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나는 ‘마녀’가 되어야 했다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믿음

이주아 | 기사입력 2022/04/26 [12:56]

기독교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나는 ‘마녀’가 되어야 했다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믿음

이주아 | 입력 : 2022/04/26 [12:56]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정의와는 사뭇 다른 교회의 모습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다니던 교회였다. 그런데 한 목사님을 통해 나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분은 아직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1순위이다.

 

그 목사님의 설교에 따르면, 천국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해됨도 상함도 없는 곳’(이사야 11장)이다. 또한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누가복음 4장)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동체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갈라디아서 3장) 공동체다.

 

나는 고무되었고, 진로를 바꾸었다. 열심을 내기 시작했고, 교회에서 제공하는 성경공부 모임을 차례로 수료하였다. 점차 교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교회만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속한 교단은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하는 곳이었다. 분명히 같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여성들은 목사가 되지 못했다. 여성 장로도 물론 없었다. 여성들은 주방봉사를 비롯한 교회 곳곳의 중요한 일꾼이지만, 정작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당회나 각종 위원회는 모두 남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존재’이고,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것이다.

 

▲ 유튜브 <교회언니 페미토크> 시즌4 중 ‘신의 네 여자들’ 5편 “아마도 저는 마녀인가 봐요?”에서 캡쳐.

 

‘교회언니 페미토크’를 시작하다

 

물론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해서 교회에 열심을 내게 만든, 그 말씀들도 성경에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한 보수 교단의 대답은 ‘(남녀가)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질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고, ‘여성의 소명은 남성의 그것과는 다르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도사 월급이 목사의 월급과 적게는 두 세배부터 많게는 열 배 혹은 그 이상 차이가 나서, 여자전도사들이 생계에 허덕거리며 살다 정년은퇴를 하고 노년에는 매우 빈궁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똑같이 공부했는데 왜? 목사를 못하게 할 거면 월급은 그래도 비슷하게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남자랑 여자를 만들어놓고 여자를 남자의 보조적 존재로 삼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나는 그런 신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여성이 목사 안수와 장로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교단의 신학교에서 석사를 했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문화적 차별과 한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같은 목사직을 가졌으되 교회 안에서 맡는 역할은 확연히 달랐다.(20년 전의 상황이므로 지금은 변화가 있기를 기도한다.)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여성신학이라는 것을 처음 들어보게 되었다. 여성신학이란 그동안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관점으로 해석되어오던 성경을 여성의 눈과 목소리, 경험으로 다시 읽고, 기존의 해석을 의심하고, 잊혀져 있던 교회와 성경 안의 여성들을 재발굴하는 신학이다. 여성신학을 자신의 신학적 중심으로 삼는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고 강단에도 서게 되었다.

 

▲ 여성신학을 하는 동료들과 기독여성연구원 ‘훌다’를 만들었다. 가장 오른쪽이 필자다. 가끔 인터뷰 요청이 온다. 기독여성주의를 알리고 목소리 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직은 너무나 미약하지만 다양한 소그룹들의 활동도 계속되고 있다.  ©훌다

 

강의를 하던 중에 젊은 여성들이 얼마나 교회의 성차별 관습에 큰 상처를 받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나를 포함한 동료 넷이 ‘교회언니 페미토크’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기로 했다. 유튜브를 통해 우리가 믿고 아는 하나님은 차별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이가 동등하게 존중받는 날을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인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주에 가까운 댓글들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청년 페미니스트들이 나오는 인터뷰 시즌에서는 아예 ‘좌표를 찍고’ 오는 남성들의 댓글이 너무나 인신공격적이라 잠시 댓글 창을 닫아야 했다.

 

기독교 내 성차별의 세 가지 차원

 

기독교의 성차별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나는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성차별적인 교회 제도 등에서 일어나는 명시적인 차별이다. 두 번째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적 관습을 신앙과 혼동하며 일어나는 차별이다, 나머지 하나는 성평등의 가르침이나 성경에 남아있는 ‘리더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부각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차별이다. 이 세 가지 차원의 차별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먼저 성경해석을 보자. 분명히 성경 안에는 평등과 해방을 이야기하는 본문들도, 매우 구시대적이고 성차별적인 본문들도 존재한다. 특히 구약은 무시무시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에게 잔혹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몇천 년 전의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아갔던 히브리인들의 삶의 모습이 반영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니면 돌로 쳐 죽이고(신명기), 집단성폭행을 당하고 숨이 끊어지자 12조각으로 잘려 각 지파에 보내지고(사사기), 공주의 신분임에도 이복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정당한 형벌을 요구하지 못한다(사무엘하). 사실 이런 본문들은 교회 현장에서 그다지 이야기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너무 지나치고, 구시대적이고, 오늘날의 상황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은 신약의 서신서에 나오는 것들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에베소서),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디모데전서), “아내의 머리는 남편,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린도전서). 이러한 구절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창조질서 또는 성서적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성경에 그렇게 써 있으니 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신약의 서신서에는 또한 “서로 입맞추어 문안하라”는 말도 있는데, 왜 이것은 말 그대로 따르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렇게 질문하면 대부분 “그것은 당시의 관습을 반영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같은 서신서에, 분명히 성경에 쓰여 있는 구절들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질서이자 바뀔 수 없는 진리이고, 하나는 당시의 관습이 반영되어있는 구절이니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성경 구절을 취사적으로 선택하는 일들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남성들이 해 온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교리’이자 ‘신적 질서’라고 배우는 것들 대부분이 남성들의 시선에서 성경을 해석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여성 목사 안수가 거부되었고, 지금도 거부하는 교단이 있으며, 여성 장로와 목사가 있더라도 부수적 역할을 맡고, 가정에서도 여성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다. 이미 한국 기독교의 여성 선배들은 1930년대 여성 목사 안수 운동을 하며, 이러한 내용에 대해 분명히 지적한 바 있다.

