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치료 캠프, ‘잘못된 교육이 분명합니다’[극장 앞에서 만나] 디자이리 아카반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2010년대에 일부 지자체에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가 위기를 맞고 있다. 조례의 폐지를 요구하는 단체들이 이 조례가 동성애와 성전환을 조장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위원들은 학생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 양심과 종교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가 삭제된 ‘학교구성원 인권증진 조례안’을 작성했다. “성적 지향 및 성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라는 표현을 쏙 뺐다. 인권단체들이 항의를 했지만 아직 학생인권조례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성소수자,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편협하고 치졸하다. 성적 지향 및 성정체성의 문제를 청소년기의 일탈로 바라보고 존재를 부정한다. 성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립이 어려운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양육자와 학교 및 사회 시스템 하에 놓이게 되는데, 여기서 내쳐지기 않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동성애는 정신병”
‘동성애는 정신병이다.’ 매체에 글을 쓰면서 정말 많이 받는 댓글이다. 이 댓글은 꼭 동성애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모든 성소수자 이야기에 달린다. 이 말도 안 되는 말이 한 때는 정말 말이 된 적도 있다. 미국 정신의학회(APA)가 중심이 되어 발행하는 정신질환 진단 기준을 담은 책자인 DSM에 19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동성애’ 항목이 존재했다. 하지만 1974년부터 동성애를 질병명에서 삭제하였고, 1987년에는 성적 지향과 관련된 모든 질병명을 삭제하였다. 구시대적 발상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맞춰 세상은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편견과 미비한 제도는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
어떠한 현상을 병으로 분리하면 편리하다. 이해할 필요 없고, 치료하면 된다고 분리하면 되니까 쉽다. 그런데 지구상의 많은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때로는 어떠한 원인도 없이 발생한다. 그중 하나가 성소수자의 존재다.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분히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사회는 끊임없이 밀어낸다.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의 경우, 이 시기를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잘 보내면 성인 성소수자로 자라날 일이 없다고 판단한다. 일부 종교는 여전히 전환치료를 시행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은 오히려 이 캠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캠프에 모인 청소년들의 공통점은 성소수자라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혐오와 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현저히 적다. 사랑이 싹트기 좋은 환경을 전환치료 캠프가 제공해버린 셈이다. 주인공은 결국 캠프에서 사랑을 찾고 자신 또한 찾는다.
20년이 지나 2020년이 되었고, 전환치료 캠프를 배경으로 하는 또 다른 영화가 등장했다. 디자이리 아카반 감독의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이다. 앞서 언급한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예요〉와의 공통점은 전환치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모인 이 환경이 오히려 이 캠프의 목적과는 다르게 그들을 자극한다는 점, 이 두 가지다. 영화의 장르, 문법, 톤 앤 매너, 연기 스타일은 정반대다. 과장되고 밝고 코믹한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예요〉에 비해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은 현실적이고 다소 어둡다.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사회에 이 두 작품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다.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20년 째 말이다.
자세히 본 적이 있나요?
〈카메론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은 교사의 보이스 오버(voice-over,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내레이션)와 암전된 화면으로 시작한다. 보이스 오버가 계속되고 성경을 들고 있는 청소년의 손 인서트로 첫 번째 컷이 시작된다. 다음 컷은 역시 교사의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청소년의 모습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은 측면-뒷모습이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대충 넘기는 모습이 클로즈업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컷은 책의 모서리에서 꼼지락대는 청소년의 손, 역시 클로즈업이다. 네 번째 컷은 긴 머리의 끝을 매만지는 청소년의 모습으로, 앞선 컷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만지지 않는 손으로는 성경을 쥐고 있다. 교사는 교회의 교사로 추정되며 이야기를 듣는 청소년들 또한 기독교인으로 예상된다.
클로즈업 인서트 컷들이 지나고 다섯 번째 컷에서 비로소 주인공 카메론 포스트와 친구 콜리의 얼굴이 나온다. 이어지는 컷들은 청소년들의 얼굴을 차례로 보여주고 보이스 오버의 주인공인 교사의 얼굴도 비춘다. “우리 어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서 뭘 하는 줄 아니? 우리가 너희 또래였을 때 저질렀던 잘못들을 돌이키기 위해 애쓴단다.” 교사는 이어서 말한다. “너희 나이는 특히 악에 빠지기 쉬울 때지.” 교사의 언어는 앞선 클로즈업 인서트의 실천과 정반대에 서 있다. 이미지와 충돌되는 보이스 오버는 언어의 편협함을 더 낱낱이 드러낸다.
