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연 기타하라 미노리(北原みのり)씨를 꼽을 것이다. 이미 1990년대부터 미노리 씨의 활동은 일본 페미니즘과 서브컬쳐 영역에서 독보적이었다. 1996년에 여성을 위한 섹스 굿즈숍 ‘러브 피스 클럽’(LOVE PEACE CLUB)을 설립한 이후, 25년 동안 젠더와 섹슈얼리티, 한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미투운동 등 활동 영역을 확장해왔다.
한국과의 인연과 교류도 깊어서,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하는 ‘희망의 씨앗’ 기금 이사를 역임하고, 올해는 원래 운영하던 회사에서 출판 부문 ‘아줌마 북스’를 설립해 한국의 페미니즘 서적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미노리 씨와 일본에서 비슷한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성공대학교에서 재직 중인 재일조선인 3세 조경희 교수가 그를 “팬심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한국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과 만나다
조경희: 빠른 시기에 한국과 관계를 맺으셨군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최근에 ‘희망의 씨앗’ 기금 활동을 하면서 깊이 개입하기 시작한 건가요?
미노리: 2013년에 하시모토 도루(橋下徹)의 위안부 발언(당시 오사카 시장이었던 하시모토가 “위안부 제도는 필요했다”고 말한 사건)이 있었죠? 저는 정치인 발언을 듣고 잠을 설쳤던 건 처음이었어요. 이놈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데 반론할 수 있는 지식이 없었다는 것에 스스로 충격을 먹었어요. 하시모토는 저와 1살 차이니까 같은 시기에 도쿄에서 대학생이었고 같은 조건에서 1991년의 김학순 증언을 들었을 텐데, 우리 세대의 이런 남자가 유명 정치인이 되었다는 것에 막막했어요. 당시 『사모님은 애국(奥さまは愛国)』이라는 책 집필을 위해 넷우익들을 조사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일본이 심각한 상황까지 왔구나 라는 것을 실감했죠. 여기서부터 ‘도망가면 안 된다’는 현실을 겨우 직시했다고 할까요.
국회에서 하시모토 발언에 대한 항의 집회가 있었는데, 그때 양징자 씨(1993년에 재일조선인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지원모임을 만들어 활동해온 재일 2세)가 발언했는데 누구보다도 설득력이 있었죠. 우에노 치즈코 씨도 와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언론 보도를 보니 우에노 씨와 저의 발언만 소개가 된 거예요. 이건 진짜 아니다 싶었어요. ‘위안부’ 운동을 가장 활발히 해온 양징자 씨나 재일조선인 여성들의 목소리가 존재조차 없는 것으로 되어 있어 좀 무섭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바로 양징자 씨를 찾아가서 내가 그동안 러브피스클럽에서 해왔던 미디어 활동이나 라디오, 팟캐스트 등에 출연해달라고 요청했죠. 양징자 씨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2013년 이후 저의 활동이 확장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여러 사람들을 소개시켜주셨고, 한국 성산업에 관한 스터디 투어도 같이 갔고요.
2013년 이후는 한국 또한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잖아요. 미투운동이나 메갈리아 등도 나왔고, 페미니즘 전반에서 젊은 세대가 커다란 파도를 만들었죠. 사실 성산업이나 포르노와 같은 분야는 내가 과거에 가담해온 분야이기도 하잖아요. 성산업에 대해서는 일본이 서브컬쳐로 소비하고, ‘화이트 비즈니스’가 되어버렸어요. 저 자신도 진지하게 대면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동의 전환점으로서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조경희: AV(Adult video, 성인영상물) 피해자들이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일본의 AV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 내용도 소개해주시겠어요?
미노리: 팝스(PAPS People Against Pornography and Sexual Violence: AV 출연을 강요당하는 문제나 아동 포르노 피해자들의 영상 삭제, 회수, 판매정지 등을 지원하는 단체)에서 이사로 일하고 있어요. 팝스는 한국의 디지털성범죄 척결운동의 영향을 받았어요. 저도 몇 년 전 활동가들과 함께 한국의 디지털성폭력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기도 했어요. 지금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포르노 수요가 더 늘어나고 있어요. 옛날 VHS 시대 작품들도 지금 다 디지털화되고 있어요. 정말 지옥이죠.