 

▲ 기독여성주의는 그동안 여성신학으로 꾸준히 연구되어왔지만, 학문 분야라 대중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았다. 올해는 한국여성재단의 후원을 받아 문턱이 낮은 기독여성주의 입문서를 출판할 계획이다.   ©기독여성연구원 훌다

 

원래 성차별적인 구절이 아님에도, 남성중심적인 시각으로 왜곡하여 이야기하는 설교도 많다. 가령 “돕는 배필”이라는 구절은 교회 현장에서 여성의 순종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이 인용된다. 한국어로 “돕는 배필”이라고 하면 마치 주체자로 일하는 누군가를 옆에서 보조하는 이미지이다. 그런데 사실 “돕는 배필”이라는 히브리어 “에제르 케네그도”는 “꼭 맞는 도움”이라는 뜻이며, “돕다”라는 의미의 “에젤”은 하나님이 인간을 도우심을 나타낼 때 쓰인 단어이다. 야곱에 대한 도움(시편), 사무엘에 대한 도움(사무엘상) 모두 이 단어로 하나님의 도움을 표현하고 있다. ‘남성이 중요한 일을 하고 여성이 보조하라’는 뜻이 전혀 아닌 것이다.

 

부활의 증인이었던 여성들, 그러나…

 

하와, 미리암, 밧세바… 가부장적인 시각으로 그릇되게 해석되며 죄인 취급 받아온 여성들이 성경에는 굉장히 많다. 이들은 불순종의 죄인들로 교회에서 자주 설교된다. 반면,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리더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다.

 

작년에 동료들과 함께 만든 단체 이름이 기독여성연구원 ‘훌다’이다. ‘훌다’는 구약에 나오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운동 당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전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 예언자이다. 그런데 훌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신학자와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이제껏 한 명도 못 만나보았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의 증인이 된 것도 여성들이다. 하지만 이 사실도 거의 설교되지 않는다. 기껏 나온 이야기는 ‘여자가 입이 더 싸기 때문에 말을 널리 퍼뜨리라고’ 여성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는 것이었다. 시대적으로 당시 여성은 법적 증인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하는, 사회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는데, 굳이 여성들을 택하여 기독교의 핵심 사건인 부활의 증인으로 삼은 하나님의 뜻이 ‘여자가 입이 싸서’라니? 일종의 신성모독에 가깝다.

 

성경 공부 교재들에서도 성차별적인 언어와 삽화 등이 많이 발견된다. 목사님은 거의 남성으로 그려져 있고, 성만찬을 묘사한 삽화에 남성 목사와 남성 교인만을 그려 놓은 경우도 있다. 반면 율동을 가르치는 사람은 여자 선생님으로 그려진다.

 

▲ 유튜브 <교회언니 페미토크> 시즌1 중 6. “거기에 여자가 있었어??? 분명히 있는데 사라진(?) 여자들” 편에서 필자(직진 주아)가 이야기하는 모습. 2020년부터 시작한 채널이 시즌 10을 맞이했다. 이제는 저주의 댓글을 보는 게 익숙함을 넘어 재미나기까지 하다. 기독 여성들이 가끔 남겨주는 응원과 감사의 댓글은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다짐하게 해준다.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등에 대해서는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들이라고 언급한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결혼했고, 밧세바는 다윗을 유혹했으며, 룻은 모압 사람이고, 라합은 기생이었으니 자격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가르친다. 다말이 그래야만 했던 사회문화적 상황이나,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불구하고 신전의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남성 유다와 신하의 아내를 탐한 다윗의 잘못은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를 따라 결단을 내린 룻의 용기도, 뛰어난 상황판단으로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에 크게 공헌한 라합의 결단력도 언급하지 않는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소개하는 장에서는 “음녀”라는 한자를 쓰면서 그 의미를 함께 읽으라고 되어 있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드보라가 누구였는지 묻는 질문의 정답은 성경 구절에도 없는 “예쁜 여자”이다. 대형교회의 각종 건물의 이름이나 중고등부, 청년부의 제목은 전부 성경 남성들이다. 기드온부터 다니엘, 노아, 모세, 이사야… 여성 이름은 적어도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단 하나도 없었다. 중고등부, 청년부에는 여성들이 많고, 성경에 여성 영웅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니며 언급한 여성 동역자의 비율은 남성의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도, 교회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아니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어떤 존재적 차별도 없는

