이런 자리가 더 많아져야 퀴어 이슈가 사람들에게 친숙해질 거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때 우리가 애써 설명하는 만큼 그들 역시 설명했고, 여러 질문을 던졌다.
사회운동 전반에 걸쳐 퀴어 이슈를 알리기 위한 이러한 워크숍들이 필요하다. 조직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소수자 당사자들을 위한 또 다른 엠파워먼트가 된다. 올해 열리는 퀴어 행진 조직 회의에 나는 난민 운동가들과 함께 갔다. 이 역시 괜찮은 경험이었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게 이미 퀴어에 대한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행사라는 생각이 들어서, 난민 운동가들과 같이 간 것이었다.
전환기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게는 ‘퀴어’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보라, 이름을 붙이고 이리저리 분류하는 것은 그야말로 유럽스러운 것이다. 나에게는 스스로 이런 문제를 절대 입 밖에 꺼내 말하지 않을 만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엠파워먼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억압된 자들끼리 연대하는 문제로, 나는 항상 그 편에 설 것이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전환을 겪기 전에 나는 내 안의 다른 성 정체성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 몸 안에 있고, 주어진 몸에 따라 행동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런 힘의 논리에 따를 필요가 없다. 퀴어를 몰랐던 사람들을 엠파워먼트하는 것은 그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매사에 그런 이들과의 소통을 추구해야 한다. 트랜스로 커밍아웃하면서 나는, 눈에 보이는 축제를 필요로 하는 이들 뿐 아니라 스스로 무대에 서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고 알리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사회운동은 성차별, 인종차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나는 문제 속에 있는 문제 그 자체였고, 늘 문제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성찰을 해왔다. 하지만 권력 구조라는 게임에 나 역시도 잘 적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야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이었나 돌이켜 본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제대로 고민해보지 않았다. 정치운동 조직에서 마땅히 고민해야 할 것들도 그냥 넘어갔다.
예를 들어, 조직 내 강간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고 공론화하려는 그룹들이 있었지만, 토론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어떤 사안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제 알겠다. 우리는 모임을 통해 모든 것을 성찰하며 함께 말하고 생각함으로써만 문제를 적절히 다룰 수 있다. 그렇게 한 발짝씩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에 대한 우리만의 정의가 있긴 했지만 그걸 성찰이라고 볼 수는 없고, 성차별은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었다. 상호교차적 관점을 취한 적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이미 정해진 도덕 룰이 있고, 정해진 화법과 판단법이 있는 듯 행동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신경했다. 문제를 한 번도 제대로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자체 조직 운동(self-organized movement)에서 우리가 솔직해져야만 하는 문제들이 있다. 상호교차적인 방식으로 투쟁을 해나가며, 차별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느냐의 문제. 현실적인 실천 방안은 잘 모르겠다. 모든 구성원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이성애자, 백인, 지정성별 남성, 이런 건 아마도 조직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상호교차성을 통해 조직 내부를 성찰할 때,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권력 구조란 가부장적으로, 인종차별적으로, 혹은 계급적으로 아주 뿌리 깊어서 몇몇 갈등 지점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99%의 운동 조직이 상호교차성을 발견하고 차별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고 함께하고자 하지만, 사실상 권력 구조가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을 성찰하지 않으면 오늘과 같은 꼴이 되고 만다. 권력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운동도 식민화된다. 가령, 언어는 권력과 관련 있다. 통역을 맡은 사람은 때때로 힘 있는 자리를 누리게 된다. 한참 뒤에야 나는 내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쉽고 덕도 많이 봤다. 언어 권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부탁했고, 나는 그 권력 게임을 한 셈이다. 람페두사 그룹이 베를린에 있을 때, 리더 한 명을 뽑는 문제를 논의한 적 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권력 문제였다. 어떤 한 사람이 집단을 대표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의미니까. 우리의 사회운동이 얼마나 식민화되었는지 보여주는 단면들이었다.
각자가 처한 현실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등을 전제하고 갈 순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평등, 평등, 평등”을 꾸며댄다. 자, 백인들이 현재 모든 것을 이끌어간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서로 평등하다는 상상에서 출발해서. 현실에서 평등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 대신, 우리는 서로 다른 삶들을 연결하는 공통 지점에서 출발할 수는 있다.
오라니엔 광장의 인종차별에 대해선 잊지 않고 얘기해야 한다. 사실 큰 문제였고, 나는 거기서 인종차별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재생산되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사람들, 가령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중심인 수단 출신으로, 자국의 역사와 강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차별을 당했다. 종교 또한 인종차별과 관련된 요소였다. 종교는 지역에 따라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차별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시스템이 우리에게 준 것은 오로지 국적인데, 이는 식민지배자들이 만든 경계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알고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고자 한다면 쿠르드인처럼 봐야한다. 쿠르드인들은 배제되고 또 배제된 사람들로, 국가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한다. 그러나 종교적 투사 역할을 하는 독실한 무슬림 교도들은 쿠르드의 ‘자치’(autonomy)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쿠르드인에게 “쿠르드 운동은 내셔널리즘인가?”라고 묻는다. 쿠르드인들의 신념과 주장은 내셔널리즘과 상관이 없고 종교적인 것도 아니다. 완전히 다른 무언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스스로 집단을 조직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풀뿌리 정신, 아나키즘은 우리 운동 안에서 무시되었다.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종교적 믿음과 좌파적 관념인 연대 정신을 둘 다 가지고 정치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두 가지가 혼재되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나는 또한 이란에서 종교가 좌파의 언어를 어떻게 오용하고, 그걸로 온갖 장난을 치며 문제를 일으키는지도 보았다. 혹은 종교는 버리면서도 마치 다른 선택이 없는 양, 국가중심의 사고는 계속하는 것도 보았다. 이슬람교가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도, 국가론이 해결책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쿠르드인과 같은 관점을 갖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이들 자치주의자들과 같은 대안을 모색하지도, 이웃과 토착민 운동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자치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화합을 이룰 수 없다. 이는 혁명적인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우리 조직에 그런 감수성은 있었지만 개념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쿠르드인이 실제로 살아가는 지역에서 온 나와 같은 사람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른다. 내게는 쿠르드인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자치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다. 쿠르드인들은 이곳에서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한다. 여긴 뭔가가 빠져있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아니요’를 연습하다
평범하게 잘 살고 싶으면 두 가지 인생을 따로 두어야 한다. 하나는 땅 속에, 하나는 땅 위에 사는 것으로. 비단 퀴어로서의 삶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다 그렇다. 우리는 두 가지 자아로 사는 것에 익숙하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걷고 말하고 행동하는 지는 땅 위와 땅 속에서가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학교에 다니면서 뭔가를 배우지만 거기 설득은 되지 않고, 시험 볼 때만 그럴 듯하게 적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적으면 증명서를 받을 수 있고, 아니면 못 받는다는 것을 아니까 하는 것뿐이다.