과거에 잠깐 출연한 작품들이, 본인은 잊고 사는데 갑자기 나오는 거죠. 영상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상담을 하는 것이 팝스의 주된 일이에요. 경찰에 넘기는 경우도 있는데, 업계도 교묘하니까 출연 동의서를 쓰는 단계부터 찍고 있어요. 사인을 할 때 손을 잡고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남자들의 압력으로 동의서를 쓰는 그 상황 자체가 강요된 것인데, 사회에 그런 인식이 없으니 (피해자가) 단념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통계에는 안 나오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조경희: 정말 심각한 문제네요. 1990년대 이후 일본을 돌아보면 참 괴롭고 막막하기도 해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성산업에 ‘스스로 참여한다’는 식의 담론이 반복되어 왔죠. 이제 겨우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노리: 일본은 입구가 너무 넓어요. 고급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하고 성산업에 유입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팝스는 소셜 워커들이 만든 단체인데, 내가 과거에 가담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역시 이 30년 동안 너무나 심각해진 일본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관련 기사: 포르노 소비자들도 인권침해 현실을 알아야 한다 https://ildaro.com/7984)
입시 성차별에 분노…도쿄의대 앞에서 시작된 미투
조경희: 일본의 미투운동과 ‘플라워 시위’ 이야기로 이어갔으면 하는데요. 한국에서 미투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일본에서는 왜 안 나오는가? 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종종 받았어요. 당연히 일본에서도 나오고 있고 그 피해도 심각하지만, 잘 가시화되지 않았죠. 언론이나 사회의 분위기가 피해자에 대한 연대나 공감을 보이지 않게 만든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토 시오리(伊藤詩織, 유명 언론인에게 겪은 성폭행을 공론화함) 씨의 미투 때도 미노리 씨가 선두에 계셨는데, 솔직히 일본의 여성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라는 생각도 좀 했어요. 그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미노리: 저는 사실 한국 페미니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일본에서 대중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미투운동 때였어요. 2017년 5월에 시오리 씨가 목소리를 내고 기자회견을 했을 때, 일본 페미니스트 중에 움직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누가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연대의 목소리를 냈어야 했는데 저도 그때 이거 내가 할 일인가? 라는 고민으로 바로 움직이지는 못했어요.
시오리 씨의 소송이 처음 기각되었을 때가 9월이었는데 마침 양징자 씨와 함께 한국에 가 있었어요. 택시 안에서 뭔가 움직여야겠다는 대화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났는데 왜 연대하거나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단체가 안 나타나는가. 그래서 바로 시오리 씨와 연락을 취하고 지원자가 있는지, 혹시 원하지 않는 건지 확인을 했어요. 한국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의 문제”라는 의식으로 움직이잖아요. 일본에서는 당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전엔 움직일 수 없다는 자기규제가 있어요.
또, 성폭력 피해자에게 고통의 경험을 언제까지 말하게 하는가 라는 이슈도 있는데, 이런 관점이 성폭력 피해에 대한 이해를 저해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운동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언제까지 말하게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듣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죠.
2018년에도 부산에 가 있었는데, 그때 1970년대에 똥물 공격을 당한 여성 노조원들의 사진(동일방직 사건)을 본 적이 있어요. 여성운동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다음날에 일본에 돌아갔더니, 도교의과대학이 오랫동안 입시에서 여성합격자들을 감점해왔던 사실이 밝혀진 거예요. ‘이건 똥물이다’라는 생각을 직관적으로 했어요. 그동안 제가 시위를 주최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 바로 순발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도교의과대학 앞에 모이자고 호소했어요.
2018년 8월이었는데, 정말 사람이 많이 모였고 방송국에서도 카메라가 많이 왔어요. 일본에서 사회운동이 보도되는 일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의아하기도 했는데… 그때 시위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구호를 외치는 건 잘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마이크 들고 자기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모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다 시작하는 게, 이게 미투였어요. 아 일본의 미투는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성폭력 문제로는 시작할 수 없었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점수 차별은 언론도 관심을 가져주고 사람들도 모일 수 있었고, 큰 소리로 울면서 말할 수 있었어요.
그럼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피해자를 찾는 일이라는 건 ‘위안부’ 운동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잖아요. 당일 왔던 사람들은 수험생이 아니었지만, 그 후 바로 실제 피해자들이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그들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변호사들과 연결하는 일을 시작했죠. 지금도 재판이 진행 중이고, 문부과학성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어요. 지금도 불투명한데요. 대학에 따라서는 남녀 합격률이 4배 정도 차이가 나는 곳도 있었어요. 합격률을 평등하게 유지하도록 문과성도 매년 조사하겠다고 약속했고요. 목소리를 내면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어요. 성공 경험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죠. 이게 시작이었어요.
촛불 대신 꽃을 들고
조경희: 저도 도쿄의과대 앞에서 여성들이 울부짖으면서 외치고 있는 영상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또 이토 시오리씨의 지원모임이 결성될 때도 미노리 씨나 양징자 씨가 지원모임을 이끌어가고 계셔서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역시 ‘위안부’ 운동의 경험은 무시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지원자나 참여자는 어떤 분들이었나요?