 

남성 영웅의 이야기만을 배운 사람은 여성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자신이 자란 마을이나 도시만 아는 인간은 다른 문화적 관습이나 태도에 대해 관용보다는 배척과 의심을 하게 된다. 네모가 세상의 전부라고 배운 사람은 동그라미나 삼각형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성경에 대해 남성의 이야기만을 배우고 여성을 남성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여성의 시각을 교회 공동체에서 차단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딸이 “도대체 나는 성경 안의 누구를 롤 모델로 삼아야 하느냐, 여성은 없느냐?”고 질문했을 때 할 말을 잃었다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왔고, 무엇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지, 그것이 교회 안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수정하고, 공동체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한다.

 

여전히 ‘교회언니 페미토크’ 유튜브 채널에는 섬뜩한 댓글들이 달리고,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기다리며 초청한다. 진짜 성경적 진리는 무엇인지, 기능적 위계나 성별 고정관념이 정말로 하나님의 질서인지 같이 물어보자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고 예수께서 선언한 메시아의 소명,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주의 은혜의 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강처럼 흘러넘치는 날이 올 것을 기도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그 어떤 존재적 차별도 없는, 하나님의 정의이자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필자 소개] 이주아. 기독여성연구원 훌다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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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4/10/13 [14:32] 수정 | 삭제
  • 마음껏 뱉어라 너희에게 다 돌아갈테니
  • onlygrace 2023/04/18 [05:06] 수정 | 삭제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본 글에서는 오직 남자 여자로만 쓰여있지만, 많은 다른 언어로 된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남편 그리고 아내로 번역합니다. 그렇기에 고린도전서에서 남자가 머리가 된다는 말은 부부간에서만 이루어지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성경의 부부는 예수님과의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에 머리에 순종하는 것=예수님께 순종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한 머리라는 뜻은 가부장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에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머리라면 여자가 몸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신도 사랑한다 라는 구절처럼 머리는 몸과 나뉠 수 없는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남편은 머리로서 몸, 그러니까 아내의 필요를 채워주고(육체적,이성적,정서적)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몸으로서 머리를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미혼 여성들에게는 제 구약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미혼의 여성들은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Gemeinschaft를 살고있으니 그것 또한 크나큰 복이다. 결혼은 절대 강요되서는 안된다. 그리고 하게 된다면 그전까지는 너희가 원하는 여성성 살아라.
  • 크리스천 2023/03/24 [08:17] 수정 | 삭제
  • 사랑의 하나님은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soli deo gloria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막말하지 마셔요.
  • soli deo gloria 2023/03/24 [01:43] 수정 | 삭제
  • 진심으로 걱정되서 씁니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치지 마시오. 하다하다 성경을 딴지걸고 페미운동을 해? 저주받습니다.
  • 미리암 2022/05/10 [12:17] 수정 | 삭제
  • 닉네임 홍길동은 독해력이 얼마나 떨어지길래 정반대의 얘길 써놓으셨네... 예수는 성평등주의자이고, 성차별주의자는 님같은 분이라는 얘기잖아요. ㅎㅎ
  • 홍길동 2022/05/10 [08:57] 수정 | 삭제
  • 이젠 하다하다 예수도 남녀차별주의자로 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성수 ㅋㅋㅋㅋㅋ 그것도 적으면 차별??ㅋㅋㅋㅋㅋㅋㅋ 에효 여성이 발작은것도 차별이라해라 나중ㅇ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콘볼필요가없네 진심ㅋㅋㅋㅋㅋㅋ
  • amd 2022/04/29 [11:16] 수정 | 삭제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현재 종교 관련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비슷한 문제로 부딪힌 경험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애써 주시는 분들 덕분에 처음보다는 변하고 있는 부분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큰 힘이 되어 드리진 못하겠지만, 감사의 마음은 전해 드리고 싶어서 댓글을 달아 봅니다. 감사합니다.
  • kilili 2022/04/29 [07:05] 수정 | 삭제
  • 정말 큰 힘이 되는 기사입니다. 만인 만물이 평등하다는 걸 온몸으로 설파한 예수님의 뜻, 걸림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주시고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며 응원하겠습니다.
  • 반가움 2022/04/28 [14:34] 수정 | 삭제
  •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에 대해 교황청도 최근에서야 인정을 했죠..
  • 공감백배 2022/04/27 [13:15] 수정 | 삭제
  • 몇년전에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이라는 책이 나온 걸 보고서 더 찾아보았더니 번역이 된 기독여성주의 책들이 좀 있더라고요. 훌다에서 한국적 상황에 맞는 책이 나올 것 같아서 기대가 됩니다. 중요한 건 계속 배우려고 하는 자세인 거 같아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ㅇㅇ 2022/04/26 [21:03] 수정 | 삭제
  • 교회에서 배운 거랑 신학이랑은 진짜 다른 거라는 걸 알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대학에 와서야 신학적인 진실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는데, 신 앞에 존재론적으로 어떤 차별도 없다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니 정말 힘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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