나 역시 그런 학교생활을 거쳤고, 이후에 이란에서 환경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힘을 받았다. 그 에너지는 아마도 “자, 이제부터 반대할 건 반대하자”고 말한 사람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나도 그에 따라 반대를 외쳤지만, 일하던 대학에서 잘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 때 “아니요” 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내가 땅 위에서의 삶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진짜 내 존재를 숨긴 채 살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억압한, 그 오래된 그림자를 여기 와서 완전히 없애기까지 3년이 걸린 것 같다. “아냐, 여기서 넌 자유로워. 넌 자유로워.” 여기 유럽에서의 삶도 완전한 자유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 자신으로 살 여지가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심지어 대학에 다닐 때도 스스로가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나는 스스로가 ‘그런 남자’라는 것을 보여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색했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그것이 내 안에 내재된 어떤 힘들에 맞서는 과정이었음을, 그래서 힘들었다는 것을 안다.
요즘 나는 놀러갈 때 내가 정말 입고 싶은 옷이 따로 있는지 생각해본다. 늘 그 생각을 한다. 화장을 조금 하고 카페나 바에 가보지만, 어색하다. 여자처럼 완전히 잘 꾸미면, 잘은 모르겠지만 좀 더 쉬울지 모르겠다. 턱수염이 있는 상태로 눈 화장을 하면 사람들이 나를 훨씬 더 많이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담을 건네고, 나를 성희롱하고 심지어는 무언가 집어던지기도 한다. 그들은 말 한마디라도 꼭 해야 하고 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보여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런 일을 아주 많이 겪는다. 상점에 가면 점원은 나를 보며 온갖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들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설 자리는 없는 것 같다. 그래 그래,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런 일들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과정이라고, 마치 이란에서 환경운동이 막 시작되고 있는 것 같이, 퀴어 이슈가 더욱 정치화되어가는 과정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아니요’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연습. 때때로 나는 슬프고 우울하고 이 모든 것들이 다 싫어지기도 한다. 친구들을 잃어가고, 사람들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야한다고 내게 조언할 때에. 그래도 그게 나를 완전히 단념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 세상의 도시들 가운데 베를린이 퀴어에게 최악의 장소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괜찮은 곳이다. 그래도 물론 어렵다. 아주 많이.
[번역자 노트] 커밍아웃 이후, ‘더 자유로운 나’로 살기
하나는 땅 위에, 다른 하나는 땅 속에서 평생을 ‘두 가지’로 살았다던 화자는 실제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상)편의 거침없던 난민운동가는 (하)편에서 고민과 성찰을 가득 껴안은 트랜스젠더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본격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몸도 마음도 여전히 많은 혼란을 겪는 와중에, 난민 농성장에서의 치열한 시간들을 돌아보는 내적 여정 또한 시작된 것이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젠더는 우리 존재의 핵심 정체성과 감수성과 연결되어있다. 그동안 억눌렸던 젠더를 내세워 살아가기로 했을 때, 확연히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게 되었을 것 같다. 보다 구체적으로 조직 내 성폭력 문제가 충분히 공론화되지 못한 것에 유감을 느끼는 모습은, ‘트랜스 여성’이라는 또 한 겹의 ‘사회적 타자’ 정체성을 입은 화자 여성의 깨달음의 순간으로 보인다.
경험에 대한 날것의 언어 속에서 꺼끌거리는 아직은 추상적인 말들-식민화, 아나키즘, 상호교차성-이 앞으로 그녀가 더욱 자유로운 ‘나’로 살아가며 어떻게 더 풍성해질지 벌써 기대가 된다.
그녀는 독일 베를린이 퀴어로서 살기에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 백인들의 퀴어씬에 이질감을 표한다. 나도 그 마음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베를린은 백인 유럽인 퀴어에게 더 각별한 포용과 인정, 기회를 준다. 그녀나 나나 여러모로 이방인으로 이곳에 살며 ‘베를린의 특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수의 편에서 목소리 내는 일을 더욱 멈출 수 없다. 퀴어에 대한 다수의 편견과 차별에 저항의 느낌표를 보내고 사회운동 내부의 소외와 무관심에 계속 물음표를 던질 것이다. 독일, 이란에서, 한국에서. 그리고 또 우리의 목소리가 가닿을 수 있는 다른 모든 곳에까지.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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