미노리: 네, ‘위안부’ 운동의 영향은 정말 컸다고 생각합니다. ‘플라워 시위’를 처음 했던 것이 2019년 4월 11일이었고, 그 전날 4월 10일에 이토 시오리 씨 지원모임을 발족했어요. 그때 나온 사람들은 연령대가 높았어요. 이분들은 성폭력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오히려 정부 부정이나 사법 부정에 분노하고 있었죠. 발족식 자체는 열기에 차 있었지만, 미투 지원자들이 비교적 고령이라는 것이 좀 의아했고, 다음날 플라워 시위도 약간 걱정이었어요.
그런데 플라워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99% 여성이었고, 세대도 폭넓은 사람들이 왔어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때 아 드디어 시작했구나 라고 느낀 순간이었어요. 그 동안에도 소송을 통해 성폭력과 싸워온 여성들은 많았지만, 어떻게 이들에게 다가가면 될지 몰랐던 거에요. #Metoo를 하기 위해서는 #Withyou가 필요하잖아요. 이게 없으면 목소리 낼 수 없어요. 이건 한국에서 배운 것이기도 해요. #Metoo에 앞서 #Withyou를 하자고 늘 강조하곤 합니다. 2013년 이후 ‘위안부’ 운동이나 한국의 촛불시위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을 플라워 시위에 연결시킬 수 있어 저로서는 뿌듯한 경험이었어요.
일본 사회에서 미투가 가시화되지 않는 것은, 언론에서 뉴스 기사를 뽑는 것이 중년남성인 이상 성폭력을 기사화하는 것 자체를 막아버리죠. 이건 피해자에게도 좋지 않다는 논리로요. 플라워 시위 때는 여성 기자들이 많이 취재하고 기사화에 힘써줬어요. 이제까지 보지 못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줬어요. 2019년에 각지에서 성폭행에 대한 4건의 무죄판결이 있었고, 이에 저항하면서 시작한 시위였어요. 1건은 이미 판결이 나와버린 건이었지만, 나머지 3건은 다 유죄가 인정되었죠. 이건 플라워 시위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성공 경험을 얻을 수 있었죠.
조경희: 대단한 일이네요. 저는 영상에서 일부 본 정도지만, 꽃을 들고 참여한다는 컨셉도 너무 좋고 서로 위로하는 따뜻한 분위기가 감동적이었어요. 일본다운 아기자기함이라 할까요. 꼭 한국처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럴 수도 없구요.
미노리: 따라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에요. 교코거리(行幸通り: 도쿄역에서 황거 앞을 잇는 거리)에서 진행한 것도 역시 광화문을 의식해서였어요. 마음 같아서는 촛불을 들고 싶었는데, 일본은 까다롭잖아요. 소방차 출동하면 위험하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꽃을 들고 진행했어요.
조경희: 저는 꽃을 든 것이 오히려 좋던데요? 지금도 하고 계시죠?
미노리: 네, 코로나 이후는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각지 37곳에서 진행 중입니다.
조경희: 미투의 고발 내용은 역시 상당히….
미노리: 저는 일본에서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하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타깃이 되고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어요.
조경희: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아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피해인데, 가해자는 중년 남성이니 드러나기 어렵죠. 일본에서 젠더 문제에 대한 백래시는 계속 있어왔지만, 플라워 시위를 하면서 공격이나 위협을 받은 적도 있었나요?
미노리: 2000년대 초부터 오만 가지 일을 당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백래시를 극복하려고 하는 여성들의 성공 경험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압력은 있지만 그만큼 연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흐름은 가볍게 보고 있으면 휩쓸릴 수 있어서 긴장해야 해요. 한국에서도 백래시가 너무 심해진 것을 보고 좀 무섭게 느껴졌어요. 일본은 기본적으로 세련된 폭력이라 할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지배되고 있는데, 한국은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제도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제도나 시스템을 맞추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숨쉬기 쉬운 사회 같아요.
여성들의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책을 만들고 싶다
조경희: 오늘 말씀 들으면서 생각보다 더 한국과의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올해 출범한 ‘아줌마 북스’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최근에 한국의 페미니즘을 반영하는 문학 작품이나 에세이가 일본에도 많이 소개되고 있어 놀라운데요. ‘아줌마 북스’는 어떤 경위로 시작하게 되었나요?
