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호실’로부터…안전을 감각하고 확장하라

숙박형 다원예술프로젝트 〈19호실로부터〉 참관기

박주연 | 기사입력 2022/11/28 [12:24]

‘19호실’로부터…안전을 감각하고 확장하라

숙박형 다원예술프로젝트 〈19호실로부터〉 참관기

박주연 | 입력 : 2022/11/28 [12:24]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19호실로 가다』 중 「‘19호실로 가다」에서 발췌

 

영국 작가이자 88세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의 단편 중 대표작 「19호실로 가다」엔 수전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20대 후반, 매슈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네 아이를 낳고 정원이 딸린 주택에서 ‘평탄한’ 삶을 살아간다. 임신하며 일을 그만뒀지만, 아이들이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진 엄마로서의 역할에 매진하기로 한다. 매슈와 동의한 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슈는 다른 여자와 잤다는 얘기를 털어놓고, 수전은 용서가 아닌 ‘이해’를 한다. 집엔 가사노동을 하는 파크스 부인이 합류하고, 막내도 이제 학교에 진학해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 그 때 수전은 공허함을 느끼며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렇게 수전은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서, 19호실에 다다르게 된다.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혼자가되는집’에서 전시 〈19호실로부터〉가 진행 중이다. ‘19호실’의 입구. ©일다

 

작년 이맘때 만난 제람 작가(관련 기사: 성소수자, 제주사람…사적인 이야기를 ‘우리의 역사’로, https://ildaro.com/9193)는 당시 인터뷰를 하며 수전의 19호실 같은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리고 1년 후, 작가는 전시 〈19호실로부터〉를 열었다.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혼자가되는집’에서 진행 중인 이 전시는 공영선, 노윤희, 여혜진, 제람, 홍초선 작가 그리고 최정은 씨가 참여했으며, 사전 예약을 한 관객이 전시 장소에서 머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오후 3시부터 다음날 낮 12시까지, 그 공간은 오롯이 관객 혼자만의 것이다.

 

작가에게 처음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들었을 때부터 ‘대체 어떤 걸 만들려고 하는 거지?’ 궁금했다. 이후 〈19호실로부터〉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프로젝트 일환으로 은유 작가와 함께한 ‘글쓰기’ 워크숍, 공영선 안무가와 함께한 ‘몸쓰기’ 워크숍이 진행되었을 때도 ‘전시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궁금증이 더해졌다. 마침내, 숙박형?! 전시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조차 어떤 공간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물음표들을 안고 지난 18일, 〈19호실로부터〉를 방문했다.

 

19호실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

 

서울에서 제주로 비행기를 타고 그리고 버스를 타고 애월읍 조용한 마을에 도착했다. 미리 안내 받은 문자에 따르면 19호실까진 좀 걸어야 했다. 어딜 둘러봐도 감귤나무가 보였다. 그렇게 도착한 19호실, 혼자 조용히 공간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감귤 향이 났고 현관 한켠엔 간이의자, 망원경, 텀블러가 있었다. 거실 테이블엔 환영 카드와 ‘혼자 하루를 보낼 당신을 위한 안내’, 그리고 전시에 대한 설명이 적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거실 바로 옆엔 부엌이 있고, 조리대 위엔 몇 가지 조리 도구들과 냄비 등이, 냉장고 옆엔 한 끼를 위한 레시피가 붙어있었다. 거실을 지나면 침실이 있고, 침실 안쪽에 화장실 및 샤워실이 있다. 그리고 거실 한켠엔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테이블에 앉아 안내와 설명부터 읽었다. 현관에 놓여있는 간이의자, 망원경, 텀블러의 용도를 알게 됐다. 침실 천장 쪽에 달린 스피커와 헤드폰, 아이팟. 부엌 찬장에 놓인 각기 다른 크기의 모래시계 5개, 각 공간마다 놓인 디퓨저, 19라 적힌 약간 두꺼운 노트의 의미도.

 

▲ 5개의 모래시계엔 각기 다른 시간이 담겨있다. 5를 나타내는 저 표식은 공간 어딘가의 물품에서 또 발견되기도 한다. 참고로 간의의자엔 저 표식이 6개 수 놓여있다. 그렇다면? ©일다

 

가까이 놓여 있던 모래시계 중 15라 적힌 모래시계를 뒤집어 시간을 흘러가게 한 후, 찬찬히 공간부터 감상했다. 지난 여름, ‘몸쓰기’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했던 것들이 생각나 혼자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보기도 하고, 창문 너머의 풍경을 멍하니 보기도 했다. 앉았다가 굴렀다가 일어서 걷기도 하고, 공간의 물건들을 만져보고 향도 맡았다. 낯선 이 공간과 나의 거리를 허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어느 정도 공간에 익숙해진 뒤엔 요리를 시작했다. 냉장고 속 준비된 채소들을 꺼내, 레시피에서 알려 주는 대로 자르고 찌고 끓이는 과정을 차근차근 진행시켰다. 김밥에서도 빼고 먹을 정도로 기피하는 당근도 먹어 보리라 마음 먹었다. 19호실에선 조금 다른 도전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이렇게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 동안, 준비된 아이팟을 통해 ‘19호실로 가다’ 오디오를 들었다.