자세히 본다면, 개개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런 노력을 한다면 편견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클로즈업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개개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서 그들을 그저 한 묶음으로 치부할 뿐이다. 익스트림 롱 샷에서는 개인을 구별할 수 없다. 사람이 아닌 뭉텅이로 보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의 혐오는 더 쉽다. 영화는 개개인의 손, 귀 등을 주목하며 면밀하게 들여다볼 것을 제안한다.
꿈과 회상을 막을 순 없어
카메론은 콜리와 몸을 섞다가 다른 이에게 발각된다. 그리고 곧장 전환치료 캠프로 보내진다. 캠프에서는 빙산 그림을 나눠준다. 바다 위에 보이는 작은 빙산이 동성애, 성정체성의 혼란이고 그 밑에 큰 빙산이 그것을 발현시킨 원인이라며, 작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 캠프의 모든 청소년들은 빙산 그림을 갖고 있다. 운동에 대한 열정으로 성정체성의 혼란이 생겼다, 아버지로부터의 애정결핍이 문제다, 다른 이에 대한 부적절한 집착이 원인이다,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다. 각 청소년들의 빙하 이야기가 빠른 호흡으로 차례로 나열되는 이 씬은 이 어두운 영화에서 가장 코믹한 부분이다. 이성애의 원인은 묻지 않는 사회에서 다른 성적 지향은 어떤 원인이 있을 거라며 가정하고 늘어놓는 구시대적 발상을 비웃는다.
카메론은 룸메이트와 2인 1실로 방을 사용하게 된다. 첫날 밤, 카메론의 회상이 등장한다. 카메론과 콜리가 함께 침대에서 영화를 보다가 애무를 하는 회상이다. 그 때 갑자기 손전등 빛이 카메론의 얼굴을 비춘다. 다음 컷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의 캠프 교사가 불 꺼진 숙소 방에 손전등을 비추고 있다. 빛을 받아 놀란 카메론의 얼굴이 이어진다. 불쑥 들어온 회상이 억압의 현실과 충돌한다.
회상에는 이렇다 할 맥락이 없다. 물론 어떤 환경이나 단어에서 연상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감정은, 회상은, 특히나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에 대한 생각은 불쑥 튀어나온다. 반대로 모든 것이 그 대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예 맥락이 없거나 모든 맥락과 맞닿아 있다. 영화는 이 장면들이 회상 씬임을 부러 드러내지 않는다. 현실의 씬이 뒤따라 붙고 나서야 관객은 방금 컷이 회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연스럽고 돌발적이며 어찌할 수 없다. 성적지향과 성정체성 또한 그러하다. 종교의 교육으로, 치료로 바꿀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이다.
카메론이 이성인 남자친구와 키스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씬이 있다. 이 씬은 콜리와의 씬을 회상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상상의 장면 전부터 몽환적인 배경음악을 깔고, 상상을 하고 있는 카메론을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상상의 장면으로 음악과 함께 이어지며 이것이 상상임을 부러 강조한다. 상상 중간에 상상을 하고 있는 카메론의 컷을 넣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 상상은 부자연스럽고, 의도적이며, 현실감이 떨어진다. 영화는 카메론에게 동성애는 본능의 현실이고 이성애는 억지 상상에 불과함을 연출로 드러낸다.
회상 뿐 아니라 꿈으로도 본능은 카메론에게 적극 개입한다. 카메론이 캠프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여자 선생님이 카메론에게 다가와 질문을 하고는 키스를 한다. 이 꿈 장면 또한 회상처럼 현실적으로 연출한다. 꿈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힌트를 주지 않는다. 룸메이트가 카메론을 깨우는 목소리와 함께 현실의 씬이 들어오고나서야 꿈이었구나 알게 된다. 불쑥 떠오르는 회상을, 나도 모르게 꾸는 무의식의 꿈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무슨 교육으로, 치료로, 종교로 막을 셈이냐고 영화는 묻는다.
한국의 개신교는 여전히 그 질문을 외면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반동성애 세력이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를 위해 축복 기도를 올린 이동환 목사를 또 고발했다. 편협한 사람들은 청소년의 다양한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교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종교의 이름으로, 교육의 이름으로, 정상의 이름으로 혐오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미 존재해버렸다. 살아가고 있고, 또 태어나고 있다. 진짜 부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세상의 의심을 걷어내고 나를 믿는 힘은 때때로 나와 닮은 사람들의 면면을 볼 때 자라난다. 걸음이 지칠 때 보는 퀴어영화 한 편이 내가 결코 프레임 밖의 존재가 아님을 알려줄 것이다. 당신이 주인공인 서사는 분명 존재한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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