미노리: 2년쯤 전부터 양징자 씨와 함께 이경신 씨의 『못다 핀 꽃』(휴머니스트, 2018)을 꼭 번역출판하고 싶다고 이야기는 하고 있었어요. 너무 좋은 책이라서 출판사를 찾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은 예전부터 제 꿈이어서 이를 계기로 “그래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죠. 정미경의 『하용가』(이프북스, 2018)도 동시에 진행하고 출간했고요. 일단 이 두 작품을 내기 위해서 만든 출판사입니다.
조경희: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을 비롯한 한국문학 붐은 어떻게 보고 계셔요?
미노리: 일단 아주 기뻐요. 이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앞서가는 나라에요. 음악도 문학도 페미니즘도요.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아웃나라에요, 한국은. 페미니즘 관련 책도 일본에서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일본 출판사는 피하는 책이라 생각해요. 읽고 싶은 내용이고, 또 한국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럽이나 미국의 작품보다는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죠. 가족관계나 가부장제 분위기 등 굉장히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이제까지는 한류 드라마나 스타를 보고 있었지만, 소설을 통해서 동시대 여성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거죠. 한국의 페미니즘 작품이 일본의 미투운동이나 페미니즘에 큰 힘이 되고 있어요.
조경희: 『하용가』(소라넷 사건을 다룬 소설)는 저도 일본어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독자들의 반향은 어떤가요? 『김지영』은 이야기 자체가 일상적이고 담담하니까 일본에서도 인기를 끈 측면도 있을 텐데 『하용가』는 굉장히 극적이고 자극적이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이고요. 일본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흥미로워요. 사실은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미노리: 네. 『하용가』는 좀 자극적이라 처음에는 안 팔릴 수도 있겠다 생각도 했어요(웃음). 생각보다는 많이 읽히는 편이에요. 마침 ‘김지영’의 10살 아래 세대, 1990년대생 여성들의 이야기인데, 일본의 같은 세대에는 투쟁을 위한 매뉴얼처럼 읽히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오는데요. 정말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요. 한국에서 범죄인 일이 일본에서는 범죄시 되지 않거나… 바깥의 시선을 통해 일본 사회의 심각함이 폭로되는 부분도 있다고 봐요. 이 작품을 통해 조금은 투쟁하는 기분이 되면 좋겠어요.
조경희: 앞으로도 어떤 책이 나올지 기대가 되네요. 미노리 씨 자신도 지금 진행 중인 작업이 있어요?
미노리: 지금은 성폭력과 관련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잘 진행은 못하고 있어요. 한류 주제처럼 좋아하는 책을 쓰는 것이 더 즐겁긴 해요. ‘아줌마 북스’를 통해, 여성들의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책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 양징자 씨가 새로 번역하고 있는 책이 세 명의 조선인 여성에 관한 책이에요.(조선희, 『세 여자』1,2 한겨레출판사, 2017)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의 애인이나 부인이었던 여성들의 이야기인데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여성들의 우정과 역사 이야기가 교차하는… 이것도 또다른 ‘장금이’ 이야기가 아닌지 기대하고 있어요.
조경희: 그동안 활동의 과정에서 미노리 씨 스스로가 여성들을 잇는 미디어로서 역할을 해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길 자유롭게 해주세요.
미노리: 먼저, 이렇게 한국에 못 가는 2년이 너무 괴로워요. 빨리 가서 순대도 먹고 싶고요. 한국의 운동이 나의 일부가 되고 있는데, 일본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나 힘은 너무 없어져 버린 지난 30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여성들은 어떤 면에서 과거에 더 연대하고 있었어요. 1980년대 일본 교풍회와 윤정옥 선생님이 연결되면서 ‘위안부’ 운동이 시작된 것처럼, 연대하면서 현실을 바꿔온 역사가 있어요.
또 일본에서 ‘위안부’ 운동을 움직여 온 건 재일여성들이었잖아요. 일본의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라고 생각했을 때, 이런 더 아래의 역사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이나 정치가 최악인 경우도 있지만 결국 시민들의 연대를 이어가는 것이 희망이 된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울 수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시스터후드’로 연결되면서 가부장 여성혐오 사회에 맞서가야 합니다.
[필자 소개] 조경희. 일본 출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역사사회학을 전공했고 식민주의, 이주, 소수자 문제 등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주요 공저로 『전후의 탄생: 일본, 그리고 조선이라는 경계』(2013) 『아시아의 접촉지대: 교차하는 경계와 장소』(2013) 『주권의 야만: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2017) 『〈나〉를 증명하기: 동아시아의 국적, 여권, 등록』(2017) 『두번째 ‘전후’: 1960-70년대 아시아와 마주친 일본』(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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