 

깜깜해진 밤이 되었을 땐, 약간의 회색 빛 표지에 하얀 색의 19가 적힌 책을 폈다. 이 프로젝트와 연계된 ‘글쓰기’ 워크숍에 참여했던 이들의 글이 가득했다. 위험한 상황을 마주했던 경험과,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했던 노력과 생각들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살아간다’는 말이 생각났다. 왠지 조금 용기가 났다.

 

▲ 침실 창문 너머로 해가 뜨는 시간이, 바람이 부는 촉감이 느껴졌다. ©일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정말 그림 같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 그림엔 햇살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숨’ 오디오를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냥 그 장면을 바라봤다.

 

19호실 안과 밖

 

19호실 밖에서 수행해야 하는 미션도 하나 있었다. 준비된 간이의자, 망원경, 우롱차를 채운 텀블러를 들고 바로 2분 거리에 있는 언덕에 올라갔다. 자리를 잡고 의자를 펼쳤다. 해가 떨어질 즈음이어서 하늘의 색이 여러 색일 때였다. 멀리 바다도 보였다. 망원경을 들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도 봤다. 늘상 해보려고 하지만 좀처럼 하기 힘들었던 ‘그냥 가만히 있는다’가 가능한 공간이었다. ‘익명의 존재’가 된 것처럼.

 

19호실에서 준비한 것들은 하나같이 따듯함이 묻어났다. “스스로 ‘여성’이라 정체화하는 이들이 ‘자기다움’을 ‘안전’하게 사고하고 감각할 수 있는, 물리적이면서 관계적인 공간”을 고민한 작가의 노력이 담겨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작은 소품 하나까지 공간과 어울림을 위해 배치되어 있었고 오감을 통해 공간과 교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체험들이 가능했다.

 

▲ 언덕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평안하고, 평안했다 ©일다

 

이 공간을 벗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19호실’이 어디까지 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괜히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산책에 나섰다. ‘안전’이라는 감각이 어디까지 ‘보장’될 수 있을지 생각하며 걷다가 잠시 쉬고 싶어져 주변 카페를 검색했다. “예스키즈존”(어린이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과 반대로 어린이 출입도 환영하는 곳)이라고 안내된 카페를 발견했다. ‘여기다!’ 어린이를 동반하지 않은, 어린이와 삶을 공유하고 있지도 않은 내가 “예스키즈존”을 선택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곳이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이니까.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공간.

 

19호실에 머무는 동안 제람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19호실을 예약한 사람들 중엔 트랜스젠더 여성, 청각 장애를 가진 여성,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여성, 질병 투병 중인 여성 등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전동휠체어 이동에 적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때가 제일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 공간을 혼자 점유하고 있을 때보다.

 

19호실에 머무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런 공간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 따뜻한 안전의 감각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학교 밖 청소년, 자립준비청년, 이주민/난민, 싱글맘, 장애인, 성소수자, 성/폭력 피해생존자 등 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19호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마음 한편으론 이것이 19호실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산책하다 들린 카페 입구엔 길고양이 급식소가 있었다. 길고양이가 안전한 공간이라면 나도 안전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다

 

무엇이 ‘안전’을 만드는가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결말은 해피엔딩은 아니다. 수전에게 19호실이 대피소가 되긴 했지만, 그의 삶을 구하진 못했다.

 

19호실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던 날 저녁,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에서 주최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사에 갔다. 떠난 이들을 기리며 많이 울고 또 많이 웃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그곳이 또 다른 ‘19호실’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곳을 벗어나는 순간, 나를 보호하기 위한 벽들을 세워야 한다. 때때로 그 벽엔 창문이나 문도 없어서, 나 자신을 고립시키는 위험성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그 위험성을 감수할 만큼 ‘안전한 공간’이 절실한 이들이 있다.

 

수전을 살릴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수전에겐 19호실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잠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수전이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살 수 있는 사회가,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 주는 주변인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걸 지금 우리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19호실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19호실에서 느낀 안전의 감각을 확장하는 방법을 상상하는 것. 그것을 실현되게 하는 것. 함께 만들어 보자는 것. 경계 없는 19호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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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2/12/01 [11:03] 수정 | 삭제
  • 레싱 읽으려다가 번번히 실패했는데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전시회와 리뷰입니다.
  • ue 2022/11/28 [17:42] 수정 | 삭제
  • 부럽다.. 레싱 단편들 좋아하는데, 19호실로 가다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퓨리 2022/11/28 [14:27] 수정 | 삭제
  • 19호실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 요즘 전시들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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